<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
<또는 마르 16,1-7 또는 저녁 미사에서는 루카 24,13-35>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임신부님 강론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3월 31일, 요한 20,1-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20,9)
+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면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고통 없이 부활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참된 의미를 빼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와 따로 떼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한 가운데에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생은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고통이 따릅니다. 이 좋은 세상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면 좋겠지만 삶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라옵니다.
많은 현자들의 가르침이나 종교는 인생에서 겪게 되는 삶의 고통에 답을 주려고 했지만, 고통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면서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느냐가 문제입니다.
예수회의 히라바야시 후유키 신부의 “상처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여겼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바빌론에 하느님께서 고통스러운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사13,1-11참조) 주변 강대국의 핍박도 하느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진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벌을 받을 정도의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가혹한 운명을 짊어진 선량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이란 하느님의 교육이라는 또 다른 가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단련시켜 신앙을 굳세게 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훌륭하게 자녀를 키워낸 성실한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자녀를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겪는 큰 고통을 과연 하느님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통에 대한 답은 내릴 수 없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지혜를 훨씬 뛰어넘는 ‘신비’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성으로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고통 자체의 의미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통을 마주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에 고난의 때, 위기의 때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고통을 어떻게 마주하는가에 따라 한 사람의 품격이 결정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결단을 통해 인간 내면의 뿌리 깊은 고통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시고, 고통을 받아들일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고통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나약함과 죄로부터 나오고 인간을 아프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를 때 고통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고통의 의미가 변하는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사람과 함께, 사람을 위해서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요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넘어 부활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둠의 힘이 강하고 실패가 계속될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사회 전체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이 희망이 한 사람의 인생과 역사 전체에 밝은 빛을 비춥니다. 상처가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사람에게 고통은 다양하게 찾아옵니다. 생각할 수도 없이 찾아오고 우리를 때론 무기력하게 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외면하고 마주치지 않고 도망가기를 원합니다.
“고통을 외면하고 잊으려고 한다면 아픔은 잠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뒤에 남는 것은 무의미와 허무함입니다. 도망치기만 한다면 당장 괴로움은 사라질지라도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없고, 치유되지도 않습니다. 고통 없이 기쁨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번민이나 고뇌가 없는 삶이 언제나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삶에는 가치와 의미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비로소 우리 인생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생겨납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참된 행복을 약속받은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기쁨이든 고통이든 슬픔이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합니다. 특히 인간을 위협하는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도구가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희망을 앗아가 버린 십자가는 예수님을 통하여 오히려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따라 고통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이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며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히라바야시 후유키 신부, 같은 책)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을 넘어 인간 삶의 가치와 의미를 회복시켜주며 기쁨을 줍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
그리스도교 신앙의 삶이 고통을 모른 체 하고 외면하고 은총의 꽃길만 말해준다면 그것은 사이비이며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고통을 마주하고 껴 앉을 때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부활은 고통을 넘어 부활의 삶이 있음을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부활은 그래서 우리 삶에 영원한 희망입니다. 부활의 기쁨이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아멘
무태성당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
첫댓글 +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 하셨도다.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신 하느님 사랑의 부활 신비에 깊은 찬미 감사 바칩니다
살아 가면서 부닥쳐 오는 모든 고통을 있는 그대로
사랑으로 받아 들이고,
은총으로 느낄때 고통의 신비가 구원의 신비로
이어 짐을 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 시켜 새로윤 삶을 살면서 , 느끼게 되는 기쁨을 다른이에게 함께 기뻐하며 전하고 나눌수 있는 것이 신앙의 신비 이리라 생각 합니다
" 보고 믿었다 !
( 요한 20 /8) "
본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 까지 믿고 이해하고,
고통을 통해서 만이 참 부활의 신비 안에서 참된 삶의 가치를 느끼고 그대로 살 수 있으리라 믿으며, 고통의 신비를 통해
부활 로 얻을 수 있는 영광 의 신비 안에 들 수 있기를 간구 드립니다.아멘.
신부님
감사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음을 저희가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 저희는 고통중에서도 끈임없이 기도하고 소망하고 사랑하고 견디어 죽음너머의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처럼 주어진 고통의 잔을 주님뜻에 맡기고 순종하고 이끄심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고통으로만 버려두지 않으시고 힘을 주시어 영광으로 부활로 구원해 주시리라 굳게 믿나이다.
고통중에서도 의미를 찾게 하시고 타인의 고통을 도우게 하시고
고통을 직시하여 받아드리고 인내로 이게내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을 뵈올수있는 영광 누리게 하소서.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저희를 구원해 주셨음에 진심 감사드립니다.
주님 부활을 축하하며
저희는 다만 찬미 찬송 드릴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알렐루야.알렐루야.알렐루야.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멘
+ 찬미예수님
아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