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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저 밥먹듯이 용서하십시오!
복음서는 온통 하느님 아버지의 흘러넘치는 자비와 우리를 향한 측량할 수 없는 너그러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무거운 죄와 악습, 치명적인 실수와 허물이 떠올라 괴로울 때마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는 즉시 복음서를 펼쳐 드는 일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와 관련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공동생활을 시작한 베드로였습니다.
성장 배경이나 출신 성분이며 모든 것이 다른 사도들이 함께 동고동락하다 보니, 너무나도 당연히 충돌할 일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공동체 역시 우리와 비슷한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삐그덕거렸을 것입니다.
더구나 수제자로서 사도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던 베드로는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유난히 미운 마음이 드는 사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컸던 베드로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나름 고민한 흔적이 있습니다. 마음 크게 먹고 심호흡도 한 후,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 사도를 뒤로 나가떨어지게 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곱이란 숫자는 충만함, 완전함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니!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씀은 결국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냥 습관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삼시 세끼 밥 먹듯이 틈만 나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면 깊숙이 차곡차곡 쌓아둘 때, 우리 영혼과 육신에 끼치는 악영향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한두 번, 일곱 여덟 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수시로, 숨쉬듯이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를 통해 충만한 대자유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차곡차곡 쌓아둠을 통해 혹독한 고통 속에 살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사람이 미워진다면 우선 감사일기 쓰고 십일조 내고 자선부터 실천하라
영화 ‘레인 맨(Rain Man)’에서 돈만 아는 이기적인 찰리 배빗은 자폐증이 있는 그의 형 레이먼드와의 동행을 통해 성숙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찰리는 빚에 허덕이면서 파산 직전에 몰렸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을 받으려면 형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이먼드를 고인이 된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고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던 중 어렸을 때 형이 자기를 구하려다 오히려 부모님에 의해 시설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는 형이 있는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레이먼드와 함께 다니며 모험을 경험하고 그 과정에 형과 정이 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형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시설에 살게 하는 것이 더 형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유산을 포기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은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관계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과 반대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용서에 관한 내용이지만, 비유 말씀은 돈을 주제로 하십니다. 곧 일만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일만 탈렌트는 하루 일당을, 곧 한 데나리온을 10만 원이라치면 6조 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액수를 탕감받은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꾸어간 돈 100데나리온, 곧 천만 원을 갚지 않는 것에 더 화를 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6조 원을 받은 기쁨이 천만 원 잃은 고통보다 당연히 더 커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치부할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는 내가 받은 용서의 기쁨이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가 나에게 주는 고통보다 크지 못하게 느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피해의식’이 막습니다. 피해의식이란 내가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보통은 어렸을 때 받지 못했던 사랑의 상처가 너무 커서 나이가 들어서도 생존에 필요한 재물을 잃는 고통을 남들보다 몇 배나 크게 느낍니다. 그래도 6조 원의 기쁨보다 천만 원의 고통이 더 큰 것은 문제입니다.
미움은 교만에서 옵니다. 그러나 그 교만은 또한 육욕과 탐욕을 자아냅니다. 가장 이기기 쉬운 것이 탐욕이고 그다음이 육욕이고 마지막이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우선 탐욕을 먼저 없애야 나에게 돈을 꾸어간 사람에 대한 원한이 줄어듭니다.
우리는 탐욕을 없애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일기 쓰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나에게 돈을 안 갚는 사람이 덜 미워집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버는 이유는 가정을 위해 내어주라는 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만 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록펠러는 십일조를 철저히 내는 사람이었지만,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쓸데없는 보험료가 나갔을 때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병이 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때는 당연히 미운 인간들이 많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불치병에 걸려 오래 못 살게 되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게 되었고 그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한 것을 넘어서서 줄 수 있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잃은 재물은 오히려 좋은 일에 쓰였다고 하며 미워지던 사람이 고마워질 수도 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그 한 군데의 상처 때문에 건강한 다른 많은 지체들의 행복을 잊어버립니다. 오직 그 상처에만 집중하고 그 상처에 아주 작은 아픔이라도 더해질라치면 기겁합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그 상처를 건드리면 용서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재물이나 명예, 인기나 혹은 내가 가진 무엇으로도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미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분노는 나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옵니다. 그 욕망을 무력하게 만드는 게 이웃 사랑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8,21-35: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일흔일곱이라는 수의 신비는 이 특별한 수가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는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그에게 일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과 셈을 시작한다. 종은 많은 돈을 맡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많은 돈을 잃은 듯하다. 이익을 내기는커녕 엄청난 돈을 잃어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임금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탕감받는 빚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려 줌으로써 그를 가르치고자 했다. 그도 그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가?
종은 무릎을 꿇고 참아달라고 탄원한다.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7절). 주인은 종이 이 일에서 배워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자신의 불행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그가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탕감해 주기는커녕 참아주지도 않고 그를 옥에 가두어 빚을 갚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는 영원히 고문 형리에게 맡겨졌다는 뜻이다. 그는 결코 그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하느님을 이렇게 사악한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형제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느 자매님께서 젊었을 때, 남동생이 사고로 하늘 나라에 가버려서 어린 조카들을 맡아 키웠다고 합니다. 남의 자식을 함부로 대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또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동생이기에 조카에게 자기 자식들보다도 더 먼저 챙겨주는 등 신경을 써서 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들이 “우리가 의붓자식이야?”라며 어릴 적에 불만을 많이 표시했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남동생의 아들을 잘 키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카가 성인이 되어 의사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친척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고모인 자기에게 인사는커녕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자녀보다 더 신경 써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튼 이 자매님은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이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만약 다시 남동생 죽었을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조카를 받을 것 같아?”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한참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조카가 커서 나를 섭섭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맡을 거야.”
이 모습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그냥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진짜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시지요. 가치 있는 삶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한 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한계를 두지 않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사랑을 주시는 모습을 우리는 복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에,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큰 빚을 탕감받고도 동료의 작은 빚을 참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모습으로, 절대 가치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가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은 어떨까요?
오늘의 명언: 위대한 행위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위대한 사랑으로 하는 작은 행동이 있을 뿐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18,21)
용서는
겸손의 가장 성숙한 표현이라네.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는 이는
겸손하지 못한 이라네.
용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숫양과
수만 마리의 살진 양보다
더 귀한 번제물이며
희생제물이고
예물이며
분향이라네.
6)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계절의 봄또한
생명자체로 날마다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생명은 자유를
향해 나아갑니다.
자유를 향하여 나가는
모든 생명은 힘겹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데는
함께 살아가는
동료의식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적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한
우리의
동료입니다.
참된용서는
용서라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진정성있는
용서는 용서의 아픈
여정을 필요로합니다.
완벽한 단 한 번의
용서가 아니라
용서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용서의 삶이란
하느님의 자비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를 꼭 기억하는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과거에
묶여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서로를 파괴시키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삶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제 우리가 미움과
원망에서 벗어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만나십시오.
우리에게 용서 할
힙과 용서를 구할
진실된 마음을 주시는
분또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용서는 사로잡혀
있는 용서의 강박이
아니라 충만한 하느님
자비를 기쁘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느님 자비에
참여하게 하소서.
7)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조건 없는 용서!'
오늘 복음(마태18,21-35)은 '조건 없는 용서에 대한 말씀'과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조건 없는 용서!'
용서에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 곧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너와 내가 사는 결정적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마태18,35 참조)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가르쳐 주신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너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바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만 탈렌트'(6천 데나리온)는 현재 하루 노동자 임금(1데나리온) '십 만원'을 기준으로 한다면 6조원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이 엄청난 금액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서 '백 데나리온'(1천만원) 빚진 사람을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매정한 종의 비유'이며,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고 있으니,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조건 없는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카23,34)
8)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용서는 사랑의 결과, 즉 사랑에 딸려오는 결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회개보다 앞섭니다.
먼저 사랑하시고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로 치유되는 걸 내가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값싼 용서를 행하는 게 아닙니다.
용서는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잊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조건도 대가도 없이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해야
우리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탕감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용서해야 하고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하는 게 맞습니다.
복음 말씀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