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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묵상글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때가 되면 알리라. 등 )
*** 07:25,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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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09.30 06:04
연중 25주 토요일-2013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수난에 대한 예고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수난에 대한 2차 예고이지요.
한 번 예고했으면 될 터인데도 또 예고를 하십니다.
사실은 이번 2차뿐 아니라 한 번 더, 3차 예고를 하시지요.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수난에 대한 예고를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건강할 때는 자기가 중병에 걸릴 것이라 전혀 생각지 않지요.
권력이 있을 때는 자기가 비참하게 될 거라 전혀 생각지 못하고,
그래서 권력형 비리를 저질러도 나중에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머리의 문제, 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머리로는 지금 건강해도 나중에 반드시 아플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건강할 때는 그것이 실감나지 않고 그것을 믿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오뉴월 더위에는 겨울의 추위가 생각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름이 있으면 겨울도 있다는 것을 머리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이렇듯이 우리는 좋은 것만 기대하기에 나쁜 것을 각오하지 않습니다.
각오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예상이나 대비는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생각이 뇌리腦裏에 스치는 것조차 거부합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하곤 합니다.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또는 그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가끔 제가 죽게 되면 중풍에 걸려 오래 앓다가 죽지 말고
차라리 암에 걸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말은 아예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니 고통, 수난, 죽음에 대해 예고해도 귀담아듣겠습니까?
듣지 않으려고 아예 귀를 막는데 들리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의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수난에 대한 예고의 뜻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려고 들지 않으며,
이해하려 들지 않기에 묻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은 너무도 잘나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리라고 제자들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것을 전혀 바라지 않고 그래서 아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모든 것이 좋을 때도 수난을 생각하고,
모든 게 잘 안될 때도 부활의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1차, 2차의 수난 예고를 듣는 우리가 아니라
수난 예고를 매일같이 주님께 듣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영적 게으름 때문일까
아무런 나눔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나눔을 다시 올립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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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06:06 우선 올림
http://www.ofmkorea.org/ofmhomily/535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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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9,45 참조).
0606. 우선 게시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9,45 참조). 이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본문이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침묵은 우리의 대화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성경 본문에 철저히 복종해야 함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는 동안 그분을 기다리도록 도와주고, 우리 힘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며,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분 앞에 서 있다는 의식과 함께 사랑의 자세를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본문을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장애라고 여겼던 대목들이
실로 크고 거룩한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필로칼리아)
또한 사막의 마카리오는 역시 믿음으로 먼저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우리가 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분과의 만남의 신비를 사는 일입니다. 곧 우리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죽음으로서 만나게 되는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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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때가 되면 알리라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 감탄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고통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말씀 안에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97).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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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민 교수님의 "조선 초기 교회의 신앙 활동과 교회조직"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교회사가 시작 될 수 있었던 것은 2개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입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성장 그리고 순교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프랑스 파리의 외방 전교회로 보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블뤼 주교님의 ‘비망기’를 토대로 기록한 달레 신부님의 ‘한국천주교회사’입니다. 달레 신부님은 한국에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다블뤼 주교님의 생생한 기록을 토대로 방대한 ‘한국천주교회사’를 기록했습니다. 교회의 시작 당시 조선의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교회의 시작과 성장을 기록이 있었습니다. 혹독한 박해와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기록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달레 신부님의 기록이 있었기에 ‘한국천주교회’는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기록의 있었기에 우리는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달레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신앙의 등불을 밝혔던 선조들을 따라 우리들 역시 신앙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강의 후에 ‘질의응답’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한국보다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지만 지금 중국과 일본의 교회는 한국보다 신자도 적고, 활동이 미약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교수님은 한국인의 독특한 ‘심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불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입니다. 신라와 고려는 불교를 ‘호국불교’로 여겼습니다. 국가의 어려움을 불교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했습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 9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건립되었습니다. 신라는 이런 불교의 힘을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힘으로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려고 하였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인류의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유교의 ‘성리학’도 비슷합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은 성리학의 자리를 ‘양명학’이 대신하였지만 조선은 성리학의 가르침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런 성리학은 새로운 사상인 ‘서학’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서학 곧 천주교회 역시 오랜 박해를 견디면서 성장하였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순교의 역사를 지닌 역동적인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한국인이 가진 독특한 ‘심성’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독특한 한국인의 심성이 21세기 산업화를 빠르게 이룩한 ‘동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병중에 있는 가족, 믿었던 친구의 배신, 자녀의 방황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되, 하느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의 길입니다. 절망 중에서도 꽃이 피는 희망의 길입니다. 배반한 사람을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믿음의 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옳은 일에 주리고 굶주린 사람이 행복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는 속옷까지도 내어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씨앗 하나가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겠지만 썩어서 싹이 나면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기도 하겠지만 끝가지 믿고 참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받아들였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조용히 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피는 열매를 맺었고, 교회가 되었습니다. 순교자 성월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이 오늘 나의 삶으로 되살아 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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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이 오늘도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스스로 그 의미를 감추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 의미도 묻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따라다녔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재미있었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것도 좋았습니다. 언제나 함께라면 두려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욕심도 바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따라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합니다. 죽음에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은 다 재미있고 또 사람들이 예수님은 스승으로 보기에 당연히 그 스승의 제자들 또한 대접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스승님이 떠난다고 합니다.
‘그럼 나는? ’ 그때 이와 같은 생각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가정도 포기했고, 명예도 포기했고, 제물도 포기했는데, 예수님이 죽으면 나는 뭐지? 나는 지금까지 뭐 한 거지?
어쩌면 본전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많이 포기하고 많이 사랑하고 많이 내어 줄수록,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본전 생각이 납니다. 속으로는 ‘내가 이만큼 해주었는데.’라고 말하며 나에게 무엇인가 돌아오기를 희망합니다. 많이 포기하고 사랑하고 내어 줄수록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의미를 묻는 것조차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항상 진실했는데, 듣는 것과 같이 정말로 예수님이 죽는다면 그것보다 자신들의 상황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겪은 유혹입니다. 우리도 사랑과 선행을 하며, 혹은 봉헌을 한 후 대접받고, 알아주기를 바라고, 더 많이 얻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제자들처럼 우리 곁에도 유혹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걸으세요. 그저 주님만을 바라보고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걷다 보면 알게 됩니다.
길을 걷다 보면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막막해 보이지만
그냥 하다 보면
답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읽고 또 읽다 보면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깨닫고 걸으려 하지 마십시오.
가끔은 가다가, 하다가 얻게 되는 보물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의미들은 우리의 발걸음을 더욱 기쁘고 가볍게 만들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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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결혼에 대해 고민하던 어느 젊은이가 종이에 결혼의 장점과 단점을 적었습니다. 결혼의 장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동반자가 생김, 함께 놀 상대로서 강아지보다는 나음, 여성과의 즐거운 수다, 노년에 나를 돌봐줄 자녀가 있음, 아내 덕분에 너무 강박적으로 일하지 않을 수 있다면 건강에 더 좋을 수도 있음, 집을 돌볼 사람 생김.
결혼의 단점도 이렇게 나열했습니다.
지금 사는 도시를 떠나야 할 수도 있음, 내 뜻대로 살 수 없음, 이제 친구들과의 만남을 자유롭게 가질 수 없음, 아내 친척들을 즐겁게 해주느라 시간 낭비가 됨, 아내의 친척들을 방문하느라 시간 낭비를 할 수 있음, 양육 비용의 부담이 있음, 자녀에 대한 걱정과 가족을 책임지는 데 따르는 일반적 걱정도 있음, 저녁에 독서 불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이 되는 직업을 가져야 함.
이 젊은이는 이렇게 나열한 뒤에 과연 결혼했을까요?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결혼의 단점이 이렇게 많은데도 그는 결혼했습니다. 헌신적인 아내와 자녀들까지 그의 일에 총동원되어 함께 위대한 업적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한 찰스 다윈입니다. 결혼할 수 없는 이유가 그렇게 많았지만,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보았기에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뛰어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세상의 눈으로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뜻인 사랑에 무조건 집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미리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세상의 눈으로는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게 되면 두려움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감추어져서 이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알아듣기 힘들고 두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 너머에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만을 내세우면서 섣부르게 판단하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 안에서만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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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얼마나 많이 주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느냐가 중요하다(마더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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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망의 여정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만세육창으로 시작하는 오늘 하루 기분이 나를 듯 상쾌합니다. 윗 만세육창의 대상이야말로 저에게는 ‘감사의 대상’이자 빛나는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그러니 저절로 만세육창입니다. 만세육창후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 희망의 전사다.” 고백도 빼놓지 않습니다. 눈만 열리면 희망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희망의 표징이 되는 것들은 무궁무진합니다. 어제 도반이 보내준 강론 댓글도 저에겐 참 고마운 희망의 표징이 됐습니다.
“신부님, 수십년 동안 매일 강론 쓰시고 다른 신자분들과 나누는 것이 매일 하늘에 보물을 쌓으시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랑의 행위들은 모두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요, 이렇게 희망의 표징이 되어 살아가는 사랑의 사람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만납니다. 희망의 표징이 되는 분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오랜만에 어제 수도원 주일미사에 참석한 반가운 분이 빈손으로 왔다 미안해 하길래 즉시 답했고 만족했습니다.
“자매님 자체가 최고의 선물이자 희망의 표징입니다. 다른 무슨 선물이 필요하겠습니까? 참 성실히 아름답게 살아가는 좋은 분들은 그 자체가 참 좋은 선물이요 빈손으로와도 반갑고 기쁩니다.”
참으로 희망과 기쁨을 주는 분들 자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이런면에서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성인보다 더 좋은 하느님의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4대교부인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 예로니모 역시 우리에게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성화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소망입니다. 희망의 표징이,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성 예로니모! 그의 만 73세 동안 살의 궤적을 보면 얼마나 치열하고 열정적인, 역동적인 삶을 살았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말 에너지가 넘치는 교회 학자 성인으로 고고학자, 기록 보관인, 성경 학자, 도서관 사서, 도서관, 학생, 번역가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어 “히에로뉘모스” 이름 뜻은 ‘신성한 사람’이라 합니다. 성인은 오늘의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는데 사람들은 농담삼아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었다”하니 그 비범한 면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어 성인은 로마에 가서 학업에 전념했고 다양한 지역을 여행했으며 열병을 앓다가 치유되자 은수자들과 4년동안 사막에서 기도와 고행, 공부에만 전념하며 은수생활을 합니다. 꿈속에서 예수님께 “너는 키케로의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꾸중을 들은후 회개합니다.
성인은 394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연대하여 펠라기우스 파를 축출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으며 사막의 은수자인 테베의 성 바오로 전기를 썼습니다. 은수자들과의 불화로 사막을 떠나 379년 안티오키아로 가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전제로 바울리노스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고 사실 평생 미사도 드리지 않았고 일체의 사목직도 갖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와 교류를 가지면서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합니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성인들과의 활발한 교류입니다.
성인은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로부터 신구약 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아 391년부터 406년까지 무려 15년에 걸쳐 완성하니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불가타 성경입니다. 한편 성인은 로마에서 성녀 마르첼라와 성녀 바울라등이 주축이 된 상류층의 미망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수도생활의 열정을 고취시켰고, 이어 이들과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 수도생활을 합니다.
성녀 바울라와 함께 한 개의 여자 수도원과 세개의 남자수도원을 세웠고 성녀 바울라는 여자 수도원의 원장이 되고 성인은 남자 수도원의 원장을 하면서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도 합니다. 406년부터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임종할 때까지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수많은 성경주석서를 남겼습니다.
말 그대로 성서의 사람이요 “성서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동분서주(東奔西走) 정말 치열했고 가열찼던 성인의 구도여정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었고 우리에게는 부단히 분발케 하는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서의 즈카르야 예언자가 전하는 세 번째 환시가 우리에게는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그대로 파스카 주님의 은총을 미리 앞당겨 보여줍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 머무르리라.”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 옛날 환시를 통한 즈카르야의 예언을 파스카의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시켜 주시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요!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이런 주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를 알아듣지 못했으니 그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고 묻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당시의 복음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어도 우리는 그 감추어진 뜻을 확연히 깨닫고 이해하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어 당신이 바로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임을 깨우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빛나는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이 되어 살게 하시니 이웃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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