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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
불안사회와 광신주의, 그리고 토라가 제시하는 치유의 길
흔들리는 세계와 우리 안의 그림자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기술적으로 초연결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하는 경이로운 시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문명의 번영 뒤편에서, 인류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깊게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외형적인 풍요의 이면에 도사린 현대인의 본질적인 감정은 다름 아닌 ‘불안’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가장 어두운 질병인 ‘불안’과, 그 불안이 낳은 가장 괴기스러운 괴물인 ‘광신주의’에 대해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불안해하는가? 그리고 그 불안은 어떻게 평범하고 이성적인 개인들을 눈먼 맹신과 증오의 늪으로 밀어 넣는가? 더 나아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온갖 박해와 고난을 견뎌내며 생존과 번영을 이어온 유대교의 지혜와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잃어버린 이성과 연대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무겁고도 중차대한 질문에 대해, 동시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통찰과 오래된 토라의 지혜를 빌려 답하고자 합니다.
오늘날의 불안은 단순한 개인의 성격 결함이나 일시적인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조적이고, 일상적이며, 실존적인 공포입니다. 내일의 생계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경제적 불안, 급변하는 기술 속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소외의 불안, 그리고 기후 위기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파국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은 현대인의 영혼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견딜 수 없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확실성’을 갈구합니다.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설명해 줄 절대적인 진리, 나의 불안을 대신 짊어질 강력한 지도자, 그리고 내 고통의 원인을 돌릴 수 있는 명확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광신주의는 바로 이 지점, 불안이 이성을 집어삼킨 척박한 토양 위에서 피어나는 독버섯입니다.
우리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쌓아 올린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현대 사회학이 진단하는 불안의 실체를 직시하고, 그것이 어떻게 광신주의로 변모하는지 그 매커니즘을 낱낱이 파헤친 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영적 자산 중 하나인 유대교적 유산 속에서 그 구체적인 해결책을 도출해 내야 합니다.
현대 사회의 진단 — 불안사회의 도래와 구조적 매커니즘
현대 사회가 왜 ‘불안사회’가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사회학자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Ernst-Dieter Lantermann)의 기념비적인 저서 『불안사회(Die radikalisierte Gesellschaft)』를 펼쳐보아야 합니다. 란터만은 현대인을 가리켜 ‘근본적인 안전망을 상실한 채 파도 위에 떠 있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과거의 사회는 전통, 종교, 지역 공동체, 그리고 비교적 안정적인 고용 구조라는 울타리를 제공했습니다. 개인은 그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과 세계화, 그리고 급격한 디지털 전환은 이 모든 울타리를 해체해 버렸습니다. 이제 모든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 전가됩니다. 성공도 네 탓이고, 실패도 네 탓이라는 이 가혹한 개인화(Individualization) 속에서 인간은 만성적인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란터만은 특히 사회의 중심을 지탱하던 중산층마저 계층 하락의 공포에 시달리며 극심한 심리적 붕괴를 겪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의 뇌는 지속적인 비상사태로 인식되며, 합리적인 사유 능력을 상실하고 생존을 위한 방어 기제를 발동합니다.
여기에 현대 사회학의 거장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통찰을 더해 보갰습니다. 그는 저서 『유동적 공포(Liquid Fear)』와 『우리 문 앞의 이방인(Strangers at Our Door)』을 통해, 현대 사회의 불안이 고정되지 않고 사회 전반을 부유하는 ‘유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공포는 실체가 명확했습니다. 홍수, 기근, 혹은 눈앞의 적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공포는 어디서 올지 모릅니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직장,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테러, 예측 불가능한 금융 위기 등 공포의 진원지가 불분명합니다.
바우만은 이처럼 출처를 알 수 없는 유동적 공포가 극에 달할 때, 인간은 그 공포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치환하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고 지적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인’이자 ‘타자’입니다.
난민, 이민자, 성소수자, 그리고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타 집단에게 모든 사회적 불만과 불안을 투사하는 것입니다. "저들 때문에 우리가 불안한 것이다", "저들만 없어지면 우리 사회는 다시 안전해질 것이다"라는 환상이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즉,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 불안이 타자를 향한 혐오와 증오로 둔갑하는 순간이며, 이것이 바로 광신주의가 탄생하는 심리적 뼈대가 됩니다.
불안이 낳은 괴물 — 광신주의의 심리학과 사회적 현상
그렇다면 불안에 짓눌린 인간은 어떻게 광신주의자로 변모하는가? 이에 대해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에릭 호퍼(Eric Hoffer)는 그의 명저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에서 소름 끼치도록 정확한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호퍼는 광신주의자가 되는 이들은 대개 무언가 결핍되고, 좌절했으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초라한 현실과 무력한 자아를 견디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자신보다 훨씬 거대하고 절대적인 무언가에 귀속되기를 갈망합니다.
광신주의는 종교적 극단주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맹목적인 정치적 진영 논리, 과학주의적 근본주의, 혹은 특정 음모론을 추종하는 집단 등 현대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에릭 호퍼가 분석한 광신주의 집단의 핵심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아의 완전한 포기와 대량화입니다. 광신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중단합니다. 교주, 독재자, 혹은 집단의 교리가 제공하는 정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합니다. 자신의 이성을 집단의 의지에 위탁할 때, 비로소 개인은 고독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둘째,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세계관입니다. 세상을 극단적인 선과 악으로 나눕니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적이다"라는 논리 속에서 복잡한 현실의 맥락은 소거됩니다. 이러한 단순함은 불안한 인간에게 엄청난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회색지대가 주는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에게 흑백의 명확함은 마약과도 같습니다.
셋째, 과거의 신성화와 미래의 유토피아주의입니다. 그들은 현재를 철저히 부정합니다. 대신 "과거의 위대했던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거나 "모든 악을 쓸어버린 뒤 도래할 완벽한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파괴적 혁명주의가 그들의 행동 양식이 됩니다.
넷째, 가차 없는 폭력의 정당화입니다. 절대적인 선을 실현한다는 명목 하에, 반대파에 대한 언어적·물리적 폭력은 정당한 과업으로 둔갑합니다. 악을 멸절하기 위한 폭력은 죄책감이 아니라 오히려 성스러운 의무가 됩니다.
란터만 역시 그의 책에서 불안한 개인이 분명한 삶의 의미를 찾고 헌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장소로서 광신주의적 집단을 택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외부 사회와의 소통이 단절된 채 가짜 뉴스와 에코 챔버(Echo Chamber, 반향실 효과) 속에서 그들만의 확증 편향을 강화하고, 결국에는 파괴적인 극단주의로 치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쓸모 있음과 안전함을 갈구하는 인간의 보편적 갈망이 왜곡되었을 때 발생하는 현대의 비극입니다.
유대교적 가르침에서 찾는 해법 1 — 토라와 탈무드의 지혜: '토케하(תּוֹכָחָה)'와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거대한 불안의 파도와 광신주의의 폭주를 우리는 어떻게 막아설 것인가? 이성의 힘만으로, 혹은 법과 제도적 처벌만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적 공포를 치유할 수 있는가?
수천 년 동안 고난과 유랑 속에서도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고, 광신적 파멸에 빠지지 않으면서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 온 유대교의 가르침(Jewish Teachings)에서 그 강력한 대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은 결코 현실을 떠난 형이상학적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역사적 고난 속에서 다듬어진 ‘생존과 연대의 매뉴얼’입니다. 그 첫 번째 핵심 해법은 토라와 탈무드에 흐르는 ‘티쿤 올람(Tikkun Olam)’ 정신에 있습니다.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이란 히브리어로 "세상을 고치고 복구한다(Repairing the world)"는 뜻입니다.
유대교는 이 세계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창조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은 세상을 미완성의 상태로 창조하셨으며, 이를 온전하게 완성해 나갈 파트너로 인간을 부르셨다는 공동 창조주(Co-creator) 의식을 심어줍니다.
이 가르침이 현대 불안사회에 주는 시사점은 지대합니다. 현대인의 불안은 "내가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티쿤 올람은 단 한 명의 개인도 소외되지 않고, 깨어진 세상을 치유할 성스러운 의무(미쯔바, Mitzvah)를 부여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내 이웃의 가난을 돌보고, 사회적 불의를 바로잡는 작은 실천이 곧 우주적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이 사상은, 개인을 고립된 불안에서 건져내어 거룩한 사회적 책임감으로 고양시킵니다. 광신주의가 파괴를 통해 가짜 유토피아를 꿈꾼다면, 티쿤 올람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선행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수선해 나가는 건설적 대안을 제시합니다.
더 나아가 유대교는 광신주의의 핵심인 ‘독선’을 제어할 강력한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레위기 19장 17절에 등장하는 ‘토케하(תּוֹכָחָה, Tokhehah, 정당한 책망)’의 원칙입니다. 토리에 따르면, 이웃이 잘못된 길로 가거나 증오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를 방관하는 것은 죄입니다. 사랑을 담아 그를 논리적이고 인격적으로 책망하여 올바른 길로 돌려놓아야 할 의무가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있습니다.
탈무드는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미련한 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칩니다. 광신주의는 내부의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침묵 속에서 괴물이 됩니다. 반면 유다이즘은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를 향한 건강한 비판과 책망이 활발히 일어날 때, 집단적 광기로부터 안전할 수 있음을 이미 수천 년 전부터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적 가르침에서 찾는 해법 2 — 하브루타(חַבְרוּתָא, Havruta): 독선과 맹신을 깨는 대화의 철학
유대교가 인류에게 준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다름 아닌 교육론이자 철학적 방법론인 ‘하브루타(Havruta)’입니다. 짝을 지어 질문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이 독특한 학습 방식은 단순한 공부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광신주의를 원천 차단하는 가장 강력한 ‘정신적 예방백신’입니다.
탈무드는 한 권의 책이지만, 결코 단 하나의 결론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탈무드를 펼치면 수세기에 걸친 랍비들의 수많은 이견과 논쟁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랍비 힐렐(Hillel)은 "이것이 옳다"고 하고, 랍비 샴마이(Shammai)는 "저것이 옳다"고 치열하게 논쟁한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유대교는 이 상충하는 두 의견을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Eilu v'eilu divrei Elohim chayim, אֵלּוּ וָאֵלּוּ דִּבְרֵי אֱלֹהִים חַיִּים)"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의 정답만을 절대화하는 근본주의적 태도가 유대교 전통 안에서는 발붙이기 어려운 구조인 것입니다.
하브루타의 정신은 현대 사회의 독선과 맹신을 깨뜨리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타자의 발견'입니다. 하브루타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내 앞에 앉은 파트너, 즉 ‘너’가 있어야 합니다. 나비(נָבִיא, Navi, 예언자)적 전통에서 타자는 내가 지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 지성의 한계를 깨어줄 거울입니다. 내 앞에 앉은 이가 나와 다른 생각을 말할 때, 나는 내 생각의 불완전함을 깨닫습니다.
둘째, '질문의 신성화'입니다. 광신주의는 질문을 금기시합니다. 질문하는 순간 믿음이 흔들린다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질문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깁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 무엇을 배웠니?"라고 묻지 않고, "오늘 선생님께 어떤 좋은 질문을 했니?"라고 묻습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정신은 권위주의와 가짜 뉴스, 선동 선전이 개인의 내면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이성적 방어벽이 됩니다.
셋째, '모호함을 견디는 힘(Negative Capability)'입니다. 탈무드 논쟁의 수많은 결론은 '테쿠(Teku, תיקו)'로 끝납니다. 이는 "엘리야 예언자가 오기 전까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보류한다"는 뜻입니다. 즉, 당장 완벽한 답을 내릴 수 없는 현실의 복잡함과 모호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견뎌내는 성숙함입니다. 흑백논리의 중독에서 벗어나, 세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는 관용의 태도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현대 사회의 광신자들은 키보드 뒤에 숨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과만 소통하며 확증 편향을 키워갑니다. 만약 우리 사회에 내 생각과 다른 이들과 마주 앉아 치열하지만 존중을 담아 토론하는 ‘하브루타의 광장’이 회복된다면, 극단주의 선동가들이 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입니다.
유대교적 가르침에서 찾는 해법 3 — 안식일(Shabbat)과 공동체(Kehillah): 불안을 이기는 실존적 정박지
마지막으로, 유대교가 제시하는 해법은 구조적 불안을 치유하는 실존적 제도인 ‘안식일(Shabbat, 샤밧)’과 ‘공동체(Kehillah, 케힐라)’의 회복에 있습니다.
현대인의 불안은 멈추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24시간 연결된 스마트폰, 끊임없이 날아오는 업무 메시지, SNS를 통해 중계되는 타인의 화려한 삶과 나의 초라한 삶의 비교는 현대인을 만성적인 심리적 과부하 상태로 몰고 갑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와 같은 유대인 철학자들은 현대 사회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인 ‘너’로 대하지 않고, 하나의 도구나 수단인 ‘그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소외와 불안이 가중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유대교의 안식일 제도는 혁명적인 치유책이 됩니다.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은 모든 전자기기를 끕니다. 돈을 쓰지도 않고,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지도 않으며, 생산 활동을 전면 중단합니다. 24시간 동안 인간은 경제적 유용성으로 평가받는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 부모로서, 자녀로서, 그리고 신 앞의 단독자로서 존재합니다.
위대한 유대교 사상가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은 그의 저서 『안식일(The Sabbath)』에서 안식일을 가리켜 "공간 속의 정복을 멈추고 시간 속에 지은 성소(A sanctuary in time)"라고 정의했습니다.
안식일은 세상이 나 없이도 굴러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집착과 불안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합니다. 끊임없는 성취 압박 속에서 퓨즈가 끊어지기 직전인 현대인들에게, 일주일에 하루 모든 경쟁을 강제로 멈추고 영혼을 재충전하는 안식일의 지혜는 심리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최고의 묘약입니다.
또한, 유대교의 ‘케힐라(קְהִלָּה: 공동체)’ 전통은 고립된 개인을 품어주는 따뜻한 안전망입니다. 유대인들은 혼자서는 온전한 예배(미냔, מניין, Minyan - 성인 10명이 모여야 기도가 성립하는 규칙)를 드릴 수 없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눕니다. 누군가 상을 당하면 온 마을 사람이 교대로 음식을 날라오고, 누군가 경제적 곤궁에 처하면 보이지 않게 자립을 돕는 구제(쩨다카, צְדָקָה, Tzedakah)의 네트워크가 가동됩니다.
란터만과 바우만이 지적했듯, 현대인의 불안은 '철저한 고립'에서 기인하며, 광신주의는 그 고립된 영혼들을 사냥합니다. 그러나 개인이 발 디딜 수 있는 끈끈하고 건강한 일차적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극단적인 음모론이나 맹목적인 집단주의에 영혼을 팔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주는 소속감과 안전감이 불안을 상쇄하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은 세상을 향한 연대와 이성의 선언
우리는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의 눈을 통해 불안에 떨며 스스로를 과격화하는 현대인의 실상을 보았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통찰을 통해 우리 사회를 떠도는 유동적 공포가 어떻게 이방인을 향한 증오로 둔갑하는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릭 호퍼의 무서운 경고를 통해 자아를 잃어버린 좌절한 개인들이 어떻게 광신주의의 맹신자로 전락하는지 그 멸망의 전개 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오래된 지혜인 토라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명확한 탈출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파괴하는 광신적 칼날 대신, 깨어지고 상처 입은 세상을 한 땀 한 땀 기워나가는 ‘티쿤 올람’의 바늘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내 생각만 옳다고 부르짖는 광장 위의 선동 대신, 마주 앉은 이의 눈을 바라보며 질문하고 경청하는 ‘하브루타’의 식탁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무한 경쟁의 러닝머신 위에서 쓰러질 때까지 달리는 대신, 잠시 멈추어 영혼의 평화를 회복하는 ‘안식일’의 쉼표가 필요하며, 고독한 낙오자를 품어 안아줄 끈끈한 ‘공동체’의 품이 필요합니다.
광신주의는 결코 강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두려움과 유약함의 가장 처절한 비명일 뿐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불안을 외면하고 각자도생의 길로 걸어갈 때, 광신주의라는 괴물은 더욱 몸집을 불려 우리의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안에 굴복하여 타자를 증오하는 쉬운 길을 거부하겠습니다. 우리는 흑백의 단순함 뒤에 숨어 이성을 마비시키는 맹신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겠습니다. 대신, 더 많이 질문하고, 더 깊이 토론하며, 내 이웃의 손을 놓지 않는 고단하지만 영광스러운 연대의 길을 택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이들의 오래된 가르침처럼,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더 큰 어둠이나 폭력이 아닙니다. 오직 작은 한 자루의 촛불, 즉 이성과 관용, 그리고 연대의 빛만이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세상을 치유하는 자’로 거듭날 때, 우리를 위협하는 불안사회는 마침내 서로를 신뢰하는 ‘안전하고 성숙한 공동체’로 전환될 것입니다.
그 위대한 여정에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동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By Torah & Judaism Editor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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