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008년 뉴저지주 프린스턴 [2]
나는 이 음식을 한 번도 맛보거나 들어보지 못했지만, 엄마가 시키는 대로 요리했다. 무를 참기름에 부드러워질 때까지 볶는다. 참기름을 아끼지 말고,이제 마늘 넣고 넉넉히, 그것도 아끼지 말고, 엄마의 요리법은 열등하다고 여겨졌던 과거사를 거스르는 주문인 듯싶었다. 생선, 다시물, 파, 국간장, 고춧가루를 넣고 약한 불로 끓인다. 그리고 밥이랑 같이 상에 낸다.
우리는 유리 상판이 놓인 커피 테이블 바닥에 앉아 시원한 생선찌개를 먹었고, 나는 칼칼한 맛, 불 맛, 알싸한 맛과 단맞의 조화에 감탄했다.
"40년 만에 먹어보네." 엄마가 말했다. 꿈을 꾸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와! 너무 맛있어! 나 어렸을 때는 왜 이 요리 안 했어요?"
"전에는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나봐." 지금 먹는 음식을 왜 전에는 먹지 않았는지 물으면 엄마는 항상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 엄마의 갈망을 부추긴 건 무엇이었을까?
"엄마가 요리할 때랑 똑같은 맛이야?"
"난 이거 만들어본 적 없어." 엄마는 마늘 맛이 진한 국물을 들이키며 말했다.
"정말? 그럼 만드는 법은어떻게 알았어요?"
"엄마가 그렇게 만들었던 기억이나네."
엄마가 40년 전에 다른 사람이 요리하는 것을 본 기억으로 내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평생 동안 엄마에게 생태찌개는 당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음식이었고, 그렇기에 가장 위로가 되는 음식이었다. 그 요리법은 외할머니의 손맛에 대한 기억과 함께 혀 끝에 수십 년간 잠들어 있었다. 엄마는 음식을 맛보며 마치 고향집에 돌아가는 것 같았으리라.
엄마의 기억을 되살린 경험이 참으로 감격스러워 생태찌개는 우리 가족의 보물이 되었다. 나는 그 소중함을 지키려고 너무 자주 요리하지 않고, 엄마가 특별히 부탁할 때만 만들었다,어느 날 엄마가 생태찌개을 끓여달라고 한 뒤로, 나는 올케한테서 엄마가 일주일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님 그 생선찌개 해드릴 거예요?" 올케가 말했다 "어머님이그 얘기만 하세요. 한껏 기대하고 계신걸요."
우리가 나누었던 한식 만찬은 엄마의 단도로운 삶을 조직하는 봉홧불이 되었다. 내가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음 식사를 위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월요일 뉴욕시립대 대학원으로 돌아오자, 호수와 그녀의 여자 친구가 주말에 무슨 요리를 했느냐고 물었다. 둘은 항상 우리 모녀의 저녁 식사 얘기를 즐겨 들었는데, 이번엔 생태 째개였다고 답하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굴러 넘어질 정도로 정신없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내가 물었다.
"우리 또래에 그런 요리 하는 사람이 어딨어!" 호수는 숨 넘어 갈 듯 웃으며 말했다.
엄마를 방문하는 일은 마치 1950년. 1960년대 한국과 조우하는 요리 역사 수업 같았다. 엄마 인생 마지막에 우리가 함께 먹었던 음식은 분명 하나같이 당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었으리라. 그 부분은 옛날 한국 음식이었고, 유일한 미국 음식으론 치즈버거가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는 온갖 종류의 음식을 접해봤을 텐데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늘 치즈버거를 꼽았다. 토마토와 체다 체다 치즈를 곁들여 미디엄 레어로 구운 채티와 먹는 걸 엄만 가장 즐겼다. 해마다 워싱턴주에서 비가 잦아들고 건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엄마는 숯불 바비큐 그릴에 불을 붙이고 고기 패티를 올리며 '치즈버거 시즌'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