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89]‘마이산, 그 신비神祕에 빠지다?
어제(16일) 밤, KBS1 다큐온의 <마이산, 그 신비에 빠지다>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말의 귀를 닮았다한 마이산馬耳山을 한두 번 가보신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요즘에는 탑사까지 가는 벚꽃길 2.7km가 굉장하다는데, 한번도 가보지 못해 유감이다. 마이산 탑사는 우리집과 수십년 간 세교世交가 있다. 바로 일제강점기 천지탑과 만불탑을 쌓았다는 이갑룡(1860-1957) 처사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귀가 아프게 들었던 것은, 할머니가 40여년간 불공을 드렸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날 무렵, 1955년인가는 이처사가 우리집을 다녀가기도 했고, 할머니는 오로지 총생들의 무병무탈만을 천지신명께 빌려고, 임실서부터 진안 마이산을 걸어서 다닌 세월이 무려 40년이 넘었으니 ‘일등보살’인 셈이다.
오죽했으면 이처사의 기氣를 물려받은 며느님(보살할매)가 나를 당신의 손자사위로 삼으려 했을까? 흐흐.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장관감이네”하던 말씀이 생각날까. 보살할매의 큰아들인 이왕선(혜명스님)대에 이르서, 비로소 탑사가 조성되고 태고종에 속하게 됐고, 지금은 진성(혜명스님의 아들)이 주지스님으로, 봉사활동(갑룡장학회) 등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또한 진성 스님의 아들 계향군이 불교대학을 졸업, 가업(?) 계승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마이산은 신라 때부터 숱한 전설과 신비를 간직한 산이다. 타포니현상의 거대한 암벽 밑에 움막을 짓고 30여년간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도 분명 보통사람은 아니다. 구한말 군인 신분에서 벗어나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다 마이산에 정착했다는데, 할머니가 직접 들었던 예언(한국전쟁 발발등)을 비롯해 신서神書, 호랑이, 솔잎환 생식生食, 축지법 등 믿기지 않은 일화가 지금도 많이 전하고 있다. 그 많은 탑을 진짜 이처사가 쌓았느냐는 논란이 수년째 계속되자, 진안군청이 1992년 ‘이갑룡 조성’을 결론으로 한 용역보고서로 일단락이 지었다. 거대한 암벽 곳곳에 구멍이 뻥뻥 뚫려, 심지어 동굴이 되기도 한 타포니지형(역암躒巖). 그곳에서 조개류 화성이 발견됐다고 하니, 해발 687m가 되는 암마이봉 중턱까지 몇 천 년 전에는 바다였을까?
겨울철 정한수를 사발에 떠놓으면 고드름이 거꾸로 솟는 현상은 또 무엇인가? 탑군塔群과 역고드름은 『한국의 불가사의』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기도 하다. 누구나 탑사에 들어서자마자 ‘아-’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마이산과 돌탑들 그리고 수마이봉 자락에 자리잡은 은수사銀水寺라는 절은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석 달 동안 기도를 하며 산신령에게서 ‘금척金尺’을 받았다는 곳이다. 금척이 궁금하시면, 어제의 프로그램을 기획한 작가 김종록의 『금척』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또한 태조가 심었다는 청배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금도 열매를 맺고 있다. 암마이산은 누구나 올라갈 수 있으나, 수마이산은 암벽타기 등 전문가가 아니면 오를 수 없이 험하다. 탑사의 샘물은 데미샘과 함께 섬진강의 발원지로도 유명하다.
마이산은 금강산처럼 철따라 이름도 다르지만, 정상부근에서 절벽으로 내려오는 실개천같은 폭포는 겨울에 거대한 ‘절벽 고드름’이 장관이거니와, 헤명 스님이 절벽 아래 심은 능소화는 절벽을 감싸안으려 무한정 올라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데 진실로 볼만하다. 이것조차 신비의 하나라 하겠다. 2010년 7월,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의식 '사십구재'를 탑사 대웅전에서 거행했다. 열과 성을 다해 주신 주지스님. 무려 4시간 반이나 지나 가까스로 '반야선'을 태워 드릴 수 있었다. 장엄했다. 정말 극락왕생하실 것을 믿게 만든 스님, 새삼 고맙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부탁드립니다. 참조하시압.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77]길에서 만난 어느 시인과 그의 여친 - Daum 카페
어제 프로그램을 보면서, 새삼 마이산의 신비에 사로잡혀 떠오르는 기억 하나. 80년말인가 90년대초인가, D일보라는 중앙일간지 산행모임을 이끌고 암마이산을 오르고 탑사를 둘러본 적이 있었다. 그때 해설사를 자청, 이갑룡 처사 일화를 중심으로 마이산의 신비를 관광버스 속에서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의 D일보와는 판이했다. 그런데 지금은? 씁쓸하기가 이를 데 없다. D일보를 보지 않은 지 너무도 오래이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리고 유력한 대선후보자를 비롯한 그 신문사 출신의 금배지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 그 꼴일까? 어제 친구가 보내준 모 논설위원의 <홍범도가 본 홍범도> 칼럼 내용을 일일이 반박한 한 대학 교수의 반론칼럼 <홍범도가 본 송평인 칼럼>을 읽고, 오직 혀만 끌끌 찼을 뿐이다. 한국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를 아예 가지고 논다. 우째 이런 일이? 홍범도가 기가 막힌다. 하여, 나는 오늘도 또 절망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