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96
5월20일[부활 제6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qdFM_v48qA (이승화 시몬 신부님 집전)
[성모성월 특집]교황청이 승인한 성모 발현 성지 17곳(성모 발현 메시지 총정리) / 내레이션 - 박민우 신부님
https://youtu.be/PW-mMLy7_7I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꼭 유념해야 할 사항 한 가지>
최근 우리가 계속 봉독한 요한복음 내용은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고별사는 절정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3~24절)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현 중에 ‘진실로 진실로’란 표현이 있습니다. 100 퍼센트 확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100 퍼센트, 꼭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꼭 유념해야 할 사항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 내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아무 것이나 죄다 청해도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허무맹랑한 청원, 황당무계한 청원, 낯부끄러운 청원, 유아기적 청원은 해서 안 될 것입니다. 청원 기도에도 식별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들의 청원 기도에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개입되기 십상입니다.
유한한 우리들의 불사불멸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의 작은 노력은 뒷전인 채,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는 동화 같은 인생의 반전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인간 측의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 아버지께만 공을 넘겨 드려서도 안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나 자신의 인생과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결국 우리의 청원기도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가 원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을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을 것인가에 대해 신경을 좀 껐으면 좋겠습니다. 그보다는 기도 중에 하느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 오고 가는 깊이 있는 영적 친교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겠습니다.
기도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 그분 앞에 내가 앉아 있고, 그분께서 내 안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고, 그분께서 사랑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왕이 자신이 아끼는 신하에게 “무엇이든 소원 한 가지를 말하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신하는 과연 어떤 것을 청할까요?
한 가지만 청하라 했으니 아무래도 심사숙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청할 것 정말 크게 한 가지 청할 것입니다. ‘현금으로 백만 원을 주세요.’ ‘땅 다섯 평만 주세요.’라고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평생 먹고 정도의 돈인 ‘10억만 주세요.’ 아니면 ‘넉넉한 퇴직금이나 연금이 보장되는 장관 자리 하나 주세요.’ 라고 청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청입니다. 이왕이면 드리는 청, 보다 큰 청, 보다 중요한 청을 드려야겠습니다.
인간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할 작은 고통 하나, 눈 녹듯이 없애 달라고 청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그 고통을 잘 극복할 힘을 청하고, 그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큰 뜻을 이해할 능력을 청해야겠습니다.
다양한 한계와 약점 지닌 존재이기에 필연처럼 짊어져야 할 매일의 십자가 없애주시기를 청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일상의 십자가 기꺼이 지고 갈 인내심을 청하고, 내 십자가 통해 주님의 십자가 묵상할 지혜를 주시라고 청해야겠습니다.
부초처럼, 뜬구름처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보다는 보다 영원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불멸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 구원에 합당한 자격을 청해야겠습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 한 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힘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
<(2)작은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청해야겠습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4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다가 불현듯 든 생각 한 가지!
청하는 것에도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청할 것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청원의 시작, 청원의 최종 목표는 다름 아닌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청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영을 청한다는 것, 예수님의 운명이 내 운명이 되도록 해주십시고 청한다는 것, 결국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영광스런 부활이 내것이 되기를 청한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것이나 지극히 유치하거나 이기적인 청원이 아니라 성령을 청했을 때, 그런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흐뭇해하실 것입니다.
‘드디어 네 신앙이 이토록 성장하고 성숙해졌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성령을 청하다니!’하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성령을 청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무척이나 흡족해하시며, 우리가 청하는 성령을 찔끔찔끔이 아니라,마치 폭포수처럼 콸콸 우리 위에 보내주실 것입니다.
청원기도 때 늘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작은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청해야겠습니다. 세월 흐르면 다 지나갈 별것 아닌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대상인 성령을 청해야겠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도록, 내 안에 머무시도록, 내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도록 간절히 청하는 나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흘러넘치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오실 때면 좋은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안갯속 같았던 우리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만사를 제대로 볼 줄 알게 될 것입니다.그때 우리는 꽃이 피는 시절에도 기뻐하지만, 꽃이 지는 시절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에도 감사하지만, 노후된 중고차 처럼 여기 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지만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를 큰 마음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실 때 인생사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댓가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의 문을 여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정착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경에 정통한 사람?>
며칠 전에 신천지에 빠진 한 자매가 남자친구에 이끌려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이 신천지의 교리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벌써 반년 정도를 간판도 없는 곳에 들어가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빠지게 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성경공부를 하게 된 것은 어떤 지인에 이끌렸기 때문인데 마음이 ‘공허’했기 때문에 거기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겠다고 하며 거기서 가르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배우면서 마음의 공허함이 어느 정도는 채워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30분 정도의 면담으로 그녀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워낙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을 짜깁기해서 가르쳤기 때문에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방주가 교회이지 성경이 아님만을 인식시켰더니 쉽게 수긍하는 눈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 ‘아폴로’가 나옵니다. 그는 비록 예수님의 세례도 모르고 있었지만 성경을 놓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유다인들 앞에서 대놓고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가 성경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정확’했다고 말합니다.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사실 지금까지는 워낙 성경을 통해 발생한 이단들이 많아서 성경보다는 교회를 먼저 믿으라고 많이 이야기를 했는데, 성경보다는 교회라는 말 자체도 다 성경에 있는 말입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는 교회를 이해하는 것도 성경 자체를 이해하는 것도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당신 부활을 확신시켜 줄 때도 당신을 만난 이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이해시켜 주시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분명 성경은 마음의 평화를 줌은 물론 진리를 확신하게 하고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는 귀한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를 반박하는 사람들도 다 성경을 가지고 합니다. 그런 강의나 동영상을 보면 그것이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아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또한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임을 성경으로 증명하는 것을 들으면 또한 신기해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성경보다는 교회입니다. 진리의 기둥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성경 자체로 그 힘이 있어서 성경을 읽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는 이의 손에 독이 묻어있다면, 혹은 그 요리를 해 주는 사람이 독버섯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분별없이 받아먹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 줄 수 있는 교회를 먼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리사를 믿어야 음식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폴로는 교회의 사람들을 만나고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정확히 전하기는 했지만 더 완전해지기 위해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더라도 교회의 가르침, 즉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먼저 익히지 않으면 성경만 가지고는 언제든 빗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만 가지고 자신들의 생각을 끼워 맞추는 성경을 유일한 가치로 여기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으로만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경보다는 교회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철학자 데카르트는 모든 명제를 의심하면서 사유하였습니다. 그러다 의심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명제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입니다. 지난번 성지순례를 갔다 오면서 늘 입고 다니던 옷이 낡아져서 더 이상 입기가 어려웠습니다. 해외여행 중에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권, 핸드폰, 지갑’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여권’입니다. 여권이 없으면 함께 이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탑승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옷이 찢어지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여권을 보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깨에 메는 가방에 보관합니다. 여자 분들이 그렇게 보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옷에 보관합니다. 주로 남자 분들이 그렇게 보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여권은 늘 입고 다니는 옷의 안 주머니에 보관하였습니다. 순례 중에도 여권을 보관하는 옷 생각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오늘 ‘생각’이란 무엇인가? 돌아봅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입니다. 좋아하는 것들이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늘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는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애주가는 ‘술’ 생각을 많이 합니다. 기뻐서 한잔, 우울해서 한잔, 비가 와서 한잔, 경치가 좋아서 한잔을 떠올립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거나 해결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잡은 고기에게는 더 이상 미끼를 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함께하고 결혼하면 사랑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생각이 덜 나기 마련입니다. 저도 아마존에서 여행에 필요한 ‘옷’을 구매했습니다. 여권을 보관할 옷이 생겼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주가들도 어느 정도 술을 마시면 더 이상 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취할 정도로 마시면 며칠 동안 술을 가까지 하지 않기도 합니다.
순례 중에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매일 미사가 있었고, 미사 지향으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와 생각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다른 점도 있습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라면 기도는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생각은 내가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는 나의 전구로, 타인의 전구로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의 만족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생각은 나의 욕망을 위해서 나의 희생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생각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가 마시면 생명을 살리는 ‘우유’가 됩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뱀이 마시면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저도 그릇된 생각 때문에 위험을 자초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릇된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면 ‘죄’가 되기도 합니다. 순례 중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기도하였고, 하루를 마감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례의 여정에 함께 해 주셨고, 모두가 건강하게 순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는 반항하던 유다인들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쪽 벽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모두 흩어졌고, 1년에 한 번 무너진 성전의 한쪽 벽에서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2000년이 지나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통곡의 벽’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한 지 7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유다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나면 ‘하느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폴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번 순례의 여정에도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난 분들이 많았습니다.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성가 봉사를 해 주었고,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부축해 드렸습니다.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도 필요하지만, 신앙인이라면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23-28: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와 청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의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바로 구원과 관계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을 청해야 한다. 이 말씀은 항구하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청하라고 하신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충만한 기쁨이란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26절) 우리가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영적인 사람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함께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7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로써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은총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고 이제는 영광중에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그 모범을 따라 살 때 예수님과 같이 그분을 닮아 아버지께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이방인들은 신의 이름을 거듭 부르면, 신을 조종하여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주실 것이다.” 하신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만 생각하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내 뜻만 고집하기보다 먼저 그분의 뜻을 찾고 나의 의지가 그 뜻에 일치되기를 청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십니다. 그 성령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충만한 기쁨, 이해와 깨달음, 아버지의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여야 할 것은 무엇보다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결정적으로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께 직접 청하고 사랑과 기쁨을 받아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 아폴로는 예수님을 증언한 탁월한 설교가였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이, 곧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로 말미암아 성령을 알게 되고, 마침내 바오로가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1코린 3,6)라고 말할 정도로 하느님의 소중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문득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간절히 청한 때가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아버지께 필요한 은총과 성령을 청하는 자녀의 삶으로 서둘러 돌아갑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
[성분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기만 하면 바라는 그 모든 것을 이루어 주는 마술적인 주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우리가 청원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에도 성부이신 하느님과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신적 일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는 그 순간에 내 마음에 사적 욕심이 끼어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나오는 충만함과 기쁨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을 받느냐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서 느끼는 기쁨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체험은 내적인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드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께서 주십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시는지 잘 모릅니다.
그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것은 간절히 청할 때 기쁨이 넘친다는 사실이고, 그 기쁨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끼게 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미사의 본기도는 우리가 날마다 간절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이가 날마다 더 옳은 일을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자비, 주님의 사랑인 은총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옳은 일인 당신의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며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당신 집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하느님 구원 업적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며,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주님을 전하는 모든 이, 우리의 부모님, 형제, 친지, 그리고 우리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분과 일치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 줍니다. 주님과 일치한 이들이 바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기도란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성부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믿음과 사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항구함’을 잃어버리고 많은 시련과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께 ‘항구함의 은총’을 얻으려면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을 받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노력은 바로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와 관심과 사랑의 실천에서 드러납니다.
=====================
[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적대자들을 위하여 아폴로를 준비하신 하느님>
한편 에페소(로마 제국 아시아 주의 수도)에는 알렉산드리아(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해양 도시로 상업의 중심지이며,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에서 온 아폴로라는 유다인이 와 있었다.
그는 천부적인 언변과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의 세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그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는 그가 복음의 진수에 대해 무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이리하여 아폴로는 복음의 핵심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아폴로는 아카이아 지방으로 가서 코린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코린토의 유다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며 박해하였기 때문이다.
코린토에 온 아폴로는 능통한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유다인들의 주장을 논박하며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더욱더 설득력 있게 유다인들에게 전하였다.
코린토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살았고, 율법을 주신 하느님까지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그처럼 율법에 매어있는 완고한 그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아폴로를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아폴로를 선택하셨다.
아폴로는 철학과 성경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뛰어난 언변과 박학한 학식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서에도 능통하였다. 때문에 그는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심을 이내 알고 주님을 믿을 수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로 에페소에 가서 프리스킬라 부부를 만났고, 그들로부터 복음의 진수를 전하여들은 다음 복음전파의 열정에 불타 코린토로 갔다.
그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코린토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였다. 그들에게 성경을 해석해 주고, 성경이 전하는 주님을 선포하였다. 성경을 통하여 그들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하여 당신을 거부하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성서에 능통한 아폴로를 그처럼 준비하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던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는 변함이 없다. 어떤 악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 어떤 죄와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이사 44,22)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사울을 미리부터 준비하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고, 아폴로를 예비하셔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유다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하셨다.
오늘,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는 하루가 되자.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 믿음으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그분과 일치하여 그 이름에 걸맞은 청을 해야 합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가 깜짝 놀랐던 일이 기억납니다. 아마 늦은 봄이었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성당 마당에서 재미있게 노는데, 한 친구가 “눈 온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입니다. 얼음덩어리인 우박이었습니다. 눈인 줄 알고 맞았다가 따끔하고 아파서 얼른 우박을 피했습니다. 다행히 금세 그쳤지만, 우박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던 날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박으로 농산물 피해가 크고, 단단한 차에도 커다란 흠집을 내지 않습니까? 그때 우박의 크기가 훨씬 컸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크지 않았음에도 따끔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해 봅니다. 눈 대신 매번 커다란 우박이 떨어졌다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음이 정말로 다행스럽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께 감사드릴 이유입니다.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불평불만만을 늘어놓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불만 거리만 찾고 있으며, 이런 것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본당 신부를 하다 보니 완전히 초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솔직히 의욕이 넘쳐서 부족한 부분을 많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형편없는 강론도 잘 들어주시는 것 역시 감사합니다. 주일 미사에 충실히 나와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신나게 떠들면서도 성가를 힘차게 부르는 어린이들, 공부할 것이 그렇게 많은데도 미사와 교리에 참석하는 청소년들, 할 일이 많은데도 열심히 미사에 나오는 청년들, 세상의 힘듦 속에서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신자들…. 모두 감사한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니, 제가 얼마나 행복한 본당 신부인지를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할 일을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감사할 일을 찾는 데 집중한다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고 감사할 일을 주시는 주님임을 받아들여야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기쁨 안에서 우리는 계속 주님께 청할 수 있고, 또 이런 믿음으로 청하는 사람만이 주님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평불만의 이유를 찾는 것보다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 노력이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청해야지요>
요한 16,23ㄴ-28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청해야지요>
사랑께
오직 사랑을
청해야지요
착함께
오직 착함을
청해야지요
참됨께
오직 참됨을
청해야지요
올곧음께
오직 올곧음을
청해야지요
베풂께
오직 베풂을
청해야지요
품음께
오직 품음을
청해야지요
살림께
오직 살림을
청해야지요
평화께
오직 평화를
청해야지요
더불어 삶께
오직 더불어 삶을
청해야지요
하느님께
오직 하느님을
청해야지요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쁨의 여정>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기쁨-
삼일간 계속되는 주제가 기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우울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주님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공자의 논어의 시작이 참 멋집니다. 참 멋진 군자, 공자입니다. 예수님과 만났어도 곧 의기투합했을 것입니다. 공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으로 시작되는 논어의 시작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벗이 먼 지방에서도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남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화가 나지 아니하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의 군자삼락에 대한 자부심에 공감이 갑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그리스도교의 군자들인 우리 수도승들에게도 그대로 공감이 가는 군자삼락입니다. 정말 좋은 도반의 방문은 기쁩니다. 빈손으로 와도 그 존재자체가 반가움과 기쁨입니다. 과연 이런 도반이 있습니까?
어제도 기쁨으로 가득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회의가 있어 서울에 들렸던 제주에서 은거(隱居)의 삶을 살고 있는 도반이 잠시 수도원에서 하루 묵어가면서 저에게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참 오랜만에 웃으며 유쾌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 집무실 앞 주님의 힐링의 꽃길, 환대의 꽃길에서 혼자의 독사진도 찍어 드렸고, 함께도 찍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온 도반만이 아니라 고백성사차 집무실을 찾았던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집무실옆 힐링의 꽃길, 환대의 꽃길, 사랑의 꽃길, 기쁨의 꽃길, 평화의 꽃길에서 사진을 찍어 드렸습니다. 참 좋은 주님의 선물인 힐링의 선물, 기쁨의 선물을 드린 것입니다. 힐링과 기쁨, 주님을 만나는 사랑의 고백성사의 근본 목표이기도 합니다. 새삼 서로를 즐겁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기쁨의 선물, 기쁨의 나눔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이미 어제 정했습니다. “기쁨의 여정-주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기쁨-”으로 말입니다. 어제는 삼시경후 공동체 형제들이 모인 가운데 귀엽고 예쁜 새 승용예초기 축복식이 있었고 또 이것이 우리를 기쁘게 했습니다. 마치 귀여운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새삼 가톨릭 축복 예식의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사랑의 기쁨이듯 역시 아름다움의 기쁨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며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며 또 이런 아름다움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주님의 파스카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5월 신록과 파스카의 꽃들을 상징하는 무수한 꽃들의 아름다움이 또 우리를 감동케하고 기쁘게 합니다.
축복기도시 아름다웠던 독서와 축복기도를 나눕니다. 요즘 복음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요 계속되는 제1독서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기쁨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역시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바깥 사람들에게 품위 있게 처신할 수 있고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1테살4,11-12)
백장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 ‘하루일하지 않으면 하루먹지 않는다’라는 말씀도 있듯이,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수도승의 노동 윤리의 기초가 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런 노동의 기쁨, 역시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합니다. 축복기도문도 참 아름답습니다.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풍성한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
믿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이 도구들을 봉헌하는
자녀들을 굽어보시어,
이들이 열심히 일하여
창조사업에 협력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인류발전에 공헌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도구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할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요 도구를 사용하는 이들이 꼭 기억해야 할 기도문이요 안전에 각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축복기도문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마지막 대목인 우리 주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삶의 모두가 됩니다.
아무리 영성을 강조해도 토마스 머튼이, 산티아고가, 렉시오 디비나가 우리 주 그리스도를 가려선 안됩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파스카 예수님의 영성이 있을 뿐입니다. 정말 하나의 소원을 청한다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뿐이겠습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과 더불어 기쁨도 날로 깊어지고 더해져 갈 것이니 그대로 기쁨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참으로 날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뜻에 일치할수록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것이니, 바로 충만한 기쁨의 선물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기쁨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도 우리의 주님 사랑의 의욕을 붇돋습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참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의 복된 운명을 보여줍니다. 이들 역시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와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담대히, 확고히 열정을 가지고 유다인들을 논박하는 아폴로! 기쁨과 활력으로 넘치는 모습입니다. 새삼 그가 얼마나 내적으로 주 예수님과 깊은 우정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하시며 더불어 날로 기쁨 충만한 기쁨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고백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요한16,24)
<무엇을 청했는가?>
오늘 복음(요한16,23ㄴ-28)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16,23-24)
무엇을 청했는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이상합니다. 우리는 매일, 아니 매순간 많은 것들을 청하고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고 있는데,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1-33)
오늘 복음은 내 뜻 안에만 갇혀 있고, 내가 원하는 것에만 갇혀 있음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려놓고, 낮아지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의로움)인데, 이것을 먼저 청하지 않은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일깨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충 믿고 대충 살아서는 결코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 뜻 안에만 갇혀 있으면 결코 완성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M8hhUMfzJQ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 27)
가장 중요한
신앙인의 자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믿음은
믿음이신
예수님께
가치를 두는
삶입니다.
예수님께
중심을 둘 때
우리는
우리의
자아 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무게만큼
달라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우리자신을
알게 합니다.
믿음은 이제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법으로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익어가야 할
믿음과 사랑
사랑과
믿음입니다.
믿음과 일상이
한 몸이 됩니다.
우리 삶의 자세가
신앙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믿음으로
기다러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일상 속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일상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는
빛나는 중심
구원입니다.
구원을
믿습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