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 아닌 포용으로 ‘남자’를 이기다 150년전 영국의 한 여인이 쓴 소설 ‘자기’ 찾는 ‘제인’ 통해 “주체성 선언” ‘남성우월’의 무모성과 아집 해체 여성 생명력 부각 휴머니즘 복원
우리 사회에서는 요즈음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문화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다.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착된 구조에 대해 도전하는 시도도 많이 목격된다.문화 형성의 주요 매개체인 글쓰기 행위에 있어서도 가부장적 전통은 역사적으로 그 뿌리를 깊이 박고 있어 여성작가를 그 전통에서 배제된 주변부로 내몰았다는 반성을 낳게 한다.
문화의 중심권에서 소외된 여성작가들의 자의식은 첨예할 수밖에 없다.때로는 중심 권력과 절충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방자로 영원한 떠돌이가 되기도 하여,그들의 글에서 타협과 대립이 복합된 미묘한 심리적 긴장을 발견하게 된다.두터운 문화적 권력의 층을 비집고 터져나오는 긴장의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인해 여성들의 글은 새롭고 낯선 경험을 갖게 만든다.
19세기 빅토리아조에 쓰인 ‘제인 에어’(1847)가 갖는 매력은 바로 이 점에 있다.성장소설의 전형적 틀을 빌려 어린 소녀가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나간 작품이다.
작품의 여성 주인공은 교육을 통해,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을 통해 사회와 타자(他者)를 접하면서 억압적인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저항하며 여성의 주체성을 선언한다.불합리한 문화적 편견을 거부하며 여성만의 독자적인 이미지를 옹호한다.
주인공 제인 에어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삼촌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같은 또래의 남자 사촌과 차별되어 온갖 구박과 폭력에 시달린다.부모가 없다는 점만이 아니라 여자 아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학대받아 그의 서러움은 더욱 커진다.
억눌린 분노가 마침내 폭발해 사촌과 싸우고 난 뒤 춥고 컴컴한 붉은 방에 갇힌 열 살의 어린 제인은 거울에 비친 성난 자신의 모습에서 억눌려 있던 또하나의 자기 모습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늘 순종하고 회피하던 평상시의 모습이 아니라 분노로 질식된 백지장 같은 얼굴과 불타오르는 두 눈빛은 억압적인 환경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잠재된 여성적 의식의 표출이었다.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와 기숙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만 거울에서 발견한 낯선 자아는 늘 깊숙이 도사리고 있어 제인의 독립의지와 저항의식을 발전시켜나갈 에너지가 된다.여자 기숙사에서의 생활과 교육은 여성의 자아와 주체성을 억압하는 대표적 사회기관이었다.이것을 피해 갈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종교적 헌신과 영적 해탈로 속세의 현실적 박해를 초연히 승화시키는 길이다.그러나 지적 호기심과 삶의 열정에 타오르는 제인의 영혼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기숙사를 떠나 가정교사로서 직장을 찾아간 곳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 로체스터의 저택이다.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이 처음부터 평등한 관계에서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계급상의 차이,재정적 부의 엄청난 불균형,고용자와 피고용자의 신분적 관계,심지어 외모까지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벽이 너무나 높다.
남성,백인,지주,귀족으로서 로체스터의 지배적 우위가 여러모로 예상되는 상황이다.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 로체스터가 제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우리는 신데렐라의 로맨스를 다시금 상기할 수 있다.여성의 존재를 무에서 유로 창조하는 이러한 환상적 로맨스 뒤편에는 언제나 남성의 절대적 권력과 권위가 도사리고 었어 가부장제 구조는 영구히 지속된다.이와 똑같은 상황에서 우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여성의 독립된 자아의식을 작가는 여성 주인공을 통해 모색한다.
19세기 빅토리아조 사회가 남성에게 부여한 모든 권력에 대항해 남녀간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아니면 남성의 권력을 무력화시킬 여성 원리는 무엇일까.
열렬한 사랑과 깊은 이해로 사회적 간극을 넘어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청혼하지만 그래도 그의 의식 속에 지워지지 않는 희미한 남성중심 사고를 제인은 끝까지 파헤치며 고발한다.자신이 비록 가난하고,평범하고,내세울 것은 없어도 남의 부추김에 따라 움직이는 단순한 꼭두각시나 수동적 기계가 아니라 고귀한 영혼과 뜨거운 감정을 지닌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제인은 일깨운다.
사랑의 열정에 휩싸여 자신을 신비화하거나 추상화에 빠지지 말기를 또한 강조한다.절대자 앞에서는 너와 나가 동등한 존재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오히려 작가는 도덕적 측면에서 제인이 로체스터보다 더욱 우월한 정당성을 갖게 한다.비록 자신의 몸보다 더욱 사랑하는 로체스터지만 그가 미친 여인에게 속아 결혼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제인은 공동체의 윤리성을 내세워 그의 곁을 과감히 떠난다.도덕성이 공동체적 규범에 너무 얽매여 있다는 인상을 독자에게 준다면 여성이 지적이지 못하고 감상에 빠지기 쉽다는 사회적 편견을 뒤엎는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더군다나 작가는 제인을 통해 여성에게 발휘되는 특유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남성원리가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이를 치유하고 새 생명을 부여하는 여성원리의 상징적 역할을 수행한다.
말에서 떨어진 로체스터를 치료하며 두 사람이 처음 대면하는 장면,이후 불 붙은 침대에서 잠자는 로체스터의 목숨을 구하는 제인,미친 아내의 방화로 두 눈이 멀고 팔이 잘린 로체스터에게 다시 돌아와 마침내 결혼하고 그를 치유해 시력을 회복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모두 여성의 고유한 특성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로체스터의 몰락은 가부장적 사회의 파멸을 의미한다.이를 회복시키고 소생시키는 생명력은 여성에게서 나오는 잠재력이다.두 사람의 재결합은 여성의 희생과 봉사를 요구하는 가부장제의 또다른 양상이라기보다 남성원리와 여성원리의 화합으로 양성적(兩性的) 비전의 조화를 추구하는 대화적 상상력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사회의 중심에서 권력을 독점했던 남성원리의 단선적 사고는 여성을 주변의 변방으로 몰아내지만 ‘제인 에어’는 그 중심 권력의 무모성과 아집을 해체시킨다.억눌리면서도 변방에서 꾸준히 생명을 이어온 여성적 자아는 자기탐색 과정을 거치며 중심부에 도전한다.여성만의 외침이 아니라 참다운 휴머니즘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울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