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올람토라 온라인 성도방에 초대합니다.
카카오 오픈채팅방에 "레올람토라"를 검색하시거나, 아래의 링크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픈채팅방 링크 주소
https://open.kakao.com/o/gvbFarQf
# 로잔 대회 서울 선언문을 모두 실은 것은 아니며 나누기 위해 일부만 실었습니다. [ ] 괄호 안에 있는 글이 선언문 내용입니다. 그 아래 저의 의견을 달았습니다. 참고하시면 됩니다.
1. 서문 (사이비 생활방식을 경계한다?)
[대한민국 인천에서 열린 제4차 로잔대회는 세계 선교에 헌신한 놀라운 운동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우리는 지난 50년이라는 복음 전도 추수 기간에, 세계 교회는 새로운 신자들이 진정으로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돕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적절히 제공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교회는 종종 새신자들이 가정, 학교, 교회, 이웃, 그리고 시장에서 급진적 제자도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양육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신앙을 약화시키고, 주 예수의 교회의 연합과 교제를 파괴하려는 사회적 가치관과 복음의 왜곡에 대응할 수 있는 지도자를 구비하려고 고군분투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수많은 신자가 복음의 본질적인 가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거짓 가르침과 사이비 기독교적 생활방식의 부상을 경계한다.
그러나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 피조물을 스스로 선택한 속박에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을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도 없으셨다. 하나님은 오실 구세주를 통해 무력한 상태에서 인류를 구출하고 모든 민족이 예배로 연합하여 하나의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되는 계획을 세우셨다.]
로잔 대회는 세계 선교에 헌신한지 50주년이 되어 기념하는 행사였다. 50년을 복음 전도 추수 기간이라 말하며 신자들이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가르치지 못했고 예슈아의 제자로서 양육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즉 제자화의 실패가 50년 로잔대회의 열매이다. 또한 복음의 본질과 멀어지게 하는 사이비 기독교적 생활방식이 부상하는 것을 경계한다고 말한다. '생활 방식'은 살아가는 방법을 말한다. 과연 사이비 기독교적 생활방식이 무엇인가? 기독교인 처럼 살지 않는 생활 방식은 복음의 본질과 멀어지게 한다고 경계하고 있다. 예슈아를 믿고 안믿고가 아니라 생활 방식을 지적하는 것은 조금은 의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생활 방식은 성경적인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또한 모든 민족이 연합하는 방법은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함께 예배하면 연합인가? 성경은 '하나됨'이 '계명'을 지킴으로 아버지와 예슈아와 우리가 모두 하나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요14:20,21). 단순히 연합 예배로 하나될 수 없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0,21)
2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새롭게 갱신할 때가 왔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이 선포한 축복은 부나 건강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변혁하는 능력인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었다. 메시아 예수님이 교회를 세울 때가 도래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그분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죽음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때, 새 창조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그다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육체적 부활에 참여할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가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 백성은 메시아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이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연합된 백성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백성은 모든 선의 근원인 하나님을 중심으로 축복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세상을 돌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역 교회에 모일 때, 우리는 만물의 참된 이야기인 복음을 살고, 연습하며, 기억한다. 우리는 예배에서 은혜로운 그 이야기의 저자와 그의 업적을 송축한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에서 복음의 핵심을 명확히 정제한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에게 그 모범과 명령에 삶을 일치시켜 순종하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 용서와 화해의 실천에서 그 효과를 드러낸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기도한다.]
예슈아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가 이르렀고 그것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즉 교회를 세우려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정말 예슈아께서 교회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여 자신을 드리셨는가? 그러면 우리도 교회를 위해 죽도록 헌신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하나님은 말씀이시므로 말씀을 생명다해 지키고 죽도록 순종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로잔은 교회를 위해 죽었다고 말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사실상 말씀보다 높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독특한 삶(생활)의 방식은 영생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삶의 방식은 '예배'라는 것이다. 즉 기독교식 예배가 바로 이들이 말하는 온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복음의 핵심을 명령에 삶을 일치시켜 순종하는 것이고 사랑과 정의와 용서와 화해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율법을 말하지 않는다. 정의라고 말하면서 무엇이 의로움인지 말하지 않는다. 교회의 정체성은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켜야 함을 말하지 않는다(왕상9:3,4). 이것이 삶의 방법이 아닌가? 무엇을 지키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방법은 말하지 않고 오직 예배만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왕상9:3,4)
3 성경: 우리가 읽고 순종하는 성경 (해석 전통을 따라 읽어라?)
[로잔운동의 시작부터 로잔운동의 기둥은 교회와 선교, 기독교인의 삶을 위한 유일한 신앙과 실천의 원칙인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서 성경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성경관이 항상 복음을 옹호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를 삼는 교회의 선교를 강화하는 신실한 성경 해석을 낳은 것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종종 상충되는 해석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교회의 효율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성경관을 확언하려면 성경의 역사적, 문학적, 그리고 정경적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교회의 해석 전통에 따라 성경을 읽는 방식이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성경에 대한 중요한 확언은 성경의 본질뿐 아니라 성경 해석, 즉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성도의 교제와 함께 성경을 신실하게 읽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성경의 목적은 제자를 형성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여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민족들 가운데 택한 민족인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신다(골 1:15, 3:10, 엡 4:24, 마 6:10).]
로잔운동의 기둥은 교회와 선교, 성경에 대한 헌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상충되는 해석으로 교회가 위협을 받기 때문에 교회의 해석 전통에 따라 읽어야 그것이 신실하게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선교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행하는 공동체가 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슈아께서 죽으신 것도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고 성경이 존재하는 목적도 교회를 세우는 것인가? 그럼으로써 선교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교회라는 공동체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할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멸하시고 던져버리신다고 경고하셨다. 즉 교회가 목적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이 목적이다(왕상9:6,7).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왕상9:6,7)
4 성경 해석은 보편적 교회에 속한다?
[우리는 복음주의적(복음 중심적) 성경 해석이 최근의 발전이 아님을 확언한다. 그것은 사도적 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해석 전통을 이어간다. 성경에 대한 신실한 해석은 보편적 교회에 속하며, 다양성 속에서 복음의 일치를 추구하기 위해 지역적, 역사적, 그리고 교파적으로 서로 다른 상황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동일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동일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복음을 믿은 과거 세대의 신실한 성경 읽기의 연속성을 전승하는 전통의 필수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확언한다. 복음주의적 해석 접근법이 신실하기 위해, 이러한 전통을 존중해야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지역 교회들이 개인, 그룹, 그리고 예배 공동체로서 성경을 공적으로 읽고 신실한 성경 읽기와 듣기를 형성하는 데 헌신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선포하는 복음이 우리의 세계관과 삶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의 전 세계적인 협업의 필요성과 고대의 신조,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 전통에 대한 주의를 확언한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과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주되심을 신실하게 선포하고 나타내는 신실한 성경 읽기와 경청 공동체로 우리 자신을 형성해야 한다.]
성경 해석이 최근의 발전이 아니라고 확언하며 성경의 신실한 해석은 보편적 교회에 속해있다고 말한다. 즉 보편적 교회에 그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해석 전통을 존중해야 하고 그것이 성령이 인도하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전 세계적인 협업이 필요하며 고대 신조, 신앙고백, 교회 전통에 주의를 기울이고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도적 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해석 전통을 말한다.
그렇다면 보편적 교회, 사도적 교회가 어떤 의미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가톨릭'의 정의와 일치한다. 2세기 말에 교부였던 치릴로는 '가톨릭'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이 땅에서 저 땅끝까지 온 세상에 퍼져있는 까닭에 또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을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모두 포함한 모든 교리를 가르치는 까닭에 그리고 모든 인간의 왕, 시민, 학자, 무식한 자들ㅇ 모든 사람을 참다운 신앙에로 이끄는 까닭에 그 이름을 가톨릭이라고 한다." 사도 신경에도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라고 되어 있으며 니케아 신경도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나와 있다. '보편(catholic)이라는 의미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믿어온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를 뜻한다.' 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모든 교회가 연합하여 굳건히 세워지기 위해 가톨릭의 성경 해석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가톨릭이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 교회임을 인정하는 것 뿐아니라, 성경 해석의 권위까지 인정하는 것이다.
5 교회: 교회에 대한 이미지 (교회를 어떻게 상상하는가?)
[로잔 언약(1974)은 “세계 복음화는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할 것을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제4차 로잔대회(2024년)의 주제는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상상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교제이다. 고대의 사도신경은 “성도의 교제”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신앙을 고백한다. 오늘날에도 주 예수님은 교회에 성령을 계속하여 부어주고 성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주 예수님께 계속하여 영광을 돌린다(고전 12:27; 고후 6:16).
수 세기 동안 전 세계 그리스도의 백성과 함께 우리는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에 의거하여 교회가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임을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종, 성별, 지역, 지위, 그리고 능력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그의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안에 동등하게 속한다는 점에서 보편적(보편적이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이다. 그러므로 소년과 소녀, 여성과 남성, 목회자와 선교사, 주부, 교육자, 노동자,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일터의 지도자를 위한 자리가 있다.]
제 4차 2024년 로잔대회 주제는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이므로 교회를 어떻게 상상하는지 즉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의 사도신경은 모두가 공통된 신앙 고백을 했었고 성령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예슈아께 계속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교회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사도 신경의 원조인 니케아 신조에 의거하면 교회가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이라고 말한다. 즉 고대부터 있던 가톨릭 교회가 원조이고 우리가 가져야 할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인종, 성별, 지역, 지위와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교회에 속할 수 있으므로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가톨릭의 정의이기도 했다. 로잔대회는 우리에게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천주교'로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6 정통 교리를 따라야 한다?
[보편적 교회에서는 어떤 인간 문화도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인간 문화는 모든 지혜를 소유하신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머리를 숙여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문화는 성경을 이해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공헌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로 연합하여 우리의 모든 다양성 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내신다. 지역 교회는 보편 교회의 유일한 가시적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안에서 산 돌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다(고전 3:16-17, 12:12-27; 엡 2:20-21; 벧전 2:4-10).
이러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도 사도적이다. 오순절 날 성령의 부으심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공개적으로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온 세상에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해 왔다. 역사를 통틀어 모든 곳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단번에 맡기고 대대로 전수한 가르침을 견고하게 붙잡음으로써 연속성을 유지하며 지탱하는 사도적 공동체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눈을 돌릴수록 신실한 믿음과 실천의 두 기둥인 정통 교리와 정통 실천(orthodoxy and orthopraxy)은 약화된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실패와 죄를 애통해하며 성령의 확신과 주님의 명령을 계속하여 무시하는 태도를 회개한다(딤전 4:16).]
이제는 보편적 교회를 기준으로 말하고 있다. 어떤 인간 문화도 우월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톨릭의 정의)는 사도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성령의 부으심과 함께 시작했고 온 세상에 계속해서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했으며 열두 사도가 대대로 전수한 가르침을 견고하게 붙잡았기 때문에 연속성을 유지했으므로 사도적이라는 것이다. 가톨릭이 오순절에 시작했는가? 오순절에 시작했다면 그들은 토라를 준행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고기를 금하고 결혼을 금하는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다(딤전4:1-3). 심지어 신실한 믿음과 실천을 위해 가톨릭의 정통 교리와 실천을 따르라고 말한다. 그것이 성령의 확신이며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미혹하는 영이며 역사까지 왜곡하며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7 교회는 예배로 모일 때 성장한다 (교회의 정체성은 예배이다?)
[그리스도의 한 몸이며 한 성령의 성전인 교회는 주로 예배를 통해 그 정체성을 드러낸다. 함께 드리는 예배 가운데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구현하고 교회됨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는 예배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사건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찬양)을 선포하는’ ‘왕 같은 제사장’(royal priesthood)이며 ‘거룩한 나라’(holy nation)이다(벧전 2:5, 9).
교회는 말씀과 성만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자신을 교회로 구별한다. 예배의 이 두 가지 기본 요소는 교회를 정의하는 표지(marks)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다른 많은 교회의 실천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근본적인 실천이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선교적 노력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선교 사역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끝날 것이지만, 예배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교회가 근본적 실천으로 예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설교, 기도, 그리고 찬양을 통해 예배를 더욱 공동체적 경험으로 만들 것을 요청한다.
올바르게 질서 잡힌 예배는 지역 교회의 권위와 규율 아래 이루어진다. 이는 신자 개인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안녕을 위해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이 지역 교회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청한다.]
로잔은 교회의 정체성은 예배라고 말한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공동체적 사건으로서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라고 말한다. 예배가 어떻게 법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될 수 있는가? 예배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경배하는 것이며 나라는 하나님의 법으로 통치되는 즉 법을 살아내는 백성의 삶의 터전이다. 예배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도 어폐가 있다. 왕은 법으로 다스리는 자이다. 왕 같은 제사장은 실질적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사장도 하나님께 제사하는 자이나 동시에 백성에게 법도를 가르치는 자이다. 예배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삶을 통해서도 가르친다. 로잔은 교회의 표지(표증)이 말씀과 성만찬과 삼위일체이며 예배가 교회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러한가? 교회가 궁극적 목적이 예배인가?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순종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며 존재 이유라고 말한다(왕상9:3,4). 예배와 순종은 다르다. 순종이 목적이라면 순종을 통해 우리가 하나될 수 있지만 예배가 목적이라면 순종과 상관이 없을 수 있다. 우린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예배할 수 있다. 가인도 예배했고 사울도 예배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 하나되지 못했다. 이들은 예배가 교회의 정체성이므로 설교, 기도, 찬양을 통해 하나되기 위해 공동체적 경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도 교회의 권위와 규율 아래 이루어져야 하고 교회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선 지역 교회라고 말하지만 앞에서 지역 교회도 하나인 보편적 교회에 소속되어 있고 그 권위 아래 있음을 강조하므로 지역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곧 가톨릭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들은 이렇게 교회의 권위를 그 무엇보다 복종을 강조하고 있다.
8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회복되는 존재 (교회는 새로운 인류이다?)
[오늘날 세계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몰두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기독교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교회는 신자들을 하나님과 서로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이다. 이 새로운 인류는 참되고 온전한 인간성을 정의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변화되고 있다(엡 2:14-16; 롬 8:9; 12:1-2; 고후 3:18).
구속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교회의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고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은사와 사역을 부여받았다.]
인간에 대한 기독교 교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예슈아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인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교회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동선 즉 전체 교회를 이롭게 하기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신격화, 우상 숭배화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도구일지라도 그것이 섬김의 대상이 될 때 우상 숭배가 된다.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교회를 신격화하는 것일까? 의심스럽다.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깃발 제작 문의
https://cafe.naver.com/freeflag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