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앞 능소화
이현승
1
이를테면 제 집 앞 뜰에 능소화를 심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여름날에, 우리는 후두둑 지는 소나기를
피해 어느 집 담장 아래서 다리쉼을 하고, 모든 적막을 뚫고 한바탕의 소요가 휩쓸고 갈 때, 어사화 같은 능소화
꽃 휘몰아쳐지고 있을 때,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집의 좋은 향기에 가만히 코를 맡기고 잠시 즐겁다.
능소화 꽃 휘어진 줄기 흔들리면,
나는 알고 있다. 방금 내가 꿈처럼, 혹 무엇처럼 잠시 다녀온 듯도 한 세상을.
2
말걸어 오지 않는 세상을 향한 말걸기.
언뜻언뜻 바람을 틈타고 와
확, 뿜어져 나오는 향기란
아무것도 예비할 수 없었던 도난사고처럼
툭, 어깨 치며 떠난 자에게서 후발되는 것.
뒤숭숭한 꿈자리처럼
파편적으로만 나타나는 기억 속에서
징후로만 읽혀지는 것.
그러나, 감추어진 것을 향한 나의 짐작은 두렵다.
다 익었다는 것 속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열매도 없는 화초의 지독한 향기.
급소를 중심으로 썩어가는 맹독성
혼기 지난 여인처럼
꽃은 향기 속에 부패의 경고를 담는다.
모든 향기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현승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2년 《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수상.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대답이고 부탁인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