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
년 경술국치 직후 경복궁 근정전엔 일장기가 걸렸다.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해줌으로써 한국 근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 분단과 6·25전쟁, 냉전의 근본원인으로 간주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정체를 알아본다.
1905년7월27일, 미국 육군성(국방부의 전신) 장관인 윌리엄 태프트는 일본
도쿄를 방문해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과 장시간 회담을 했다. 1924년에야 그 내용과 실체가 알려진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 회담의 산물이다. 도대체 밀약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밀약과 관련해 어떤 점이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가.
우
선, 1905년 7월의 동북아 국제정치 상황부터 살펴보자.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두
강대국이 벌인 일전이었다. 일본은 1905년 초,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러시아 점령하의 뤼순(旅順)을 함락시켰고, 3월에는
펑톈(奉天·지금의 선양)의 육전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그해 5월 동해상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러시아의 발틱함대까지 전멸시킴으로써
마침내 전쟁의 승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은 러시아는 물론, 일본 또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바닥난 상황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외교적 협상 구도를 미국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협조는 불가결했다. 우선 절실했던 것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관련 열강으로부터 확인받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일본에 대해 지지의사를 표명한 나라가 미국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배경에서 탄생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1)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떤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점,
2) 일본측의 일본-영국-미국 ‘비공식 동맹’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조약적 의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
3)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회담 내용의 일부는 1905년 10월 일본 신문 ‘고쿠민(國民)’ 지면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으나, 회담의 전체 내용은
1924년 미국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넷에 의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일 비밀조약(Theodore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전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밀약’이라는 표현은 데넷의 글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데넷의 논문에는 회담 직후 태프트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이 실려 있는데, 전문에 나타난 회담 내용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 번째 사안이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국 문제와 관련해 가쓰라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이는 일본에 실로 중대한 문제”임을 밝혔다. 또한 그는 “만약 전쟁 이후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한국에 맡긴다면 한국은 또다시 다른 국가들과 협정이나 조약을 맺어 전쟁 이전과 같은 복잡한 상황을 재발시킬 것이므로 일본은
이러한 상황의 재발 가능성을 막기 위해 모종의 확실한(definite)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내세운 논리, 즉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
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태프트는 ‘모종의 확실한 조치’가 보호조약 체결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논리적 정당성’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
면서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하게 요구하는 범위에서 일본 군대로써 한국에 대해
종주권(suzerainty)을 확립하는 것은 전쟁의 필연적 결과이며, 극동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 비밀협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쟁점을 던졌다. 첫째 이 협상 내용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quid pro quo)’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그것이 단순히
양국 고위관료간 의견교환 수준인지, 아니면 양국간 장래의 행동을 상호 약속하는 ‘협정(agreement)’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그 비밀협상이 한국-필리핀의 맞교환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약소국 문제를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전문의
내용상으로는 ‘A 대신 B’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더욱이 필리핀에 있어 미국의 입지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권
승인 요구는 외교적 흥정 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국의 인식은 그러했다.
일본은 한국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반군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던 점이 달랐다. 루스벨트 자신도 회담 3개월 후 태프트의 방일(訪日)이 외교적 흥정이었다는 소문이 일본 신문에 실리자 상당히
불쾌해하면서 미국은 “영토보전을 위해 누구의 지원이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가. 그것은 몇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루스벨트의 인종주의적 문명관과 친일론적 인식도
중요한 원인이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당시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시장이었다. 이미 1899년,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은 중국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해놓은 터였다. 즉 군사적 개입이라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문호개방 정책에 대해 일본은 외교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문호개방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 인식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일본의 대(對)러시아
전쟁을 “미국의 게임을 일본이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미국의 그러한 기대감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고
러시아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적대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미일 충돌의 원인(遠因)이 됐다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첫댓글 아오 수염쟁이들 수염 불태워버리고싶네 시발
아오근현대사에서 이거배울때 열뻗쳤는데ㅡㅡ
국력이 약한 게 안타까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