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혀가 참 길기도 하구나
◎ 말씀/본문: 시89편
◆ 기도
아무리 말을 길게 해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 주님은 아십니다. 아무 것도 필요없는 척 해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 주님은 아십니다.
◆ 본문살핌
시 89편은 50절이 넘는 다소 긴 기도문이다. 1~14절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 구원하심에 대해 노래한다. 15절부터는 바로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시며 다윗을 통해 영원한 통치를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읊는다. 30절부터는 만약 다윗의 후손들이라도 하나님과의 언약과 율례를 저버린다면 징계를 받을 것이나, 그들이 멸망에 이르기까지 하지는 않으시겠다던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38절에 이르러야 본론이 나온다. 바로 그 징계를 지금 받고 있는데, 이러다 다 죽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주 멸망시키지는 않으신다 하지 않았냐며 이제 용서하시고 도와주시길, 구원해 주시길 요청하며, 뜬금없이 할렐루야로 시를 맺는다.
◆ 묵상
혀를 길게 빼고 별 소릴 다한다 했더니 결국 도와달란 이야기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나왔던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랑한 게(불륜이지만) 죄는 아니잖아?!" 약간의 미안함과 그보다 많은 억울함, 불가항력이었다는 이유를 대며 용서와 이해를 '강제적으로' 요구하는 그 모습이 묵상하며 언뜻 떠오른 것이다.
어리석은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용서를 강요하고 있다.제가 잘못은 했지만서도 그래도 살려는 줘야 할거 아닙니까. 아, 살려는 주신다면서요? 그러셨잖아요! 그러실거죠? 감사해요~! 미리 감사부터 좀 할게요. 좀 어떻게 해 주세요. 89편의 구구절절한 기도가 딱 이렇게 들리니 큰일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나니 시편들이 곱게만은 안 보일 때가 많다. 개콘의 철지난 유행어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를 외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과 별 관계가 없는 것 같은 나는 그럼 어떤 사람일까? 원하는 게 없다지만 그게 정말일까? 사실 소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소욕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직접 맛 본 덕분에 그길로 다시 가길 단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된 까닭에 그것을 무쓸모로 여기게 된 것일 뿐 이다. 뭐 대단히 깨닫거나 경지에 올라서가 아니란 말이다. 다만 뜨거운 것을 쥐면 손이 데인다는 사실을 굳이 직접 경험해 보고나서야, 그걸 쥘 생각을 놓아버린 것일 뿐이다.
망해야 하는 일들은 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새로운 회복을 얻을 유일한 기회가 되기까지, 이스라엘의 반복된 고질병은 그치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거 뜨겁다고 수차 경고해도 굳이 부여 잡겠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그들의 욕심 가운데 내버려 두신다. 그것이 그들의 불의다(롬1장).
죄를 더하는 삶이나 안되게 노력하고 살 일이다 싶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생체활동 아니면 습관 뿐이다. 습관이 안됐다면 습관을 들이면 되고, 그게 생존에 관계 없다면 그게 꼭 생존에 필요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면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없이 살수 없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시험과 욕망 속에서 좌절하다가 쥐엄열매로 만족하는 삶을 한동안 살았다. 세상이 주는 보잘것 없는 쾌락과 도움들이 나를 연명시켰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진실로 산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니었기에, 다시 하나님 말씀 앞에 나왔다. 하지만 어느새 쥐엄열매가 습관이 되고 체질이 되어 버린 탓에, 거듭난 본성대로 체질을 되돌리려 이젠 본성을 되찾기 위한 습관의 시간들이 필요하다. 그런 날이 계속 된다. 이 결사의 묵상도 그래서 시작됐다. 아프지만 현실이다. 그래도 소망이고 긍정인 일이다. 그래서 이 시간이 참 소중하다. 내게 필요한 것... 예전으로 돌아감이 아니고 옛적부터 날 사랑하신 하나님께 더 깊이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필요하다. 나는.
◆ 기도
아버지, 오늘도 긍휼히 여기사 레고마을같은 이 하루의 일과에서, 안온히 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들을 헛되이 쓰지 않고, 무너진 영과 육을 조금씩 더 회복하는 데 사용하도록 계속 이끌고 살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