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가져온 겁니다. 많은 참고문헌을 볼때에, 틀릴거라고는 여기지 않음.
어디에도 10만기병이 있다는둥, 준비가 있었다는 말은 없음. 논문도 틀렸다고 우긴다면 할말 더 없음. 학설이던 가설이던 논문은 우선순위를 두는 법임.
필요하면 원대에 관련논문요청하면 더 나옴.
아래는 스크롤의 압박...흠.
-----------------------------------------------------------------------------
序論
1592년 壬辰年, 朝鮮과 日本사이에 7年에 걸친 大規模 戰爭이 벌어지기 전까지 朝鮮을 둘러싼 中·日의 外交關契는 상당히 對照的으로 전개되었다.
歷史的으로 韓國과 中國은 密接한 關契를 유지해왔다. 국경을 맞댄 양국 사이에는 때로 中國의 侵略과 그에 대한 우리의 저항에 의해 敵對關係가 지속되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全體的인 흐름에서 볼 때 平和的이고 友好的인 관계가 더 오래 유지되었다.1) 그것은 '冊封-朝貢體制'라 하여 中國을 大國으로 섬기고 그 代價로 우리의 存在와 獨立性을 인장받는 기제에 의해 유지되어왔다.
특히 朝鮮時代의 양국관계는 '冊封-朝貢體制'의 가장 典型的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2) 朝鮮과 明의 關契는 1368年 明 建國 이후 고려가 明과 맺었던 外交的 關契를 계승한 것이었다. 朝鮮 前記에는 基本的으로 '冊封-朝貢體制'에 基盤한 事大關係를 바탕으로 朝鮮이 明을 섬기는 상황이었다.
명과 조선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君臣·上下 관계가 성립되고 朝鮮은 諸侯國으로써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具體的으로는 明 皇帝에 의한 冊封의 수용, 明 연호의 사용, 정례적인 租貢 등 제후로서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朝鮮王朝가 明에 대해 事大政策을 취한 것은 어디까지나 새로 建國한 朝鮮을 國際的으로 승인받고, 그를 통해 政治的 安定을 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主體性이나 自主意識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3)
이것은 朝鮮 초, 鄭道傳등이 高句麗의 옛 영역을 회복하려는 차원에서 요동 정벌을 꾀하여 明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던 상황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4) 이 때문에 明은 朝鮮을 의심하게 되었고 太祖 李成桂에게 誥命과 印信을 주지 않는 등 牽制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관계는 갈등의 기미를 보였다 더욱이 世祖연간 明의 永樂帝가 요동을 거쳐 두만강 부근까지 세력을 뻗어와, 女眞 集團을 초무하려고 시도하면서 朝鮮과 明의 관계가 여진에 대한 관할권을 놓고서 긴장 국면으로 접어든 적도 있었다. 또 세종연간 조선이 여진의 閭延 침략을 계기로 婆猪江 일대의 建州女眞을 토벌할 것, 곧이어 압록강 방면에 四郡을 설치하여 鴨綠江과 豆滿江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기에 이르렀던 것 등은 女眞을 사이에 놓고 明과 신경전을 벌였던 상황에서 거두었던 일정한 成果라고 할 수 있었다.
15세기에는 이처럼 明에 대한 事大를 표방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明과 대결을 시도할 정도로 主體的 움직임이 드러나는데 거기에는 조선 나름대로의 思想的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世宗대의 卞季良이나 世祖대의 梁誠之처럼 朝鮮을 단군이 건국한 獨自的인 國家로 認識하여 郊祭와 같은 祭天禮를 행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들이 있었다.5) 또 朝鮮을 中國의 아류가 아닌 별개의 자기 완결적인 세계로서 인식하고, 朝鮮의 건국이 中國과 마찬가지로 天命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자부하는 의식도 나타났다.6)
16세기에는 華夷論을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에 대한 사대가 문화적 동질의식과 春秋大義에 바탕을 두고 이해와 시세를 초월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면서7) 明과의 外交關契는 15세기 이래의 기조를 유지하였다. 平和的이고 安定的인 양국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朝鮮은 明과 약속한 '1년 3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과의 교섭에 적극성을 보였고 그를 통해 명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데 열심이었다.
16세기 이후 양국관계에서 중요해진 측면은 經濟的 관계였다. 15세기 이래 조선은 '冊封-朝貢體制'아래 규정된 당초의 租貢 부담을 줄이는데 주력하여 世宗年間에는 金과 銀을 租貢 품목에서 제외받는 성과를 얻었다. 양국 사이의 통상은 부진한 상황이었으나 15세기 말부터 朝鮮내부의 농업경제력 향상과 함께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明으로부터 대량의 비단과 원사가 유입되었다. 朝鮮과 明 사이의 貿易關契의 進展은, 朝鮮의 銀鑛開發과 日本으로부터의 銀 流入을 加速화시켰으며 窮極에는 銀을 매개로 朝·中·日 三國 사이의 무역구조가 정착되는 단초가 되었다.8)
요컨대 朝鮮초기부터 16세기까지 양국관계는 대체로 友好的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요동정벌 문제, 여진족 문제 등 일부 현안을 놓고 상당한 파란을 겪었다. 朝鮮은 국가의 獨立을 유지하고 선진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사대관계를 받아들였지만 明의 압력에 의해 自主性이 침해되거나 國益이 심하게 손상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 명에 대한 저항도 불사하는 양면적 입장을 보여던 것이다.
明과 事大關契를 유지하면서도 自主性과 自存意識을 지키려 했던 분위기는 16세기 말엽을 지나면서, 특히 壬辰倭亂을 맞아 朝鮮이 위기에 처했을 때, 明이 朝鮮에 大軍을 파병하고 軍事援助를 베풀었던 것은 이후의 양국 관계를 亂 이전의 그것과는 현격히 다른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16세기 말부터 '明淸交替의 흐름이 가시화되면서 양국사이에는 後金이라는 새로운 變數가 등장하였다. 이제 倭亂당시 明이 베풀었던 再造之恩에 대한 보답문제, 가시화되는 '明淸交替'의 분위기 속에서의 관계설정의 방향 등을 놓고 양국관계는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先祖대 대명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壬辰倭亂 당시 明이 朝鮮에 참전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明軍이 參戰하기까지 朝鮮과 明 사이의 外交的 交涉을 다룬 歷史的 사실9)과 明軍의 참전 동기를 中國 本土를 保護하려는 戰略的 차원에서 이해되는 자료들이10) 우선 주목된다. 明軍이 명목상으로는 '朝鮮을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戰略的 차원에서 朝鮮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연구를 통해 明軍이 參戰하게 되는 과정과 동기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朝鮮에 參戰했던 明軍의 구성에 관해 살핀 연구로는, 당시 明軍을 따라왔던 동남아인이나 琉球人들의 활동을 다룬 것이 있다.11) 또 明과 日本 사이에 벌어졌던 강화협상과, 그와 관련된 朝鮮과 明의 관계를 다룬 연구가 있다. 이들은 壬辰倭亂 말기 對日交涉과정에서 朝鮮이 明에게 一方的으로 끌려다닌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主體的 입장에서 明의 권위를 이용하여 당시의 동북아질서 재편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려 했다는 등의 논지를 담고 있다. 明軍이 참전하여 日本軍과 벌였던 전투상황, 각 전투가 벌어질 당시의 정세와 추이를 서술한 연구 뿐 아니라 明軍의 참전과 주둔이 불러온 社會的 弊害에 주목하여 몇몇 사례를 중심으로 明軍이 끼친 民弊를 간략하게 정리한 연구 또한 있다.12)
壬辰倭亂 시기 明軍의 군량문제와 관련되어 이것이 전쟁 전체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했다는 것을 밝힌 것, 이와 관련하여 屯田 경영을 살핀 것13), 군량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어느 정도의 明軍 兵力을 남기느냐를 놓고 양국 사이에 벌어졌던 논의의 전말을 살핀 것 등114), 당시 朝鮮과 明과의 관계에 있어 많은 문제들이 歷史的으로 부곽되었다. 壬辰倭亂을 다룬 日本人들의 연구는 굉장히 많지만 그 가운데 明軍의 參戰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룬 것은 별로 많지 않다. 明軍 문제를 다룬 것의 경우 대개 明軍이 參戰하여 日本군과 벌였던 戰鬪의 양상, 강화협상을 둘러싼 교섭 문제를 壬辰倭亂 전체의 진행과정에서 살핀 것들이 대종을 이룬다.
특기할 것은, 壬辰倭亂 당시 明軍 參戰의 전체적인 성격과 전쟁이 明나라에 미친 영향을 개관한 연구와15), 明軍의 參戰과 駐屯, 강화론을 둘러싼 명 조정 내부의 찬반양론, 참전이 화북지방 등 명 내지에 미친 영향을 다룬 연구16) 등이 주목된다. 이 밖에 明과 日本 사이의 강화교섭을 실증적으로 다룬 연구17)는 당시 강화협상이 破綻에 이르게 된 까닭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런데 日本인들의 연구는 대체적으로 壬辰倭亂을 '中日戰爭'의 시각에서 파악하여 朝鮮의 입장은 의도적으로 소외시키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또 明軍의 참전이 明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壬辰倭亂 이전부터 7년간의 전쟁이 끝나기까지의 朝鮮을 둘러싼 양국의 外交的 입장과 이에 대한 朝鮮의 外交的 입지를 살피고 壬辰倭亂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우선 壬辰倭亂 이전의 外交的 방향과 壬辰倭亂 당시의 對明관계, 대일관계를 알아보고 壬辰倭亂 開戰 전야적 상황과 壬辰倭亂에 明軍이 參戰했던 것이 朝鮮에서 '再造之恩'이 형성되고 숭앙되는 데 바탕이 되었던 사실 등을 알아보고 壬辰倭亂 이후의 전후 사정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本論
Ⅰ.壬辰倭亂 전의 三國의 政治狀況
壬辰倭亂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대륙을 정복하기 위한 야욕에서 비롯된 朝鮮 侵略戰爭이었다. 무모하게 저지른 이 侵略戰爭은 日本의 실패로 끝났지만 어느 측의 勝敗 여부를 떠나 동아시아 3국에 모두 큰 피해를 남긴 戰爭이었다. 특히 戰爭準備가 전혀 없는 가운데 一方的인 侵略을 당한 朝鮮측의 전란 피해는 더욱 컸다.
역사상 韓國民族이 겪은 최대의 國難이자 충격적인 전란이었다. 물론 이것은 사저에 침략군을 막아낼 만한 최소한의 상비군조차 양성해두지 못했던 朝鮮정부에 모든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倭亂이 터지자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만 내버려둔 채 국왕으로부터 말단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들의 살길만을 찾고 있던 지배층의 無能과 湧怯으로 인해 戰爭은 더욱 길어만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거침없는 義兵抗爭을 펼침으로써 장기간의 戰亂을 이겨내고 침략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즉 나라는 평소에 백성들을 收奪하고 差別하고 소외시켜왔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스스로의 희생을 치르면서 끝까지 나라를 지켜냈던 것이다.이와 같은 壬辰倭亂에 대한 연구는 해방 전의 경우, 국내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연구가 전무한 실정이었다. 최남선이 壬辰倭亂 이해를 위한 교양서로 저술한 <壬辰亂>외에는 본격적인 논문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일본측 관학자들에 의한 논문과 저서는 계속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당시 대한제국을 그들의 植民地로 만든 다음 대륙침략을 꾀하고 있던 帝國主義 日本의 국내 정세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연구결과는 자연히 학문의 객관성이 배제된 가운데 국가의 정책을 뒷받침한 논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극 壬辰倭亂史 연구가 한반도의 植民地화를 정당화하고 帝國主義를 合理化하는 데 이용되었던 셈이다. 이렇게 볼 때 壬辰倭亂의 역사는 전혀 각 나라의 입장에서 상반된 모습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日本측에서 보면 自國의 領土확장을 획책한 侵略戰爭의 歷史요, 韓國측에서 보면 國難을 이겨내야 했던 전란극복의 역사였으며 中國측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을 돕기 위한 明軍의 파병이었지만 실로는 자국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역사였다고 하겠다.
1.壬辰倭亂 勃發 前의 朝鮮의 상황
1592년 壬辰年, 朝鮮과 日本 사이에 7년에 걸친 大規模 戰爭이 벌어지기 이전 朝鮮에는 200년이란 긴긴 平和의 세월이 있었다. 1392년, 太祖 李成桂가 나라를 세운 뒤 世宗大王(在位-1418~1450年代)에 이르기까지 建國 初期에는 王室內에 두 차례의 王子의 亂이 있었으며 북쪽 女眞族을 정벌,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넓히고 남쪽 쓰시마(對馬島)를 정벌, 왜구들을 소탕하느라고 이민족들과 세 차례 비교적 큰 규모의 征服戰이 있었다. 그 밖에는 나라 안팎에 이렇다 할 큰 전란 없이 평화의 세월만이 있었다.18) 물론 世宗 때의 쓰시마 정벌 이후 잠잠했던 왜구들이 조선과 일본 사이의 7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 다시 남서해안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마을을 습격하고 노략질을 일삼기도 했다. 북쪽 두만강변에도 여진족의 출몰이 잦았다. 이로 인해 조선의 조정에서는 국방체제를 종전의 鎭管體制에서 制勝方略으로 바꾸어 대응하기도 했고, 한때 小船主義로 水軍 戰艦의 크기를 줄였던 것을 다시 板屋船 등 大船主義로 바꾸어 수군 전력을 강화하여 이들을 물리치기도 했다.그러나 이들 소규모 국경선의 충돌이 조선의 평화 무드를 깨거나 조선의 조정을 긴장시키지는 못했다.
학문하는 사람들만이 관료로 진출, 권력을 잡고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조선의 朝野는 오직 儒學의 연구 열기로 가득 찼다. 朝鮮과 日本 사이에 大規模 戰爭이 일어나기 직전, 明宗(在位-1567~1608年代)과 宣祖(在位-1567~1608年代)에 이르러 儒學은 학문으로서의 완숙의 경지에 달했으며 花潭 徐敬德에 이어 退溪 李滉, 栗谷 李珥 등의 대가들이 줄을 이어 나타났다.19) 그러나 儒學 일변도의 국가 政治理念의 추구는 학문으로서의 儒學을 크게 발전시켰으나 中央集權制적 관료조직체계의 朝鮮 조정에 극한적인 이념 대립 등 그 폐해도 함께 內燃시켜왔다. 田園 깊숙히 묻혀 학문에 몰두하던 金宗直 등 젊은 유학자들이 成宗(在位-1469~1494年代)에 대거 관계에 진출, 이른바 사림파 관료층을 형성하고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려 하면서부터, 그 때까지 왕권 주변에 뿌리를 내리고 권력을 장악해 왔던 勳舊派 관료층과 마찰과 대립을 빚어냈다. 대립은 사화로 번져 목숨을 건 권력 쟁탈전으로 번졌고,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사생의 당쟁으로 확산되었다.
긴 세월의 평화 무드 속에서 국가 지도층이 학문에만 심취, 문약에 흐르고 조정의 관료들이 당쟁의 내우에 휩쓸려 있는 동안 조선 왕조는 外患을 생각하지 않았고 국방을 잊어갔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文治 우위의 통치조직을 정립하였다. 고려 왕조 말기 武臣 政權의 폐해를 경험했던 교훈도 있었겠으나 李成桂 자신이 高麗 武臣으로 군사 쿠테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쿠테타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안 탓이어서인지 건국 후 武臣들의 세력화를 철저하게 경계, 조직적으로 이를 관리했다.
주요 정책을 의결하는 議政府에 太祖 때에는 二品 이상 文·武官이 참여했으나 2대 定宗 때부터 문관만 참석케 했으며, 국방을 맡은 兵曹의 判書도 文官이 독점했다. 군사문제를 다루고 관리하는 備邊司의 최고 책임자인 都提調도 전·현직 議政, 즉 영의정, 좌·우의정 등 문관이 겸직하고 위원들인 제조들 또한 문관들인 吏·戶·禮·兵조 판서들과 江華留守 등 5인이 겸직했다. 전쟁이 터진 선조 25년에야 비로소 副題調를 두어 군사를 아는 武官을 배치했다.
京官, 즉 중앙관청 뿐 아니라 外官, 즉 지방관청의 군사 분야 직책도 주요 지휘계통은 대부분 문관들인 方伯·守令들로 하여금 겸직케 했다. 전국을 8道로 나누어 觀察使를 두고 그 밑에 4府, 4大都護府, 20牧, 43都護府, 82郡, 175縣으로 나누어 府에 府尹, 都護府에 府使, 牧에 牧使, 郡에 郡守, 縣에 縣令 및 縣監을 두어 다스렸는데 府尹 이하를 守令이라 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文臣들이었고 이들에게 行政 및 司法權은 물론 軍司權까지 부여했다.20)
전쟁이 터질 무렵의 조정 관료들의 국방관이 어떤 것이었는가는 율곡 이이가 국가 방위를 위해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해 두어야(十萬養兵論) 한다는 주장을 편 데 대해 <兵을 養成하는 것은 禍를 키우는 것>이라 하여 默殺시켜 버린 사실로 알 수가 있다. 군대 자체를 위험시하는 데까지 극단적인 文弱에 빠졌던 것이다.
그 무렵 朝鮮 王祖는 이미 腐敗하기 시작했다. 일선 指揮官들이 上番으로부터도 軍布를 받아 着服하고 멋대로 現役을 免除해 주었다. 이를 放軍收布라 한다. 弊害가 심해지자 朝政이 이를 개선했는데 결과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兵役 義務자로 하여금 現役 복무 대신 아예 布를 바치게 하고 조정이 이를 거두어 병력이 필요한 병영에 보내면 그곳에서 필요한 병력을 돈으로 사는 제도로 바꿨던 것이다. 이를 軍籍收布制라 한다. 얼핏 그럴싸한 제도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병사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웬만하면 布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받았지만 그럴 수 없는 농민들은 도주를 하거나 숨어 다녔다. 軍布 또한 제대로 쓰여지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이를 다른 비용으로 돌려 써 버리고 중간관료들은 이를 橫領, 着服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마을 사람들이나 젊은 장정들, 그들의 가족들은 도주하여 힘없는 노인이나 어린 소년들이 징집되기도 하였다.21)
그 무렵, 조선에 군사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어느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으며 당시의 조정조차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북방 여진족에 대비하여 수천 명, 병마절도사가 있는 적국 주요 진영에 각각 몇백 명씩, 모두 몇천 명 그리고 관아에 몇백 명 또는 몇십 명씩의 군사가 있어 몇만 명쯤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할 따름이었다.
전쟁이 발발할 무렵 선조대에는 북방 6鎭의 병력까지 모자라 선조 16년 2월, 자원해서 3년 이상 복무하면 庶孼, 즉 첩의 자식도 科擧를 볼 수 있게하고 公奴, 즉 관청의 奴婢는 良民으로, 私奴는 公奴로 身分을 올려주는 조치까지 취했다. 조선 왕조는 엄격한 신분제로 양반과 양민 그리고 천민의 구별을 확실히 했으며, 武를 천시하여 양반의 자녀는 병역을 면제해 주었고 노비 등의 천민도 병역 의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병역은 오로지 良人들인 농민들만의 몫이었다.
조선의 국방체제는 원래 中央軍과 地方軍으로 나뉘어 中央軍은 五衛라 하여 中衛를 중심으로 前衛, 後衛, 左衛, 右衛로 구성되어 5위 都摠府가 지휘했다 5위는 각각 지방군을 나누어 통괄했는데 中衛는 서울 중부와 경기·강원·충청·황해도, 前衛는 서울 남부와 저라도, 後衛는 서울 북부와 함경도, 左衛는 서울 동부와 경상도, 右衛는 서울 서부와 평안도의 지방군을 맡았다.22)
각 衛는 다시 5부로 나뉘고 각 府는 각각 4統으로 나뉘었으며, 각 통은 각각 旅·隊·伍·卒로 지휘계통이 세워졌다. 중심 병력은 甲士를 위시한 職業軍人으로 하고 일부 병력이 醫務兵으로 징집되어 충원되기도 했으며 정병은 시험에 의해 선발되었다. 그러나 평화의 세월이 계속되면서 中央軍은 有名無實해졌고 실제 전쟁이 터졌을 때에는 그 존재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에 비해 地方軍은 비록 문관 통제하에 병력은 부족했어도 그 존재는 있었고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유지해 왔다. 지방군은 원래 鎭管制로 편성되었으며 각 도의 감영이나 전략적인 요충 등 한두 곳에 主鎭을 설치하고 主鎭은 도내 주요 읍성에 설치된 巨鎭을 거느렸다. 巨鎭은 도의 크기에 따라 적게는 3개(黃海道), 많게는 20개(平安道)까지 설치되어 郡縣마다 설치된 諸鎭을 거느리게 되었다.
경기도에는 서울(漢成)에 主鎭을 설치하고 廣州·水原등 6개 읍성에 거진을, 그리고 利川·安城등 38개의 郡縣에 諸鎭을 두었다. 경상도에는 尙州·蔚山, 두 곳에 主鎭을, 安東·晉州 등 7개 읍성에 巨鎭을, 梁山 등 81개 郡縣에 諸鎭을 설치했다. 전라도에는 全州·康津에 主鎭을, 羅州·順天 등 7개 읍성에 巨鎭을, 金堤·光州 등 66개의 郡縣에도 諸鎭을 두었다. 23) 다른 도에도 같은 방식에 의해 主鎭-거진-諸鎭으로 組織化가 되어 있었다. 主鎭에는 兵馬節度使를 두어 관할지역 군사업무를 총괄 지휘케 했는데 관할지역의 크기에 따라 한 사람에서 세 사람까지 두었다.
경기·강원도는 1인, 충청·전라·황해·평안도는 2인, 北方 女眞族과 남방 왜구들의 침공이 잦은 함경·경상도에는 3인이었다. 24)그러나 문신 지배 원칙에 의해 각 도의 兵馬節度使 한 사람은 반드시 그 도의 문신 觀察使가 겸직했고, 나머지만 무신을 배치했는데 3인이 있는 곳은 左·右로 나누어 배치했다. 兵馬節度使 밑에는 助幇장을 두어 보좌케 했다. 巨鎭에는 節制使·僉節制使 등의 軍職이 있었으나 대개 주요 읍성에 있었기 때문에 문신인 府尹·府使·牧使 등이 겸직했고, 諸鎭 또한 同僉節制使·節制都尉 등의 軍職이 있었으나 이 역시 문신들인 郡守·縣令·縣監들이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별히 요새에는 萬戶라는 군직이 있었는데 만호에는 대부분 무장들로 배치되었다.수군 체계도 육군의 鎭管체계와 같이 하였다. 각 도에 水軍節度使를 두고 그 밑에 僉節制使·同僉節制使 등을 두었으며, 각 浦口에 수군 萬戶를 두었다.25)
北方을 개척하고 南方 쓰시마(對馬島)를 정벌하며 세종때까지 견고하게 다져왔던 조선의 국방은 그 뒤 긴긴 평화의 세월 속에서 이완될 때로 이완되었다. 특히 전쟁이 터지던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학문, 특히 유학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렀으나 국방은 임금이나 관료들 모두가 관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조선 왕조 가장 빼어난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이 방위산업을 일으켜 개발하고 양산해 냈던 신예 무기들, 다양하고 강력한 破壞力을 가진 각종 火砲, 多連裝과 疾藜彈 등이 그 존재조차 잊혀진 채 官庫에서 방치된 채 보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은 이미 국방을 망각한 채 일본에 관한 무관심으로 임진왜란을 겪게 된다.
2.日本에서의 政治的 狀況
日本은 쓰시마에서 아침에 배를 타면 저녁에 釜山浦에 도착하는 거리에 있는 가까운 인근의 나라였다. 더구나 일본은 왜구로써 高麗이래 수시로 몰려와 변방을 노략질 해가는 해적국가였고 일종의 잠재적 국가였다. 조선은 전쟁 발발 5년 전에도 일본의 상황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로 적의도 우호도 없이 그저 인근의 조그마한 왜구의 섬으로 인식했던 듯 싶다.26)
1587년 쓰시마의 島主 소오 요시시게가 다치바나 야스히로라는 사신을 보내어 알려올 때까지 일본이 백여년에 걸친 戰國시대를 보냈다는 사실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침내 60여 주를 무력으로 통합하여 국내통일 사업을 완수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백여년 동안 일본 천지를 피로 물들이고 하극상으로 얼룩진 일본의 전란을 몰랐을 뿐 아니라 이 해 3월 히데요시가 장차 朝鮮과 明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쉽게 굴복하지 않던 규슈(구주-九州)를 정벌하면서 대군을 축척해 온 사실은 더욱 모르고 있었다.
이 해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에 나서 20만 대군으로 수륙 양면에서 규슈를 공격했다. 사실 규슈 정도의 정벌에 20만 대군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당시 규슈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사는 엄청난 대군에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항복해버렸다.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에 대군을 동원한 것은 장차 조선 침공을 앞두고 대군의 동원 능력을 시험해 본 일종의 기동훈련인 듯 싶다.
조선의 조정은 그로부터 5년 뒤, 壬辰倭亂이 발발하던 날 아침에 쓰시마를 출발한 700여 척의 上陸船團이 그날 저녁 釜山 앞바다를 뒤덮을 때까지도 일본의 조선 침공 준비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전쟁에 임박하여 일본의 몇 차례 경고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3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전쟁이 터진 것을 알게 되었다.27) 그 무렵 일본은 이미 近代國家로서의 變革의 兆朕이 시작되고 있었다.
16세기 초, 西洋勢力의 물결이 日本에 닿게 되면서 1510년 印度 고아에 이어, 1516년 中國 서남단의 마카오에 식민 기지를 건설한 포르투갈인들이 1543년 일본 규슈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나타나 조총과 탄약 및 그 제조법을 전했다. 당시 일본의 왜구들은 한반도의 남서해안뿐 아니라 멀리 중국 연안을 따라 남서쪽으로 노략질의 무대를 넓히고 있었고, 포르투갈 등 서양세력들이 동방무역의 이익을 위해 아시아 영역권 속에 침투했고 일본인들은 서방세력들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 동안 뒤떨어진 그들의 문화의 발전에 조금씩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서양세력과의 무역을 통해 일본은 재정을 늘여가기 시작했고 이는 후에 帝國主義的 日本 建設의 資本 蓄積의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壬辰倭亂이 발발하기 17년 전 1575년, 히데요시에 의해 國內統一의 기반을 다져 준 오다 노부나가는 3500명의 조총부대를 편성, 방책 뒤에 배치해 두었다가 기세좋게 달려드는 다케다 가쓰요리군의 기병대를 일제 사격으로 일거에 전멸시켰다.28)
1549년 무렵에는 천주교가 전파되어 전쟁이 터질 당시에는 일본 전역에 200여 개의 교회와 15만여 명의 신도들이 있었다. 신도들 가운데는 오토모 소린 등 상당수의 영주들이 포함된 지배계급도 적지 않았고 조선 침공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도 천주교도였다. 당시 전파된 천주교로 인해 일본의 지배계급들은 이미 西歐的 眼目과 思考力을 갖기 시작했고 國內統一事業으로 성취된 강력한 統一政府 아래 軍事力이나 經濟力에 있어서 세계를 향해 나가는 日本의 變革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日本의 變革 속에서 近接 國家였던 朝鮮은 이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은 事大交隣으로써 事大는 明나라에 대한 것으로 큰 나라이고 문화가 발전한 나라인 만큼 섬기고 모시는 자세로하며 交隣은 북쪽의 女眞과 남쪽의 倭人에 대한 것으로 이웃간에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外交政策 用語가 交隣일 뿐, 실제로는 이들은 작은 나라이고 미개한 野蠻人들인 만큼 적당히 구슬러 변방을 침범, 노략질이나 난동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이들 나라에 대해서 스스로 小華, 즉 작은 중국을 자처했고 변방을 침범하지 않는 한 이들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이들의 국내 사정이나 動向따위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선 건국이래 200년간, 일본이 60여 차례나 사신을 보내어 조선을 부지런히 드나든 데 반해 조선은 6차례 사신을 보낸 것에 그쳤으며 그마저 1443년(世宗 25年) 이후부터는 무려 150여 년간 단 한 차례의 사신도 보낸 일이 없었다. 조선이 일본에 대해 무관심한 반면 일본은 조선에 관한 많은 조사와 정보로써 조선 조정의 동향과 국방의 현실을 상세히 알고 있었고 수시로 변방을 침범한 왜구들을 통해 조선군의 전투력까지 알고 있었다. 부산포 왜관에는 조선말을 할 수 있는 일본인 상인들이 수시로 드나들기도 하였다.
전쟁이 임박해지자 조선말을 아는 일본인들을 조선인으로 변장시킨 密偵 수십 명을 조선에 밀입국시켜 조선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으며 도로, 교통, 주요 邑城의 위치와 방비, 하천과 渡江 지점, 漕稅倉의 위치, 그리고 조선 전역의 쌀 소출량에 이르기까지 조사토록 하였다. 이들 모든 정보자료는 조선 지도를 그려 기입해 두었으며 조선말을 아는 일본인들만으로는 의사소통의 부족하자 섬 지방의 조선 백성들을 납치해 조선말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침공에 앞서 일본은 조선 조정에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으며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결심하자 일본 내 평화주의자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쓰시마의 영주와 은밀히 협의, 이 사실을 조선에 알려줌으로써 조선 조정으로 하여금 외교적으로 손을 써 전쟁을 사전에 막아보려 하였다. 사신을 보내 간접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침공작전을 알렸으나 조정은 이를 외면했다. 1588년 12월 고니시 유키나가는 소오 요시시게가 죽고 새로 쓰시마 도주가 된 소오 요시토시와 겐소들을 사신으로 보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유키나가는 히데요시가 조선의 항복을 원하고 있으나 조선이 이에 응할 이유가 없으므로 통신사의 파견을 조선의 항복으로 히데요시의 눈을 적당히 속여 전쟁을 막아볼 심산이었다.29)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583년 6월, 이들은 다시 조선에 들어와 다음해 3월까지 무려 9개월 동안이나 서울에 위치한 일본 사신 전용 숙소인 동평관에 머물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고 끝내 이는 수락되어 전쟁 발발 2년 전인 1590년 3월, 조선 통신사 일행 100여 명이 일본측 사신들과 함께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國書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堺浦口에 와서 답서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膽略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또 선위사 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動兵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請和通好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邊將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그 뒤 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倭館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金邈를 경상감사, 李洸을 전라감사, 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30)
한편으로는 申砬을 경기·황해도에, 李鎰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李舜臣만이 戰備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이 동안 일본의 侵略 計劃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兵法·武藝·築城術·海運術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3. 中國의 政治的 상황
한편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戰雲이 짙어가고 있을 무렵, 대륙에는 세력 교체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중원의 풍운아 朱元璋에 의해 조선이 개국에 한 발 앞선 1368년 明 帝國이 건국 200여 년만에 점차 세력이 약해지고 그 대신 滿洲의 女眞族이 勢力을 擴張하기 시작했다.
明나라와 朝鮮의 국내 정치상황은 매우 흡사했다. 조선에 도입되어 국가 지도이념으로 채택되었으나 黨爭의 불씨가 되었던 朱子學이 명나라에서도 크게 성행하고 문화가 난숙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정치는 실로 부패했고 조정에는 당쟁이 격화되어가고 있었다. 처음 당쟁은 鄕黨閥로 나뉘어 싸웠다. 山東省의 齊黨, 河北·河南省의 楚黨, 浙江省의 浙黨 등이 대표적이었다. 향당벌에 밀려난 유명한 주자학자 顧憲成이 고향인 江蘇省에 내려가 東林書院을 세워 세력을 키우면서 동림파와 비동림파로 나뉘어 당쟁에 영일이 없었다. 정치가 해이해지고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명 조정에 대한 반란이 도처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전쟁이 터지던 1592년 3월, 서북방의 寧夏鎭에서 몽골인 발拜가 반란을 일으켜 李如松을 보내 가까스로 진압했다. 朝鮮 出兵이그로 인해 늦어졌으며 뒤이어 조선과 일본간에 전쟁이 터져 戰火가 명의 국토에까지 번질 것이 우려되어 1593년 조선에 대군을 투입하게 된 것이다.
1597년 7월, 조선에 2차 전쟁이 터져 다시 출정함과 동시에 남장의 貴州省에서 原住民 楊應龍의 반란이 일어나 내외적으로 국력 소모가 계속되었다. 한편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나타나 여진족의 3대 부족인 黑龍江 하류의 野人女眞部, 松花江 연안의 海西女眞部, 그리고 牡丹江 상류의 建州女眞部를 統一하고 드디어는 중원을 노리기 시작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질 무렵, 神宗 치하의 명제국은 내정의 부패와 혼란이 극에 달한데다가 이같이 외환이 겹치고 있어 여러 가지로 말기 현상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Ⅱ. 壬辰倭亂의 勃發
1.戰爭의 勃發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고야(名古屋)에서 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으며, 대군을 9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각 대를 지휘한 主將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31)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로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로 병력 1만 15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상의 병력 15만 8700명은 육군의 정규 병력이었다. 그밖에 구키(九鬼嘉隆)·도토(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수군(水軍)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이 이끄는 1만 2000명이 전쟁을 전후하여 바다를 건너 후방 경비에 임하였다. 이밖에도 하야가와(早川長政) 등이 부산에 침입하여 부대의 선척을 관리하는 등 정규 전투 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일본이 침입할 당시에 총병력은 30여 만명으로서, 출정 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약 10만명을 머무르게 하고 3만명으로 경도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고니시32)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宋象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中路를 택하여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순변사 이일이 거느린 조선의 관군을 파하고 조령으로 향하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33)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제1번대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빠져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들어갔다. 같은 날 구로다가 인솔한 제3번대34)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의 茂溪에서 地禮·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모리·시마즈가 이끄는 제4번대35)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후쿠시마 등이 인솔한 제5번대36)는 제4번대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북으로 침입하였고, 고바야가와 등이 이끄는 제6번대37)와 모리 등이 이끄는 제7번대38)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
우키다의 제8번대39)는 5월초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서울을 향하여 급히 북상하였다. 그리고 제9번대는 4월 24일 이키도에 留陣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었다. 적이 대거 침입했다는 邊報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좌수사 朴泓으로부터 釜山眞成이 함락된 것 같다는 狀啓에 이어 그 장계 내용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다음의 인물들을 선발하여 적의 북침에 대비하게 하였다.
즉,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 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방수하게 했으며, 전 강계부사 邊應星을 起復하여 경주부윤에 임명하여 각자 관군을 뽑아서 임지로 떠나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백성들은 군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라 인솔하여 전장으로 떠날 군사가 없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장수가 군사 모이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3일 만에 홀로 떠나야 했으며, 별장 兪沃으로 하여금 뒤에 따라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檢督하게 하였다.
한편, 이일 등이 내려가기에 앞서 경상감사 김수는 왜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列邑에 공문을 발하여 각자 소속 군사를 인솔하고 안전한 지역에 모여 주둔하게 하고 京將이 이르기를 대기하였다.
문경 이하의 수령들 또한 각기 소속 군사를 영솔하고 대구 천변에 나가 순변사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당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적세가 점차 가까워오자 군사들이 놀라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비도 많이 내려 우장이 젖은 데다가 군량 보급마저 끊기자 밤중에 모두 흩어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다. 수령들은 할수없이 홀로 말을 달려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바삐 돌아갔으나 고을은 이미 텅 비어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倉穀을 털어서 이끌고 온 잔여 군사를 먹이고 함창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니 목사 金楹는 산속에 숨어버리고 판관 權吉만이 邑을 지키고 있었다. 중로의 방어 책임을 짊어지고 내려간 이일은 상주에 이르러 판관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으며 참수하려 하자, 그가 용서를 빌며 자신이 나가 군병을 불러모으겠다고 자청하였다. 밤새 촌락을 탐색하여 수 백명을 불러모았으나, 그들은 군사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이 일이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를 열고 관곡을 내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산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수 백 명에 이르자 이일은 급히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는 상주에서 모은 사람과 서울에서 내려온 장사 중 800∼900명을 인솔하고 상주 北川邊에 서 習陣을 시키면서 산을 의지, 둔진하여 전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제1번대 고니시군의 갑작스런 급습으로 대패하자 관군은 전의를 잃었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하여 문경 땅에 이르러서야 상주에서의 敗狀을 치계하고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신립은 고니시의 부대가 26일에 조령을 넘어 다음날 충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도에서 모은 8,000여의 군사를 이끌고 彈琴臺에서 背水陣을 치고 일전을 각오하던 중이었다. 잠시 후 왜군이 丹月驛을 따라 길을 나누어 공격해왔다.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으로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조총을 쏘아대니 형세가 풍우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총성이 진동하여 신립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말을 달려 두어 차례 적진에 돌진했으나 실패하고 전군이 함몰하자 달천강(達川江 : 속칭 달래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일만은 동쪽 계곡을 따라 탈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니시의 군사는 가토의 군과 충주에서 잠시 합류했으나 다시 진로를 달리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경기도 여주로 나와 강을 건너 양근을 경유, 동로로 빠지고, 가토의 군은 죽산·용인으로 빠져 한강 남안에 이르렀다. 또한, 구로다·모리의 군은 25일에 성주에 이르렀으며, 지례·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가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기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였다.40)
일본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 전해왔으나 충주 패보를 접하기 이전까지는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일부 조관들도 대의에 억눌려 강력한 주장을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4월 28일 선조는 李元翼과 崔興源이 각각 안주목사와 황해감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의지하고 따른다 하여, 이원익을 평안도의 도순찰사로 삼고, 최흥원을 황해도의 도순찰사로 임명하여 먼저 가서 백성들을 撫諭하도록 하였다.
선조가 이렇게 西行의 채비를 갖추자 臺諫·宗室들은 社稷을 버리지 말 것을 애원했고, 유생들 또한 소를 올려 반대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날 대신들은 국세가 날로 다급하니 儲君을 세워 인심을 繫屬하기를 청하였다. 선조도 이 청을 받아들여 둘째 아들 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했고 백관들은 權停例로써 陳賀하였다. 백관에 명하여 융복(戎服 : 전복)을 입도록 한 것도 이날이었다.
4월 29일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선조의 서행에 대한 시비를 따질 겨를도 없이 그날 밤으로 이를 결정하였다. 대신들도 “事勢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평양으로 移御하시어 명나라의 원병을 청하여 회복을 도모하소서.”라고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령 權筵 등이 請對하여 도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자 유성룡은 “협의 말은 진실로 충성이나, 다만 사세가 부득불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이어 왕자를 諸道에 파견하여 勤王兵을 불러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御駕를 따라갈 것을 청하니 왕도 그것에 응하였다. 이에 맏아들 臨海君에게 명하여 함경도로 가게 했으며 金貴榮·尹卓然 등을 따르게 하였다. 셋째 아들 順和君을 강원도로 가게 하고 黃廷彧과 그의 아들 赫을 비롯, 李攪가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강원도에 이르러 신병을 들어 따라가지 않았다. 순화군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이 강원도에 들어오자 북으로 향하여 임해군과 동행했으며, 김귀영·황정욱에게 명하여 협동해서 호행하도록 하였다. 국왕 일행이 서행에 오르기에 앞서 우의정 李陽元을 留都大將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고, 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수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비가 허술하여 대적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밤이 깊어 이일의 장계가 도착했는데 “왜적이 금명간에 반드시 도성에 다다를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장계가 들어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왕은 祠官에게 명하여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의 主版을 받들고 먼저 가게하고 왕은 융복으로 고쳐 입고 말을 타고 나섰다. 세자 광해군이 왕의 뒤를 따랐고, 왕세자 신성군후와 정원군부가 광해군의 뒤를 따라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나와 도성을 떠났다. 왕비는 轎를 타고 仁和門을 나서자 시녀 수십명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달이 없는 데다가 비까지 내려 더욱 어두워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왕이 서울을 떠나자 노비들은 그의 문적(文籍 : 노비문서)을 맡고 있던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다. 이때에 경복·창덕·창경의 세 궁궐도 모두 불타 없어졌다. 왕의 일행이 개성까지 도착하는데 3일이 걸렸는데, 出城 당시 100여 명이던 호종 인원이 그 사이에 상당히 줄어있었다. 그리하여 개성까지 따라온 인원만으로 관원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어 관직의 변동도 많았다. 적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고니시의 군이 5월 2일, 가토의 군이 3일이었다. 이때 한강을 수비하던 김명원은 적이 쏜 탄환이 지휘본부 제천정(濟川亭 : 현 普光洞 소재)에 떨어지자 한강 수비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강으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유도대장 이양원도 도성 수비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개성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 일행은 도성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를 다시 평양으로 옮겼다. 이어 김명원의 임진강 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고 적군이 계속 북침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평양 수비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옮겼다. 5월 초에 왜군은 서울을 함락하여 본거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바로 북침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양주 해령(蟹嶺 : 속칭 게너미고개)에서 부원수 申恪군의 기습을 받고 패했으나 북침을 중단할만한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 뒤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지휘하는 관군이 적의 침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도리어 적의 전술에 말려들어 실패하였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下三道의 대군마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 도중 용인·수원 사이에서 소수의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대패하자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적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적군은 3군으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침입하여 6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본거로 삼았다.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함경도감사 柳永立을 체포하고 병사 李渾은 반민에게 피살되었다. 또한 함경도로 들어간 임해군과 순화군도 반민에 의해 포박되어 적진에 인도되는 등 도 전체가 적중에 들어갔다. 황해도로 들어간 구로다의 군은 해주를 본거로 삼고 대부분의 고을을 침범하여 분탕질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義兵과 義僧軍이 봉기하여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월에 진주목사 金始敏은 군관민과 합세하여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41)
2.義兵의 活動
義兵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한마디로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하여 짓밟히고 많은 生靈이 죄없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병은 신분적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文班出身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適合地로는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곳을 택하였다. 나아가 이를 확대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불러 모았고, 자연히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적 저항 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또한 오랜 유학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勤王精神이 깊이 뿌리를 박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보인다.
1593년 정월에 명나라의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임진년(1592년)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숫자이다. 그것은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관군이 차차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金千鎰)·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문부(鄭文孚)·이정암(李廷目)·우성전(禹性傳)·권응수(權應銖)·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유팽로(柳彭老)·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홍계남(洪季男)·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곽준(郭說)·정세아(鄭世雅)·이봉(李逢)·임계영(任啓英)·고종후(高從厚)·박춘무(朴春茂)·김해(金垓)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의병장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지역별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곽재우는 玄風 유생으로서 사재를 털어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어 紅衣將軍으로 통칭되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의령·삼가·합천·창녕·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 우도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다. 또한 전라도로 향하는 적을 정암진(鼎巖津 : 속칭 솥바위나루)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치고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김면은 조종도·곽준 등과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관군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시켰고,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경상좌도에서 起兵한 권응수는 정세아 등과 함께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또 학연·예천·문경 등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여 적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김해는 9월 예안에서 일어나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등 적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호남에서는 고경명과 김천일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먼저 고경명은 유팽로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會盟하고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각 도는 물론 제주도에까지 격문을 보내고 근왕병을 이끌고 行在所로 향할 무렵에 적이 금산에 들어오자, 임진년 7월 9일 금산에 주둔한 적군과 정면대결하였다. 그러나 대패하여 아들 因厚와 유팽로·安瑛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뒤 맏아들 종후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해 12월에 의병을 일으켜 다음해 6월 2차 진주성싸움에 참가했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나주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을 이끌고 선조가 피난한 평안도로 향하다가 강화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 점령하에 있는 도성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얻었으며, 한강변의 여러 적진지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10여명의 유생과 함께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와 거의 같은 때에 옥천에서 봉기하였다. 이들 의병은 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격퇴시켰다. 또 온양·정산·홍주·회덕 등 도내 여러 읍에서 의병 1,600명을 얻은 다음, 의승장 靈圭가 이끄는 의승군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관군이 오지 않아 의병들 상당수가 흩어지고 七百義士만이 남아 생사를 함께 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승장 영규도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금산성에 육박하였다. 적군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조헌이 채 진영을 정돈하기도 전에 전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끝내는 조헌 부자와 영규 그리고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헌은 고경명에 이어 싸움에서 패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수차에 걸친 의병과의 싸움으로 적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호남 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과 우성전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홍계남은 아버지 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서 양성·안성을 활동 무대로 용맹을 떨쳤다. 적정을 보아 동서로 달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군이 감히 이 지역에 접근하지 못했으며, 경기도에 인접한 충청도의 여러 읍도 안전할 수 있었다. 우성전은 강화·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화를 수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전 이조참의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켜 연안성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벌였다. 당시 황해도에는 구로다의 군이 열읍을 정벌하고 온갖 약탈을 자행했으며 반민들도 많았다. 그런데 오직 연안성만은 침해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구로다는 이정암이 의병을 영솔하고 이 성을 지킨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침입해왔다. 성중에 있는 의병들은 성을 빠져나가 기회를 보아서 도모하자 했으나 이정암은 이를 듣지 않고 굳은 결의로써 수성을 결심하였다. 이에 1592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 아침에 이르기까지 4주야를 싸워 끝내 구로다의 5,000병력을 물리쳤다. 이로 인하여 연해 열읍도 회복되었고, 兩湖의 해상 교통도 강화도와 연안을 통하여 의주의 행재소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현직 관원으로서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같은해 9월에 경성을 수복하고 길주·쌍포 등에서도 가토의 군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수복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가토가 북쪽 깊숙이 들어와 주둔할 수 없도록 수시로 위협을 가하였다. 의병 중에서도 의승군은 특수 집단으로 활약이 컸다. 妙香山의 노승 휴정(休靜: 西山大師)은 수천의 門徒로 승군을 일으키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냈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영규 이외에도 호남의 處英, 관동의 유정(惟政 : 松雲大師), 해서의 義嚴 등 휴정의 문도들이 승군을 일으켜 호응하였다. 이밖에 전국 사찰에서 일어난 의승군의 수도 많았고 그들의 전과 또한 컸다.
3.水軍의 活躍
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판옥선(板屋船 : 戰艦) 수는 모두 250여 척으로 추측된다. 이때 경상·전라 양도의 수군 진용은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 元均,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李億祺였다. 그러나 난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자 전선과 戰具를 모두 침몰시켜 수군도 흩어지고 단지 4척의 전선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실정이라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전선이 주축이 되었고 그 지휘는 이순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에는 원균도 가세했으나 이순신 단독에 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벌어진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玉浦·合浦·赤珍浦 해전에서 적선 37척을 焚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우리 피해는 경상 1명에 불과했을 뿐이다. 제2차 출동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에 있었다. 泗川·唐浦·唐項浦·栗浦 등 네차례의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88명을 참획하였다.42) 이때도 아군의 피해는 전사 11명, 전상 26명으로 적에 비하여 경미하였다. 이 2차 출동에서는 도중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도 가세하여 원균의 3척을 합하여 연합 함대의 규모는 51척이나 되었다. 특히 사천 해전부터 거북선〔龜船〕이 사용되어 그 효능이 증명되었고, 적 수군의 주력이 괴멸되어 制海權을 장악한 것은 그 뒤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3차 출동은 제2차 출동 후 약 1개월이 지난 7월 6일부터 13일 사이에 있었다. 6일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90여 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露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見乃梁에 정박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여 鶴翼陣을 펴고 각종 銃筒을 쏘아 먼저 2, 3척을 부수니 적이 도망하려 하였다. 이 때 우리 함대가 일시에 달려들어 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파괴하고 나포하는 등 대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을 지휘했던 와키사카는 쾌속선으로 겨우 탈주하고 적선 10여 척이 간신히 도망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이순신의 閑山大捷이다. 이순신 함대는 이날 견내량에 임시로 정박하고 9일 다시 적선을 찾아 떠났다. 10일에서 다음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安骨浦에 정박중인 적선을 포격과 엄습으로 모두 파괴하고 육지로 도망한 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뒤 12일에 한산도에 이르러 원균에게 한산도 해전에서 육상으로 도망친 적을 소탕하게 하고 13일 여수로 돌아왔다. 안골포 해전에서 대패한 적군은 구키가 지휘한 수군이었다. 이 3차 출동에서는 적선 약 100여 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고 적 250급(級)을 참획하여 개전 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다.
제4차 출동은 다음 8월 24일부터 9월 2일에 걸쳐서 있었다.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적선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향하여 절영도(絶影島 : 지금의 부산 영도)에 이르러 적선 수 척을 파괴하였다. 이어 이순신은 왜선 470여 척이 나란히 정박하고 있는 부산포 내항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전함대를 돌진시켜 적선을 분파하였다. 그러나 적장은 군사를 하선시키고 육지에서 총포를 난사, 종일 교전한 끝에 적선 100여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 함대는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고 2일 여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본거지를 기습당한 적은 그 뒤 해전을 기피하고 陸兵으로 변화하는 이변을 가져왔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鄭運의 전사를 비롯,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와 같이 수군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지휘 능력의 탁월함과 밝은 전략 전술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 전선이 일본 전선에 비하여 견고하며 화력이 우세한 데 있었다.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은 의병의 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戰局을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활력소가 되었다.
4.朝·明軍의 反擊과 休戰의 成立
앞서 선조는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병부상서 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遼陽副摠兵 祖承訓은 5,000의 병사를 이끌고 고니시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들 원병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아니고 국경 수비병이었다.
그들은 1592년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하여 풍우가 심한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右參將 戴朝弁과 유격遊擊 史儒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조승훈이 잔여병을 거두어 퇴각하니 1차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고니시는 임진강에서 대진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차례의 講和를 청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1차 명나라 군사의 來援을 계기로 명나라와의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도 조승훈의 군이 패하자 화의에 응할 기세를 보이던 중 석성의 건의로 沈惟敬이 화의 교섭을 맡게 되었다. 심유경은 8월 29일 평양에 와서 고니시를 만나 쌍방의 강화 조건을 논의하여, 50일 이내로 본국에 돌아가 구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평양 이상은 침입하지 말 것과 조선군도 남쪽에 들어와 작전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심유경은 약속대로 11월 14일에 돌아와서 고니시를 만나고 임의로 화의를 성립시키려 하였다.
1차 원병에 실패한 명나라는 화전양론의 의논끝에 파병으로 기울어져, 간쑤성(甘肅省) 寧下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한 李如松을 다시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병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해 12월에 이여송은 4만 3000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총병 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 이여백(李如栢 : 이여송의 아우)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 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군의 제2차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조선에서는 임진년 10월 재정비된 관군과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11월에는 의승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진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심유경이 화의차 적진에 있으니 그가 귀환하는 것을 기다려 관군과 합세하여 진병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으로 때를 잃고 말았다.
그 뒤 이여송의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다음해인 1593년 1월에 평양 근방에 이르렀다. 이에 순변사 이일과 별장 김응서가 관군을 이끌고 합세했고, 휴정 휘하의 의승군 수 천여 명도 이에 합세하여 28일 평양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명 연합군이 七星·普通·含毬의 세 문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니 고니시 등은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內城에 불을 지르고 그 길로 성을 빠져나와 대동강의 얼음을 밟고 패주하였다. 이때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도 모란봉 격전에서 많은 적을 참획하여 평양 수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고니시는 주야로 속행하여 10일 배천에 당도하였다. 황해도 해주를 근거로 했던 구로다는 고니시를 먼저 후퇴하게 하고 자신도 군사를 거두어 개성으로 철수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은 황해도방어사 李時彦과 金敬老를 시켜 관군을 이끌고 고니시군의 퇴로를 끊어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도 그 길로 바로 남진하여 개성에 육박해왔다. 그러자 여기를 지키고 있던 고바야가와는 함께 머무르던 구로다와 같이 서울로 퇴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대결하지도 않고 계속 퇴각하자 이여송은 적을 경시하고 바로 그 뒤를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일본 진영에서는 고바야가와 등으로 하여금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 : 속칭 숫돌고개)에다 정예병을 매복하게 하고 명나라 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하였다. 이곳에서 대패한 이여송은 기세가 꺾여 더이상 진격을 못하고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조선측에서 재차 공격을 주장했으나 이여송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함경도에 있는 가토의 군이 양덕·맹산을 넘어 평양을 기습한다는 流言이 있자, 이여송은 부총병 王必迪을 개성에 머무르게 하고, 조선 諸將에게도 임진강 이북에 포진하도록 명한 다음 다시 평양으로 퇴진하였다. 한편, 함경도 방면에 침입한 가토는 명군의 내원으로 평양성이 수복되고 고니시 등이 서울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래서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즉시 철군을 서둘러 서울로 퇴진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평양성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으나 여석령 전투(일명 벽제관싸움)에서 승리하여 회복세에 있었다. 이때 마침 전라감사 권율(權慄)이 명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던 중 幸州山城에 이르러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2월 12일 도성에 머무르던 일본 대군이 일시에 공격을 해왔지만 권율과 의승장 처영 등은 휘하군을 지휘하여 격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三大捷의 하나이다.
그 동안 명군은 다시 심유경을 서울의 일본 진영에 보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다. 일본군도 각지의 의병 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따라 4월 18일 도성에서 철수하여 강원·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켰다. 그리고 西生浦에서 熊川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의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은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어 성안에 있던 수만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한편, 심유경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 3년간 사신이 왕래했으나 화의는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하여 ①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② 감합인(勘合印 : 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④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했고, 붙들려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이에 1596년 명나라의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전하였다. 토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 침입을 꾀하였다.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오랫동안 결말을 보지 못하던 화의마저 끝내 결렬되었다.
5.丁酉再亂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할 계획을 서둘렀다. 이때 조선에서는 한산도를 통제영(統制營)으로 삼아 남해안을 지켜오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그를 대신하여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의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3월 중순부터는 일본의 대군이 속속 바다를 건너왔다. 대부분 구로다·모리(毛利秀元)·시마즈·나베시마(鍋島直茂)·하시수가(蜂須賀家政)·우키다·고바야가와·아사노(淺野長慶)등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제장들로서 총병력 14만 1500명이었다. 이밖에 수군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도토·와키사카·가토(加藤嘉明) 등이 지휘하였다. 일본군은 먼저 동래·기장·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병부상서 형개(邢坎)를 총독, 첨지도어사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재차 원병을 보냈다.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 양호는 평양에 머무르고, 마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6월에 제장을 나누어 부총병 양원은 남원,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성주, 유격 진우충(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충주를 각각 기지로 삼게했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이덕형·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두어 8도에 모병하였다. 또 명군의 계획에 따라 장관(將官)을 분파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를 경주에 주둔시켜 조령로(鳥嶺路)를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게 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으며, 그밖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모두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해 4월 일본 수군은 조선 근해로 들어왔다. 조선 수군이 이를 중도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제로 물러났고, 일본 수군은 겨우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그 뒤 통제사 원균은 미숙한 전술과 무지한 싸움으로 일본 수륙군의 전략에 말려 패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등도 전사하니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거제 해전의 소식을 듣고, 울산 죽도성에서 部將 회의를 열어 육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석권할 것과 수군은 전라 해안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7월 28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우키다를 대장으로 한 1隊 5만 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모리를 대장으로 한 1대 역시 5만의 군사로 초계·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모국기의 본거인 성주로 우회하여 역시 안의·전주 방면으로 향하였다. 당시 조명 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곳은 남원이었다. 남원으로 향한 일본군은 8월 14일부터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격전 끝에 마침내 16일에 남원이 함락되어, 병사 이복남 등 많은 전사자를 내고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은 50騎로서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그리고 2,000 병력으로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의 유격 진우충도 따라서 성을 버리고 패주하여 일본군은 전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한편, 전주로 향하던 모리의 군은 8월 안음 黃石山城을 지키던 안음현감 郭說 등의 치열한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산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모리 휘하의 가토군은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고니시군과 합류하였다. 이에 서울에서는 도성민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조신 가운데는 왕의 피란을 주장하는 건의까지 나오게되었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퇴각한 명군이 한강에서 서울을 지켰으며, 경리 양호는 평양에서 급히 서울로 와서 일본군의 북침 저지를 지휘하게 되었다. 전주에서 합류한 일본군 가운데 모리·가토군은 전주·공주를 거쳐 전의·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군은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양호는 부총병 解生·牛白英등을 남쪽으로 나가게 했는데, 마침 9월 5일 여명에 직산 북방 素沙坪에서 구로다군과 충돌하여 크게 싸워 일본군의 북상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또 원균이 패사한 뒤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소사평의 대첩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9
월 16일 鳴梁에서 대첩을 하여 일본군의 西進도 봉쇄하였다. 진로를 봉쇄당한 일본군은 겨울이 닥쳐온다는 이유로 10월부터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수만의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나누어 주둔하였다.
울산에는 가토와 나베시마군이, 양산에는 우키다와 모리군이, 사천에는 시마즈군이, 남해에는 다치바나(立花宗茂) 등의 군이, 순천에는 고니시군이 각각 주둔하였다. 이 때 명군은 남원 함락 이후 적극 전세를 펴서 수륙 원병이 다수 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 또한 지난해 명량대첩 이후 본영 우수영이 황폐하여 각지로 왕복하던 중 1598년 2월 고금도로 진을 옮겨 전투를 하면서, 장기 작전으로 병영을 세우고 난민을 이주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수개월만에 민가가 수만 호에 이르게 되어 한산도 당시를 능가하였다.
이 해 7월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의 수군 5,000이 고금도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명군은 한때 그 위세를 믿고 방자하여 事端을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이 강온으로 잘 대처하여 명군의 군기를 감독하는 권한을 얻고, 조명 수군의 총지휘권도 실질상으로 양보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양호가 파직되고 그의 자리에 天津巡撫 萬世德이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군은 일대공세를 취하기로 하고 4路로 나누어 일제히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마귀는 2만 4000의 군사를 이끌고 東路를 따라 가토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평안·강원·경상좌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董一元은 1만 3500의 군사로 中路를 따라 시마즈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경기·황해·경상우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劉珽은 1만 3600의 군사로 西路를 택하여 고니시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충청·전라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진린은 수군 1만 3300으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해상을 담당하게 했으나 별다른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8월 18일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였다. 일본군은 喪을 감추고 회군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철수를 시작하여 형세는 일변하였다.
명나라 제독 유정은 9월 중순 순천의 고니시군이 철수하여 귀환한다는 보고를 받고 9월 20일부터 육상에서 이를 공략하고, 이순신과 진린은 수상에서 봉쇄하여, 퇴로를 얻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일본군과 수일간 격전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 뒤 곤경에 처한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유정은 10월 16일에 군사를 철수시켜 최후의 기회인 수륙 협공 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다. 진린 또한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 주려했으나 이순신의 설복으로 뜻을 거두었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병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11월 18일 夜潮를 타고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 왔다. 三更에 이순신은 분향을 하며 하늘에 맹세하고, 명군과 함께 호응하여 四更에 노량에서 적의 선대를 맞아 적함대의 절반을 분파하였다. 적은 견디지 못하여 남해 觀音浦로 빠졌으나, 퇴로가 막혀 다시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독전하였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그의 유명을 받은 조카 莞이 대신 지휘하여 적함 200여 척을 분파하고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에 시마즈 등은 50여 척을 건져 탈주했고 고니시는 격전중에 猫島로 몰래 빠져나갔으며, 유
정은 순천으로, 진린은 남해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죽고 일본의 국내 사정이 불안하여 적군이 급히 철수하는 줄은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朝日戰爭은 끝났다. 이때 좌의정 이덕형과 黃愼 등은 소를 올려 명군과 함께 대마도를 칠 것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9년에 명군도 철수하였다. 1월에 유정·진린·마귀·동일원 등이 진영을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오고, 4월에는 총독 형개가 이들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경리 만세덕, 도독동지(都督同知) 李承勳, 산동안찰부사(山東按察副使) 杜潛 등이 군사 2만 4000으로 서울에 잠시 주둔하다가 다음해 9월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6. 亂中의 社會的 狀況
倭亂 중에 조선 군민의 가장 큰 괴로움은 食糧難이었다. 명나라 원군이 조선땅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식량난이나 군량미 부족 보다도 왜군과 맞서 싸울 전투 병력이 더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이 들어온 뒤에는 훈련된 병력의 부족 보다도 군량미의 부족이 더 무겁고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내원할 때는 병력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무기 등 군수 물자와 군량미도 함께 보내왔다. 그런데 군량미는 명군에 의해 그들의 진영까지 운반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명군의 급식을 위한 조선측의 군량미 조달은 적기에 공급되기가 어려웠다. 군량미의 수송은 육로와 해로 두 길을 택하였다. 명군이 내원한 이래 1594년(선조 27) 8월 일단 본국으로 철수하기까지의 기간은 주로 육로로 수송하였다. 이를 위해 싸움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이나 부녀자 및 각처의 의병이나 의승군을 동원하였다. 또 수복 지역의 소나 말은 물론, 왕의 호위병과 동궁의 행차를 따르는 군인 중 말을 소유한 자도 차출하여 군량미 운송에 나서게 하였다.
해로는 정유재란으로 명군이 두번째 내원하면서부터 많이 이용하였다. 정부는 이를 위하여 각처에 산재한 선척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宮家나 內需司의 배를 빙자하여 거절하는 예가 많아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민력이 다하여 전선을 만들 수 없는 형편에서 운량선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의주에 쌓아둔 명나라 군량미를 육로나 해로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운송 도중에 많은 양이 소모되었고, 인력이 부족하고 수송 수단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보낸 양곡으로 명군을 급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족량을 국내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 정부는 국내 양곡을 조선 관군 보다는 명군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하였다. 그러나 국내 양곡을 조달하는 데는 애로가 컸으며, 민간인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군량을 충당할 수 있는 길은 전세와 곡물작미·노비신공작미·募粟·貿粟·둔전소출 등이었다. 이 중에서 정부의 필요 경비를 제한 나머지는 모두 군량으로 충당되었다.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전세는 경작할 종자가 없는데다가 전쟁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경지 면적의 감축으로 격감되었다. 납속 사목(納粟事目)에 의한 募穀은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기는 했으나 모속 관료의 비행으로 官으로 납부되는 양은 많지 않았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살식(人相殺食 :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음)의 끔찍한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왜란 전에 170만 결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54만 결로 감소된 것도 노동력의 감소에 큰 원인이 있었다.이런 와중에서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1594년 宋儒眞의 亂과 1596년에 일어난 李夢鶴의 亂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 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불만을 느껴온 지배층에 대한 우발적이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왜적의 세력권 안에서 발생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이몽학의 난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양상이 판이하였다. 주모자들은 정면으로 현 왕권을 타도하고 새 국가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해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충청도 지역이 중심이었다. 이런 점에서 임란 초기 감사나 수령들의 수탈이나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이나,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帥臣들을 증오한 농민들의 이반과는 성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들 두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히 컸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지배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군공이나 납속을 통하여 주어지기는 했으나 난국 타개가 목적이었으므로 그 문이 넓지는 않았다. 壬辰亂 초기에 의병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지배층이어서 그 밑의 의병들은 전공이 표면에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의병이 해체되자 한가닥 신분 상승의 기회마저 끊어졌다. 납속의 길도 쉽지는 않았다. 정부에서 발표한 납속 사목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아사 상태에 처한 양민들로서는 납속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반란의 주도자가 의병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면 납속의 임무를 띠고 활약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전쟁에는 많은 인명의 손실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는 전란을 통해 많은 것을 터득하고 배우게 된다.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을 통하여 많은 것
을 깨달은 피지배층의 가담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 끌려들었다가 죽음을 당한 李山謙과 김덕령金德齡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당시 사회적인 추세로 보아 중앙 정부가 반적의 입을 빙자해서 고의적으로 만든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이산겸과 김덕령은 끝까지 의병 활동을 하여 중망이 높고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을 처형한 것은 그들이 의병 세력의 기반을 믿고 혹 동요되는 민심을 이용하여 반란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結論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田野가 荒廢化되었다. 社會的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庶椧許通, 鄕吏의 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史書를 보관한 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兵制의 재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戚繼光의 ≪기효신서 紀茸新書≫를 얻어서 절강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였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서는 종래의 주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총통(銃筒)·완구(碗口)·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가 발명되었다. 또 항왜(降倭)로부터 조총 제조와 염초 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했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 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關羽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난 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關羽廟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졌고,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 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다. 또한 일본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陶工들의 도자기 제조로 일본 도자기업에 큰 발전을 보았으며,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고,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典籍을 가져가서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의 여진족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參考文獻
▶單行本
·한명기 「壬辰倭亂과 韓中關契」역사비평사
·강만길「朝鮮후기 硏究의 現況과 課題」창작과 비평사
·양재숙「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고려원
·이장희 「壬辰倭亂史 硏究」 아세아 문화사
·김문길 「壬辰倭亂은 문화전쟁이다」도서출판 혜안
·최영희 「임진왜란-교양국사총서 7」『세종대왕기념사업회』1999년 11월
·서필량 「임진왜란」 『서문당 』,1994년, 09월
▶論文
·권중헌 「壬辰倭亂을 중심으로한 三國의 外交關係」
·이헌종 「명사접대고」『향토서울』12, 1961
·이존희 「조선 전기 대명서책무역」『진단학보』44,1976
·박원호 「명'정난의 역' 시기의 조선에 대한 정책」『부산사학』4,1980
·김한식 「명대 중국인의 대한반도 인식」『동양문화연구』8, 경북대,1981
·한상권「16세기 대중국 사무역의 전개」『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1983
·김구진 「조선전기 한중 관계사와 시론」『홍익사학』,4, 1990
·민덕기 「조선후기 조·일강화와 조·명관계」『국사관논총』12집, 1990
1)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사비평사, 1999 p.13
2)전해종, 「한중 조공관계 개관」,『한중관계사연구』, 일조각, 1970
3)한영우, 「조선전시의 국가관·민족관」,『조선전기사회사상연구』, 1983 참조
4)신석호, 「조선왕조 개국 당시의 대명관계」,『국사상의 제 문제』제1집, 1952 참조
5)한영우, 「조선전시의 국가관·민족관」,『조선전기사회ㅣ사상연구』, 1983 참조
6)山內弘一,「李朝初期」における對明自尊の意識」,『朝鮮學報』92집, 1979
7)한영우, 「조선전시의 국가관·민족관」,『조선전기사회ㅣ사상연구』,제 2장 1983 참조
8)이태진,「16세기 한국사의 이해방향」·「16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 문화」
『한국 사회사 연구』1986 참조
9)최영희 「임진왜란 중의 대명사대에 대하여」,『사학연구』18, 1964
손종성 「임진왜란시 대명외교-청병외교를 중심으로」,『국사관논총』14. 1990
10) 최소자「임진란시 명의 파병에 대한 논고」『동양사학연구』, 11, 1977 --
「임진왜화와 명조」『아시아문화』, 8호 한림대 아시아 문화 연구소,1992
11)이현종 「임진왜란시 유구·동남아인의 내원」『일본학보』2집, 1974
12)민덕기 「조선후기 조·일강화와 조·명관계」『국사관논총』12집,1990
13)이장희 「임란중 양향고」『사총』15·16합집, 1971
이장희 「임진왜란 중 둔전경영에 대하여」『동양학』26, 1996
14)유승주, 「왜란 후 명군의 유병안과 철병안」,『전관우선생환력기념 논총』1985
15) 石原道傳, 「萬曆東征論」『朝鮮學報』21·22합집, 1961
16)岡野昌子 「秀吉の朝鮮侵略と中國」
17)佐島顯子 「壬辰倭亂講和의 破綻
18)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19
19)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20
20)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22
21)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23
22)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24
23)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24~26
24)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27
25)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28
26)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29
27)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32
28)양재숙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Ⅰ」고려원 1994 p33
29)[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30)[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31)[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양재숙 「다시쓰는 임진대전쟁」, 고려원 1994 p59~63
32)인물-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비후반국(肥後半國) 24만 석의 領主로 宇土成의 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 장수. 조선 침공군 1군 사령관으로 부산·동래·상주·충주에서 조선군 방어군 격파. 서울·평양 점령. 평화주의자로 明나라 심유경과 강화회담을 주도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家의 편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협력하여 세키가하라(關原)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싸웠으나, 패배하여 참살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33)인물-가토 키요마사:비후반국 25만 석의 영주로 웅본성의 주인. 조선 침공군 2군 사령관으로 서울 점령 후 함경도 일대를 석권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하여 도쿠가와 편에 서 세키가하라에서 이긴 뒤 52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34)인물-구로다 나가마사: 조선 침공군 3군 사령관으로 평양 점령 후 함경도 점령군 사령관. 13세 때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볐으며 조선 침공 때는 24세였다. 귀국 후 도쿠가와 편에 섰고, 복강성의 주인으로 52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35)인물-모리 요시나리: 침공군 4군 사령관으로 강원도 일대 점령을 맡았으며 가장 잔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창성의 성주.
36)인물-후쿠시마 마사노리: 5군 사령관으로 충청도 점령을 맡았다. 미장 청주성 주인으로 24만 석의 영주였는데, 귀국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서 광도 성주로 5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곧이어 몰락했다.
37)인물-고바야카와 타카가게: 6군 사령관으로 60세에 조선에 침공했으며 전라도 점령을 맡았으나 일본군 중 유일하게 점령에 실패했다. 명도성의 성주로 30만 석의 영지를 가졌다.
38)인물-모리 데루모토: 7군 사령관으로 경상도 일대의 점령 통치와 보급로 경비 담당. 112만 석의 영주였으나 귀국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家 편에 서서 36만 석의 영주로 격하되었다.
39)인물-우키다 히데이에: 8군 사령관으로 서울·경기도를 맡았고, 조선 침공군 총사령관이었으나 전쟁 경험이 없는 21세 전후의 청년 장군이었다. 히데요시의 양녀에 장가든 사위라는 설과 정부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강산의 성주로 61만 석의 영주였다.
그런데 김경진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보니 책을 보니 생각나는군요. 하하. 저사람이 대한민국 역사의 표본입니까, 임진란사의 권위자입니까? 그런 사람의 글들은 믿을 만하고 사학과의 논문은 볼만한 가치가 없다는 분이랑 논쟁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전공이 뭔지는 모르나 비전공자가 님의 논문을 비웃는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고고학을 배운적도 없는 슐리만의 업적은 뭐가되는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말이에요 역사는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사실상 없는 학문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누구나 연구할수 있는 학문이고요 그리고 전공자라고해서 안틀리나??전혀요 전에 말한 국방부 관련 논문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흔히들 말하는 임진왜란
예를 들어 봅시다. 의사가 모든병을 다아나요? 아닙니다. 분과별로 알겠죠. 그런데 암환자가 암에대해서 잘안다고 그 사람이 암의 권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에요. 역사에 대해서 해박한 아마춰가 있다해서 그의 말이 정설, 혹은 실증사학적인 뒷받침이 따르는 논문조차 압도한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학강단등에서 아마춰 사가들의 역사를 배워야 될테지만, 언제까지나 논문이라는 검증된 수순을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안하는 겁니다. 더구나 논문이 오류가 있다는 것이랑 논문자체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랑은 다릅니다. 참고문헌이나 인용문헌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더라도 일정한 경향에
맞춰서 논문은 나오게 되어있는 겁니다. 대다수의 사가들이 인정하는 역사가 각론에서는 다소간 틀릴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전체적인 경향이 맞으므로 인정하는 겁니다. 사실 삼한이 언제 삼국으로 바뀌었는지조차 통일 못하는 것이 사학계입니다만, "대략 언제다"라는 식의 표준을 주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첫댓글 사료를 보고서 말하세요 맨날 누구 논문퍼오지 마시고 참고로 저는 국방부 논문에서 어처구니 없는거 많이 봤어요~~~그리고 참고문헌이라는게 1960년~2000년대 책입니까??그리고 신립과 이일의 직위가 서울에 있는 군사를 끌고 갈수 있는 사람들도 아닌데요??
그리고 참고 논문이라면 저는 중국애들이 직산전투에 대해서 간략하게 쓴 것도 봤습니다 물론 어떤 분이 올린 것입니다(대만 국방대학[중화민국 3군대학]발행 18권본 '중국역대전쟁사' 14권 직산전투 부분입니다)여기서는 명군이 큰 역할을 한 것처럼 되있더군요
대학의 논문도 믿지 못하면서 해괴한 논리만 편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행논문에서는 대부분 준비가 없었다는 것이 공론입니다. 사료는 논문쓴 사람들이 전상용씨보다 더 많이 보았겠지요. 명군이 직산에서 일정부분역할을 한 것은 사실아닙니까??
논문이 별 것아닌 것처럼 폄하하는 전상용씨는 논문이나 써보시고 사료운운하십니까? 논문이라는 것은 나의 생각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사료의 일부만 응용하여 전체인 것처럼 말해도 어렵습니다. 폄하할걸 폄하해야죠. 더구나 그것이 학위논문일때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김경진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보니 책을 보니 생각나는군요. 하하. 저사람이 대한민국 역사의 표본입니까, 임진란사의 권위자입니까? 그런 사람의 글들은 믿을 만하고 사학과의 논문은 볼만한 가치가 없다는 분이랑 논쟁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전공이 뭔지는 모르나 비전공자가 님의 논문을 비웃는다면 어떨까요?
그런데 국사논문쓸때의 참고문헌에도 연도제한이 있습니까? 이거는 기술논문이나 실용논문이 아니므로 그런 것은 없는 걸로 아는데... 흠.
그러면 고고학을 배운적도 없는 슐리만의 업적은 뭐가되는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말이에요 역사는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사실상 없는 학문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누구나 연구할수 있는 학문이고요 그리고 전공자라고해서 안틀리나??전혀요 전에 말한 국방부 관련 논문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흔히들 말하는 임진왜란
연구하는 논문들을 여러번봤는데 여러 사료를 통해서 교차검증을 해야하고 그 시대의 편제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아야하는데 그거 정확히 알지 못하고 쓰는 사람 한둘이 아니에요
슐리만은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당시는 고고학의 태동기여서 그런 것에 대한 구분을 두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비전문가가 설칠 분위기가 아닙니다. 슐리만은 고고학자라기 보다는 보물사냥꾼으로 더 악평이 높습니다. 더구나 여기에 슐리만이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의사가 모든병을 다아나요? 아닙니다. 분과별로 알겠죠. 그런데 암환자가 암에대해서 잘안다고 그 사람이 암의 권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에요. 역사에 대해서 해박한 아마춰가 있다해서 그의 말이 정설, 혹은 실증사학적인 뒷받침이 따르는 논문조차 압도한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학강단등에서 아마춰 사가들의 역사를 배워야 될테지만, 언제까지나 논문이라는 검증된 수순을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안하는 겁니다. 더구나 논문이 오류가 있다는 것이랑 논문자체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랑은 다릅니다. 참고문헌이나 인용문헌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더라도 일정한 경향에
맞춰서 논문은 나오게 되어있는 겁니다. 대다수의 사가들이 인정하는 역사가 각론에서는 다소간 틀릴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전체적인 경향이 맞으므로 인정하는 겁니다. 사실 삼한이 언제 삼국으로 바뀌었는지조차 통일 못하는 것이 사학계입니다만, "대략 언제다"라는 식의 표준을 주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