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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5일 일요일 저녁 가끔 가는 '성북동메밀수제비'에서 몇이 모였는데 고영훈 화백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茶咸이 제일 좋아하는 '메밀수제비'도 시키고 사모님들이 좋아하는 구수한 '누룽지백숙'도 주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날 저녁식대는 이 식당을 운영하는 李사장이 이미 계산했다며 한사코 받지를 않았다. 오랜동안 친우 茶咸의 짝꿍인 姜여사가 쌓아 놓은 음덕 덕분임에 틀림이 없었다. 李사장은 우리를 보면 나이가 같아 '甲長'이라며 좋아하는데, 아직 서로 편하게 말은 놓지 못했지만 이 글에서는 존칭은 빼고 싶다. 이 식당 3층에는 李사장이 문화자선사업처럼 운영하는 음악감상실 'Rheehall'이 있다. 앰프나 스피커도 명품이거니와 공연을 할 수 있는 아담한 무대와 피아노와 악기들도 함께 있다. 특별한 것은 음악실 양쪽 벽면에 가득한 LP판이다. 총 6만 5천장이라고 하는데, Rheehall 李사장이 젊어서부터 수집해서 모은 것이라 한다. △왼쪽에 서서 이야기 하는 사람이 李사장이다.
△고영훈 화백은 이야기로도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주의 추억, 재즈와 그림이야기, 따듯한 커피... 저녁을 마친 우리는 커피도 마시고 음악도 감상할 겸 식당건물 3층에 있는 'Rheehall'로 올라갔다. 음악실로 들어서는 우리를 李사장이 입구에서 한데 불러모았다. 음악실 안에 한국재즈1세대의 대표 보컬리스트 김준 선생이 계신데 함께 인사나 나누자는 것이었다. 김준 선생은 우리가 모두 제주출신이란 걸 알고 너무 좋아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대정고등학교 39회 졸업생이라 했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주에 있는 사계국민학교와 중문중학교까지 졸업한 분이었다. 육이오 전쟁통에 제주섬에 피난와서 9년을 살았다는 것이다. 육지사람이라면 흉내내기 어려운 제주사투리도 그럴싸하게 하는 것이었다. 김선생은 우리하고는 띠동갑이었다. 인사를 끝내고 잠시 후 우리를 위해 김선생은 무대로 나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노래까지 들려 주었다. 물론 두 번의 앵콜이 있었다. 노래와 연주에 연륜이 묻어났다. 김선생은 지금도 구기동에서 'Kim Jun Jazz Club'을 운영하고 있다. 즉흥적이고 멋진 단독공연이 끝나고 김준 선생은 우리와 합석을 하였다. 그 뒤부터 우리의 대화는 봇물이 터진 것처럼 이어졌다. 특히나 고영훈 화백과 김선생은 제주의 옛날 이야기며, 음악과 그림 이야기로 밤을 샐 모양새였다. 음악실 문을 닫을 시간까지도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1950년대의 제주풍경, 재즈음악, 달빛 젖은 배밭의 그림같은 풍경...
△왼쪽에서 세번째가 고영훈 화백, 네번째가 한국재즈1세대 보컬리스트 김준 선생이시다.
△제주 하도리에서 '재즈카페 하도'를 운영하는 재즈 피아니스트 임인건과 함께 한 김준 선생. 가끔 음악적인 도움과 가르침을 준다고 한다.
김준 재즈보칼리스트 김준은 1940년 1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산현이다. 아버지는 논밭 30만평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탄 자전거 짐받이에 앉아 신의주 시내를 구경했다. 가죽 장화를 신고 허리에 긴 칼을 찬 일본 기마경찰의 모습도 여전히 그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다 1945년 광복을 맞이했다. 소련군이 진주했고 조선 노동당이 들어섰다.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아버지는 숙청 대상 1호로 낙인찍혔다. 가족들은 할 수 없이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월남했다.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원주로 이사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강원 영월과 경북 문경 등으로 피란을 갔다.
이어 1·4후퇴 때는 목포를 거쳐 제주로 피란 갔다.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산방산 인근이었다. 사계초등학교 6학년을 거쳐 대정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미군 부대 전용 교회의 찬양대에서 활동했다. 도내에서 열리는 음악 콩쿠르에서 ‘가고파’ ‘고향생각’ ‘고향이 그리워’ ‘달밤’ ‘봉선화’ ‘바다로 가자’ 등을 불러 우승을 휩쓸었다. 대정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단거리 육상과 마라톤 시합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축구선수로도 할약했다. 제주의 축구명문 오현고를 이기려고 무던히도 훈련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는 한편 음악 교사에게 피아노, 트럼펫,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합창단에서 바리톤도 맡았다.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관학교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고등학교 교장 선생의 권유로 나간 경희대학교 주최 ‘전국 남녀 고등학생 음악경시대회’에서 3위를 차지해 경희대 성악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음악 인생은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4·19로 인해 잦은 휴강이 이어지다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종로2가 ‘뉴월드 음악감상실’에서 DJ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5·16 후에는 예그린가무단의 합창단원으로 강제로 뽑혀 갔다. 당시 가무단장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예그린합창단이 해체되면서 쟈니 브라더스를 결성하게 된다. 쟈니 브라더스는 1962년 당시 TBC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주말 프로그램 ‘쇼쇼쇼’에 전속 가수로 출연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방앗간집 둘째딸’ ‘니가 잘나 일색이냐’ ‘마포 사는 황부자’ 등의 히트곡을 쏟아냈다. 그가 신영균이 주연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곡을 부른 것도 이때였다.
동영상을 보시려면 상단의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김준 선생을 비롯한 재즈1세대들의 다큐멘타리이다.
다큐 '브라보 재즈 라이브' OST 'You are so beautiful'
1968년 쟈니 브라더스가 해체된 이후 각자 솔리스트로 변신한다. 김준은 멤버 중 가장 먼저 독립했다, 스탠더드 팝과 재즈 번안곡이 주를 이룬 음반을 발표하면서 솔로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1970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로 ‘음악은 곧 인생’이라는 일관된 삶을 살아 오고 있다. - 서울신문 [김문이 만난사람] ‘재즈 인생 50여년…국내 남성 재즈 보컬 1세대 김준‘ 기사에서 발췌 |
첫댓글 메밀수제비? 우째 낯설게 들리네. "모멀초배기"라고 해야 제맛이 남.
이날 먹은 메밀수제비는 모양만으로 봐선 칼국수와 비숫허더이다. 메밀반죽을 손이나 숟가락으로 떼어내야 하는데 칼을 대었더군. 메밀조베기는 원래 겨울·봄철 음식이고, 산모는 미역을 넣고 어느 계절에나 먹었지. 제주에선 이 집처럼 고급진 육수는 없었고,메밀가루를 낭푼에 담고 더운 물로 반죽한 다음 끓는 물에 손이나 수저로 조금씩 떠 넣으면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끝이었지. 모멀조베기...
몽생이 선배님이시네. 역쉬 몽생이 출신은 달라.
바람 코쟁이 모슬포 흙바람 속에서 공을 찼으니 저 나이에도 정정하시지. 저 형님 만나면 대정 축구부 후배로써 들을 이야기 참 많을 듯한데 그럴 인연이 될랑가.
사계리해안이나 산방산 근처에서 지냈던 유년시절이 몹시나 그리운 모양이라... 신이나서 옛날 이야기 허시더군. 은제 서울오면 김선생이 운영하는 김준클럽에 노래들으러 가서 이야기 나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