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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10권 / 세기(世紀) 10
신라(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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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신라의 혁거세(赫居世)가 진한(辰韓) 6부(部)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에 즉위하여 비로소 서라벌(徐羅伐)이라 칭하였고, 남해왕(南解王) 때
계림(鷄林)으로 고쳤으며, 기림왕(基林王) 때 신라로 고쳤다. 동진 원제(東晉元帝) 3년(320)이다. 그 사이에
혹 사로(斯盧)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 신라라고 칭하기도 하다가 지증왕(智證王) 4년에 양 무제(梁武帝)
천감(天監) 2년(503)이다. 비로소 신라로 정하였다. 대개 방언(方言)에 신(新)을 ‘새로[斯盧]’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고 하므로, ‘새로 창건하여 세운 나라’란 뜻에서 취해 와 신라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서라(徐羅)ㆍ사라(斯羅)ㆍ신라(新羅)는 모두 사로(斯盧)에서 전이된 것인데,
사로란 것은 바로 《위지(魏志)》에서 말한 진한사로국(辰韓斯盧國)이 바로 그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동진 이전에는 단지 사로(斯盧)란 칭호만이 있었는데, 사로는 바로 진한의 속국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들이 사로의 사실에 대해서 진한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즉 위진(魏晉)의 역사서에 실려 있는 진한에 관한 내용은 위 경초(景初) 연간에 오림(吳林)이
진한 8국을 낙랑에 주었고, 진 태강(太康) 연간에 진한왕이 해마다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모두 삼한 세기(三韓世紀)에 자세히 보인다.
모두가 신라의 실적(實跡)인 것으로, 징험할 수가 있고 믿을 수 있음이 우리나라의 소위 고기(古記)라 하는
여러 책들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매번 신라와 진한을 분명하게 구분 지워 전후로
세대를 바꾼 두 개의 나라로 여기고 있으니,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닌가.
○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다. 진한은 처음에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점차 나뉘어져서
12개의 나라로 되었으며, 신라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살펴보건대, 《위지(魏志)》를 보면, 진한의 12개 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고, 《북사(北史)》를 보면, 신라를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통전(通典)》에는 5백 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다.
그 땅은 동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남쪽과 북쪽은 고구려와 백제와 접하고 있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모두 “신라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하였고, 또 “한나라 때 낙랑(樂浪)의 지역에 있었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틀린 말이다. 위(魏)나라 때에는 신로(新盧)라고 하였고, 살펴보건대, 이는 사로(斯盧)를
잘못 쓴 것인 듯하다. 송나라 때에는 신라(新羅), 혹은 사라(斯羅)라 하였다. 살펴보건대, 후위(後魏) 때에는
사라(斯羅)라 하였다. 그 나라는 아주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중국에 파견하지 못한다.
그 나라의 풍속에 도성을 ‘건모라(健牟羅)’라 하고 읍을 도성 안에 있는 것은 ‘탁평(啄評)’이라 하고 도성
밖에 있는 것을 ‘읍륵(邑勒)’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말로 군현(郡縣)을 뜻한다. 나라 안에는 6개의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륵이 있다. 문자(文字)가 없으며, 말을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만 통할 수 있다. 《양서(梁書)》
○ 《수서(隋書)》에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邱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자, 고구려 왕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그 뒤에 다시 고구려 왕이 옛 땅으로 돌아가자 따라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던
자들이 드디어 신라를 세웠다. 그러므로 그 나라 사람 가운데는 중국인ㆍ고구려인ㆍ백제인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ㆍ불내(不耐)ㆍ예(穢)ㆍ한(韓)의 지역을 아울러 차지하였다. 신라 왕은 본디 백제 사람으로,
바다를 통해 도망가 신라로 들어가서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선대 때에는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으로
있다가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신라로 귀화함으로
인해 드디어 강국이 되었으며, 인하여 백제를 습격하였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으로 삼았다.” 하였다.
○ 한 선제(漢宣帝) 오봉(五鳳) 원년에 혁거세 원년소벌공(蘇伐公)이란 자가 나림(蘿林)에서 큰 알[卵]을
얻었는데, 어린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자라남에 성스러운 덕이 있자, 6촌(村)에서 기이하게 여겨 이를
세워 서간(西干)으로 방언으로, 군(君)을 뜻한다. 삼았다. 이때에 알영씨(閼英氏)는 또한 신룡(神龍)이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쪽 옆구리로 낳은 계집아이인데, 그 역시 성스러운 덕이 있어서 사람들이 ‘두 성인[二聖]’이라
불렀다. 고구려ㆍ백제와 더불어서 정립하여 삼한의 왕이 되었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 살펴보건대, 이는 제갈원성(諸葛元聲)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 진(晉)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2년 내물왕(奈勿王) 22년 봄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전진(前秦)에
조공을 바쳤다. 《자치통감》
○ 진왕(秦王) 부견(苻堅) 건원(建元) 18년에 내물왕 27년 신라 왕 누한(樓寒)이 사신 위두(衞頭)를 보내어
미녀(美女)를 바쳤는데, 머리털의 길이가 1장(丈) 남짓 되었다. 부견이 사신에게 묻기를,
“경이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사신이 답하기를,
“중국도 시대가 바뀌면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진서(秦書)》
○ 후위 선무제(後魏宣武帝) 경명(景明) 3년에 지증왕(智證王) 3년 사라국(斯羅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후위서》
○ 양 무제 보통(普通) 2년에 법흥왕 8년이름이 진(秦)인 신라 왕 모(募)가 비로소 백제의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양서》
○ 뒤에 가라(加羅)ㆍ임나(任那) 등의 나라를 습격하여 멸하였다. 《통전》
○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법흥왕 때 가라의 여러 나라를 멸하였다. 지지(地志)에 상세히 보인다.
○ 북제 무성제(北齊武成帝) 하청(河淸) 4년 진흥왕 26년 2월 갑인에 조서를 내려 신라 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공 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公新羅王)으로 삼았다. 《북제서》
○ 신라의 풍속에 귀인(貴人)의 자제 가운데 아름다운 자를 뽑아 분단장을 시켜 꾸미고 이들을
‘화랑(花郞)’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앞 다투어서 이들을 섬겼다. 《대중유사(大中遺事)》
○ 살펴보건대,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흥왕 37년(576)에 화랑(花郞)을 두었다. 당초에 군신(君臣)이
사람의 덕을 알아볼 길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사람들을 많이 모아 놓고 함께 놀게 한 다음 그들의 행실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이에 얼굴이 잘 생긴 남자를 뽑아 분장을 시키고는 화랑(花郞)이라고 불렀다.
그러고는 혹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가악(歌樂)으로 서로 즐기게 하니, 세월이 오래 흐름에 사정(邪正)이
저절로 드러났다. 이에 그 가운데서 바른 자를 택하여 등용하였다.” 하였다.
○ 수 문제(隋文帝) 개황(開皇) 14년에 진평왕 16년 신라국왕 김진평(金眞平)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고조(高祖)가 김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에 제수하였다.
○ 대업(大業 수나라 양제(煬帝)의 연호임) 이래로 신라에서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신라 땅은 산이 많고 길이 험한 탓에, 비록 백제와 서로 사이가 나빴으나 백제에서 어쩌지를 못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
○ 신라는 김씨(金氏) 성으로 서로 전하여 30여 대를 내려왔는데, 지금도 성이 김씨이다. 《수동번풍속기(隋東蕃風俗記)》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신라는 박(朴)ㆍ석(昔)ㆍ김(金)이 서로 이어서 왕위를 전하였다.
신라는 위진(魏晉) 이후로 비로소 중국과 통하였으며, 육조(六朝)를 거쳐서 수당(隋唐)에 이를 때까지 대대로
중국을 신하로서 섬겨 중국으로부터 봉작(封爵)을 받았으며, 사신이 잇달아 오가고 조공을 빠지지 않고
바쳤다. 그런데도 박씨와 석씨 두 성은 당초에 중국 측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김씨가 30여 대를 서로
전했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신라는 시조 때부터 수나라 양제 대업 원년(605)인 진평왕 때까지
6백 62년으로, 총 25대이다.
《통지》에는, “그 왕은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역시 성이 김씨였다.” 하였고, 《양사(梁史)》에는,
신라 왕의 성이 모씨(慕氏)라고 하면서, 중간에 성씨가 변경된 사유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는 정초(鄭樵)가 《통지》를 지으면서 이연수(李延壽)가 《남사(南史)》를 지으면서 잘못 쓴 것을 그대로
따라 쓰고, 마단림(馬端臨)이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지으면서도 그대로 따라 쓴 것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양서》에 “보통(普通) 2년(521)에 이름이 진(秦)인 신라 왕 모(募)가 백제의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하였지, 어찌 일찍이 ‘성씨가 모(募)’라고 하였는가. 모(募)가 《통지》에는 ‘모(慕)’로 되어
있고, 진(秦)이 또 ‘태(泰)’로 되어 있다.
○ 당 고조 무덕(武德) 4년에 진평왕 43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조가 친히 위로하고,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 유문소(庾文素)를 보내어 사신으로 가게 하고, 새서(璽書)와 그림 병풍 및
금채(錦綵) 3백 단을 하사하였다. 이 이후로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그 나라는 동쪽과 남쪽이 모두 바다로
막혀 있고, 서쪽은 백제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고구려와 접하였다.
동서 간은 1천 리이고, 남북 간은 2천 리이다. 《구당서》
○ 신라의 관제(官制)는, 왕의 친속으로 상관(上官)을 삼는다. 그 종족은 제1골(骨)ㆍ제2골이라 이름하여
분별한다. 형제의 딸이나 고모, 이모, 종자매(從姊妹)를 모두 아내로 맞아들여도 된다. 왕족은 제1골이
되는데, 아내 역시 그 종족 가운데서 취하며, 아들을 낳으면 모두 제1골이 된다. 또 제2골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으며, 비록 맞아온다 하더라도 항상 잉첩(媵妾)으로 삼는다. 《신당서》
○ 고조가 이미 해동의 세 나라가 오래 전부터 원한을 맺어 서로 번갈아 가면서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모두 번국(藩國)이니, 서로 화목하게 지내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 사신에게 원한을
맺게 된 사연을 물으니, 사신이 대답하기를,
“지난날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적에 신라에 가서 도와주기를 청하였는데, 신라가 도리어 군사를 동원해
백제를 공격해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원한을 맺어 번번이 서로 공격하게 되었는데,
신라가 백제 왕을 잡아 죽였습니다. 원한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구당서》
○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진흥왕 15년(554)에 백제의 성왕(聖王)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신라의 군주(軍主) 김무(金武)가 백제 왕을 쳐 죽였다.
○ 7년에 진평왕 46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김진평을 주국(柱國)으로 삼고, 낙랑군왕 신라왕
(樂浪郡王新羅王)에 봉하였다. 《상동》
○ 태종(太宗) 정관(貞觀) 5년에 진평왕 53년 신라 왕이 사신을 보내어 여자 악공(樂工) 2명을 바쳤는데,
둘 다 머리가 새까만 미인이었다. 그러자 태종이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짐이 들으니, 노래와 미색을 즐기는 것은 덕을 좋아하느니만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천이 가로막혀
멀리 있으니, 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얼마 전에 임읍(林邑)에서 바친 흰색 앵무새도
오히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제나라로 돌려보내 주기를 하소연하였다. 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겠는가. 그들이 멀리 고국을 떠나왔으니, 반드시 부모 친척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니 사신이 가는 편에 그들을 붙여 보내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상동》
○ 6년에 진평왕 54년 진평왕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와 《구당서》에 모두 진평왕이 정관 5년에
훙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아들이 없어서 딸 선덕(善德)을 왕으로 삼고 종실(宗室)인 대신
김을제(金乙祭)가 국정을 총괄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김진평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비단 2백 단을 부의로 하사하였다. 《상동》
○ 9년에 선덕주(善德主) 4년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가서 선덕을 주국(柱國)에
책명(册命)하고 낙랑군왕 신라왕(樂浪郡王新羅王)에 봉하여 아버지의 봉작을 세습하게 하였다.
신라 사람들이 선덕을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불렀다. 《구당서》 및 《신당서》
○ 17년 선덕주 12년 9월 경진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글을 올려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여러 차례 번갈아 가면서 침입해 수십 성을 잃었습니다. 두 나라가 연합한 것은
그 뜻이 신의 사직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데 있기에 삼가 배신(陪臣)을 보내어 대국에 귀명(歸命)하니,
얼마간의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고구려기에 상세하게 나온다.
이에 태종이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어 고구려에 새서(璽書)를 내리기를,
“신라는 나에게 귀순한 나라로서 조공을 빠뜨리지 않고 바치고 있다. 그러니 너와 백제는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할 경우에는 내년에 군사를 출동시켜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하였다.
이때 태종은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하여 신라에 조서를 보내어 군사와 말을 모집해 중국 군사에
응접하라고 하였다. 《책부원귀》에, “정관 18년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조서를 내리기를, ‘신라 왕 김선덕이 그 나라의 성읍을 다 동원하고 국고를 모두 긁어모은 다음,
우리의 크나큰 은택을 받아 여러 대에 걸쳐 맺힌 원수를 갚고자 한다. 그러니 낙랑(樂浪)으로 나아가
고구려의 한가운데를 치고, 옥저(沃沮)로 달려가서 고구려의 소굴을 소탕하라.’ 하였다.” 하였다.
그러자 신라에서 대신을 파견하여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국경으로 들어가
수구성(水口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구당서》
○ 21년에 선덕주 16년 선덕이 졸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나머지 관직과 봉작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 인하여 그의 여동생 진덕(眞德)을 왕으로 삼고는 주국(柱國)을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에
봉하였다. 《상동》
○ 22년 진덕주(眞德主) 태화(太和) 2년 9월 기축에 신라가 백제의 공격을 받아 13성을 격파당하였다고
상주하였다. 《자치통감》
○ 12월 계미에 신라국에서 재상인 이찬(伊贊)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보내어
조회하였다. 황제가 광록 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교외에 나아가 노고를 위로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김춘추가 도착하자, 김춘추를 특진(特進)으로 삼고, 김문왕을 좌무위 장군
(左武衞將軍)으로 삼았다. 김춘추가 이어 장복(章服) 제도를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르기를 청하니, 안에서
진복(珍服)을 꺼내 김춘추 등에게 하사하고, 부(府)로 하여금 김춘추의 종자(從者)들에게도 주게 하였다.
《책부원귀》
○ 김춘추가 국학(國學)에 나아가서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는 것과 강론(講論)하는 것을 보여 주도록
청하였다. 태종이 이에 자신이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및 새로 찬한 《진서(晉書)》를
하사하였다. 김춘추가 본국으로 귀국할 때에는 3품관 이상으로 하여금 전별연(餞別宴)을 베풀게 하는 등
예우가 극진하였다. 《구당서》
○ 고종(高宗) 영휘(永徽) 원년에 진덕왕 4년 진덕이 백제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는 그의 동생
김법민(金法敏)을 파견하여 《신당서》에는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을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보고하였다.
진덕이 이때 오언(五言)으로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비단에 짜서 올렸다. 태평송은 예문지에 나온다.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김법민을 태부경(太府卿)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상동》
○ 5년 진덕왕 8년 윤4월 임진에 진덕이 졸하였다. 황제가 거애(擧哀)하고, 조서를 내려서 김춘추로 하여금
뒤를 이어 즉위하게 해 신라 왕(新羅王)으로 삼은 다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에 봉하였다. 《상동》
도수충(屠粹忠)이 찬하였다.
○ 6년에 무열왕(武烈王) 2년 백제가 고구려ㆍ말갈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서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구당서》
○ 현경(顯慶) 5년 무열왕 7년 3월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衞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웅진도 대총관
(熊津道大摠管)으로 삼아 수군과 육군 총 10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이어 김춘추를 우이도 행군총관
(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토평하게 하니, 백제 왕 부여의자(扶餘義慈)를 포로로
잡아 궐하(闕下)에 바쳤다. 이 뒤로 신라가 점차 백제와 고구려의 지역을 소유하여 그 경계가 점차
넓어져서 서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상동》
○ 용삭(龍朔) 원년 무열왕 8년 9월 초하루 계사에 김춘추가 졸하였다.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태부경(太府卿) 김법민(金法敏)에게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으로 삼았다. 《상동》
○ 3년 문무왕 3년 4월 을미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을 계림주 대도독부(鷄林州大都督府)로 삼고,
김법민에게 계림주 도독(鷄林州都督)을 제수하였다. 《상동》
○ 상원(上元) 원년 문무왕 14년 정월 임오에 좌서자 동중서문하 삼품관(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官)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 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고, 위위 경(尉衞卿) 이필(李弼)과 우영군대장군
(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출동해 신라를 토벌하였다. 이때에 신라 왕
김법민이 고구려의 반역한 무리를 거두어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는 사람을 시켜서 지켰으므로,
제(帝)가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서 김법민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때 김법민의 동생인 우효위
원외대장군 임해군공(右驍衞員外大將軍臨海郡公) 김인문(金仁問)이 마침 경사(京師)에 와 있었는데,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 2년 문무왕 16년 2월에 유인궤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호로하(瓠蘆河)를 건너가 신라 북방의
큰 진(鎭)인 칠중성(七重城)을 격파하고, 또 말갈(靺鞨)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 남쪽 국경으로
가서 많은 백성들을 참획하였다. 유인궤가 군사를 거느리고 되돌아왔다. 《구당서》
○ 조서를 내려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신라의 매초성(買肖城)에 둔병해 있으면서
경략(經畧)하게 하였는데, 신라와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이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또 사죄하니, 상이 용서해 주고, 김법민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이 중도에서 중국으로 되돌아오자,
다시 임해군공(臨海郡公)을 봉하였다. 《자치통감》
○ 그러나 신라는 백제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구려의 남쪽 국경까지 점령하여 상주(尙州)ㆍ
양주(良州)ㆍ강주(康州)ㆍ웅주(熊州)ㆍ전주(全州)ㆍ무주(武州)ㆍ한주(漢州)ㆍ삭주(朔州)ㆍ명주(溟州) 등
9개 주를 설치한 다음, 주에는 도독(都督)을 두어 10개 혹은 20개의 군을 통솔하게 하고, 군에는
태수(太守)를 두고 현에는 소수(小守)를 두었다. 《신당서》
○ 개요(開耀) 원년에 문무왕 21년 김법민이 졸하였다. 그의 아들 김정명(金政明)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구당서》
○ 무후(武后) 수공(垂拱) 2년에 신문왕 6년 김정명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조회하였다. 인하여 표문을 올려
당나라의 예전(禮典)과 기타 사장(詞章)의 책을 내려 주기를 주청하니, 측천무후가 유사(有司)를 시켜
《길흉요례(吉凶要禮)》와 《문관사림(文館詞林)》의 글 가운데서 규계(規戒)에 관계되는 글을 가려 뽑아 이
를 50권으로 만들게 하여 하사하였다. 《상동》
○ 천수(天授) 3년에 신문왕 12년 김정명이 졸하였다. 측천무후가 거애(擧哀)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조제(弔祭)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인 김이홍(金理洪)을 책봉하여 신라 왕으로 삼았다. 이어 김이홍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관작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輔國大將軍行豹韜衞大將軍鷄林州都督)을
이어받게 하였다. 《상동》
○ 《자치통감》에는, “장수(長壽 측천무후의 연호임) 2년(693) 2월 병자에 신라 왕 김정명이 졸하였다.”
하였다.
○ 장안(長安) 2년에 효소왕(孝昭王) 11년 김이홍이 졸하니, 측천무후가 거애하고 이틀 동안 조회(朝會)를
거두었으며, 《자치통감》에, “장안 3년(703) 윤 4월에 신라 왕 김이홍이 졸하였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신문왕은 재위한 지 11년 만인 장안 2년 임인에 훙하였으니, 《자치통감》이
틀린 것이다. 사신을 보내어 그의 동생인 김흥광(金興光)을 세워 신라 왕으로 삼고, 이어 그 형의 관작인
장군과 도독을 이어받게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구당서》에는 또 “김흥광의 본명이 태종(太宗)과 같았으므로 선천(先天) 연간에 측천무후가
고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동사를 보면, 성덕왕(聖德王)의 본명은
김융기(金隆基)이며, 《자치통감》에는 김숭기(金崇基)로 되어 있다. 대개 당 현종(玄宗)의 휘(諱)를 피하여
김흥광(金興光)으로 고친 것이다. 그리고 선천(先天)은 현종 원년(712)인 바, 측천무후가 고쳤다고 하는 것은
더욱 크게 잘못된 것이다.
○ 현종(玄宗) 개원(開元) 2년 성덕왕(聖德王) 13년 2월 임인에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와서 조회하니,
머물면서 숙위(宿衞)하게 하고, 집과 비단을 하사하여 특별히 대우하였다. 《책부원귀》
○ 11년에 성덕왕 22년 신라에서 자주 들어와 조회하면서 과하마(果下馬)ㆍ조하주(朝霞紬)ㆍ어아주(魚牙紬)
ㆍ해표피(海豹皮)를 바쳤으며, 또 두 여자를 바쳤다. 이에 황제가 이르기를,
“이 여인들은 모두 다 왕의 누이동생으로, 낯선 풍속에 부모와 이별해 있으니, 짐이 차마 이들을 여기에
있게 하지 못하겠다.”
하고는 많은 물품을 주어 되돌려 보냈다.
신라에서 또 자제(子弟)들을 파견하여 태학(太學)에 입학해서 경술(經術)을 배우게 하였다. 황제가 간간이
김흥광에게 서문금(瑞文錦), 오색라(五色羅), 자수문포(紫繡紋袍) 및 금은으로 만든 그릇 등을 하사하였고,
김흥광 역시 특이한 개와 말, 황금, 미체(美髢) 등 여러 가지 물품을 올렸다. 《신당서》
○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에는 개원 연간이라고 하였는데, 《책부원귀》에는 개원 11년의 일로 되어
있으므로, 그에 따라 기록한다.
○ 21년에 성덕왕 32년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에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이때 김흥광의 족인(族人)인 김사란(金思蘭)이 앞서 조회하는 일로 인하여 경사(京師)에 와 있으면서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그를 귀국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어 김흥광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를 더 제수하였다. 《구당서》
○ 24년 성덕왕 35년 6월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고 방물을 바쳤으며,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패강(浿江) 이남을 하사하였다. 《책부원귀》
○ 25년 성덕왕 36년 2월 무진에 김흥광이 졸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증직하고, 이어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숙(邢璹)에게 홍려 경(鴻臚卿)을 섭직(攝職)시켜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가서
조제(弔祭)하게 하고, 아울러 그의 아들인 김승경(金承慶)을 세워 아버지의 작위인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을 승습하게 하였다. 형숙이 출발하려 할 적에 황제가 시(詩)와 서(序)를 지어
주었으며, 태자 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부(賦)와 시를 지어 전송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황제가 형숙에게
이르기를,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자못 글을 알고 있어서 중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경이 학술을 알아 강론을
잘 하므로 사신으로 뽑아 보내는 것이니, 신라에 가서 경전(經典)을 천양하여 신라로 하여금 중국의
유교(儒敎)가 성대하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다.
또 신라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는 인하여 바둑을 잘 두는 솔부병조(率府兵曹)
양계응(楊季鷹)을 형숙의 부사로 삼아 보냈다. 형숙 등이 신라에 이르러서 신라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으며, 신라에서 바둑을 잘 두는 자들이 모두 양계응보다 하수였다.
이에 형숙 등에게 신라에서 금보(金寶)와 약물(藥物) 등 많은 선물을 주었다. 《구당서》
○ 28년 효성왕(孝成王) 4년 3월 계묘에 신라 왕 김승경의 아내 김씨를 책봉하여 신라 왕비로 삼았다.
《책부원귀》
○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왕의 아내 박씨를 책봉하여 비(妃)로 삼았다고 하였다.
○ 천보(天寶) 원년에 경덕왕(景德王) 2년 김승경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효성왕이
천보 원년 임오에 훙하였다. 조서를 내려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사신으로 보내어 신라로 가서
조제(弔祭)하게 하고, 김승경의 아우인 김헌영(金憲英)을 책립하여 신라 왕으로 삼고, 아울러 그 형의
관작을 승습하게 하였다. 《구당서》
○ 황제가 촉(蜀) 지방에 있었는데, 신라 왕이 사신을 보내어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성도(成都)에 와서
정조례(正朝禮)에 참가하였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경덕왕 15년(756) 병신에 사신을 보내어 촉에서 조회하였는데,
이해는 바로 천보 15년이다.
○ 대종(代宗) 대력(大曆) 2년에 혜공왕(惠恭王) 3년 김헌영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경덕왕이 대종 영태(永泰) 원년(765)에 훙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김헌영의 아들인 김건운(金乾運)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신당서》에는, 김건운이 즉위하였으나, 아직 어렸다고 하였다. 이어 대신 김은거(金隱居)를
파견하여 표문을 가지고 와 조공을 바치면서 책명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구당서》
○ 3년 혜공왕 4년 정월 갑자에 황제가 창부낭중 겸 어사중승 사자금어대(倉部郞中兼御史中丞賜紫金魚袋)
귀숭경(歸崇敬)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책서(册書)를 가지고 가 조제(弔祭)하고 책봉하게 하였다. 김건운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으로 삼고, 이어 김건운의 어머니를 책봉하여
태비(太妃)로 삼았다. 《상동》
○ 《신당서》에는, “아울러 왕의 어머니 김씨를 태비로 삼았다.” 하였다.
○ 이때 신라의 재상들이 권력을 다투느라 서로 공격하여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다가, 3년 만에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해에 조공을 바친 것이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혜공왕 16년(780)에 김지정(金志貞)이 난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하였는데, 김양상(金良相)이
김지정을 죽이고 이어 왕을 시해한 다음 왕이 되었다.
○ 덕종(德宗) 건중(建中) 4년에 선덕왕(宣德王) 4년 김건운(金乾運)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혜공왕이 건중 원년(780)에 피살되었다. 아들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이 상상(上相)으로 있던
김양상(金良相)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구당서》
○ 정원(貞元) 원년에 선덕왕 6년 김양상에게 검교태위 도독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
(檢校太尉都督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을 제수하였다. 이어 호부 낭중(戶部郞中) 개훈(蓋塤)에게
부절(符節)과 책명(册命)을 주어 사신으로 보내었다. 《책부원귀》를 보면, 비서 승(祕書丞) 맹창원(孟昌源)을
조제책립사(弔祭册立使)로 삼아 보내었다. 그해에 김양상이 졸하였다. 상상(上相) 김경신(金敬信)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에 그로 하여금 김양상의 관작을 이어받게 하였는데, 김경신은 바로 김양상의
종형자(從兄子)이다. 《상동》
○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종부제(從父弟)라고 하였고, 동사에는 내물왕(奈勿王)의 종손이라고 하였다.
○ 14년에 원성왕 14년 김경신이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김경(金敬)’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원성왕이 정원(貞元) 15년(799)에 훙하였다. 그의 아들이
김경신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김경신의 적손(嫡孫)인 김준옹(金俊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상동》
○ 16년 소성왕(昭聖王) 2년 4월 경인에 김준옹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신라왕
(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新羅王)을 제수하고는 사봉낭중 겸 어사중승(司封郞中兼御史中丞) 위단(韋丹)을 보내
부절과 책명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위단이 운주(鄆州)에 이르러 김준옹이 졸하고 그의 아들인
김중희(金重煕)가 즉위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 조서가 없으므로 그대로 되돌아갔다. 《상동》
○ 살펴보건대, 애장왕(哀莊王)의 이름이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모두 김중흥(金重興)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므로 동사에 따라 바로잡았다.
○ 순종(順宗) 영정(永貞) 원년에 애장왕 6년 조서를 내려 병부낭중(兵部郞中) 원계방(元季方)을 파견하면서
부절과 책명을 가지고 가서 김중희를 책봉하여 왕으로 삼게 하였다. 《상동》
○ 2월 무진에 신라 왕 김중희의 어머니 화씨(和氏)를 태비(太妃)로 삼고 아내 박씨를 비로 삼았다.
《책부원귀》
○ 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 애장왕 7년 11월 경자 초하루 기해에 중국에서 숙위(宿衞)하고 있던
왕의 아들 김헌충(金獻忠)을 신라로 돌려보내고, 이어 시비서감(試祕書監)의 직을 더해 주었다. 《상동》
○ 3년에 애장왕 9년 신라에서 김역기(金力奇)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회하였다. 7월에 김역기가 글을
올리기를,
“정원(貞元) 16년에 신의 옛 임금 김준옹(金俊邕)을 책봉하여 신라 왕으로 삼고, 왕의 어머니 신씨(申氏)를
태비로, 아내 숙씨(叔氏)를 비로 책봉한다는 조서를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책봉사 위단이 신라로 오는
도중에 김준옹이 훙하였다는 것을 듣고 그대로 그 책명을 가지고 중국으로 되돌아왔는데, 그 책명이 지금
중서성(中書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제 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니, 신에게 그 책명을 주시어 가지고 가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김준옹 등에게 내린 책명을 홍려시(鴻臚寺)로 하여금 중서성에서 받아 오게 하되,
책명이 홍려시에 도착하거든 김역기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책명을 받들고 신라로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구당서》
○ 10월 기유에 칙명을 내리기를,
“신라 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과 아우 김중공(金仲恭) 등 세 사람에게 본국으로 하여금 예전의 규례대로
문극(門戟)을 주게 하라.”
하였다. 《책부원귀》
○ 《신당서》에는, “김역기가 또 신라의 재상 김언승ㆍ김중공 및 왕의 동생 김소금(金蘇金)ㆍ
김첨명(金添明)을 위하여 문극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다 들어주었다.” 하였다.
○ 5년 헌덕왕(憲德王) 2년 10월에 신라 왕이 그의 아들을 파견하여 《구당서》에는, 왕자 김헌장(金憲章)이
와서 조회하였다고 하였다. 와서 조회하고,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佛像)과 불경(佛經), 번(幡) 등을 바쳤다.
또 글을 올려 순종(順宗)을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상동》
○ 7년에 헌덕왕 4년 김중희가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애장왕이 원화(元和) 4년(809)에 숙부인
김언승에게 시해되었다. 신라의 상(相)으로 있던 김언승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김창남(金昌南)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부고를 전하였다. 7월에 김언승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충영해군사 상주국 신라국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
上柱國新羅國王)을 제수하고, 김언승의 아내 정씨(貞氏)를 책봉하여 비로 삼은 다음, 직방원외랑
섭어사중승(職方員外郞攝御史中丞) 최정(崔廷)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조제를 지내고 책립하게
하였으며, 볼모로 와 있던 왕의 아들 김사신(金士信)을 부사로 삼았다. 《구당서》
○ 8월 초하루 정해에 칙서를 내려 신라국의 대재상(大宰相) 김숭빈(金崇斌) 등 세 사람에게 본국으로
하여금 예전 규례에 의거해 문극(門戟)을 하사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 11년 헌덕왕 8년 신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경계와 가까운 곳에 있는 주부(州府)의
장리(長吏)들로 하여금 이를 단속하게 하였다. 신라에서 숙위하러 와 있던 왕자 김장렴(金長廉)이 글을 올려
진정하였으므로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상동》
○ 11월에 조회하러 오는 왕자 김사신(金士信) 등이 사나운 바람을 만나 초주(楚州) 염성현(鹽城縣)의
지경에까지 표류하여 갔는데,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 이용(李)이 아뢰었다. 이해에 신라에 기근이 들어서
무리 1백 70명이 절강성 동쪽에서 식량을 구하였다. 《구당서》
○ 경종(敬宗) 보력(寶曆) 원년 헌덕왕 17년 5월 경진에 신라의 국왕 김언승(金彦昇)이 아뢰어서,
앞서 태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 최이정(崔利貞)ㆍ김숙정(金叔貞)ㆍ박계업(朴季業) 등 네 사람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주기를 청하고, 또 새로 조공하는 데 따라간 김윤부(金允夫)ㆍ김입지(金立之)ㆍ박양지(朴亮之) 등
12명을 중국에 남아 숙위(宿衞)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으며, 이어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서 학업을 익히게
하고, 홍려시로 하여금 이들에게 물자와 식량을 대 주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황제가 따라 주었다.
《책부원귀》
○ 2년 헌덕왕 18년 12월에 신라에서 볼모로 와 있던 김윤부(金允夫)가 예전의 규례대로 중국 사신이
신라로 들어갈 적에 신라에서 숙위하러 와 있는 사람들을 부사(副使)로 차임해, 사신과 함께 신라로
돌아가서 조서를 통역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고, 단지 고한 데 따라 부사로 차임하기만
하였다. 《상동》
○ 문종(文宗) 태화(太和) 5년 흥덕왕(興德王) 6년 김언승(金彦昇)이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헌덕왕이
경종(敬宗) 보력(寶曆) 2년에 훙하였다. 맏아들 김경휘(金景徽)를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
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충영해군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
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으로 삼고, 그의 어머니 박씨를 태비로 삼고, 아내 박씨를 비로 삼은 뒤,
태자좌유덕 겸 어사중승(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 원적(源寂)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 조제(弔祭)를 지내고
책립(册立)하게 하였다. 《구당서》
○ 개성(開成) 원년에 희강왕(僖康王) 원년 신라의 왕자 김의종(金義琮)이 와서 사은하고, 아울러 머물러
숙위하였다. 《상동》
○ 2년 희강왕 2년 4월에 칙서를 내려 숙위하고 있던 왕자 김의종을 신라로 돌려보내었는데, 물품을 주어
돌려보냈다. 《책부원귀》
○ 3년 민애왕(閔哀王) 원년 7월에 신라 왕 김우징(金祐徵)이 치청 절도사(淄靑節度使)에게 선사하는 노비를
중국으로 보내었는데, 황제가 그들이 먼 이국 땅까지 온 것을 불쌍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상동》
○ 5년 문성왕(文聖王) 2년 4월에 신라에서 국상(國喪)이 났다고 고하여 왔다. 황제가 홍려시에 있던
질자(質子)와 기간이 다 차서 돌아가야 할 국학생(國學生) 등 총 1백 5명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었다.
《구당서》
○ 전류(錢鏐)가 오월왕(吳越王)을 자칭하면서 오월왕 원년은 바로 효공왕(孝恭王) 2년(898)이다. 사신을
보내어 신라 왕과 발해 왕을 책봉하였으며, 바다에 있는 여러 나라의 군장(君長)을 모두 책봉하였다.
《오대사(五代史)》
○ 후당 장종(後唐莊宗) 동광(同光) 2년 경애왕(景哀王) 원년 정월에 신라 왕 김박영(金朴英)과
신라의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상동》
○ 요(遼) 태조(太祖) 천현(天顯) 원년 경애왕 3년 3월에 요나라가 발해를 평정하였는데,
신라가 정벌에 따랐던 공이 있으므로 넉넉하게 상을 내려 주었다. 《요사(遼史)》
○ 후당 명종(後唐明宗) 천성(天成) 2년 경순왕(敬順王) 원년4월에 신라국 강주(康州)에서 임언(林彦)을
사신으로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책부원귀》
○ 장흥(長興) 3년 경순왕 6년 4월에 신라국 권지국사(權知國事) 김부(金溥)가 집사 시랑(執事侍郞)
김비(金朏)를 사신으로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상동》
○ 신라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살펴보건대, 신라는 본디 진한의 후예이지 변한의 종족이 아니다.
그 나라의 지리와 임금의 세계(世系) 및 물산(物産), 풍속(風俗) 등은 《당서》에 나타나 있다. 당나라 고조 때
김진(金眞)을 살펴보건대, 《당서》에는 김진평(金眞平)으로 되어 있다. 봉하여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삼은
뒤로부터는 그의 후손이 대대로 임금이 되었다. 동광(同光)과 장흥(長興) 연간에 국왕 김박영(金朴英)과
김부(金溥)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는데, 김박영과 김부의 세차(世次)와 즉위한 해, 죽은 해에
대해서는 사관이 그 기록을 빠뜨렸다. 후진(後晉) 이후부터는 사신이 오지 않았다. 《오대사》
○ 신라는 55대를 거친 다음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항복하였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주-D001] 혁거세(赫居世) :
이병도는, “혁거세는 실상 휘가 아니라 존호(尊號)이니, ‘혁(赫)’은 바로 광명(光明), 명철(明哲),
현명(賢明)이라는 말인 ‘’의 차음(借音)이요, ‘거세(居世)’는 왕호(王號) ‘거서간(居西干)’의 ‘거서(居西)’와
같은 음과 뜻인 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서간은 《삼국유사》 권1에서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거니와,
거세(居世)ㆍ거슬(居瑟)도 같은 음과 뜻의 말로서, 삼한 군장(君長) 칭호의 중국 측 사음(寫音)인
‘건길지(鞬吉支)’의 ‘길지(吉支)’에 해당되는 말이니, 혁(赫)은 여기의 건(鞬)과 같이 거세(居世)를 형용하고,
거세는 거서ㆍ거슬ㆍ길지와 같은 뜻의 말로 보면 좋다. 그러면 혁거세는 명왕(明王)ㆍ철왕(哲王)ㆍ
성왕(聖王)의 뜻으로 해석된다. 《삼국사기》에서 거세(居世)와 거서간(居西干)을 나누어 거세는 휘(諱),
거서간은 위호(位號)로 나눈 것은 잘못된 것인 듯하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1쪽 주》
[주-D002] 서라벌(徐羅伐) :
서라벌이 《삼국사기》 권1에는 서나벌(徐那伐)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 권1에는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로 되어 있으며, 서야벌(徐耶伐)로 표기된 곳도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서나(徐那)ㆍ
서라(徐羅)ㆍ서야(徐耶)는 사로(斯盧)ㆍ사라(斯羅)ㆍ신라(新羅)와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서,
서(徐)ㆍ사(斯)ㆍ신(新)은 바로 ‘소벌(蘇伐)’의 소(蘇)와 같이 ‘솟[高, 上]’의 사음(寫音)인 것 같다.
나(那)ㆍ라(羅)ㆍ야(耶)ㆍ노(盧)는 ‘나라[國]’의 고어(古語)인즉, 바로 상국(上國)의 뜻이다.
벌(伐)은 불(弗)ㆍ불[火]ㆍ비리(卑離)ㆍ부리(夫里)와 한가지로 성읍(城邑)이나 도시(都市)를 의미하는
동방의 고어(古語)이다. 그러면 서라벌은 ‘상국읍(上國邑)’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현대어인 ‘서울’은
이 서라벌의 약칭인 ‘서벌’ 즉 ‘서’에서 전래된 말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1쪽 주》
[주-D003] 건모라(健牟羅) :
큰 성(城)이라는 뜻이며, 후에는 금성(金城)이라고 쓰였다. 고구려ㆍ백제의 왕도(王都)에 상당한 것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한 왕기(王畿)를 말하는데, 우리말의 ‘큰마을’을 음사(音寫)한 것이다. 이병도는 “건모라는
고대어(古代語)에서 대촌(大村)ㆍ대읍(大邑)을 뜻하는 ‘큰므르’ㆍ‘큰몰’의 사음(寫音)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619쪽》
[주-D004] 읍륵(邑勒) :
신라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로, 신라어(新羅語)의 읍(邑)과 촌(村)을 의미하는 ‘벌(伐)’, ‘불[火ㆍ弗]’의
대음(對音)이다. 곧 ‘읍’의 종성(終聲)인 ‘ㅂ’과 ‘륵’의 초성인 ‘ㄹ’을 반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95쪽》
[주-D005] 문자(文字)가 …… 있다 :
문자가 없다는 것은 한자(漢字)가 아닌 고유한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중국 사람과
신라 사람과의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백제 사람의 통역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은 백제 사람이
신라어(新羅語)를 이해하였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나아가 신라어와 백제어가 같았다는 뜻이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01쪽》
[주-D006] 가라국(迦羅國)을 …… 삼았다 :
가라국은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본가야(本加耶)가 신라에 항부(降附)하였다. 가야국(加耶國)ㆍ가라국(加羅國)ㆍ가락국(駕洛國)으로도 표기한다.
[주-D007] 소벌공(蘇伐公) :
이병도는 “소벌공을 《삼국유사》 권1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라 하였지만, 이는 실상 인명(人名)이 아니므로
‘소벌’이 서라벌을 약칭한 ‘서벌(徐伐)’과 마찬가지의 말이다. 그리고 또 《삼국사기》 권1에는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공(蘇伐公)’이라 하였는데, 이 고허촌의 ‘고허(高墟)’가 바로 ‘소벌(蘇伐)’의
한역(漢譯)인 것이다. 즉 소벌의 ‘소(蘇)’나 서벌의 ‘서(徐)’는 ‘고(高)’의 뜻에 해당하고, ‘허(墟)’는 ‘벌(伐)’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소와 서는 고(高)ㆍ상(上)을 의미하는 ‘솟’ㆍ‘솔’ㆍ‘수리’의 대음(代音)이니,
소벌ㆍ서벌은 북방(北方)의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의 ‘소부리(所夫里)’ 즉 부여(扶餘)와 공통된 말이다.
‘고구려’는 ‘수릿골’ㆍ‘솔골’의 대역(代譯)이고, ‘소부리’는 ‘솟벌’의 사음(寫音)으로, 모두
상읍(上邑)ㆍ수읍(首邑), 즉 수도(首都)를 의미하는 말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596쪽》
[주-D008] 누한(樓寒) :
누한은 내물왕의 이름이 아니라 왕의 칭호인 마립간(麻立干)을 일컫는 것으로서, 루(樓)를 ‘마루’로
훈독(訓讀)하면 마립(麻立)이고, 한(寒)은 ‘간(干)’과 같이 취음(取音)한 것이다.《國譯三國史記 37쪽 주》
[주-D009] 이름이 …… 모(募)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에는 법흥왕의 휘가 원종(原宗)이라 하였다. 이병도는 “왕의 성이 모(募),
이름이 진(秦)이라 한 것은 어떠한 오해로 인한 것인 듯하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53쪽 주》
[주-D010] 가라(加羅) :
가라는 가야(伽倻)ㆍ가야(加耶)ㆍ가량(加良)ㆍ구나(拘那) 가락(駕洛)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주-D011] 임나(任那) :
고대 변진(弁辰) 지방에 자리 잡고 있던 나라 이름으로, 금관가야(金官加耶)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는
가야연맹체를 총괄하여 지칭하기도 한다. 임나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의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으로, 여기서는 ‘任那加羅’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금관가야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신라 경명왕(景明王) 8년에 세워진 진경대사탑비(眞鏡大師塔碑)에 보이는 임나도
금관가야를 지칭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는 여러 가야를 총칭해 임나라고 하였다.
임나는 본디 ‘님나(nim-na)’로 발음되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미마나(mima-na)’로 발음하였다.
이는 고대 우리말에 있어 n음과 m음이 서로 넘나드는 음운법칙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란 말이 있어서 일본인들에 의하여 마치 임나에
일본의 통치 기관이 있었던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게 되었다. 이 임나일본부설은 1970년대 이후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부정되면서 계속적인 연구가 추진되고 있는 중이다.
[주-D012] 임읍(林邑) :
지금의 안남(安南)에 있었던 나라 이름이다. 진(秦)나라 때 임읍현(林邑縣)을 설치하였고 한나라 때
상림현(象林縣)으로 고쳤다. 후한 말기에 구련(區連)이란 자가 중국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현령을 죽이고
자칭 임읍국왕(林邑國王)이라 하였는데, 수나라 때 이를 격파하고 임읍군(林邑郡)을 두었다.
당나라 때에는 다시 임읍국(林邑國)이라 하였고, 그 뒤에 임읍을 점(占)으로 옮겨 점성국(占城國)이라
하였다. 그 뒤 안남(安南)에 의해 멸망되었다.
[주-D013] 신라국에서 …… 조회하였다 :
《구당서》에 “진덕왕의 아우 국상 이찬간(伊贊干) 김춘추 및 그의 아들 김문왕을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고, 《신당서》에 “진덕왕이 그의 아들 김문왕과 아우 이찬의 아들 김춘추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고, 《삼국사기》에 “이찬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덕여왕과 김춘추는 6촌 간이고, 김문왕은 김춘추의 셋째 아들이다.
이찬(伊贊)은 이찬(伊飡)으로, 이벌찬(伊伐飡)의 다음 등급이다.
[주-D014] 도수충(屠粹忠)이 찬하였다 :
이 부분은 편찬자가 무슨 내용을 기술하려고 하다가 빠뜨린 듯하다.
[주-D015] 호로하(瓠蘆河) :
《동사강목》 제4에 “지금의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에 호로하가 있는데, 그 남쪽이 바로
칠중성(七重城)이다.” 하였다.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이다.
[주-D016] 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積城)이다. 칠중성은 진평왕과 선덕왕 때 신라 북경(北境)의 요충지로서
신라와 고구려 간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주-D017] 매초성(買肖城) :
지금의 경기도 양주(楊州)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사강목》 제4에는 “매초는 매성군(買省郡)으로, 지금의 양주이다.” 하였다.
[주-D018] 발해와 …… 노략질하였다 :
발해는 이 당시에 대조영(大祚榮)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하여 국토를 크게 개척하고 연호를 고쳐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해지던 시기로, 당나라에 맞서서 장문휴(張文休) 등이 지금의 산동성
봉래현(蓬萊縣)에 있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다.
[주-D019] 황제가 …… 있었는데 :
이 당시에 당 현종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인해 지금의 사천성(泗川省) 지방으로 옮겨 가 있었다.
[주-D020] 김중희(金重煕) :
애장왕의 고친 이름이다. 애장왕의 본명은 김청명(金淸明)으로, 즉위하면서 김중희로 고쳤다.
《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第10》
[주-D021] 화씨(和氏) :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숙씨(叔氏)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제10에는 애장왕의
어머니는 김씨(金氏)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이는 당시 중국과의 대외 관계에 있어서 혈족
혼인(血族婚姻)의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소성왕 왕비의 아버지 이름인 김숙명(金叔明)의 숙(叔) 자를
취하여 가성(假姓)으로 삼았던 듯하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169쪽 주》
[주-D022] 문극(門戟) :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시행한 제도로, 묘사(廟社)나 궁전의 문, 부주(府州)의 공문(公門)에 시렁을 만든 다음
극(戟)을 걸어 놓아 위의(威儀)를 갖추는 것을 말하는데, 귀관(貴官)의 사제에 이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주-D023] 김중희가 …… 삼았다 :
《삼국사기》에는 이 기사가 헌덕왕 원년 조에 들어 있다.《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第10》 ‘원화(元和) 4년’은
원문에는 ‘원화(元和) 원년’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를 보면 원화 4년에 김언승이 그의 아우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애장왕을 시해하였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김언승의 아내 정씨(貞氏)’는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제10에, “헌덕왕의 비는 각간(角干) 김예영(金禮英)의 딸인데, 지금 정씨(貞氏)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하였고, 《삼국유사》 왕력(王曆)을 보면 각간 김충공(金忠恭)의 딸로 되어
있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신라에서 혈족 혼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정씨라고 가칭한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171쪽 주》
[주-D024] 헌덕왕 18년 :
원문은 헌덕왕 14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편찬자가 보력(寶曆) 2년(826)을 장경(長慶) 2년(822)으로
착각하여 기술한 듯하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김윤부(金允夫)는 보력 원년에 중국으로 들어갔다.
[주-D025] 전류(錢鏐) :
오대(五代) 시대 때 오월(吳越)을 개국한 임금으로, 임안(臨安) 사람이다. 후당(後唐) 건부(乾符) 연간에
진해군 절도사(鎭海軍節度使)에 제수되었고, 천복(天復) 연간에 월왕(越王)에 봉해졌으며, 천우(天祐) 초에
오왕(吳王)에 봉해졌고, 양(梁)나라 태조(太祖)가 즉위하여서는 오월왕(吳越王)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에는
스스로 오월국왕(吳越國王)이라 칭하였다. 그 뒤 41년간 재위하였다.《五代史 卷67》
[주-D026] 김박영(金朴英) :
여기서 말하는 신라 왕은 경애왕의 전왕인 경명왕(景明王)으로 그는 동년 2년 8월에 훙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경명왕의 이름이 김승영(金昇英)으로 되어 있다.《三國史記 卷12 新羅本紀 第12》
[주-D027]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 :
왕봉규는 신라 말기의 호족(豪族)으로, 처음에 의상현(宜桑縣) 즉 천주현(泉州縣)이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의
의령(宜寧)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치다가 뒤에 강주(康州) 즉 진주(晉州) 지역도 석권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중국과 활발한 교섭을 벌여 후당(後唐)으로부터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ㆍ
회화장군(懷化將軍) 등의 직을 제수받았다. 뒤에 견훤(甄萱)의 지배하에 들어가 세력이 소멸되었다.
[주-D028] 4월에 …… 바쳤다 :
이는 신라에서 파견한 것이 아니라 당시 강주(康州)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봉규(王逢規)가 파견한 것이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제12 경애왕 4년 조에, “4월에
지강주사(知康州事) 왕봉규가 후당에 임언(林彦)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하자, 명종(明宗)이
중흥전(中興殿)에서 불러 보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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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부터인가 한국인들은 세계 강국 USA, 차이나, 재팬 뒤에 꼭 놈자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꼭 못난 놈들이 어디서 두들겨 맞고 술 쳐 마시면서 때린 놈을 흉보는 꼴과 비슷하다.
뒤에서 흉보다가 이들이 나타나면 오금이 저리는 듯한 몸짓을 하면서도 말이다.
특히 툭하면 차이나를 짱께라고 비웃는 것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떠든다.
짱궤이(사장)가 어원이라면 흉보는 꼴이 더 쪽팔릴 뿐이다.
오래전에 삼국사기를 읽다가 한국은 차이나의 속국이라고 김부식은 만 천하에
삼국사기를 지어 공표를 하였고 중화사관에 물든 강단사학은 대한민국 정사임을 공인하였으니
반도인들이 조공을 받치며 상전으로 모시던 대륙 차이나를 짱께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빙혼은 환단고기를 읽은 뒤에는 짱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환인제국과 배달제국을 이어 동북아 중심에 건국한 단군조선의 변방국가였던 지나가
쪽수로 대륙을 차지하고 대제국은 분열을 거듭하여 반도로 쫒겨난 이후 제 조상을 잊어버리고
하인의 나라 차이나에 동북아 주인의 후손으로서 조공을 받치던 것을 자랑이라고
삼국사기에 명시한 것이 대한민국 정사라고 한다.
없던 역사도 만드는 재팬인데
있는 역사도 부정하는 한국인들은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