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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대마도 여행12 - 이즈하라에서 조선통신사 막부 영접비를 보면서 옛일을 떠올리다!
2024년 1월 26일 대마도(對馬 쓰시마) 히타카쓰 (比田勝) 에 “히토츠바타고 렌터카” 에서 차를 빌려
에보시타케 전망대 에 올라 아소만을 보고 이어 만제키세토 (万関瀬戸) 운하를 구경한후 만제키
바시(万関橋, 만관교) 로 운하를 건너 남섬으로 달려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가네다성터 에 오릅니다.
그러고는 렌터카에 올라 면세점인 다이렉스 미쓰시마 에 도착해 쇼핑을 하고는 나와서
다시 5분쯤 달리니 드디어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쓰시마시의 시청
소재지인 이즈하라 (嚴原 엄원) 로 식당가 근처 운하 옆에 지온(祈園) 호텔 로
찾아가는데 대마도시에서 발행한 도시 안내도에 보니 식당 으로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호텔은 입구에 일본풍 냄새가 물씬 나지만 한국인이 주인 으로.... 건물은 1층은 카페이고 3층은
레스토랑이며 5층은 민슈쿠(民宿, 민숙) 인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 3년간 여행이 불가능
했던지라 그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배낭과 가방을 푼 후 지온 호텔을 나와
이즈하라 시내를 보기위해 골목길을 걸어 서쪽 운하에 이르러 가네이시 성터 로 방향을 잡습니다.
쓰시마 관광은 대부분 먹거리 관광 이나 면세 쇼핑 위주로만 진행되어서, 문화재 관광 측면은
우리 한국인이 접근하기 좀 어려운 편인데, 그래도 쓰시마섬이 지닌 고유한 역사성을
담은 특수한 문화재나 명승지가 제법 있으나..... 한국인이 찾는 경우는 많지 않은 듯 합니다.
한국인이 접근하기 용이한 문화재 중에 그나마 한국과 연관이 있는 문화재인 반쇼인(滿松院), 최익현
순국비, 가네이시(金石) 성터 와 덕혜옹주비 정도가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슈젠지(修善寺) 는 개인
사찰로 관광객을 받지않지만.... 저녁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최익현 순국비 정도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지온 호텔을 나와 이즈하라 시내를 보기 위해 골목길을 걸어 서쪽 운하에 이르러 가네이시 성터
로 가는데.... 이즈하라는 쓰시마섬의 경제 중심지로 모스버거, 티아라 몰 쇼핑센터 처럼 당일치기
쇼핑 여행도 가능하며, 북쪽 근교에는 미쓰시마에 드러그 스토어 도 있어서 면세쇼핑을 하기에 좋습니다.
이즈하라에는 인포메이션 데스크인 후레아이도코로 쓰시마, 반쇼인, 가네이시 성터, 하치만구
신사, 무가 저택거리,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아메노모리 호슈의 묘, 그리고
니시칸몬, 이사라비 공원, 이즈하라 하치만구 신사(巖原八幡宮神社) 와 고려문 등도 있습니다.
운하를 따라 걸어서 주택가를 지나니 넓은 터가 나오고 비석 이 하나 서 있어 읽어보니
문화8 (1811) 년도 朝鮮通信使 幕府 接偶の地 (조선통신사 막부 접우노지) 라고
적혀 있으니.... 그럼 1811년에 여기서 막부의 관리가 조선통신사를 맞이 하였나 봅니다.
가네이시성 은 직진해야 하지만, 왼쪽으로 가면 서산사(西山寺) 가 있으니 조선 통신사들이 묵었던 숙소 로
1589년 통신사 때 부사로 임명된 김성일의 시비 도 있어 한국 하고도 연관성이 있는 문화재 입니다.
쓰시마(대마도)는 80% 이상이 산지라 농토가 부족하니 쌀 생산량이 모자라는지라 왜구로 해적질에 나서 고려
와 조선 초기에 한반도를 노략질 했는데.... 고려 시대에 강화도가 함락 되고 수도 개경이 위협 을 받아
게엄령을 발동한후 수도를 철원이나 한양으로 옮길 논의를 하기도 했으니 왜구 침입은 무려 600회에 이릅니다.
왜구는 여기 대마도가 주력 이지만 그 외에도 이키섬과 북규슈의 5도 열도 에서도 성행했는데
한반도 뿐만 아니라 멀리 중국 명나라에도 침입해 내륙 깊숙한 쑤저우(소주) 등 중국
동남 연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중국 현지의 해적과 상인이며 빈농들이
대거 왜구에 가담했기 때문이니..... 한창 때는 왜구 중에 90%는 중국 현지인 이었다고 합니다.
견디다 못한 조선은 세종 1년에 상왕 태종이 3차로 대마도를 정벌 하기도 했는데... 마침 대마도 왜구
들이충남 해안을 노략질 하기 위해 떠난 탓에, 섬 사람들이 저항하지 않고 도주하니 빈 마을
인 이즈하라에서 수백척 배와 수천채 민가를 불태웠으나.... 산속으로 추격하다가 매복 기습을
당해 200명이 전사 한 후에는 바로 황급히 철수하니 무력으로 점령은 어렵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그래서 나온게 회유책 으로 대마도주에게 벼슬 을 하사하고 제포, 염포 및 부산포 3포 를 열어 1년에
세견선 3척이 오면 쌀과 콩 을 배에 가득 실어주고..... 또 3포에 왜관을 설치해 수백명의 일본인
들이 상주하면서 무역 을 하게 하니 대마도는 해적질 보다도 오히려 더 짭짤한 수입 이었습니다.
또 조선의 대마도 정벌도 있었고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과 친교를 맺으면서 통제하니 왜구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오닌의 난 이래 일본이 200여개 국가 로 나뉘어 밤낮으로 이웃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 전쟁으로 날을 지새는 혼란 이 120여년간 계속되다가, 마침내 오다 노부나가
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니..... 대마도는 히데요시에게 복속 합니다.
무려 120년간이나 혼란이 지속되던 일본을 무력으로 통일한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조선이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선봉 에 서서 길을 열라” 라고 지시하자, 대경실색한
소 씨는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의논해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 보고자 몸부림 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게 국서를 위조 하는 것으로, 저 말을 조선에 전했다가는 어림반푼도 없는 짓
이라, 표현을 일본이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길을 빌려달라” 라는 좀 온건한
말로 바꾸었으며..... 또 전쟁을 막기 위해 조선이 사신을 일본에 보내달라고 간청 합니다.
저 말을 하기 위해 조선의 한양에 온 대마도주 소씨는 신무기인 조총 2정을 조선에 선물 하는
"이적행위" 도 마다않는데.... 요즘으로 치면 스파이이자 매국노 로 지탄받을 일입니다.
경복궁에서 선조가 친히 보는 가운데 조총을 발사해 요란한 굉음과 함께 표적을 관통합니다.
이 위력적인 무기를 보고 선조가 선택할 것은 두가지로, 하나는 조총을 대량생산해 조선군
에 보급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랜 전란으로 일본군은 전투 기계 로 단련된
데다가 저런 위력적인 무기를 가졌으니 고개를 숙이고 일본에 화평사신 을 보내는 것입니다?
대마도주가 노린 것은 2번째로 조선이 참혹한 전쟁을 막기 위해 저런 선택 을 할것이라 내심 기대했지만
저런 끔찍한 광경에 놀란 선조는 "저 흉측한 물건을 치우라" 명하니, 그대로 군기시 창고로
들어가고는 끝 이었는데.... 당시 조선은 더 위력적인 대포에다가 총통들도 있었기에 시큰둥한 것입니다.
하지만 명을 치러간다며 길을 빌려달라면서 끈질기게 사신 파병을 요청하니 유성룡 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총대를 메어 1590년 3월 참 어렵게 통신사가 파견되어 오사카 에 도착했지만, 정작 히데요시
는 동쪽 가마쿠라에서 5대 100년의 영화 를 누리던.... 강력한 세력인 호조씨를 치러 출정 한 이후 였습니다.
1590년 일본을 거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쿄 입구인 오다와라성을 공격 하자 간토의
사타케 및 우쓰노미야 가문도 히데요시 편에서 참전하는데, 오다와라의 동맹국 으로
오슈 66개군중 30개 군을 평정한..... 동북의 패자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는 망설이게 됩니다.
호죠 가문 출신인 어머니가 출진을 재촉하다가 마침내 아들의 독살을 시도 하니, 분이 치민
다테 마사무네는 차마 어머니를 죽이지는 못하고 대신 어머니가 애지중지 아끼던 남동생
다테 코지로를 참살 하는데.... 이번에는 도요토미군의 아사노 나가마사가 출진을 재촉합니다.
다테 마사무네 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아이즈를 떠나, 요네자와를 거쳐 에치고와 시나노를
돌아 가이 를 거쳐 오다와라 에 이르면서 정세를 살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각지의 영주들이 대거 히데요시편에 참전한걸 확인 하고서야 히데요시군에 복속 합니다.
힘겨운 전투를 지속하면서 오늘 내일 하며 기다린 믿었던 동맹인 다테 마사무네가 히데요시에게 복속 하면서
오다와라성의 호조 우지마사 는 결국 히데요시에게 항복했고, 히데요시가 다테 마사무네의 거성 아이즈
까지 접수하니.... 비로소 123년간 지속되었던 전국시대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는 "일본 통일이 달성" 됩니다!
아들인 호조 우지나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 인지라 목숨을 건졌지만..... 아버지
우지마사(北条氏政) 와 삼촌 우지테루가 할복 을 하면서 남긴 절명시 입니다.
호죠 우지마사 : 吹きとふく風な恨みそ花の春 紅葉の残る秋あらばこそ
불고 또 부는 바람이여, 원통함은 봄날의 꽃과 같구나. 낙엽 흩날리는 가을은 오지 않으리니.
호죠 우지테루 : 天地の清き中より生れ来て もとのすみかにかえるべらなり)
천지간 맑은 가운데서 나왔으니, 원래의 살던 곳으로 돌아가리라.
하도 사신을 보내 달라고 해서 기껏 머나먼 길을 어렵게 왔건만 오사카에 도착해 몇 달을
기다리면서 지친 탓에 까칠한 김성일이 이런 무례한 자들을 보았나 하며 성을 내는
데.....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 전쟁 이 끝나고 일본을 완전 통일한 후에야 귀환 합니다.
마침내 히데요시는 교토에 지은 대저택 주라쿠다이(聚樂屋) 에서 조선 사신을 만나는데.... 사신이 귀환한
후에 조선 침략을 반대 하던 일본 다도(茶道) 의 창시자 센노리큐 千の利休 는 이 저택에서 할복하게
되는데, 히데요시의 지극한 총애를 믿고 교만해졌던가 봅니다? 그래도 참수가 아닌 할복은 특전 이지요?
귀국후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눈빛에 광채가 깃들어 지략을 갖추었고 통일한 직후라 자신감과 야심으로 쳐들어
올 것 으로 보인다." 며 방어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고, 반면에 김성일 은 "풍신수길의 행동은 과장되고 허세
에 가득 차 있었다." 라고 반대하니... 조정은 전쟁 준비의 고단함 이 싫은지라 침략은 없을 것으로 결론 짓습니다.
김성일 은 일본침략이 없다고 주장한데 대해 유성룡에게 말하길 "지금 남도의 백성 들은
소문만으로도 겁에 질려 집을 버리고 피난가는 백성들로 길이 미어터지니
이러다가는 일본이 침략하기도 전에 먼저 무느질 것이니 그걸 염려 하는 것 입니다" ...
실제로 조정은 이광을 전라 관찰사, 김수를 경상도 관찰사 로 내려 보내서 성을 수축하자
일꾼들은 도망치고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중지 하고 말았는데... 서울의 대신들이 재산
일부를 내놓고 그 자제들이 붓을 던지고 내려와 성 쌓는데 투입되었더라도 저리 되었을까요?
전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진 미카와, 스루가, 도토미, 시나노등을
몰수하고 대신에 호조가문 영지를 이에야스에게 주어 간토로 전봉 시키니, 에도성 을
거처로 삼은 이에야스 는 측근 오쿠보 다다요에게 오다와라성 을 주었는데.... 호조
가문은 우지모리가 가와치국 사야바번의 번주가 되어 호조 가문의 명맥 을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마사에게는 할복을 명하고 그 아들 우지나오 는 이에야스의 사위
임을 감안했는지... 간토에 1만석을 주어 다이묘를 유지 시켜 주었는데, 병으로 죽어
대가 끊기자 조상의 제사 를 위해 이번에는 그 사촌 우지모리 에게 다이묘직을 잇게 했던 것입니다!
조선도 전쟁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경상 감사 김수가 중단되기는 했지만 성을
보수 했고 전란 13개월전 부임한 이순신도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나 거기까지!
문신인 동래부사 송상현이 한 일이라고는 성 밖에 큰 나무를 옮겨 심어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성 내부가 보이지 않게하고 또 마름쇠 를 뿌리며 목책 을 세운 정도가 전쟁준비 라....
부산 좌수영 박홍과 통영 우수영 원균이 배를 불지른 이유는 조선은 16세 부터 60세까지 병역의무가 있으니
평시에는 일부만 소집 되어 수군으로 근무하는지라 전시에는 어민이나 농민을 소집해 승선 시키는데
배가 출항하자면 대포를 장착하고 쇠나 돌을 둥글게 깍은 포탄과 화약이며 장비를 실어야 하고... 또
활과 화살이며 창과 칼에 쌀과 부식, 솥과 그릇을 싣자면 시일이 필요한데 준비하는게 어렵다고 본 것이라?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 좌수영 박홍 이 적군의 기세에 겁에 질려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못하고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를 불지르고 수군을 해산한후 도망쳤으며, 동래성에 들어왔던
좌병사 이각 이 달아나는데도 장열하게 전사했으니 후세에 귀감 이 될 훌륭한 분 입니다만....
전쟁 준비라고 한게 부족하니, 군과 민간인이 처절하게 싸웠지만 전투시작 2~3시간만에 함락 됩니다.
영남의 주 성이 불과 2~3시간만에 어이없이 함락됐다? 그가 닷새만 버텨 주었더라면 대구에 모인 5만 제승
방략 군대 를 서울에서 내려온 이일 장군이 인수했을텐데.... 이일은 서울에서 병사 300명 을 얻지 못해
출발이 3일이나 지체되니 유성룡이 재촉해 5~6명만 데리고 오는데, 대구에 모인 저 군대는 서울에서 장수는
감감무소식이고 비는 내리는데 들판에 잘 곳은 없는데다가 왜군이 북상한다는 소문에 모두 흩어져 달아납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 13개월 전에 부임한데다가 여수는 부산과 통영 수영의 후방이니 전쟁준비를 했으나
경상우수영 원균은 전란 3개월 전에 부임한 탓에 예하 스무곳 수군진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고,
부산의 경상좌수영 박홍은 재임명돼 근무 4년차인데도 정보 수집은 물론 수군 훈련 도 전혀 한게
없는데.... 이는 왜군의 침략 규모를 15만이 아닌 1만명 정도로 잘못 예상했기 때문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산사(西山寺) 는 현재 숙박시설이라 숙박객이 아니면 경내를 구경할 수 없다기에 망설이는
데..... 세이잔지는 쓰시마에서 묵어볼 수 있는 특이한 숙소로 절간을 숙박 시설 로 활용하고
있지만 템플스테이 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민박 혹은 호텔 형태의 숙박이 기본이므로, 부담
없이 묵을수 있으며 또 대마도에 낚시 여행을 왔다면 낚시 민숙 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절에 묵을수는 없으니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그냥 직진해서 조금 걸으니.... 저만치 현대적인 건물인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 보이고 그 옆에 오래된 성벽이 보이니 바로 가네이시성(金石城) 자리 인가 봅니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에는 대마도의 역사유물을 전시하는 곳으로 한반도 양식의 세형동검
과 청동 거울 에 가야와 백제에서 전해진 청자와 불상, 17m 길이의 엄청 큰
조선통신사 행열도 가 있다지만..... 이미 저녁이라 문을 닫았으니 보지 못하는게 서운합니다.
역사민속자료관 오른쪽 위로 난 길을 올라가면 해발 600미터의 아리아케산 으로 오르는 산책로
로 정상까지는 2~3시간이 소요되며 이즈하라 주민들이 뒷동산에 오르는 산책 코스로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만든 성터 가 나온다고
합니다만.... 무느져서 돌담만 있지만 이즈하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니 전망 은 좋다고 합니다.
역사민속 자료관을 지나니 근사하게 생긴 문이 보이니 바로 가네이시 성의 누문 인가본데,
가네이시성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걸으면
이즈하라 하치만구 신사 (巖原八幡宮神社) 인데.... 일본에 하치만구라는 같은 이름의
신사는 매우 많지만 이즈하라의 하치만구 신사 경내에는 조선인과 관련된 사당 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 가 입양한 조선인 고아였던 고니시 마리아 와 아들이자
가톨릭 신부가 된 고니시 만쇼 小西マンショ 를 기리는 작은 사당이 유명하며..... 그 밖에도 인근
에는 에도 시대에 조성된 무가 저택 거리의 방화벽 등도 에도시대의 정경을 볼 수 있는 관광지 입니다.
고니시 만쇼 小西マンショ (Konishi Mancio 1600-1644) 는 에도 시대(1603년~)
초기의 일본인 가톨릭 신부 로, 아버지는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 이며
어머니는 조선인 고니시 마리아 (小西マリア) 외할아버지는 고니시 유키나가 입니다.
고니니 만쇼는 쓰시마에서 태어났는데.... 외할아버지인 고니시 유키나가 가문이 기리시단
이었던 것은 유명한 사실이고, 어머니 고니시 마리아도 가톨릭 신자 였으며....
거기에 대마도주로 아버지인 소 요시토시 도 장인의 권유로 가톨릭 신자 가 된 사람 입니다.
훗날 고니시 유키나가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처형되자, 쓰시마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소
요시토시는 부인인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 를 소 가문에서 내쫓았으니 마리아는 갓난 아들과
함께 규슈로 추방 되었고, 그래서 아들은 외가의 성씨인 '고니시' 를 따라 '고니시 만쇼'
가 되었으며...... 외가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 부터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614년 기베 시게카츠 (岐部茂勝) 등과 베트남의 일본인촌 호이안 과 말레이시아 일본인촌 말래카 를 거쳐
인도의 고아 주, 아프리카 희망봉, 포르투갈을 지나 로마 로 건너갔으니 고니시 만쇼는 1624년 8월 28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기 시작했고..... 1627년 사제품을 받아 신부 가 되었습니다.
고니시 만쇼 신부 는 1632년 귀국길에 올랐고, 일본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1644년 체포
되어 순교 했는데.... 고니시 만쇼 신부가 순교하고 난 후로 일본 내에 일본인
사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이후 메이지 시대까지 일본인 사제는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쓰시마는 1606년에 사망한 도주 부인 마리아의 원혼 을 달래기 위해 1619년에 신사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만쇼 신부 역시 순교 후 이 신사에 합사 되었지만, 당시 일본은 가톨릭을 극심하게
탄압하던 시절이라 이 신사는 겉으로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로 위장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만쇼 라는 이름은 5세기 로마 출신의 순교자인 에보라의 성 만치오 에게서 따온 듯 하니...
라틴어로는 Mancius 이고, 만치오는 유대인 상인에 의해 노예로 팔려 지금의
포르투갈인 에보라 까지 갔고, 그곳에서 주인에 의해 순교 했으며 축일은 3월 15일입니다.
기베 시게카츠 는 예수회 신부로, 세례명은 베드로이며 일본인 최초로 예루살렘 을 방문한 인물이기도 한데
1620년 사제품을 받았고, 일본으로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1639년에 순교 하였으며, 2008년 동료 순교자
187위와 함께 시복되어 복자가 되었으니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시기는 일본 보다 240여년 이상 늦습니다!
그런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조선인 양녀로는 저 고니시 마리아 말고도 오다 줄리아 가 있으니.... 1592년 4월
13일 왜군 제1 선봉장으로 독실한 기독교도 기리시단 에 속한 고시니 유키나가 는 흰 비단에 붉은색
십자가 가 그려진 깃발을 앞세운 채 1만 8,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했는데, 적국을 침략할
때 십자가 깃발 을 앞세우는 것은 십자군 기사들과 템플 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 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습니다.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는 1584년에 영세를 받았으니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 인데, 아버지는
요나단이고 어머니는 막달라이며 처는 쥬스타이고.... 대마도(對馬島) 도주 소 요시토시
(宗義智) 의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였으니 신앙심이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 으로 믿음의 가족 이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는 1543년 일본 큐슈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
의 전도를 받고 천주교를 허용 했는데, 사비에르는 로욜라 교황을 알현하고 교황청
중심으로 종교를 통합해야 한다는 의견을 승인받았으니,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가
구태하고 부패한 천주교의 최대 경쟁자로 떠오르자 예수회는 일본을 선점 하려고 했습니다.
예수회 창립 멤버 6인중 한 명인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는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조총(鳥銃) 을
전수했으니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부대 를 앞세워 일본 통일을 꾀했고... 1600년 일본인 중에는
60만명이 천주교 신자 가 있었으며 조선을 침략한 15만의 왜군 가운데는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 였습니다.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의 배후에 천주교 예수회 가 있다고 보는데.... 세스페데스
(Cespedes) 신부는 조선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이미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와 몇몇 장수들에게 조선침략에 대한 조언 을 바쳤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예수회 신부들 을 만나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게 되면
조선과 중국 전역에 교회당 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모두 천주교인 으로
만들겠다.” 라고 호언장담 하고는 드디어 1592년에 임진왜란 을 일으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의 군대에 종군한 세스페데스 신부 는 1593년 12월 27일 남해안 진해
웅천왜성(倭城) 으로 들어옴으로써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서양인 사제(司祭)
이며...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천주교에 귀의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161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 합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외에도 제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 그리고 고지마 쥰겐, 야마쿠사 다네모토,
소 요시토시 등이 모두 일본의 기리시단 (吉利支丹 Christian) 으로 잘 알려진 장수들이니
기리시단 부대는 십자가 군기(軍旗) 를 앞세우고 조총으로 무장해 조선 침략의 선봉 에 섰습니다!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 는 항해기 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왜 장군들은 전부(?) 그리고 사병들도
대부분이 천주교인 이었다.” 라고 썼습니다. 대영 백과사전 의 일본인 역사 편에서
블린클리 는 ‘부산에 상륙한 25만 왜군 중 최소한 10% 이상이 천주교인 이었다.’ 라고 적었습니다.
예수회 가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조직이라는 사실을 안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임진왜란이
끝난후 1600년 이후에 일본에서 천주교인들을 씨를 말리기 시작하니... 260년간 계속된
기리시단의 박해 로 시마바라의 난 이라고 천주교인 영주와 신자 4만명이 반란 을 일으켰으나
에도막부 시기에 조직적 학살 로 이어져 박해가 끝난 19세기에 신도는 2만명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는 조선인 전쟁 고아 소녀인 “줄리아” 를 규슈 우토성 (宇土城) 에 데려가
처인 쥬스타에게 맡기니..... 1596년 5월 베드로 모레홍 신부에게서 세례 를
받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후궁의 시녀가 되었다가 절해 고도인 고즈시마
(神津島) 에 유배 되어 죽는데, 지금도 매년 5월 셋째주 토,일요일 “줄리아 축제” 가 열립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살을 금한 기독교 교리 에 따라 무사들의 영예인 할복을 거부하고 처형 되니
줄리아는 에도성에서 슨푸성(靜岡) 으로 이주하는 이에야스를 따라오는데, 1612년 그리스도교
종교 배척시 이에야스는 줄리아에게도 배교 를 종용했으나 따르지 않자 절도에 유배 되었습니다.
“오다 줄리아” 가 유배생활을 했던 도쿄 남쪽 고즈시마(神津島) 는 매년 5월 셋째주
토일요일 “줄리아 축제” 를 열고 있으니, 성당과 고즈시마 마을에서 주관하는
연례 행사로 도쿄에서 180km 떨어진 뱃길 인데도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일본의 밴드“서던 올 스타스” 가 작사· 작곡한 노래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입니다.
돌아가라 나의 푸른 새 메마른 느릅나무의 가지 곁으로
네가 없는 오오 세상 속은 아침 해 조차 떠오르지 않아
불타라 여름의 십자가 남쪽하늘 높이
밤의 어둠을 비추는 별자리는 눈물의 상들리에
마치 무지개처럼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사랑의 끝을 알리듯이 찢겨진 나의 로자리오
조선땅 진해 에서 일본 병사들에게 미사 를 집전했던 세스페데스 신부 는 조선에서
잡혀간 10만에 가까운 전쟁포로 중에서 노예가 되어 마카오등지로 팔려가는
조선인 남녀 2천여명 을 구출하여 영세 를 주고 가톨릭 신도 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카오 에서는 조선인 포로 들이 넘쳐 나는지라... 흑인 노예 한명이 조선인 7명 값 이었다는데
세스페데스가 구해 세례준 조선인 중에 전도사 가 된 사람도 많았으나 가톨릭 박해 가
심하던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거의 죽음을 당하였으며 신부는 1611년 나가사키에서 죽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Luis Frois) 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를 직접 만나며...... 30여년을 왜국에서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들은
사실을 기록한 일본사(日本史) 라는 책에서 조선인을 ‘이교도(異敎徒)’ 라고 기술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는 임진왜란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를 ’성모(聖母) 를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느님이 쓰시는 칼’, ‘임진왜란을 하느님의 성전(聖戰)’ 이라고 찬양하며
적었다지만, 내가 한글판 책을 직접 구입해 읽어보니 저런 구절은 보이지 않아 의아 한데... 라틴어 판을
일본어로 번역한건 12권에 이르며 한글 번역본은 4~5권을 대상으로 300페이지 정도 단 한권에 불과합니다.
그는 또 일본사(日本史) 에서 “히데요시는 인물됨이 하찮았지만 신부들은 ‘하나님의 칼과 채찍’ 이라 꼬드겨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 왜란 때 제1군 선봉장 고니시는 세례를 받고 예수회를 광신하는 자 였던 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때 고니시를 제1군 선봉장으로 신임한 것은 예수회 이기 때문이었다.” 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Luis Frois)가 지은 일본사(日本史) 를 읽으면 예수회의 조선 진출
야욕과 맞물려 임진왜란 이 일어났다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인데.... 그리고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일본사를 맺습니다. “이리하여 7년에 걸친 조선 전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전쟁은 우리(왜인) 천주교도들의 커다란 노고와 비용 지출 위에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천주교도 영주 들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 도 있었다. ”
“하느님은 진실로 선하신분 이므로 성스러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적들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승리에 관한 가장 기쁜 소식 을 이제 머지않아
접하게될 것으로 믿는다. 1598년 10월 3일 나가사키에서. 성스러운 주 하느님의 심부름꾼”
가톨릭 예수회의 열렬한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쌍벽을 이루며 불구대천의 앙숙이던 가토 기요마사 는
일연종(日蓮宗) 즉 법화종(法華宗) 의 신도 였으니 제1 선봉대인 고니시의 군대가 십자가 를 내세웠다면,
제2군 가토의 군사들은 남묘호렝게교 (南無妙法蓮花經 남무묘법연화경) 라는 깃발을 앞세웠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 믿는 종교가 다른 이교(異敎) 의 사상으로 사사건건 배척하고 반목 질시 하면서 경쟁을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인 두 장수의 경쟁적 야심 을 이용해서
조선의 한양 선점(先占) 과 선조의 포획을 부채질 했습니다. 제3군 수장인 구로다
나가마사 역시 천주교 신자 였으니... 그는 조선에서 5천 500개의 코를 베어 일본에 보냅니다!
그 덕분에 구로다 나가마사는 전후에 후쿠오카번 을 얻습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