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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종래의 예언자나 지도자들과 뚜렷이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유다인들의 특기였던 이분법적인 가르침, 과도한 흑백논리, 폐쇄성과 편 가르기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선민 사상에 깊이 빠져, 자신들만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요, 나머지 사람들은 개보다 못한 이방인 취급을 했습니다. 자신들은 구원의 뜰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방인들은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두드러진 특징이 개방적이요 통합적이라는 것,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절대 단편적이거나 편향적이지 않고 지극히 보편적이고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잔뜩 사로잡힌 유다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은 사실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섬기고 경배할 것인지? 동료 인간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피조물과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잘 안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에 대한 과몰입입니다. 율법이 포함하고 있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은 뒷전이고, 오로지 율법 한자 한 획에 과몰입되고 혈안이 된다면 바로 율법 지상주의입니다. 율법 전체를 바라보고, 핵심 정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율법의 세부적인 항목의 준수 여부를 이웃들에게 강요할 때,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 지상 주의와 관련해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또 있습니다. 지나친 성전 중심주의입니다. 물론 성전과 성막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살아 숨 쉬고 계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역시 거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좁디좁은 성전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당신 발길 닿는 모든 장소가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세리 두목이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성대한 잔치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자세로 앉으셔서 포도주잔을 기울이시고 그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세리 두목의 집이 거룩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하루는 갈릴래아 호숫가 한적한 풀밭에 오 천명이나 되는 굶주린 백성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미사를 거행하신 것입니다. 풀밭을 성전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군사들에게 체포되신 에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시다가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비린내 나는 골고타 언덕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여기저기 수많은 성당과 예배당 안에도 거처하시지만, 너무나도 당연히 주점에도 현존하시고, 노래방에도 현존하시고, 식당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 모든 장소가 거룩한 성전입니다. 물론 그곳에 비록 때 묻고 남루하지만 거룩함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말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성경에도 어머니가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기 성경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누가 가장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하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아버지는 하느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성경에도 어머니도 있지 않을까요?
성경을 대하는 첫 번째 단계는 성경에 어머니는 없다고 여기는 부류가 있습니다. 자신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교만해 하는 부류입니다.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부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설명해 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에 어디에도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는 말은 없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고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에게 대한 배신이기도 했지만, 먼저 모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소용없음을 알고 십계명 판을 깨버렸습니다. 여기서 보면 성경의 어머니는 모세처럼 보입니다. 모세에게 순종 하지 못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도 당연히 순종 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경 해석의 도움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곧 계명이 쓰인 책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계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나아만과 같은 인물이 그런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 나병이 고쳐지기를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그런 시시한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를 도와준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부하들이었습니다. 부하들은 나아만이 더 어려운 일을 시켰으면 했을텐데 쉽다고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를 설득합니다. 나아만은 부하들의 도움으로 몸을 씻었고 나병이 나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는 엘리야의 하느님을 믿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 하면 그러한 표징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지켜지게 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진정한 성경 해석자는 성경 말씀을 본인도 지키고 다른 이들도 그대로 지키라고 가르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에게 먼저 순종 할 수 있어야 말씀에도 순종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경 해석자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단계입니다. 참 어머니를 찾는 일은 쉽습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쪼개져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솔로몬이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싸울 때 진짜 어머니를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아기를 쪼개보라고 할 때 그것에 반대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라면 그래야 합니다.
여기에서 개신교의 성경 해석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는데 하늘 나라의 열쇠를 지닌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가 당신의 살과 피가 되는 예식을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예식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진짜 당신 살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 핵심적인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성경을 쪼개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라고 교회를 파견하셨지만, 사람이 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어머니가 모세이고 성경의 어머니가 가톨릭교회임을 잘 압니다. 성경 계명의 일점일획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문제는 진리가 인간의 이해력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 했지만, 신약에서는 안 받아도 된다고 교회가 정하였습니다. 그러니 한 부분 만을 잡아서 그것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면 이단에 빠집니다. 더 나아가 성경에는 피를 먹지 말아야 하지만, 지금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선지해장국을 먹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 있는 해석자를 만나지 않으면 성경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성경을 줬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면 십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정경화 과정’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교회가 생기고 교회가 그것을 정리하여 구약과 신약의 정경을 정하였습니다. 가장 처음 정해진 해가 서기 397년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거의 400년이 지나서 정경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을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도 교회를 “진리의 기둥”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 것은 맞지만,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지 구별이 되지 않을 때 그 진리를 바로잡아주는 가장 완전한 권위의 해석자가 교회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려움이 있을 때 성경이 아닌 교회에 의지하라 합니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그 해석자는 분명 하느님의 가르침을 최대한 실천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의 ‘정경화 과정’이 중요한데, 그 과정에서 교회가 권위를 가지고 정경을 정하였습니다. 신약이 27권임을 인정한다면 이는 그렇게 정한 교회가 말씀을 해석할 완전한 권위를 가졌음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성경 해석자들은 분명 성경의 일부분을 잘라버립니다. 어쩌면 십일조를 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강조하지 않는 가톨릭교회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교회는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 시각으로 온전히 성경에 순종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으로 그 해설자의 권위가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성경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기에 가장 마지막 예수님께서 지향하셨던 계명들이 가장 충실한 교회가 진짜 성경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셨다.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중요하다. 이 책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 하느님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그에 따라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표현이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절)는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으로,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시기를,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만 끝난다면, 우리가 맞는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고등학교 때 처음 타자기를 보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는 보편화되지 않았지요. 따라서 타자기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직접 타자를 쳐보면서 종이에 글이 찍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책을 출판하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자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타자 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두 손가락만을 이용한 독수리 타법이라서 1분에 3~40개의 단어만 띄엄띄엄 타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실력을 향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두 손가락의 독수리 타법으로는 실력 향상이 불가능했습니다. 저의 이 독수리 타법을 본 누군가가 양손을, 그러니까 모든 손가락으로 타자를 하면 속도가 빨라진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계속된 연습으로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또 타자기 자판도 모두 외우면서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했습니다. 한때, 1분에 800타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두 손가락만 사용하는 독수리 타법만을 고집했다면 실력 향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면서 비로소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과거의 방식에만 매여있으면 어떤 발전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너무 다른 이 현재를 살면서, 이 현재에 맞게 신앙생활도 계속 변화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때가 좋았어.’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과거에만 매여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만을 강조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조항은 모두 613개에 이르지요. 사실 이 조항 613개를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또 이를 다시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이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여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사랑은 보지 않고 613개의 조항만을 봅니다. 사랑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녹아 들어갔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삶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르누아르).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신명4,9)
생명의 말씀 한마디가
우리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와
평생 떠나지 않고
우리 곁을 지켜준다네.
때로는
지친 마음이 기댈 수 있는
너른 바위가 되어주고
때로는
상처 난 마음 구석구석을
어루만지는 약손이 되어주고
때로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되어준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가장 불행한 이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일 겁니다.
율법이라는 그릇에 사랑이 담겨있지 않으면
그 율법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사제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직업 사제로 전환되어
영혼 없는 말들을 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지키고
내 안의 반석 위에 단단한 믿음의 성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사제가 되기를 청합니다.
저는 길이신 하느님 안에서
길을 찾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찾고
생명이신 성령 안에서
사제의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남은 사제의 삶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곧 율법의 완성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7)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 19)
알지 못해
아픈 것이 아니라
살지 못해 아픈
하느님 말씀과
율법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말씀이 새롭게
돋아나길
기도드립니다.
깍고 다듬어야
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제마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사순의
아픈 시간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율법은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제대로 실행하지
않기에 아프고
힘겹게 다가옵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지않고서는
지키고 가르치는
이모든 일들이
결코 기쁨이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말씀과 율법은
스스로를 위한
스스로의 것이
되어야합니다.
살아가야 할
가장 분명한 이유는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관계에 있습니다.
말씀과 율법을
우리 삶안에
새기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말씀과 율법에서
하느님 마음을
느끼는 사순되십시오.
8)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율법의 완성인 사랑!'
오늘 복음(마태5,17-19)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이 율법은 세상 끝날까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율법의 계명들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으로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더 나아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뜻이자, 계명들이고, 하느님 그 자체'입니다.
이 율법이 전하는 핵심이자 본질은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으로 이끄는 '사랑'입니다.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사랑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의 핵심과 본질보다는 율법의 글자나 형식에 머물러 있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핵심과 본질에 머물러 계셨던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로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대했던 그들에게, 그리고 보여지는 형식과 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과 수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당신처럼 율법을 완성할 것을 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새 율법)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날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갑시다!
복음 말씀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