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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묵상글 ( 연중 제26주간. - 바뀌어야 하는데. 등 )
*** 07:22.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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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10.01 07:04
- 바뀌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오늘 복음에서 “생각을 바꾸어”를 묵상하다가 그 묵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도 있지만 생각이 바뀌는 것도 있지요.
생각뿐 아니라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마음이 바뀌기도 하고,
비슷한 뜻으로 관심이 바뀌기도 하고 관심을 바꾸기도 합니다.
겉모습 면에서도 모습이 바뀌기도 하고 모습을 바꾸기도 하는데
성형수술로 자기 모습을 바꾸기도 하고 살면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되는 변화에는 바뀜과 바꿈 두 가지가 있는데
바꾸는 것이 능동적인 변화라면 바뀌는 것은 수동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생각에 이어 ‘Turning Point’라는 말도 떠올랐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누구에게나 있지요.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에게는 나환자와의 만남이 전환점이었지요.
이때를 전후하여 나환자를 만나는 것이 쓴맛에서 단맛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세속에 맛 들이고 살던 삶이 세속을 떠난 삶으로 바뀌었으며
그래서 프란치스코 스스로 이때부터 회개의 삶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에게 전환점이 사실은 이 사건 하나가 아닙니다.
첫 번째 전쟁에 나가 포로가 되고 감옥살이를 한 것이나,
그 후유증으로 병이 들어 죽다가 살아난 것이나,
회복 후 다시 전쟁터로 가다가 스뽈레또에서 환시를 본 것도 다 전환점이 됐지요,
그런데도 나환자의 만남이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그가 말하는 것은,
스스로는 시작도 못 할 회개를 주님께서 하게 해주셨다는 강렬한 체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그러니까 능동적으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욕망이나 불의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 좋을 대로 하던 것을 하느님 원하시는 대로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또는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또 기쁘게 합니다.
우리가 바뀐다면 이렇게 바뀌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바뀌게 해주신 것을 이제는 스스로 그리고 기쁘게 살아가야 하는데
나는 바뀌기는 했는지 어떻게 바뀌었는지 오늘 독서와 복음은 돌아보게 합니다.
큰아들처럼 하느님 뜻을 적극 거부했으나 마음을 바꿔 적극 실천하는 나인지.
작은아들처럼 하느님 뜻은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관심이 없는 나는 아닌지,
또는 옛날에는 참 잘 살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제는 어디 갔다 오다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 30대 여성이 길을 가면서 길가의 쓰레기를 줍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부끄러워하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줍고 있었습니다.
즉시 저를 돌아보게 하였지요.
옛날에 저도 그렇게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길거리 청소하는 분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그 많은 쓰레기를 어떻게 내가 다 줍겠냐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저는 좋게 바뀐 것이 아니라 나쁘게 바뀐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독서의 말씀이 저를 아프게 합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회개 곧 돌아서야 하는데
불의에서 정의로 돌아서지 않고 오히려 정의에서 불의로 돌아선 것은 아닌지,
주님께 돌아서야 하는데 나에게로 돌아서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저희 집 인터넷에 문제가 생겨
이곳 센터에 일찍 와 강론을 올리느라 늦어졌습니다.
그 사이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문자들을 보내셨는데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강론을 못 올리거나 늦게 올리면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과 내일은 제가 강론을 올리지 못합니다.
인터넷이 없는 곳에 가기 때문입니다.
역시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어제 한가위 인사 드리지 못했는데
오늘이라도 한가위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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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은 자신의 영혼의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4가지 기준을 제시하여 질문합니다. 바오로가 이 서간을 쓸 때, 앞으로 어떠한 판결을 받을지도 모르는 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서간은 통상 에페소서, 콜로새서, 필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간’으로 불리웁니다. 그러기에 이 옥중서간은 일상에서 힘을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얻는지, 위로를 어디에서 찾는지, 무엇으로 말미암아 사람들과 사귀는지, 마지막으로 어떠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지 우리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게 합니다.
첫번째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질문을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복음적 열정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감옥생활, 냉대와 학대, 매맞음, 죽음의 위협, 병고, 배고픔 , 추위, 영적고통 등 여러가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내롭게 견뎌 낼 수 있는 힘은 단지 그리스도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가 체험한 그리스도 신앙이 우리의 힘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듣는데서 비롯됩니다. 들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기회가 좋든 나쁘든 슬플때나 기쁠때 늘 항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입니다. 위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믿음과 사랑은 일맥상통합니다. 믿음이 있기에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기에 믿을 수 있습니다. 참된 위안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위로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먼저 수반되는 것은 이웃사랑과 자기사랑입니다. 자신을 존경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참된 위안이 있습니다.
세번째로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무엇보다도 성령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사람을 살리는 ‘살림살이’ 사귐을 해 나갈 때 성령의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살림살이는 다음의 질문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입니다. 한마디로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비를 지닐 때 사람을 살리게 합니다. 자비의 마음이란 다른 이의 기쁨과 고통을 나의 것처럼 받아들이고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영혼의 건강을 위해 주님의 영, 즉 성령을 지니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주님의 영, 성령의 식별기준을 제시한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상기합니다.
“하느님의 종이 주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를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 주님이 그를 통하여 어떤 선을 행하실 때 그의 육신은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인간의 육신은 항상 모든 선을 거스르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천한 자로 여기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작은 자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파리의 “빌레(Billets) 가(街)”에서 있었던 성체모독
프랑스-1290년
1290년 한 가난한 부인이 파리의 빌레 가 (Billets- Strasse)의 어느 유태인에게 매우 예쁜 그녀의 옷을 저당잡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 옷을 다시 찾으려고 했을 때, 전당포 주인은 부인이 지불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가격을 요구하였다.
그 때 그 유태인은 그녀에게 만일 그녀가 받은 성체를 가져다 준다면 돈을 치르지 않아도 그 옷을 돌려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양심이 없는 이 부인은 하느님을 도둑질하는 무서운 짓을 범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부활절 성찬식에 참석하여 그 성스러운 성체를 몰래 감추어 가지고 나와 그 성체를 빌레 가(街)로 가져갔다.
그 가련한 상인은 증오에 가득차서 성체를 탁자 위에 놓고 칼로 여러 번 찔렀다.
그 때 그 칼에 찔린 성체에서 즉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놀라운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 하느님의 모독자는 참회하지 않고 망치를 가져와 성체를 탁자에 못박았다. 여전히 더 많은 피가 계속해서 흐르자, 그는 놀란 나머지 하던 짓을 멈추더니 이번에는 그 성체를 불 속에 던져버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성체는 전혀 불에 타지 않은 채 불 속에서 저절로 나와 방안을 떠다녔다. 그 때 하느님을 모독한 그 사람은 성 체를 다시 싸가지고 물이 펄펄 끓고 있는 솥에 넣었다.
그러자 물은 곧 피처럼 붉은 색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그 성체는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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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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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의 믿음도 익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 ‘회개의 행동’와 ‘믿음의 행동’에로의 초대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음의 뉘우침만 있는 회개가 아니라 ‘행실로 돌아오는 회개’와 말로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행하는 믿음’에 대한 촉구입니다.
<제1독서>는 그릇된 견해로부터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를 당하게 되자,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자신들을 벌하시는 하느님은 공정하지 않고 복수심이 많아 자신들을 멸하신다고 여기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에제케엘 예언자를 보내시어 그들을 그러한 그릇된 견해로부터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정하지 않다는 말이야?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27.32)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의 불화에 대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면서, 예수님의 낮춤과 순명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대한 순종으로 누리시는 영광을 필리피 신자들이 깨닫기를 촉구하며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지 그 상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의 재정수입과 권위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지 추궁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위에 대해 반문하시고 이를 대답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는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간 아들과,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서도 일하러 가지 않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예수님께서는 ‘누가 “예”라고 응답한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은 “예”라는 응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응답에 따르는 ‘순명의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당신의 양식’(요한 4,3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야고보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26)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계명을 매일 행동으로 채워라.”(4,63) 하시고, 창설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성인은 ‘실행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았으며, 말한 바는 모두 실행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실행’에 대한 주제를 대할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니, 히틀러 암살에 연루되어 처형된 예언자적 신학자인 본회퍼입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너무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존경받는 이들이었고, 직업적, 형식적으로 이미 부르심에 응답한 의인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의 잘못보다 남들의 허물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어쩌면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창녀들은 그 당시 천시를 받던 이들이었고, 드러난 자신의 죄를 항상 부끄럽게 여기며 사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남들의 허물보다 자신들의 잘못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곧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들과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종은 이런 풍자를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기 같은 죄인이 천국에 오다니 하고 놀라고, 둘째는 교황, 주교, 신부들, 독실하기로 유명했던 신도회장들이 천국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놀라고, 셋째는 평소에는 소위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천국에 많이 와 있는데 놀란다.”
이러한 말씀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마태 21,32)
끝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겠느냐?”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주님!
당신의 뜻을 제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응답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실행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당신 의로움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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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엄마가 보고 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시길 희망합니다.
순종한다는 것,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대로 하겠다고 말해놓고 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 사람은 말을 잘 듣는다.’고 하면, 귀로 듣는 것을 뛰어넘어 행동으로 옮겼을 때 말을 잘 듣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의로운 길을 가르치는 요한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했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한의 말을 “믿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믿었기에 그분의 뜻에 순명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귀로 들었으면 그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말씀을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1).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은 그야말로 “폭탄선언”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전포고”로 들렸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고, 스스로 내로라하는 사람으로 뽐내고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머리가 큰 것이 아니라 가슴이 따뜻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손발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세례자 요한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자신들의 세속적인 권력과 인기와 명예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요한을 기피 하였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였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싫습니다.” 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또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면서 시원스레 대답만 하고 행동으로는 딴짓했습니다. 말만 있고 실행이 없으면 더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신뢰하고 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못 한다고 하면 다른 방안을 강구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밭에 나가라고 했습니다. 긴박성을 말해줍니다. 아들이 무슨 계획이 있든지 그것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함을 암시합니다. 순명은 미룰 일이 아닙니다.
사실, 선이 무엇인지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 말을 잘 듣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결정적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 집은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마태7,24-27참조). 우리는 결정적으로 심판의 폭풍 속에서도 든든히 서 있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주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자기가 취해야 할 태도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작 들어야 할 사람은 듣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은 끝내 뉘우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극약처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인 취급하고 무시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흉보고 험담하며 욕하지 마라. 먼저 자신을 속이는 네 마음속을 봐라. 머리와 입술이 빠른 사람은 마음이 늦습니다. 그래서 알고도 거부합니다. 그것이 교만이고 불순명입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는 사람은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와 같습니다.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도 기름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은 쓰레기와 같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민첩하고 신속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행동이 없으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고, 시작은 아무리 늦어도 빠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학교에서 반 ‘급훈’을 응모하였는데 ‘엄마가 보고 있다.’가 뽑혔습니다. 이걸 제안한 친구는 수업 중에 장난을 치다가도 이 급훈을 보면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집을 떠나 외지에서 공부하는데 엄마와 찍은 사진을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그 방에 놀러 왔는데 한 아이가 책상 위의 사진을 엎어놓으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엄마가 나가셨다. 신나게 놀자.”
누군가 보고 있으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쳐다볼 때 자기도 모르게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 사람의 길은 주님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분께서는 그의 모든 행로를 지켜보신다”(잠언5,21). 사람에게 인정받고 잘 보이려 하지 않고 주님 눈에 꼭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언제 행할 것인가? 미루지 않길 바랍니다. 제일 적당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할까 말까?’ 할 때는 ‘하고’, ‘갈까 말까?’할 때는 ‘가자.’ 미루지 말고 지금!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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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9년 8월 21일에 서울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어느덧 4년이 넘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제게도, 우리가 머무는 세상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2020년 9월 10일 어머니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당시는 코로나 팬데믹이 심했기에 저는 뉴욕에서 연도와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 홍보를 다닐 수 없을 때입니다. 브루클린 한인성당에서 미사를 부탁하였고, 저는 기꺼이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코로나는 끝났지만 한인성당을 위한 미사는 3년이 넘게 다니고 있습니다.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동료사제들과 진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함께 자전거도 타고, 캠핑도 가고, 여행도 다녔습니다. 동료사제들과의 대화는 코로나를 견디는데 위로가 되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올해는 지난 3년 동안 가지 못했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덕분에 4면 만에 한국으로 가게 되었고, 어머니가 있는 추모관엘 다녀오려고 합니다. 지나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들입니다.
지난 4년 세상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역시 ‘코로나 팬데믹’입니다. 코로나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인류는 코로나를 겪으면서 깊은 성찰을 하였습니다. 인류의 지성과 과학적인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허망하게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박해의 엄중함 속에서도 계속되었던 미사가 멈추었습니다. 코로나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시 멈추자 자연은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오염되었던 대기가 정화되었습니다. 중요한 것보다 소중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폭염, 가뭄, 산불’의 삼종세트가 지구촌 곳곳을 찾아왔습니다. 학자들은 이제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열대화’를 이야기 합니다. 지구가 끓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지구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촉구하였습니다. 일본의 오염수 해양 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지 말라고 촉구하였습니다. 바다는 ‘생명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쓰레기 처리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지구열대화는 ‘회개’를 촉구하는 표징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사는 방법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업적을 보고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를 보고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십니다. 비록 잘못했다 해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과 죄의식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포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돌아와서 뉘우치면 상을 주십니다. ‘난 안 돼!’ 이 생각과 말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악의 큰 유혹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아픈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든 하느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부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비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맏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둘째 아들은 말은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실천입니다. 신앙은 생각이 아니고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비록 죄인으로 여겨지지만 ‘세리와 창녀’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하느님께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당에서도 많은 기회가 주어집니다. 대림과 사순시기에 특강이 있습니다. 성령기도회에서 피정을 준비합니다. 각 구역과 레지오에게 성당 청소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우리가 조금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께로부터 상을 받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택은 언제나 우리의 몫입니다.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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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여러분은 첫째 아들입니까? 아니면 둘째 아들입니까? 자신을 볼 때 첫째 같습니까? 아니면 둘째 같습니까?
복음은 첫째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첫째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마음을 돌려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주님이 ‘사랑해라, 나누어라.’라고 하신 그 말씀을 듣고 ‘내 코가 석 자인걸, 혹은 내가 나눈다고 누가 알아주겠어?’라는 마음이 들었을지라도 다시 한번 사랑하고 다시 한번 나눔을 실천하려 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둘째 아들의 모습도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말로는 따른다고 하나 그렇게 실천하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 좋은 말씀이지,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또 용서하고, 좋고말고, 그런데 난 싫어, 누가 날 사랑해 주었나, 누가 내게 도움을 주었나? 그러니 좋은 말씀이긴 한데 그냥 예수님 말씀이지 뭐.’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리와 창녀가 첫째 아들로 비유되었습니다. 잘 들여다보십시오. 잘 보십시오. 우리에게도 어둠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도 꼭 창녀와 같은 생각과 마음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리와 창녀들은 요한을 받아들입니다. 요한의 말이 하느님의 말이라 믿었습니다. 그에게 세례를 받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그들 삶의 자리에서는 거의 불가능할지라도 말입니다. 세리는 공정하게, 창녀는 자기 삶에서 벗어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그들을 천국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세리와 창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내 모습임을 하느님 앞에 인정하고 하느님께 겸손함의 마음을 봉헌하십시오.
첫째 아들처럼 우리가 다시 돌아서기를, 그렇게 하늘나라를 향하여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부님은 월드컵입니다.
벌써 두어 달은 지난 이야기입니다.
저는 동기 신부님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신부님이 얼마 전 외국으로 사목을 떠났습니다.
그 동기 신부가 있던 본당에서 그곳 신자분들과 송별회 중 한 신자분께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부님은 월드컵입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월드컵 4강이요. 생애 처음이고 마지막인 월드컵 4강이요.
우리 신부님도 제게는 그런 존재입니다.
제 생애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너무나 좋은 신부님이십니다.
그 순간 저는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그 동기 신부님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따뜻한 사제로 살아주어서 말입니다.
지금도 외국에서 열심히 살고 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오늘은 그 친구와 따뜻한 연락을 취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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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컴퓨터를 만진 지가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 컴퓨터를 접할 때만 해도 비싼 게임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 되었습니다. 특히 모든 글 작업과 강의 자료 등을 컴퓨터 안에 담아두기에 컴퓨터는 제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1999년에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모든 자료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하드디스크 손상으로 애써 써 놓았던 글과 자료들이 모두 없어진 것입니다. 몇몇 데이터 복구 가게에 들렀지만, 어느 곳에서도 복구할 수 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뒤에 데이터 백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보조 하드디스크에 계속해서 저장을 해두었습니다. 물론 그 뒤로 한 번도 하드디스크 손상으로 데이터를 잃어버린 적은 없었지만, 지금도 뜻밖의 상황을 대비해서 계속해서 백업합니다. 특히 요즘에는 보조 하드디스크뿐만 아니라 웹 하드에도 보관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바라보며,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떠올려 봅니다. 아직도 멀었다고 하면서 조금의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사실 아무도 알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또 하느님 나라에 재물을 쌓는 노력을 평상시에 계속 해야 합니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갑작스럽게 다가올 그날과 그때에 크게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백업이 중요한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계속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재물을 저장하는 가장 큰 준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맏아들은 처음에 싫다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작은아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습니다.
이 두 아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안에 있습니다. 열심히 주님 뜻을 따르겠다는 말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있고,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당장 따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제들과 원로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반대로 세리나 창녀들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단순히 성당에 다니는 것만으로 또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으로 평가받았던 사람이라도 주님의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깝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뜻을 계속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재물을 지금 당장 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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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고 작은 것에 깃드는 법이죠(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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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인 예수님
-사랑하라, 배우라, 실천하라-
“극한기후에 과수 몸살... 품종, 재배, 보험 종합처방 시급”
금주 농민신문 일면 톱기사입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힘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수확의 기쁨을 맛봐야 할 과수농가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합니다. 봄철 저온피해에 여름철 폭염, 집중호우가 9월까지 반복되면서 사과, 복숭아, 포도, 대추 등 과수에 병충해가 확산되어 수확할 게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톱기사 제목을 삶에 빗대어, “극한상황에 사람들 몸살...삶의 종합대책 시급”이라 말마디를 바꿔보니 그대로 통하는 듯 싶습니다. 과수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 역시 극심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여파로 너무 피폐해져있기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싶습니다. 참으로 깨어 전반적으로 삶을 추슬러야할 때입니다. 몇가지 예화를 나눕니다.
예전 피정지도중 미사를 드리기에 앞서 제의방에서 인사하고 나오려는 순간, 인사할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어, 잠시 당황했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인사할 “삶의 중심”인 십자가의 예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난감했던 순간도 잊지 못합니다. 신자 자매가 믿지 않는 분과 갑자기 내방했고 신자분은 말씀처방전을 써드렸는데 믿지 않는 자매는 성서를 아무리 찾아도 써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니 성경 말씀 전체가 무의미하겠기 때문입니다. 결국 써드리기는 했지만 별 느낌이 없는 듯 했습니다.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라 고백하는 신자들에게 이런 불신자들과의 교류도 때로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10월1일은 주일이기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1873-1897) 기념미사”는 봉헌하지 않습니다만 성녀의 임종어가 문득 생각납니다. 혼란하고 피폐한 삶을 추스르는데 임종어를 묵상함도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임종어에 성녀의 삶전체가 요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897년 9월 30일 저녁, 만24세 꽃다운 나이에 병환으로 선종을 맞이한 성녀의 임종어입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주님 사랑으로 일관한 평생 아름답고 거룩한 삶이었음을 요약하는 임종어입니다. 작년에 선종하신 교황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임종어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임종어는 무엇이겠는지요? 얼마전 9월8일 선종한 개신교 종교학자 길희성 석학(碩學)의 임종순간의 일화도 소개합니다.
-‘이진권 목사님이 병상에 누워있는 선생님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을 때 선생님은 갑자기 두팔을 들어 허공을 몇 번 가리키시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셨다. 하지만 그중에 한마디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사랑하셨던 에크하르트는 “우리 평생의 기도가 ‘감사합니다.’ 오직 하나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그 말을 마지막 기도처럼 남기고 지난 8일 신비의 세계로 돌아가셨다.’-
아쉬운 것은 “주님, 감사합니다!”이면 좋았겠는데 “주님”이 없었다는 것이며, 우리로 하면 “신비의 세계”가 아닌 “주님곁”에로 돌아가셨다라고 하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주어는 참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선종시 이런 겸손하고 진실한 임종어로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표현하며 삶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러니 평소 한결같이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배우며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비로소 참삶에 참죽음이 선종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복된 선종을 맞이하기 위한 삶에 대한 구체적 처방입니다.
첫째, 사랑하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저절로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늘 자나깨나 일편단심 온맘과 온맘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나오는 늘 바쳐도 늘 감미로운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오늘 복음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명령에 “싫다” 했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나간 맏아들이 실제 아버지를 사랑했음을 봅니다. 맏아들이 상징하는바 세리와 창녀들이요 이들이 실상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믿었던 이들임을 봅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시 시편 16장에 표현된 주님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의 내면의 예수님 사랑과 신뢰가, 또 성녀 소화데레사와 많은 거룩한 신비가들이 이랬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내게 주신 주님을 기리오니,
밤에도 이 마음이 나를 일깨우나이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
그러기에 내 마음 즐겁고 영혼은 봄놀고
육신마저 편안히 쉬오리니, 내 영혼을 명부에다 버리지 않으시리이다.”
둘째, 배우라!
우리의 영원히 배워야 할 참 스승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 주님 사랑의 학교에서 재학중인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배워도 영원히 초보자라는 자각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더욱 분투의 노력을 하게 합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필리피서 그리스도 비움 찬가에 우리가 배워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감동적 가르침입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이어지는 필리피서 2장6-11절 까지는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 저녁기도 제1저녁기도(토요일)시 바치는 그리스도 찬미가입니다. 우리가 평생 배워야할 주님의 겸손과 순종의 사랑은 끝없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보다 주님 사랑을 잘 드러내는 찬가도 없을 것입니다. 참 사랑은 끝없이 비워가는 겸손한 사랑임을 배웁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사람들과 같아지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극치, 하느님 비움의 극치, 하느님 겸손의 극치인 그리스도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평생 모시고 배워야 할 스승입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자기비움의 사랑의 극치를 체험한 분은 십자가의 예수님에 이어 피에타의 성모님일 것입니다.
셋째, 실천하라!
우리가 오매불망(寤寐不忘) 늘 그리워하고 사랑하여 우선적으로 선택할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요 이런 예수님 말씀의 실천을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정말 말로만의 공허한 믿음이나 사랑이 아니라 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속과 겉이 같은 언행일치의 믿음이요 사랑이니 이의 결정적 표현이 순교의 믿음, 순교의 사랑입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시 오늘 복음을 요약한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생각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가게 되리라.”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복음의 맏아들이요 맏아들이 상징하는 바, 세리와 창녀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폭탄선언이 참 좋은 충격요법입니다. 당대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뿐 아니라 오늘의 기득권을 지닌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아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오늘 지금부터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의 삶입니다. 오늘은 군인주일입니다. 우리는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군인, 주님의 전사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주님의 영적 전사인 우리들에게 늘 깨어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의 삶은 필수입니다. 과거 아무리 잘 살았어도, 영적전투를 잘 했어도 지금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 의인이었느냐 악인이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행태가 중요합니다.
제1독서 에제키엘서 말씀대로 의인이 정의를 버리고 변절하여 불의를 저지르면 죽을 것이요, 악인이라도 참으로 회개하여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그러니 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삶의 중심인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여 초발심의 자세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배우고, 주님의 말씀을 새롭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 파 주님의 믿음과 사랑의 전사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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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걷는 나에게 달렸지요>
가야 할 길이
가고 싶은 길이요
가고 싶은 길이
가야 할 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마냥 좋겠지만
어찌 그럴 수만
있겠습니까
가야할 길은
가기 싫고
가지 말아야할 길은
가고 싶으니
이 어찌 하오리까
탄식이 절로 날 때
그저 마음 다부지게 먹고
이리 하는 거지요
가고 싶어도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면
가지 않는 거지요
가기 싫어도
가야 할
길이라면
가는 거지요
가고 있어도
가서는 안 되는
길이라면
돌아서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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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1. 연중 제26주간. 키엣 대주교님. 14:55
참회가 바로 시작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비록 말은 안해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 등. 나는 어느 쪽에 속한 사람입니까?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신앙심을 가졌다고 자부하면서도 주님을 믿지않고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죄인을 받아들이는 주님까지도 비판합니다.
말 대신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은 비록 죄를 지으며 살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참회와 회개를 하고 주님을 따르고 믿었습니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말을 잘 포장하고 많이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말을 잘 하지도, 많이하지도 않지만 열심히 일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헤아려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은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보여진다고 했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랑 역시 행동으로 보여져야합니다. 행동으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더욱 더 행동과 실천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나쁘고 추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바라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잘났다는 자만심을 가졌지만, 주님이 오시자 그들은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삶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입니다. 비록 나약하고 죄를 지었지만 심판받지 않도록 참회하고 돌아 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스스로를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불완전하고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매번 잘못을 저지를 때 마다 진정한 참회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참회를 통해서만이 주님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참회하는 영혼을 용서하고 사랑하십니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시편 51,19)
모든 사람들은 주님 앞에 죄인이기에, 주님의 관대한 용서를 청하려면 반드시 참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를 통하여 거룩한 영혼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회개를 함으로써 비로소 낡은 삶을 버릴 수 있습니다. 회개를 함으로써 주님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새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말만 번지르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 책임을 지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자만하고 남을 비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맙시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의 죄를 스스로 심판하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만이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진실된 회개만이 형제들로부터 이해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회개를 함으로써 비로소 거룩한 주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과 형제에게 많은 죄를 지은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나의 말과 행동, 실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나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행한 잘못을 깨닫고 진실로 잘못을 사과해 본 적이 있습니까?
3. 나의 가족과 지인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사과할 때 그들의 사과에서 진실됨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사과를 할 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말씀의 실천
1. ‘용서와 회개’는 참 많이 듣는 말이지만 그 주체가 내가 되었을 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이 심판하기 전에 나의 죄를 스스로 심판하고, 나의 죄를 깨닫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이 아닌 진정한 회개만이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진실된 회개만이 형제들로부터 이해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실된 회개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마음깊이 회개하고 나의 진심을 보여주고 진심으로 용서를 청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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