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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옥수수 곁으로
이대흠
옥수수 알갱이는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 같다
젖비린내가 난다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어린 슬픔처럼
나는 옥수수처럼 그리움에 서걱거렸으나
옥수수에서 연한 살내만 떠올렸을 뿐
울컥울컥 돋는 설움이 도톨도톨 알맹이로 뭉쳐 굳어지도록
----이대흠, [옥수수 곁으로]({애지}, 2007년 겨울호) 전문
북아메리카의 칩페와이 인디언 소년들은 열 여섯 살이 되면 성년식을 치루게 되어 있었고, 그 소년들은 그 소년들의 인내력과 능력에 따라서 3일이나 4일, 심지어는 일주일 정도씩 금식기간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이 성년식을 맞이하여 숲속의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자기 자신의 사냥기술의 향상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했지만, 한 어린 소년은 사냥기술의 향상과 전쟁에서의 승리보다는 그의 부족을 위하여 진정으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하며 소중한 선물을 줄 수 있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단식의 셋째날, 마침내, 마니투신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고, 초록색의 옷과 황금깃털 장식을 한 젊은이가 마니투신의 사신使臣으로 그 소년을 찾아왔다고 한다. 인디언 소년은 그 젊은이와 네 번의 씨름 끝에 모두 다 이길 수가 있었고, 그 젊은이가 죽은 자리에서 초록색과 황금빛으로 빛나는 식물이 자라나 그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한 인디언 소년과 초록색의 옷과 황금깃털 장식을 한 젊은이와의 네 번에 걸친 씨름은 그 소년이 진정으로 눈앞의 사소한 이익을 버리고 그가 속한 인디언 부족의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연출해낼 수 있는 것인지, 그의 분명한 의지와 용기를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이었던 셈인 것이다. 고귀한 것, 거룩한 것, 소중한 것은 언제, 어느 때나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어느 누군가의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옥수수는 한 인디언 소년의 희생정신의 산물이며, 마니투신이 내려주신 은총(선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수수란 무엇인가? 옥수수는 벼목 화본과의 한해살이 식물이며, 쌀과 밀과 함께, 세계 제3대 화곡류禾穀類라고 한다. 꽃은 단성화로 수꽃 이삭은 줄기 끝에 달리고 암꽃 이삭은 줄기 중앙의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옥수수의 수꽃이 암꽃보다 이틀 정도 빨리 피며 풍매화로 타가수정을 한다. 옥수수알은 수분 후 젖익음때(유숙기), 풀익음때(호숙기), 굳음때(경화기), 누루익음때(황숙기)를 거쳐서 익음때(성숙기)에 이르며 품종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고, 그 성숙기까지는 45일에서 60일이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옥수수는 유럽에서는 주로 사료작물로 재배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식용작물로 재배된다. 대한민국에서는 대부분이 완숙(성숙)되기 이전에 수확하여 간식용으로 이용되지만, 강원도와 그 이북지방에서는 주요한 식량으로 재배되고 있다. 옥수수는 칼로리가 쌀과 보리에 결코 뒤지지 않지만, 단백질이 적으므로 주식으로 사용하려면 콩과 섞어 먹거나 유럽에서처럼 우유와 고기와 달걀 등과 함께 섞어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옛날부터 강원도에서는 쌀이 귀했던 탓에 옥수수를 구황救荒식품으로 이용하여 옥수수범벅, 옥수수풀떼죽, 옥수수풀어죽 등, 다양한 옥수수죽을 쑤어서 먹었다고 한다.
이대흠 시인은 1967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했으며, 서울예술전문대학과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물 속의 불}, {상처가 나를 살린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등이 있고, ‘현대시동인상’과 ‘애지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는 ‘어린 딸아이를 볼 수 없다는 설움이 옥수수로 익었다’는 ‘부성애의 미학’의 걸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우선 “옥수수 알갱이는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 같다”라고 말하고, 그리고 그 옥수수 알갱이에서는 “젖비린내가 난다”라고 말한다. ‘종알거림’은 어린 딸아이가 혼자말로 불평하는 소리를 뜻하고, ‘앙다물다’는 입을 꽉 다문 채, 가타부타 말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린 딸아이는 젖비린내가 날정도로의 어린 딸아이이고, 그러나 그 어린 딸아이는 그 불평과 불만의 소리를 ‘이빨을 앙다문 채 참고 견디는’ 어린 딸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 어린 딸아이는 젖비린내 나는 딸아이인 것이고, 또한 왜, 어린 딸아이는 그 천진난만함에 반하여 ‘이빨을 앙다문 채 그 불평과 불만을 잠재워야만 되었던 것일까? 젖비린내 나는 딸아이는 기껏해야 대 여섯 살 정도의 딸아이이며,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이다. 어린 딸아이에게 있어서 아빠는 하나님과도 같은 존재이며, 너무나도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존재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그리움이 슬픔으로 변모되고, 그 슬픔을 참고 견딘다는 아픔이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같이 변모된 것이다. 첫 연의 옥수수 알갱이는 어린 딸아이의 앙다문 이빨이 되고, 그 옥수수는 어린 딸아이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는 누구인가? 딸아이는 아빠의 한 점 혈육이며, 늘, 항상, 티없이 맑은 웃음으로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딸아이이다. “아빠,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라고 엄마를 대신하여 염려를 해주는 것도 딸아이이고, 아빠가 사다가 준 예쁜 장난감과 인형을 받아들며 “우리 아빠가 최고야”라고 아빠의 품에 안겨서 뽀뽀를 해주는 것도 딸아이이다. 때때로 아빠가 일터에서 늦게 들어오면 “아빠, 빨리 들어오세요”라고 전화를 해대는 것도 딸아이이고, 또, 때때로, 아빠가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빠, 내가 이 다음에 돈 많이 벌어서 아빠를 행복하게 해드릴께요”라고 제법 그럴듯하게 위로를 해주고 있는 것도 딸아이이다. 딸아이는 신데렐라처럼 예쁘고, 효녀 심청이처럼 그 마음이 착하고 다정다감한 딸아이이다. 그 딸아이의 티없이 맑고 예쁜 마음과 그 얼굴에는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의 싹도 들어 있고, 이 세계의 미래의 지도자, 즉, 모든 인류의 문화적 영웅을 생산해낼 어머니의 싹도 들어 있다. 사악한 계모에게 온갖 학대를 받고도 그 아름답고 선량한 마음씨 때문에 한 국가의 왕비가 되었던 신데렐라, 앞 못 보는 아버지의 눈을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던 효녀 심청이, 두 눈을 잃고 머나 먼 이역 나라로 추방되었던 외디프스 대왕을 위해 아버지의 두 눈이 되어주고, 그리하여, 마침내 아버지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었던 안티고네----. 딸아이는 효녀이며, 이 세상의 현모양처이다. 그 아름답고 예쁜 딸아이에 의해서 모든 사악한 죄들이 말갛게 씻어지고,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과 행복이 약속된다. 딸아이와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거나 옥수수밭가를 산책하는 일도 즐겁고 기쁜 일이고, 딸아이의 장난감을 만들거나 그 딸아이를 무등 태우고 놀아주는 일도 즐겁고 기쁜 일이다. 어린 딸아이는 아빠의 삶의 이유이며, 행복이고, 그 모든 것이다.
하지만 왜, 이대흠 시인은 사랑하는 딸아이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 무슨 일로 머나 먼 타향땅을 떠돌아 다니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그 딸아이가 보고 싶었으면 “옥수수 알갱이는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 같다/ 젖비린내가 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얼마나 그 딸아이의 곁으로, 즉, “옥수수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슬퍼했으면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어린 슬픔”을 떠올려 보고 있는 것일까? 이대흠 시인은 ‘시인이라는 허울뿐인 직업’ 이외에는 별다른 직업이 없는 시인이다. 밥은 모든 유기체들의 동체성을 보존하는 유일무이한 에너지이며, 그 밥벌이의 수단이 좋지 못하면 이 세상의 생존경쟁이라는 투쟁의 무대에서의 탈락을 의미하게 된다. 밥벌이의 수단이 좋으면 가볍고 산뜻한 옷과 산해진미의 음식을 즐길 수가 있지만, 밥벌이의 수단이 좋지 못하면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을 하고도 더럽고 남루한 옷을 입고, 겨우 나물 한 가지와 밥 한 공기로 끼니를 때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밥벌이의 수단이 좋으면 수많은 탈세와 수많은 탈법으로 더욱 더 돈을 벌고 수많은 여가의 시간과 취미생활을 즐길 수가 있지만, 밥벌이의 수단이 좋지 못하면 법치국가의 모범시민이면서도 사시사철 어렵고도 힘든 생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풍부함의 사회이며, 날이면 날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체계 속에서 온갖 신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인류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잉여생산물이 쌓여 있는데도 전세계의 수십억의 인구가 만성적인 빈곤과 만성적인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회이며, 또한 모든 산업현장마다의 전산화로 인하여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풍부함의 사회이며, 빈곤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사회이다. 이 풍요와 빈곤 사이에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양극화의 구조가 점점 더 심화되고, 만인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라는 사회주의 이상은 한낱 도로아미타불의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된다. 모든 사회는 공산주의 체제이며, 공산주의가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이상 사회인 것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며, 그 사회적 구조는 협업과 분업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고, 만인의 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가 그 기본적인 법칙인 것이다. 학생은 공부를 하고, 군인과 경찰은 국가의 안녕과 행복을 수호하고, 정치인은 국가의 살림을 떠맡아야 하고, 공무원은 국가의 정책과 공공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농부는 농사를 짓고, 상인은 장사를 하고, 판사는 상호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시인은 시를 짓고, 학자는 학문을 연구하고, 기술자는 그 기술을 통하여 그가 맡은 바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 속의 인간이지, 탈 사회 속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다. 따라서 모든 일은 협업과 분업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갖 조세제도를 통하여 만인의 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다른 점은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며,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제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한다는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옹호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온갖 영업세와 소득세와 상속세와 증여세와 양도소득세 등의 조세제도를 통하여 부의 대물림 현상을 막고, 만인의 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산주의자이기도 한 것이다. 아니, 모든 사회는 공산사회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 인간들이 무리를 짓고 있는 이상, 그 어느 누구도 공산주의자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이대흠 시인은 밥벌이의 수단이 좋지 못한 시인이며, 후원자 없이는 홀로 설 수가 없는 순수예술가이다. 그 순수예술가라는 자긍심 하나로 사랑하는 딸아이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나 먼 타향땅을 일정한 수입없이 떠돌아 다녀야만 한다는 사실은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천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앙 다물고 참아도 눈물이 나오고, 사랑하는 딸아이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온다. 따라서 그는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어린 슬픔처럼” 울게 되고, 또한 그 울음의 끝에서 “나는 옥수수처럼 그리움에 서걱거렸으나/ 옥수수에서 연한 살내만 떠올렸을 뿐”이라는 시구를 낳게 된다. 옥수수는 지리적으로는 고향집의 상징이며, 경제적으로는 초근목피 시절의 구원의 상징이다. 또한 옥수수는 정서적으로는 그림움과 슬픔의 상징이고, 인간적으로는 이대흠 시인과 그의 딸아이의 상징이다. 떠돌이--나그네의 삶이란 특수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또는 매우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어렵고도 힘든 삶에 지나지 않으며, 공동체 사회 안에서, 또는 공동체 사회 바깥에서, 그 사회주의적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뿌리뽑힌 자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옥수수처럼 그리움에 서걱거렸으나”라는 시구는 국어사전적 의미에서,
1, 싱싱한 사과나 배 따위의 과일을 씹을 때 나는 소리;
2, 눈 따위를 밟을 때 나는 소리;
3, 갈대나 풀을 먹인 천 따위가 바람에 마찰할 때 나는 소리;
중의 마지막 세 번째 뜻에 해당된다. 딸아이에 대한 그리움은 평지풍파의 바람이 되고, 이 평지풍파의 바람은 시인의 몸과 마음을 흔들어 댄다. 이대흠 시인은 그 흔들림의 한 가운데서 이를 악물고 두 눈에 흐르지 않는 속울음을 울면서, “옥수수의 연한 살내만”을 맡게 된다. 옥수수는 식량이 아니라 딸아이이며, 그는 딸아이의 그 사랑스럽고 정겨운 살냄새를 맡으며, “울컥울컥 돋는 설움이 도톨도톨 알맹이로 뭉쳐 굳어지도록”, 그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것이다. ‘울컥울컥’이라는 말은 먹은 것을 갑작스럽게 토하려는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그러나 ‘울컥울컥 돋는 설움’은 너무나도 분한 마음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설움덩어리들이 구토가 되어 나오려는 심리적인 현상을 뜻하게 된다. 그리움이 분노가 되고, 그 분노는 슬픔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움의 감정이 해소되지 못하고, 또한 그 분노의 공격성이 제풀에 꺾여서 설움으로 주저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대흠 시인의 그리움이 분노가 되고, 그 분노가 슬픔(설움)으로 변모되는 그 좌절의 과정 속에서, 마치, 마니투신이 내린 하늘의 은총처럼 초록의 옷과 황금깃털 장식을 한 옥수수가 저절로 익어가게 된다.
옥수수는 영양 만점의 식물이며,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세계 제3대 화곡류 禾穀類 중의 하나이다. 떠돌이--나그네 시인으로서의 ‘딸아이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는 설움이 옥수수의 알맹이로 익었다는 것----, 이것이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의 가장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초록의 옷과 황금깃털 장식을 한 옥수수, 이 옥수수의 맛과 영양가가 만인에게 평등하듯이, 나는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라는 시를 ‘부성애의 미학’의 극치로서 만인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명시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는 외래어나 한자가 전혀 없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모국어의 향연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국어는 살아 있는 언어이며, 외국어는 죽어 있는 언어이다. T.S. 엘리어트가 역설한 바가 있듯이, 시는 그 민족어의 가장 세련된 양식이며, 시는 모국어 속에서만이 참다운 시일 수가 있는 것이다. 외국어로 사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외국어로 느끼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국어의 삶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며 타인의 삶에 불과하고, 모국어의 삶은 몸에 꼭 맞는 옷이며, 언제, 어느 때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떳떳하고 당당한 나의 삶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대흠 시인의 [옥수수 곁으로] 속의 순수한 우리말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도 같이 될 것이다.
1, 종알거리다: 1, 중얼거리다; 2, 혼자말로 자주 불평하는 소리, 또는 그 모양; 3, 여자나 어린 아이가 자꾸 재깔이는 소리, 또는 그 모양;
2, 앙다물다: 1, 입을 힘주어 꽉 다물다; 2, 입을 앙다문 채 가타부타 말이 없다;
3, 서걱거리다: 1, 싱싱한 사과나 배 따위의 과일을 씹을 때 나는 소리; 2, 눈 따위를 밟을 때 나는 소리; 3, 갈대나 풀을 먹인 천 따위가 바람에 마찰할 때 나는 소리;
4, 도톨도톨하다: 1, 물건의 거죽이 여러군데 조금씩 들어가거나 솟아나와서 매끈 하지 않은 모양:
5, 젖비린내: 1, 젖에서 나는 비린내; 2, 유치한 느낌; 3, 말이나 행동이 몹시 치기가 어리고 아직 애티가 나다;
오오, [옥수수 곁으로}여,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슬픔으로 씌어진 시여!
오오,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우리 한국인들의 모국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