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탈경계 세태풍자시■
시인의 의자·38
-자전거 탄 사람들
김관식
시인의 의자에도 가을이 왔다.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강변의 갈대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하늘을 닦아냈다. 하늘이 점점 깨끗해졌다. 그러더니 하늘은 더 높이 달아났다. 발빠른 겨울 철새들이 날아와 시인의 의자를 찾아와 강변을 서성거렸다. 갈수록 바람이 쌀쌀해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서리가 내렸다.
시인의 의자가 있는 강변에 자전거도로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그런데 이 자전거도로는 한국형 녹색뉴딜정책의 일환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 등 4대강 유역종합개발에 따라 4대강 강변마다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4대강 중 일부 강에는 이미 강변도로가 건설되어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4대강에는 농사짓는 농업용 물을 공급하기 위해 강물의 흐름을 막는 보를 군데군데 설치했다. 이 보 때문에 강이 오염되었다고 말썽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 보를 허물겠다고 야단들이다. 이미 건설된 보의 수문만 열어놓으면 흐름을 막아 생겨났던 녹조류와 썩어가는 물질의 자정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없는데, 또 막대한 예산을 들여 허물어서 강의 생태계를 뒤집어놓겠다고 하니 사람들의 욕심은 끊이 없는 것 같다. 이랬다 저랬다 사람들이 하는 짓이란 뜬구름의 장난 같은 일만 벌리고 있다.
자전거도로에는 가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강변을 따라 분주히 지나갔다. 가을 햇살이 자전거 바큇살이 부셔져 반짝거렸다. 달리는 자전거가 명시를 쓰고 있었다. 시인의 의자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쓴 시를 읽은 재미로 가을의 서정을 함뿍 느끼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강변 모래밭에 놓여있는 시인의 의자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시인의 의자에 끌려서 달리는 자전거를 멈추고 시인의 의자로 다가왔다.
“와, 이런데 웬 의자가 놓여있지. 참 신기하다.”
그들은 흐르는 땀을 훔치며 시인의 의자에 궁둥이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시인의 의자는 땀에 젖은 자전거 탄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그의 체취에 그들을 진심으로 받아주었다. 그들은 옷차림은 너무 간소했다.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자전거 전용 옷과 모자, 그리고 자전거 한대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였다. 손에 쥔 물병이 하나 더 있을뿐이었다. 그들이 품어내는 진한 땀냄새와 온기로 인해 시인의 의자는 오랜만에 따뜻한 피돌기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부모의 뱃속에서 알몸으로 태어나서 저마다 밥벌이를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늙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 그들이 살아가면서 부대끼며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일까?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리며 시를 쓰는 시인들을 받들어주는 재미로 살아왔습니다. 시인들의 쓸쓸한 내면을 들여보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눈물 흘리는 등 희노애락오욕칠정으로 부대끼며 눈물을 흐리며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시인들의 독백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그가 노래한 시를 시인의 의자에 남겨놓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다가 시인의 의자를 찾아온 자전거 탄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난 다음 개운해지는 상쾌한 마음이 그를 자전거를 타게 했을 것이다. 가뿐한 몸은 건강해진다는 확신을 주었고, 건강한 몸은 건강한 정신이 깃들어 생활의 활력소를 주기 때문에 일을 하고 휴일이면 강변의 자전거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그들만의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자전거타기를 즐겨했을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 아니겠가? 시인은 시 쓰는 것이 재미가 있고 자기의 뿌듯한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시인이 된 것일 것이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강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늘 변화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몸으로 느끼는 자전거로 달릴 때의 상쾌한 기분은 마치 시인이 시를 완성했을 때 느끼는 기분좋은 느낌이 있었기에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달리고 있는 것이리라.
이들 중에는 그냥 자전거타는 것이 좋아서 타는 사람들도 있고, 중년층이상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옛날을 생각하며 자전거를 타는 지도 모른다.
배고픈 시절 쌀밥은 고사하고 깡보리밥도 배불리 먹기 힘들었던 보릿고개 시절을 지나 쌀밥이 넘쳐나고 육고기를 실컷 먹고 고된 노동을 기계에게 맡기고 몸을 심하게 움직이는 일을 하지 않으니 살이 쪄서 살을 빼기 위해 일 대신 자전거로 몸을 관리하는 중년층의 사람들은 유독 땀을 많이 흘리며 오래 달려가지 못하고 가다가 멈춰서 땀을 닦으며 쉬었다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었다. 시인의 의자는 반갑게 그들을 맞이해서 그들의 몸시를 온몸으로 느끼고 그들과 함께 있는 순간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가장 감동적인 시는 뭐니뭐니 해도 몸시였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은 태어났을 때처럼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사람들이 옷으로 자기 몸을 감싸면서 옷은 자신의 모습을 더 예쁘게 돋보이려는 마음을 표현하게 되었다. 알몸의 상태를 치장하기 위해 옷을 만들고 잠을 잘 때 안락하게 잠을 잘 수 있고 추위와 더위, 다른 동물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여 집을 짓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해결해야 했고 그들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을 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과학기술의 발달은 농업혁명을 일으켰고, 농업혁명은 충분한 먹거리를 확보했고, 좀더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다가 각종 산업이 발달하여 오늘날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물질사회가 된 것이다. 가난에서 해방되어 모두가 풍요로운 물질로 더 많은 행복을 누리려던 인간들은 이제 배가 부르니 마음이 허전했다. 그 허전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가을이 되자 활엽수들이 거추장한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 보였다. 자전거를 타다 시인의 의자에 잠시 앉은 이들도 꾸미기 위한 옷이 아니라 가장 달리기 좋은 최소한의 옷을 입고 몸에 거추장한 것들을 모두 버린 상태로 달리는 것이다.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몸부림, 사람이 왜 태어났고 왜 거추장한 옷을 입으며 가면을 쓰고 남에 더 돋보이려고 멋진 집을 짓고 비싼 승용차를 타고 더 맛있는 것을 맘놓고 먹겠다고 경쟁을 하며 모두들 어디론가 달려가는 줄도 모르고 오직 물질을 쫓아 달려가지 않했던가?
그런 것들을 성취하고 만족감을 누리기 위해 그 욕망을 사람들끼리 서로 교환하는 도구인 돈을 모으기 위해 치열하게 일을 하고 살다가 태어났을 때의 상황처럼 가진 것들을 모두 그대로 놓고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다. 주어진 생명의 몸이 활동을 멈추면 자신의 존재도 한줌의 흙으로 사라지고 마는데, 왜 내가 사는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쫓아가다가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생할을 하는 도중이 느꼈던 감정들 슬프고, 기쁘고, 허무하고, 쓸쓸하고, 분노하고, 무섭고 하는 절실한 심정들을 압축하여 그 핵심을 글로 표현해놓은 것이 시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좀더 멋있게 보일려고 돈을 모으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한 몸부림, 멋있게 남보다 화려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생활에서 느꼈던 정신적인 갈등과 속마음을 진솔하게 기록하려는 것이 바로 문학작품이고 그런 문학작품이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까지도 물질을 더 소유하여 남보다 더 돋보이려는 허명의식으로 작품을 창작한다면, 그 거짓된 마음이 공감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며, 그런 일들이 다 부질없는 일인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서 모든 욕심을 버리고 사람답게 살려는 순수한 느낌을 압축해서 글을 쓸 때 그 진실성이 독자의 마음 속에 숨기고 있던 속마음과 맞아떨어지면서 공감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명작으로 손꼽는 작품이 바로 이런 작품들이고 그런 작품을 쓰는 시인이나 작가를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의 명성을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싶은 거짓된 마음으로 거짓 문학인 노릇을 하며 그들의 행동을 흉내내고 그런 작품을 쓰는 것처럼 위장하여 시인이며 작가라고 속이려고 하는 위선적인 문학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인간이 가장 인간적이고 자신의 내면을 속이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을 때 많은 이들이 공감을 느끼고 그런 분들을 문인으로 존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허명의식으로 문학까지 속물적인 인간들의 돋보이려는 욕심을 내보인다면 문학은 오염되고 물질을 얻기 위한 속물적인 행태로 변질되어 누가 그런 문학작품을 읽을 것이며, 누가 그런 허접한 작품들을 좋아라 하겠는가? 한 편의 글을 읽더라도 내 가슴 속 내면에 깊이 잠들어 있는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꽁꽁 감춰두었던 보따리를 확 풀어주는 그런 작품을 원하는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가장 솔직한 내면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나 명작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가족을 위해 남몰래 새벽 샘물을 떠놓고 온갖 치성을 드리시던 어머니의 모습, 그 순간의 심정과 같다. 이 상태의 마음이 바로 시심이요, 문학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자식들이 바로 독자인 것이다. 그런데 남의 남자와 춤 바람이 나서 가족들을 속이고 분장을 하고 외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어느 자식이 그 부모를 존경하겠는가? 시인이 진솔했을 때 어떤 형식의 허접한 글이라도 감동을 주는 것이지 거짓된 마음으로 매끄럽게 글을 썼다고 감동을 하지는 않는다. 시인이냐 시인이 아니냐 하는 것은 누구보다 시인 자신이 더 잘 안다. 시인처럼 흉내내어 시인처럼 돋보이려는 거짓된 마음자세로 문학작품을 쓰고 문학 활동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작품을 쓰기 전에 이런 마음 상태로 마음을 닦는 공부를 먼저 해야 한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마음공부, 즉 인격 수양의 수단으로 시를 짓는 재도지기 자세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시인의 의자는 가을날 강변 자전거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다 시인의 의자에 잠시 앉은 사람을 위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를 들려주었다.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들이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영글도록 명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주시고,
마지막 단 맛이
짙은 포도송이 속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랫동안
외롭게 살아가면서
잠 못이루어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납엽 딩구는 가로수 길을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맬 겁니다.
인간이 가장 겸손해질 때는 자신의 오만을 깨달을 때이다. 자기를 돋보이려는 거짓된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깨달을 때 진실로 시인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세계가 풍부했을 때 감동적인 글을 나오고, 그 글은 많은 이에게 감동으로 다가가 정신적인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예쁜 아내와 잘 나가는 자식들을 가졌더라도 머지않는 날에 존재가 소멸되고 만다. 그 존재가 소멸될 때 아름다운 존재로 남고 싶다면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고 거짓된 시인노릇 흉내를 그만 중지하고 진실한 내면을 드러내는 재도지기 자세로 문학작품을 창작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내일 죽더라도 나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처럼 내일 죽더라도 나는 오늘 시 한편을 쓰겠다. 이 얼마나 멋진 문학인다운 말인가?
정말로 향기나는 문학작품을 쓰는 문학이 되겠다면 등단이 어쩌고 저쩌고 문단이 어쩌고 저쩌고 그런 인간관계의 관심을 접고 어떻게 하면 좋은 작품을 쓸 것인가하는 궁리부터 해야 한다. 그럴려면 문제는 남보다 더 책을 많이 읽고 시를 보는 안목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의 이렇고 저렇고 그런 잡스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고 자신의 내면을 냉철하게 들여다보시기 바란다.
시인은 혼자 고독한 내면세계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내면 속에 호심탐탐 들어와 앉으려는 기회를 엿보는 부끄러운 욕망의 찌꺼기들 마치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쓰레기들을 뜰채로 거두어들이는 작업을 했을 때 강물이 맑아지듯이 마음을 닦는 마음 공부의 진솔한 표현이 감동을 주는 시가 되고 글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