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제사랑 212호’에 ‘국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사당, 칠궁이 소개 되었다. 그중 延祜宮 현판의 祜자와 毓祥廟 현판의 毓자는 처음 대하는 한자라 옥편을 찾았다. 祜자는 복 호로 하늘이 주신 복이고, 毓자는 기를 육이다
延祜宮(연호궁)은 진종(영조의 맏아들)의 어머니, 정빈이씨의 사당이고 毓祥廟(육상묘)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이라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묘소가 있는 파주 고령산보광사를 들추어 본다.
대구에서 경기북부의 답사는 하룻길로는 쉽지 않다. 파주 보광사, 숙빈 최씨의 묘 소녕원과 윤관장군을 모신 여충사와 묘, 황희 정승의 유적지인 반구정과 앙지대, 율곡을 모신 자운서원과 가족묘지, 용미리 석불은 조선 시대 유적이라 듣기만 했던 유적들을 찾아본 것이다.
보광사도 임진왜란에 전소되고 6.25로 소실되었지만 숙빈 최씨의 원찰로 조성되어 영조의 효심을 볼 수 있다. 보광사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묘인 소녕원이 근접해 있어 숙빈 최씨를 모신 원찰이다. 보광사 대웅보전은 안팎의 장식이며 판벽에 그린 벽화, 모든 공포의 쇠서부리마다 숙빈 최씨가 누리지 못한 수복을 빌고자 ‘壽福’이란 길상 문자를 새겨놓았다. ‘大雄寶殿’ ‘萬歲樓’ 편액은 영조의 어필로 모든 것이 상징의 세계로 이끈다.
대웅보전의 벽채는 판벽(板璧)이다. 판벽은 법당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흩어지지 않고 판벽에 부딪혀 정확한 속도로 되돌아옴으로 소리의 혼융에 촉매가 일어나 무아 경지를 느낀다는데, 아마 영조는 대웅보전 전체를 그의 어머니로 염원했나 보다.
대웅보전의 바깥 좌우와 후벽은 온통 불화다. 판벽에 그린 민화풍에서 고졸미를 보여 불교적이라기보다 민화에 가깝다. 사찰의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는 두류산 대흥사 스님의 말이 새롭다.
대웅보전 왼쪽 출입문 창방 위로 ‘1869년 고령산 보광사 중건 시주’가 걸렸고 그 옆에 문수동자가 탄 흰 코끼리의 상아가 양쪽으로 3개씩, 귀는 처져 코끼리를 닮았고 두상과 다리는 범을 닮았다. 그 옆의 수월 관음과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을 든 동자가 앉은 자리는 바위인지 의자인지 세 남자가 끙끙대며 들고 지고 안고 가는 모양들은 꽤나 힘들어 보이지만 표정만은 밝고 날렵하다. 반원의 결들은 파도인지 운해인지 아마 극락인가 보다.
한 판벽에는 청정한 호수에 연꽃이 참 많이도 피웠다. 보살도 동자도 극락정토에서 는 연꽃으로 태어난다는 장면을 묘사해 놓았다. 노송도, 괴석도, 당초도, 맹호도 해학적인 그림들은 불국토를 표현한 듯하다.
우측 판벽에 택견 자세로 창을 들고 치켜든 금강역사는 금방이라도 잡귀를 때려잡을 태세다. 연꽃 가지를 들고, 청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는 연화좌에 올랐다. 축 처진 귀에 벙거지 같은 두상, 뭉툭한 코, 동그란 눈에 일자 눈썹의 푸른 사자는 요즘 아주머니들이 끼고 다니는 반려견을 닮았다.
갑옷과 깃털 투구에 금강저를 안는 위태천은 남방증장천왕의 한 분으로 부처의 뜻을 받들고 출가자와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 벽화들은 영조의 지극정성 효심이리라.
대웅보전의 우측 둔덕에 어실각(御室閣)이 당그랗다. 숙빈최씨의 신위를 모셨다는데 문은 자물쇠로 채워 놓았다. 뜰에 영조가 애틋한 심정으로 심었다는 향나무 한그루가 객들을 맞는다. 영조는 대웅보전 안팎을 극락으로 꾸며 그 어머니를 모셨다.
보광사 목어는 전국 사찰 목어 중에서 특이해 감초격으로 등장한다. 목어는 눈을 뜨고 사는 물고기처럼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조석으로 목어의 뱃속을 두드린다. 머리는 용, 꼬리는 잉어, 용두어신(龍頭魚身)이다. 뒷지느러미는 다른 나무로 다듬어 꽂았지만 승천하는 용의 날개다. 여의주를 문 입천장은 허허롭다. 촘촘하고 이빨은 가지런하여 악을 씹을 여지가 없고 뱉을 수도 없다. 오장육부는 비운지 오래다.
숙빈 최씨 묘, 소녕원
드라마 ‘동이’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에 대한 얘기다. ‘동이’의 묘는 파주 고령산자락에 자리한 소녕원이다. 전나무 숲과 송림으로 둘러싸인 정자각, 뒤로 높은 둔덕 위로 석물들이 선명하다. 숙빈 최씨의 비석은 3개로, ‘有明朝鮮國 後宮淑嬪首陽崔氏之墓’와 ‘淑嬪海州崔氏昭寧墓’비를 세웠고 1753년에 ‘朝鮮國 和敬淑嬪昭寧園’ 다시 비를 세웠다. 和敬이란 시호는 원園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영조의 친필이다.
소녕원 망주석에 새긴 쥐
소녕원 망주석에 새긴 쥐의 이야기다. 연잉군(왕세자가 되기 전 영조의 호칭)이 사냥을 하러 나선 날, 한 상주가 관을 옆에 두고 대성통곡을 하자 그 연유를 묻자 지관이 잡아준 묘 자리에 물이 솟으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겠느냐.
사연을 들은 연잉군은 도성에 돌아와 지관을 불러 그 원유를 물었다. 그 산은 그 망자의 묘자리는 없습니다. 어디다 묻어도 이장 해야 할 것이니 아무 데나 잡어 주었습니다. ‘그 자리는 주인은 따로 있사옵니다’ ‘그럼 그 자리는 누구 자리인가?’ ‘마마나 마마의 모친 자리옵니다.’
놀란 연잉군은 궁의 지관을 보내 그 자리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지관은 돌아와 좀 위쪽에다 마마의 모친이 돌아가시면 모실 것이라 보고하자, 듣고 있던 지관은 70여 자 아래에 있는 터가 더 좋습니다.’ 그의 말이 미덥지 않아 지관을 시험키로 하였다. 문제를 내어 풀지 못하면 사기꾼으로 처형할 것이고 맞추면 소원을 들어 줄 것이다 하고 쥐 1마리 넣어 둔 상자를 내어 놓으면서 이 상자에 쥐가 몇 마리 들어 있는지‘ 하고 묻자 지관은 서슴없이 ‘세 마리 옵니다.’ 틀린 게 분명하였는데 그 쥐가 배가 불려 배를 갈라 보았더니 두 마리의 새끼가 있지 않은가. 그때야 지관의 말이 맞음을 알고 형을 멈추도록 하였으나 이미 형을 집행한 뒤였다. 아까운 사람 하나를 죽인 셈이다.
그 후 죽은 지관의 원혼을 풀어주기 위해 숙빈최씨 묘 앞, 한 망주석에는 땅으로 내려가는 쥐 한 마리, 한 망주석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쥐 한 마리를 양각해 놓았다 한다. 묘역은 훤히 트였고 울창하다. 소녕원, 아들 영조는 그 어머니의 묘를 능처럼 꾸몄다. 이는 지극정성의 효심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