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23대 고종때의 일이다.. 몽고가 쳐들어와 고려가 항복하자 몽고는 고려에게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어서 지키도록 하였다. 그 조건이란, 첫째, 고려는 몽고의 속국으로서 해마다 조공을 바치며, 둘째, 고려는 아름다운 여자를 골라, 몽고에 바치고, 세째 고려의 세자는 임금이 되기 전에 반드시 몽고에 와서 살아야 하며, 몽고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만 되는 것이었다. 싸움에 졌기 때문에 고려는 이처럼 수치스러운 일들을 지켜야만 했다. 몽고의 속국이 된 이래로 고려는 정치나 문화에 관하여 일일이 몽고의 간섭을 받아야만 했고, 해마다 값비싼 물건을 바쳐야만 했으며 그리고 예쁜 처녀를 골라 몽고에 바쳐야만 했고,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왕자가 몽고에서 어릴 때부터 몽고식으로 가르침을 받는 일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되므로 고려의 왕자를 볼모로 잡아두었기 때문이었다. 볼모로 잡혀 간 왕자는 몽고 말을 배우고 정치와 풍습을 익히는 것은 물론이지만, 나이가 들면 몽고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만 했다. 25대 충렬왕 때부터 이 제도가 실시되어 충렬왕은 몽고의 공주와 결혼을 하고 몽고 옷을 입고 변발까지 하여 개성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이를 보고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26대 충선왕 때부터는 본 이름 말고도 몽고식 이름을 아울러 썼다고 한다. 충선왕은 '이지리부가' 27대 충숙왕은 '아라도도시리' 28대 충혜왕은 '부다시리'로 부른 것 등이다. 이처럼 몽고의 무서운 힘에 눌려 고려가 나라의 체통을 잃고 꼼짝 못 하던 때의 일이다. 26대 충선왕은 자기의 본 왕비 조비를 사랑하고 몽고에서 결혼한 공주를 따돌렸다는 이유로 임금의 자리까지 내놓아야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죄로 충선왕은 몽고로 불려가는 쓰라림을 겪었다. 몽고로 끌려간 충선왕은 그래도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람이란 누구나 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법이다. 억지로 결혼한 몽고의 공주보다, 내 나라 사람인 조비를 더 사랑한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제발 개 돼지보다 못한 짐승의 나라 몽고에서 풀려났으면......" 충선왕은 매일 이렇게 기도를 했으나 언제 그 지옥에서 풀려날지 기약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충선왕은 언제 다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낙심한 나머지, 매일매일 맥을 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충선왕은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은 자기를 위해 베풀어 준 큰 잔치의 꿈이었다. 널따란 뜰에 차려 놓은 음식상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과 갖가지 색깔의 떡이 그득히 차려져 있었다.. 충선왕이 술잔을 들자, 아름답게 차린 궁녀들이 가야금을 뜯으며 축하하였다. 이 광경을 보자 그 옛날 고국의 대궐에서 왕으로 있을때 큰 잔치를 열던 일이 생각났다. 가야금의 가락은 온 뜰 안으로 울려 퍼져 충선왕은 자기를 위해서 저렇게도 정성을 다 하여 가야금을 뜯어주는 궁녀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충선왕은 일어서서 그 궁녀 가까이로 가서 가야금의 가락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한참 동안 듣고 있던 충선왕은 그때 비로소 온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제야 알겠구나, 이 가락은 그 옛날 내가 즐겨 부르던 '청산별곡'의 고려 가요가 아닌가? 아! 나는 지금까지 나의 고국을 잊고 있었구나..' 충선왕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지금껏 슬픔에만 잠겼지, 떠나온 고국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이 가슴에 솟구쳐 올랐다. 충선왕은 소리 높여 고려를 불러 대었다. 목이 아프도록 깨어났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몽을 할 수가 없었다. 남의 땅에서 자기가 그런 잔치를 받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도록 가야금을 뜯던 궁녀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세월이 흐르자 그 꿈 이야기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답답한 생활이 다시 이어졌다. 어느 날 충선왕은 답답한 가슴을 달래려고 혼자서 뜨락을 거닐고 있는데, 저쪽으로 부터 장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충선왕이 유심히 그 장님을 바라보니, 이상하게도 열 손가락 끝을 모두 헝겊으로 동여매고 있었다. 너무나 이상한 일이라 충선왕은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서 그 까닭을 물어 보았다. "여보시오 왜 손가락 끝을 모두 그렇게 동여매고 있소? 아니 손가락을 다치기라도 했나요?" "우리들은 고려에서 끌려온 공녀입니다. 이 눈 먼 공녀는 고국으로 못 돌아가 마침내는 병까지 나서 며칠전부터 이렇게 눈을 감고 다닌답니다.. 손가락을 동여 맨 것은 , 이 공녀는 원래 가야금을 잘 뜯는데, 늘 고려가요에 맞추어 가야금을 뜯어서 손끝에 상처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말을 듣자 충선왕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리고 언젠가 꾼 그 꿈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나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손끝에 피가 맺히도록 고국의 노래를 뜯었을까? 충선왕은 또 한번 자신의 생활을 부끄럽게 여겼다... "한낱 공녀도 저렇게 고국을 생각하는데, 임금이었던 나는 지금까지 무슨 생각으로 세월을 보냈던가!" 충선왕은 그날 밤 그 눈먼 공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공녀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청산별곡'이란 곡조를 가야금으로 뜯어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 소녀는 금방 눈을 번쩍 뜨더니 충선왕의 무릎 아래 엎드렸다. 그 소녀는 '청산별곡' 을 청한 분이 누구란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것은 충선왕이 전부터 '청산별곡' 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마, 저는 고려에서 온 공녀이옵니다. 저의 아비는 옛날 마마를 위해서 일했으나, 죽음을 당하였사옵니다. 하오나 홀로 남은 어머님이 보고 파서 일부러 장님인 체 눈을 감고 지냈습니다. 그러면 고국으로 보내 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충선왕은 소녀의 이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자기도 어떤 일이 있어도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이 때 몽고에선 무종이 왕위에 오르려는 눈치가 보여, 충선왕은 무종을 도와 주었는데 그것이 성공하여 그 공으로 다시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자 충선왕은 나쁜 간신들을 물리치고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이 되자, 충선왕은 곧 몽고로 사람을 보내어서 그 공녀를 찾아오게 하였다. 자기에게 조국애를 일깨워 준 그 공녀가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공녀는 이미 죽은 뒤였다. 왕은 소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 넋을 위로해 주기 위하여 대궐의 뜨락에다 봉숭아를 심도록 하였다.
첫댓글 가슴 아픈 얘기네요,,
결국 그 공녀는 돌아 오지 못하고 꽃이 되었군요,,,
옛 선조들의 가슴아픈 이야기죠..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징기즈칸이 세계 정벌에 나섰을 때 고려와 월남은 침략하지 말것을
유지로 남기지요.
외가의 혈통이 신라계열이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후예로 기억해
고려를 강한 국가로 인식한 탓도 있겠지요.
승승장구해 서역을 쓸어버리고 더이상 먹잇감이 없는 상황에서
고려가 원과 교역도 트고 국교도 맺고 그리했으면 좋았겠으나
원을 낮추어본 결과로 고려가 도륙이 납니다.
고려가 문화대국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몽고를
군사면에서 몽고에
상대가 못됐으니 실리외교를 펼쳤으면 위와 같은 뼈아픈 교훈은 남기지 않았겠지요.
해박한 역사지식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_()()()_
중요한 역사의 교훈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