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의 희생이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
예레 26,11-24; 마태 14,1-12 /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2024.8.3.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속절없이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한 위기에 놓였다가, 백성의 여론 덕분에 가까스로 죽임을 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과 사제들과 궁정 예언자들은 권력을 비판하는 재야 예언자들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버거워한 나머지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해방과 자유의 법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율법과 성경을 방어무기로 삼아서 어처구니없게도 의인들을 희생시킨 결과 이스라엘은 우상숭배 풍조가 굳어졌고 끝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섬겨 온 이스라엘 역사에서 후대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의 수수께끼이지만, 실제 일어났던 현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주는 예언자들을 그들은 왜 이렇게 핍박했던 것일까요?
예수님 당시에 구약 시대 마지막 예언자로 활약한 세례자 요한의 운명도 예레미야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헤로데 영주가 하느님의 법을 어기자 직설적으로 간언한 요한을 교묘한 방법으로 참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요한이 되살아난 듯한 예수가 민중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예수까지도 없애 버리려 하였습니다. 결국 요한이 당한 죽임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죽임을 미리 알려 주는 전조(前兆)였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주려 했던 의인들을 이스라엘의 지배 엘리트들은 가차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의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서, 이 피흘림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후대의 수많은 민중에 의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곤 했습니다. 이것이 의로운 희생이 역사를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의로운 희생은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던 조선시대에도 애꿎게 죽임을 당한 선비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불렀습니다. 본래는 유학을 쪼개는 일이 ‘사문’(斯文)이고 공자와 맹자의 노선에 어긋나게 해석하는 유학자를 ‘난적’(亂賊)이라 부르면서, 유학에 담긴 천명(天命), 즉 진리성을 옹호하던 소수의 방어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유학의 일파인 성리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왕조가 주자가 내린 해석을 따르지 않는 선비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귀양을 보내거나 죽임으로써 성리학적 유학은 정통성을 등에 업은 유교로 등극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사문난적’이란 딱지는 ‘빨갱이’라는 요즘의 딱지처럼 괴력을 발휘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였습니다. 극단적 소수의 방어 논리가 권세를 등에 업자 다수의 공격 논리로 탈바꿈하여 제도적 폭력의 도구가 되어 버린 셈이었습니다.
명분상 학문적 해석을 문제삼았을 뿐 사문난적 논쟁은 정적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사상통제 도구였고, 이 논쟁의 와중에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났습니다. 조선 중기에 불과 50년 동안 네 차례나 일어난 이 사화에서 권력을 날선 논리로 비판하던 많은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이 결과, 더 이상 사화를 당하지 않으려고 선비들은 학문적 노선이나 지연을 따라 당파를 구성하여 방어하게 되었고, 이것이 고질적인 4색 당파의 당쟁으로 이어졌으며 피비린내나는 당쟁에서 주도권을 쥔 당파가 노론이었으니, 여기서부터 진리라든가 민족의 정체성과 나라의 공동선보다 자신이 속한 당파와 문중의 입장을 우선시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를 학문적인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 포장하는 망국적인 풍조가 조선 중기 이후 기득권층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 민족에게 전해진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 역시 이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문난적의 희생이 될 각오로 천주교 교리를 전파한 남인 선비 이벽의 용기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천주교에 입교한 신자들은 나라에서 금한 교를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실제로도 그들은 ‘천주학쟁이’, 즉 성리학에 위배되는 천주학을 배우고 전한다는 학문적 명분으로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무려 백 년에 이르는 박해 기간동안 희생된 이 의인들은 관변기록상으로 2천이요, 신자들의 기억과 입에 오르내리는 구전상으로는 2만으로서, 무기도 없이 비폭력으로 저항한 평화스런 백성을 죽인 사건으로는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상 최대의 학살 사태입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인들의 희생은 민중의 한으로 남습니다. 한민족의 역사 안에서도 지배층이 외래 종교인 불교를 들여와서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기 시작한 고구려 시대 이후 민간으로 추방된 무교가 무속화되어 각종 해원굿, 진혼굿 등으로 원한을 풀어주는 종교적 기능을 수행해 온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해방 직후 47년 4월 제주에서부터 80년 5월 광주까지 남한 각지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의 넋을 기리는 해원 행사는 민중 안에서 미신 논란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혼탁한 흐름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자면, 민중의 한은 기득권 지배 엘리트들이 저지르는 사회적 불의로 말미암은 의인들의 억울한 희생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이 민중의 한은 해원의 종교의식만으로는 불가항력입니다. 해원굿은 심리적 위안만을 줄 수 있을 뿐, 실제로 원한이 생겨난 근본 원인인 사회적 불의를 제거하고자 공동선이 정의롭게 실천되어야만 제대로 풀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 사이의 정(情)이 제 진가를 발휘합니다. 기득권 엘리트들의 무능함과 비겁함으로 초래된 여러 차례의 국난이 전부 민중의 자발적인 의지로 극복되었던 한민족 특유의 역사가 있었고, 이 공동체적 과정에서 정이 발휘되면 이 한과 정은 대동세상을 이룩한 승리의 흥(興)으로 판이 바뀝니다.
박해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은 억울한 희생을 당하면서 생긴 한을 '교우촌'이라는 새로운 대동세상으로 건설하면서 풀었고 여기서 '교우'라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특유한 정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과 대축일의 전례는 그들의 한과 정을 흥으로 승화시켜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되었고, 어쩌다가 사제가 방문하여 미사라도 드리게 될 때면 그야말로 잔치판이 흥겹게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1984년에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열린 전국 사목회의에서는 이런 매우 비극적이었으면서도 교과서적으로 신앙의 신비가 진행된 한국교회사를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 사목 의안에서 지적하듯이, 이렇듯 한과 정과 흥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야말로 세속적 이기주의로 흐를 수 있는 샤먀니즘을 성사화할 수 있는 신앙 토착화의 길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부활 신앙으로 하나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역사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의로운 이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희생이 하느님 나라의 발판이자, 비옥한 토양이 되리라고 선언하신 진복팔단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우뚝 선 한국교회를 보편교회가 경탄하는 사정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한(恨)과 정(情)과 흥(興)이라고 말합니다. 엘리트들이 저질러온 사회적 불의 탓에 민중의 한이 생겨났다면, 사회적 불의로 인해 생겨난 국난에서 힘을 모아 풀어내는 과정에서 민중의 정이 생겨났고,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민중의 흥이 우러나온다는 민속학적 통찰입니다. 그러니 의인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민중의 한(恨)과 정(情)과 흥(興)이 역사의 원동력이 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한과 정과 흥을 듬뿍 담은 한류가 전 세계인들, 특히 약소 민족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얻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 이전 세계를 풍미했던 강대국들의 문화, 영국이나 프랑스 또는 미국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중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의 문화가 금새 생명력을 잃어 버린 사태와는 달리, 한류의 생명력이 오래 지속되리라는 예측을 낳고 잇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한류를 복음화의 계기요 도구로 삼아서 아시아를 복음화시켜 달라는 여망이, 한국교회의 역사를 꿰뚫어 보고 있는 교황청과 역대 교황들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박해시대 백 년 동안 2만여 명의 의인들의 희생을 딛고 우뚝 선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고 식별하며 선택해야 할 바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습니다.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지요. 천주교인들을 학살한 백년 박해는 조선 왕조 최대의 학살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박해 속에서도 교우촌을 백여 군데 넘게 건설하여 백 년 이상 지속하여 신앙을 전수해 주었고 끝내 대한민국의 헌법 안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비롯한 인간의 기본권을 못박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왕조 오백년 역사상 아니 한민족 반만년 역사상 최대의 기적이기도 합니다. 의로운 희생이, 평화스러운 저항이 끝내 역사를 하느님의 뜻에 가깝게 진보시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