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후손
강영은
남자가 건넨 최초의 말은 눈웃음, 고삐를 쥐어준 최후의 말은 손짓과 발짓
당근 대신 붉은 장갑을 끼고 채찍 대신 잔뜩 겁먹은 눈으로 말을 따라간다 다른 부족에게 납치당한 몽골 처녀처럼
말똥냄새 땀 냄새로 범벅 진 말을 다소곳이 따라간다 속도가 다른 말의 층위에 온 몸의 리듬과 느낌을 실어 나른다
말문을 처음 열 때처럼 말을 껴안은 등줄기가 곤두서고 말을 감싼 허벅지가 팽팽해진다 그의 말은 바람에 날리는 갈
기와 근육질의 엉덩이로 세계를 질주한 속도의 후예, 매끈하게 다듬어진 등외엔 소식이 없다 마음보다 먼저 몸을 낚
아챈 말의 거리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것처럼 멀지만 말 타기의 기초는 마음을 여는 것, 눈 속에 들어 있는 초원만
읽기로 한다 한 줄금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푸른 단어가 일렁인다 말의 경계가 사라진다 국경이 사라진다 말과 말 사
이, 초원만 남았다 사막과 초원, 습한의 땅에서 피어나
그리움은 이국어도 모국어도 필요 없는 말의 후손, 최초의 그리움은 손과 발에서 태어난다
강영은
서귀포 출생.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최초의 그늘』 『풀등, 바다의 등』 『마고의 항아리』 『상냥한 詩論』 『너머의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