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식 목사님
뜨거운 여름날, 아내와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와서 김중식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은 나의 청년의 때를 지도하시고 함께하신 귀한, 형님과도 같은 분이시다.
김 목사님은 유별나게 나의 모교회인 대구 서현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전임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그리고 교회 사정으로 인해 임시목사로도 시무하셨고 후에 위임받으셔서 담임목사님으로 사역하셨다. 교역자로서 한 교회에서 모든 직책을 맡으신, 교역자 직분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신 것이다.
김 목사님은 후에 서현교회를 스스로 사임하시고 훌쩍 부산으로 임지를 옮기셔서 은퇴하실 때까지 충성되이 사역하신 후 지금은 부산 남부민중앙교회 원로목사로 계신다.
목사로서 일평생 두 교회를 섬기신 것은 그분의 목회가 얼마나 성실하고 안정되었는가를 말해준다. 사실 서현교회는 떠나지 마시라고 교회가 붙잡아도 스스로 떠나신 것이기에 그냥 계셨다면 오직 한 교회에서 평생의 목회를 하셨지 않았겠나 싶다.
지난 2008년 10월 4일, 사랑하는 아내인 박경숙 사모님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시고 지금은 외동아들 영현 부부와 세 손주들을 돌보고 계신다.
박경숙 사모님은 나의 소꿉친구였다. 한 달 터울로 같은 교회(대구 서남교회)에서 태어나 소꿉놀이를 하며 함께 자랐다. 우리들의 부모님들 역시 청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믿음의 형제들이었기에 그분들이 천국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가까운 지체로 믿음의 교제를 나누기도 했다.
목사님과 우리 가족 셋, 그렇게 넷이서 마주 앉아 지난 얘기들을 하노라니 다시 그립기만 한 그날들로 돌아간 듯하나 그래도 세월은 이렇게 흘러 우리는 여기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앉아있는데…
다음 달이면 만 열세 살인 노엘이의 독일 프라이부르크 음대 피아노과에서의 새 학기가 시작되어 독일로 돌아가는 우리 가족을 위해 목사님께서 축복의 기도를 간절히 해 주셨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만약 목사님께서 서현교회를 떠나지 않으시고 그냥 계속 계셔서 목회를 이어가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서현교회가 지금보다는 더 단단하고 건강한 교회가 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김중식 목사님은 사리 분별이 분명하고 영적 결단력이나 목회철학이 건강하고 명확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신앙적인 삶에는 엄격하면서도 늘 친근하고 따뜻했던 그분이 이제 칠순노인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모님을 먼저 보내시고 얼마나 외로우셨겠나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한 말씀 하신다. 사모님 떠나시고 난 후 설교하고 온종일 심방하며 교회 돌보느라 그리워할 정신없이 20년 가까운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 가버렸다고….
목사님께선 놀라운 기록을 갖고 계신다. 서현교회에서 시무하고 계실 때 하루에만 심방을 29번까지 하신 적이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