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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11권 / 세기(世紀) 11
발해(渤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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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발해는 본디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속말부(粟末部)로 고구려에 신하로 소속된 나라이다.
옛 숙신씨(肅愼氏)의 지역에 살면서 한(漢)나라 때에는 읍루(揖婁)가 되고, 위(魏)나라 때에는 물길(勿吉)이
되고, 당(唐)나라 때에는 말갈(靺鞨)이 되었다. 서쪽으로는 돌궐(突厥)과 맞닿았고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인접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와 접하였는데, 모두 수십 부(部)로, 바로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흑룡강(黑龍江) 등지가 그 지역이다. 고구려가 멸망함에 미쳐서는 그 종족들이 대부분 당나라로 들어가
여러 부락이 모두 흩어졌는데, 남은 무리들은 흩어져서 발해로 들어왔다.
또 불열(拂涅)ㆍ우루(虞婁)ㆍ월희(越喜)ㆍ철리(鐵利) 등의 부가 있어서 당나라 초기에는 사신을 보내어
중국과 통하였으나, 그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모두 신하로 복종하니, 발해에서는 이들 지역에 군(郡)을
두었다.
동사(東史)를 보면, 대조영(大祚榮)은 본디 고구려의 옛 장수로,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백성들을 농우(隴右)와 하남(河南) 지방으로 옮기자 백성을 거두어 모아 도망쳐 태백산(太白山)에서 근근히
보존하였다. 뒤에 또 신라에게 붙어 5품 대아찬(大阿飱)의 벼슬을 받았으며, 그 뒤에는 고구려와 말갈의
전 지역을 차지하였다. 지역이 사방 5천 리로, 5경(京)과 15부(府)를 두었다. 서쪽으로는 중국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교빙하고 북쪽으로는 거란을 막고 동쪽으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동북의 오지를
압도하며 거의 3백 년 동안이나 존속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여러 역사 문헌에 나타나는 것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이란 자는 본디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 가서 살았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임)
연간에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이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여 험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굳게 지켰다. 이진충이 죽은 뒤
측천무후가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衞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진충의 남은
무리들을 소탕하게 하였는데, 이해고가 먼저 걸사비우를 참수하고 또다시 천문령(天門領)을 넘어 대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이에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들과 힘을 합해 이해고에게 맞서니, 당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이해고는 간신히 몸만 도망쳐 돌아왔다. 그 뒤 곧바로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에 항복하여
발해로 가는 길이 막혔으므로, 측천무후가 계속해서 대조영을 토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조영은 마침내
그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읍루(揖婁)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東牟山) 지역을 차지하여 성을
쌓은 다음 살았다. 대조영은 굳세고 용맹하며, 용병을 잘 하였으므로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속속 귀속하였다. 《구당서》
발해는 본디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자로, 성은 대씨(大氏)이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 도독(營州都督) 조회(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사리(舍利)
살펴보건대,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사리는 거란의 군사를 관할하는 두목(頭目)의 칭호이다.” 하였다.
걸걸중상(乞乞仲象)이란 자가 있었는데,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넜다. 그런 다음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쪽을 차지하고는 오루하(奧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굳게 지켰다. 이에 측천무후가 걸사비우를 봉하여 허국공(許國公)으로 삼고,
걸걸중상을 봉하여 진국공(震國公)으로 삼아 그의 죄를 용서해 주었는데, 걸사비우가 그 명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측천무후가 옥검위대장군(玉鈐衞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郞將) 색구(索仇)에게
명하여 쳐 죽였다. 이때에는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패잔병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해고에게 항거하니, 이해고가 패하여 돌아왔다. 이때 마침 거란이 돌궐에 귀부하였으므로 중국 군대를
보낼 길이 끊어져 다시 대조영을 칠 수가 없었다. 대조영은 곧바로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병하였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대조영은 바로 걸걸중상의 아들인데, 《구당서》에는 이를 밝히지 않았다.
이것은 《구당서》가 소략해서 그런 것이기에 지금 《신당서》를 함께 기록하여 참고에 대비하게 한다.
○ 측천무후 성력(聖曆) 연간 성력 2년(699)으로, 바로 고왕(高王) 대조영의 원년이다. 대조영이 스스로
서서 진국왕(震國王)이 되어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그 나라는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신라와 서로 접하였고, 서쪽으로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르르며, 땅이 사방 2천 리이고, 호구가 10여 만 호이며, 뛰어난 군사가 몇만
명이 된다.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으며, 자못 문자(文字)와 서기(書記)가 있다. 《구당서》
○ 부여(扶餘)ㆍ옥저(沃沮)ㆍ변한(弁韓)ㆍ조선(朝鮮) 등 바다 북쪽에 있는 여러 나라를 모두 차지하였다.
《신당서》
○ 중종(中宗) 즉위년에 고왕(高王) 7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발해에 보내어 위무하니, 대조영이
아들을 보내어 들어와 시위(侍衞)하게 하였다. 이에 대조영을 책립(册立)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거란과
돌궐이 해마다 침입하여 변경을 노략질하므로, 사명(使命)이 전달되지 못하였다. 《구당서》
○ 예종(睿宗) 선천(先天) 2년 바로 개원(開元) 원년(713)으로, 고왕 15년이다. 낭장(郞將) 최흔(崔訢)을
발해로 보내어 대조영을 책봉해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左驍衞員外大將軍渤海郡王)으로 삼았다.
이어 그가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고 살펴보건대, 홀한주는 동모산(東牟山) 읍루(揖婁)의
옛 땅에 있으며, 발해가 도읍한 곳이다. 홀한주 도독(忽汗州都督)의 직을 더해 주었다. 이 뒤로는 발해에서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 《상동》
○ 이로부터 발해가 비로소 말갈의 호칭을 버리고 발해라고만 칭하였다. 《신당서》
○ 《자치통감》 주에는 말갈이 이때부터 융성해졌다고 하였다.
○ 현종(玄宗) 개원(開元) 7년 고왕 21년, 무왕(武王) 무예 원년 3월에 대조영이 죽었다. 6월 정묘에
좌감문솔(左監門率) 오사겸(吳思謙)에게 홍려 경(鴻臚卿)을 섭행하게 하여 사신으로 뽑은 다음 발해로
보내어 조제(弔祭)를 지내게 하고, 대조영의 맏아들 계루군왕(桂婁郡王) 대무예(大武藝)를 책립하여
아버지의 관작인 좌요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을 승습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및 구당서》
○ 《책부원귀》에는 구성연연도독(九姓燕然都督)을 겸임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 대조영이 죽자 발해에서 사사로이 시호(諡號)를 올려 고왕(高王)이라고 하였다.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가
즉위하여 영토를 크게 개척하자, 동북방에 있는 여러 오랑캐 족속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그를 섬겼다.
또 대무예는 사사로이 연호를 고쳐 인안(仁安)이라고 하였다. 《신당서》
○ 8년 무왕 2년 8월에 대무예의 적자인 대도리행(大都利行)을 책봉하여 계루군왕으로 삼았다. 《책부원귀》
○ 10년에 무왕 4년흑수말갈의 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와서 조알하니, 현종이 즉시 발리주 자사
(勃利州刺史)를 제수하였다. 이때 안동도호(安東都護) 설태(薛泰)가 흑수부(黑水府)를 설치하고 흑수부의
장(長)으로 도독자사(都督刺史)를 삼기를 청하니, 조정에서는 장사(長史)를 두어 감독하는 한편, 흑수부의
도독에게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헌성(獻誠)이라 하였다. 그런 다음 운휘장군 영흑수경략사
(雲麾將軍領黑水經畧使)를 제수하고, 유주 도독(幽州都督)에게 예속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흑수부를 둔
것이 《구당서》에는 14년(726)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무예가 그의 부하들을 불러 모의하기를,
“흑수가 처음에 우리에게 길을 빌려서 당나라와 통하게 되었고, 지난날에 돌궐에게 토둔(吐屯)을 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고하였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원을 보내 주기를 청하면서 우리에게
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필시 당나라와 함께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하고는 아우 대문예(大門藝)와 장인 임아상(任雅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대문예는 일찍이 경사에 볼모로 와 있었던 탓에 이해득실에 대해 잘 아는지라 대무예에게 말하기를,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흑수말갈을 공격한다면, 이는 당나라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당나라는 대국으로서 군사가 우리보다 만 배는 강하니,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바로 망합니다. 당나라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대무예가 듣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때 대문예가 다시 글을 올려 굳이 간하니, 대무예가 화를 내면서 그의 종형인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대문예를 대신해서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대문예를 불러들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대문예가 두려워서 샛길을 통해 당나라로 귀순하였다. 《신당서》
○ 15년 무왕 9년 4월 정미에 칙명하기를,
“발해에서 와서 숙위(宿衞)하고 있는 왕자 대창발가(大昌勃價) 및 수령(首領) 등이 오래도록 머물러서
숙위하였으니 석방하여 번국(藩國)으로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경신에 대창발가에게 백(帛) 50필을 하사하고 수령 이하에게도 각각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이보다
앞서 대무예가 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을 보내어 와서 조알하였으며, 아울러 초서피(貂鼠皮)를 바쳤다.
이때에 이르러서 교서를 내려 대무예에게 주어 위로하고 채련(綵練) 1백 필을 하사하였다. 《책부원귀》
○ 20년 무왕 14년 9월에 대무예가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해적(海賊)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공격하게 하여 등주 자사 위준(韋俊)을 살해하였다. 이에 좌영군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게 하였다. 《구당서》
○ 21년 무왕 15년 정월 경신에 조서를 내려서 대문예를 파견하여 유주(幽州)로 가서 군사를 징발해
장문휴의 군사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신라로 가서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게 하였다. 이때 산은 험하고 날씨는 추우며, 눈은 한 장 남짓이나 쌓여
얼어 죽은 군사가 반이 넘었으므로 마침내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상동》
○ 살펴보건대, 신라사(新羅史)에는, “현종이 내사(內使) 고간(高侃)ㆍ하행성(何行成) 및 김사란(金思蘭)을
함께 신라로 보내어 신라 왕에게 유시하기를, ‘발해가 겉으로는 번국이라고 칭하면서 안으로는 교활한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이제 군사를 출동시켜 죄를 물으려고 한다. 그러니 경 역시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라.’ 하고, 또 칙명을 내려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의 손자인 김윤중(金允中)을 장수로
삼고 금백(金帛)을 하사하였다. 이에 왕이 김윤중 등 4명의 장수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나라
군사와 만나서 발해를 치게 하였는데, 마침 날씨가 추워 사졸들이 얼어 죽으므로 군사를 파하여 돌아왔다.”
하였다.
○ 25년에 무왕 19년,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원년 대무예가 병이 나 졸하였다. 발해에서 사사로이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하였다. 아들 대흠무가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고쳤다. 현종이 조서를 내려
내시(內侍) 단수간(段守簡)을 파견해 발해로 가서 대흠무를 책봉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게 하고,
이어 아버지의 관작인 좌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左驍衞大將軍忽汗州都督)을 승습하게 하였다.
대흠무가 이 조서를 받들고 경내에 사면령(赦免令)을 내렸다. 그러고는 사신을 파견해 단수간을 따라
중국 조정에 들어가서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당례(唐禮)》ㆍ《삼국지(三國志)》ㆍ《진서(晉書)》ㆍ
《삼십육국춘추(三十六國春秋)》를 베껴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모두 허락하였다. 《상동 및 신당서》
○ 천보(天寶) 말기에 대흠무가 도성을 상경(上京)으로 살펴보건대, 발해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는 바로
옛날의 숙신씨(肅愼氏) 지역으로,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지역이다. 옮겼는데, 옛 도성에서 3백 리 떨어진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었다. 현종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조공(朝貢)한 것이 29차례였다. 《신당서》
○ 숙종(肅宗) 지덕(至德) 원년에 문왕 20년 평로유후(平盧留後) 서귀도(徐歸道)가 과의도위
유성현사부경략판관(果毅都尉柳城縣四府經畧判官) 장원간(張元簡)을 사신으로 보내어 발해에 고하기를,
“올 10월에 안녹산(安祿山)을 칠 것이니 왕은 모름지기 기병 4만 명을 출동시켜 와서 도우라.”
하였는데, 대흠무가 다른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머뭇거렸다. 12월 병오에 서귀도가 과연 평로 절도사
유정신(劉正臣)을 북평(北平)에서 독살하고 몰래 안녹산과 유주 절도사(幽州節度使) 사사명(史思明)과
더불어서 내통하면서 모의하였다. 안동도호(安東都護) 왕현지(王玄志)가 모의한 사실을 알아채고는 정병
6천 명을 이끌고 유성(柳城)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서귀도를 참수한 다음, 스스로 평로 절도사라고 칭하면서
북평에 주둔하였다. 그러고는 장군 왕진의(王進義)를 발해에 보내어 고하게 하였는데, 아뢰기를,
“천자가 이미 서경(西京)으로 돌아가서 촉(蜀)에서 태상황(太上皇)을 맞이해 오고 별궁(別宮)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적도(賊徒)를 다 섬멸하였으므로 신을 보내어 고하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대흠무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워서 왕진의를 억류하고서 별도로 사신을 보내어 들어가서 조알하게
하니, 숙종이 칙서를 내려 위로하였다. 《상동 및 구당서》
○ 보응(寶應) 원년에 문왕 26년 황제가 조서를 내려 발해를 나라로 삼고 대흠무를 왕으로 삼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로 승진시켰다. 《신당서》
○ 대종(代宗) 대력(大曆) 8년 문왕 37년 윤11월에 발해에서 볼모로 와 있는 자가 곤룡포(袞龍袍)를
훔쳤으므로 잡아 가두었는데, 공초하기를 “중화의 문물을 흠모해서 그랬다.” 하니, 황제가 불쌍하게 여겨
놓아주었다. 《책부원귀》
○ 12월에 사신을 보내 와서 조공하였다. 대력 2년(767)에서 10년까지 혹 자주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기도
하고, 혹 두 해마다 한 번씩 오기도 하고, 혹 한 해에 두세 번 오기도 하였다. 《구당서》
○ 12년 문왕 41년 정월에 발해에서 사신을 보내어 일본국(日本國) 무녀(舞女) 11명과 방물을 바쳤다.
《상동》
○ 14년 문왕 43년 5월 계해에 덕종이 즉위하였다. 병자에 조서를 내려 발해에서 해마다 공물로 바치는
새매[鷹鷂]를 바치지 말게 하였다. 《상동》
○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에 대흠무가 도성을 동남쪽에 있는 동경(東京)으로 옮겼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는 지금의 경성부(鏡城府)이다.
○ 10년 문왕 58년 3월에 대흠무가 졸하였다. 사사로이 시호를 문왕이라 하였다. 대흠무의 아들
대굉림(大宏臨)이 일찍 죽어서 족제(族弟)인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하였는데, 의심이 많고 포학하여 1년 만에
나라 사람들이 죽이고는 대굉림의 아들 대화여(大華璵)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대화여는 다시 도성을
상경(上京)으로 옮기고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쳤다. 대화여가 졸하자, 시호를 성왕(成王)이라 하였다.
대흠무의 작은 아들 대숭린(大嵩璘)이 즉위하여 연호를 정력(正歷)으로 고쳤다. 《상동》
발해는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고 나서 개원(開元) 연간에 그의 아들 대무예가 즉위하면서 더욱더 강성해져
동북방의 오랑캐가 모두 두려워하면서 발해를 섬겼으며,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다시 5대를 내려와
송(宋)나라에 이르러 요(遼)나라의 야율씨(耶律氏)가 자주 발해를 쳤으나,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자치통감》에 발해의 세계(世系)를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다. 《자치통감 주》
○ 11년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 원년 2월 을사에 내상시(內常侍) 은지첨(殷志瞻)을 보내어 대숭린을
책봉해 우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 발해군왕(右驍衞大將軍忽汗州都督渤海郡王)으로 삼았다. 《구당서》
○ 14년에 강왕 4년 대숭린에게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銀靑光祿大夫檢校司空)을 제수하고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올려 책봉하였다. 전에 대숭린의 아버지 대흠무(大欽茂)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왕(郡王)이 되어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에 제수되었다가 천보(天寶) 연간에 여러 차례 직급이 올라
특진 태자첨사빈객(特進太子詹事賓客)이 되었고, 이어 보응(寶應) 원년에 국왕(國王)으로 올려 책봉되었으며,
대력 연간에 여러 차례 가자되어 사공(司空)과 태위(太尉)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대숭린이 왕위를
이어받음에 미쳐서는 단지 군왕(郡王)과 장군의 직위만 제수받았다. 이에 대숭린이 사신을 보내어 이치를
들어 따졌으므로 다시 올려 책봉한 것이다. 《상동》
○ 《신당서》에는, 건중(建中)과 정원(貞元) 연간에 모두 네 차례 왔다고 되어 있다.
○ 21년 강왕 11년 정월에 순종(順宗)이 즉위하였다. 5월 갑진에 검교사공 홀한주도독 발해국왕
(檢校司空忽汗州都督渤海國王) 대숭린을 금자광록대부 검교사도(金紫光祿大夫檢校司徒)로 올렸다. 《상동》
○ 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 강왕 13년 9월 병술에 대숭린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더 제수하였다.
《상동》
○ 4년에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 원년 대숭린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강왕(康王)이라 하였다.
아들 대원유(大元瑜)가 즉위하여 연호를 영덕(永德)으로 고쳤다. 《신당서》
○ 대원유를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홀한주도독(銀靑光祿大夫檢校祕書監忽汗州都督)으로 삼고,
전대로 발해국왕(渤海國王)에 봉하였다. 《구당서》
○ 8년 정왕 5년, 희왕(僖王) 대언의(大言義) 원년 정월에 대원유(大元瑜)가 죽었다. 시호를 정왕(定王)이라
하였다. 동생 대언의가 즉위하여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쳤다. 경오에 권지발해국무(權知渤海國務)
대언의에게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홀한주도독 발해국왕(銀靑光祿大夫檢校祕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을
제수하고, 내시 이중민(李重旻)을 사신으로 보냈다. 《상동 및 신당서》
○ 13년에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원년 대언의가 죽으니, 시호를 희왕(僖王)이라 하였다.
동생인 대명충(大明忠)이 즉위하여 연호를 태시(太始)로 고쳤다.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으니,
시호를 간왕(簡王)이라 하였다. 대명충의 종부(從父)인 대인수가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다.
대인수의 4대조는 대야발(大野勃)로 바로 고왕(高王) 대조영의 동생이다. 《신당서》
○ 정월 을사에 발해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또 부고하였다. 5월 신축에 지국무(知國務) 대인수를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홀한주도독 발해국왕으로 삼았다. 《구당서》
○ 15년 선왕 3년 윤 1월에 발해에서 사신을 보내어 와서 조공하였다. 대인수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部)를 토벌하여 국토를 넓혀 공이 있었으므로, 조서를 내려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
(金紫光祿大夫檢校司空)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원화(元和) 연간에는 모두 16번 조공을 바쳤고,
장경(長慶) 연간에는 4번, 보력(寶曆) 연간에는 2번 조공을 바쳤다. 《상동 및 신당서》
○ 문종(文宗) 태화(太和) 4년에 선왕 13년 대인수가 죽었다. 시호를 선왕(宣王)이라 하였다.
아들 대신덕(大新德)이 일찍 죽어서 손자 대이진(大彝震)이 즉위하여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쳤다. 《신당서》
○ 5년 왕 대이진(大彝震) 원년 정월 기축에 권지국무(權知國務) 대이진을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홀한주도독 발해국왕으로 삼았다. 《구당서》
○ 6년 왕 대이진 2년 12월 무진에 내양(內養) 왕종우(王宗禹)가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발해에서 좌우 신책군(神策軍), 좌우 삼군(三軍), 1백 20사(司)를 두었다고 하면서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상동》
○ 7년 왕 대이진 3년 정월에 발해에서 동중서우평장사(同中書右平章事) 고보영(高寶英)을 보내어
책명(册命)을 내려 준 것을 사례하였다. 이어 학생 3인을 고보영에게 딸려 보내어 상도(上都)에 나아가
학문을 배우게 하고, 앞서 보낸 학생 3인은 학문이 어느 정도 되었으므로 귀국시켜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상동》
○ 문종(文宗)의 대가 끝날 때까지 와서 조회한 것이 모두 12번이며, 회창(會昌 당 무종(武宗)의 연호)
연간에는 모두 4번이었다. 《신당서》
○ 선종(宣宗) 대중(大中) 12년 왕 대건황(大虔晃) 2년 2월에 대이진이 졸하였다. 계미에 그의 동생
대건황이 서서 발해 국왕이 되었다. 《자치통감》
○ 대건황이 죽고 대현석(大玄錫)이 즉위하였다. 함통(咸通 당나라 의종(懿宗)의 연호) 때에 드디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나라 안에는 5경(京), 15부(府), 62주(州)가 있다. 이곳에서는 왕을 일러
가독부(可毒夫), 성주(聖主), 기하(基下)라고 하고, 왕의 명령을 교(敎)라고 하며, 왕의 아버지를
노왕(老王)이라 하고, 어머니를 태비(太妃)라고 하고, 아내를 귀비(貴妃)라고 하고, 맏아들을 부왕(副王)이라고
하고, 나머지 아들들을 왕자(王子)라고 한다. 발해의 관명(官名)은 대개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다.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와는 서로 빙문(聘問)하였으나, 영주(營州)와 평주(平州)에서 경사까지는 8천 리나
되는 먼 거리였으므로, 그 뒤에도 조공을 바쳤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사가(史家)들이 기록하지 않은 탓에,
반란하였는지 귀부하였는지에 대해 상고할 수가 없다. 《신당서》
○ 양(梁) 태조 개평(開平) 원년(907) 5월에 발해의 왕 대인선(大諲譔)이 왕자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발해는 본디 말갈(靺鞨)이라 부르는데, 고구려의 별종이다. 발해의 귀족은 성이 대씨로, 5대 동안이나 항상
왕래하면서 조공을 바쳤는데, 그 나라의 토산물(土産物)은 고구려와 같다. 대인선의 세차(世次), 왕이 된 해,
죽은 해 등에 대해서는 역사의 기록을 모두 잃어버렸다. 《오대사(五代史)》
○ 요(遼) 태조 신책(神册) 3년(918) 2월에 발해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요사(遼史)》
○ 4년 2월 병인에 요양(遼陽)의 옛 성을 수복한 뒤 이를 고쳐 동평군(東平郡)으로 삼고 방어사(防禦使)를
둔 다음 발해의 호구(戶口)들을 잡아다가 채워 넣었다. 《상동》
○ 천찬(天贊) 3년(924) 5월에 계주(薊州)의 백성들을 옮겨 요주(遼州)의 지역에다가 채웠다.
발해가 요주의 자사 장수실(張秀實)을 살해하고 백성들을 빼앗아 갔다. 《상동》
○ 《요사고증(遼史考證)》에는, “《자치통감》을 살펴보면 이해에 거란의 군사가 발해를 정벌한 내용이 있어서
날짜를 상고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요사》에는 5월조에 발해가 자사를 살해하고 백성들을 빼앗아 갔다고만
하였다. 여기에서 역사를 쓰는 자들이 빠뜨린 내용이 많음을 알겠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요(遼) 천찬 3년은 바로 후당(後唐) 동광(同光) 2년이다.
○ 후당 장종(莊宗) 동광 2년(924) 7월이다. 이 당시에 동북방의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거란에 투속하고
오로지 발해만이 거란에 복속되지 않았었다. 거란의 추장이 중국을 치려고 꾀하였는데, 발해가 중국과
내통하면서 거란의 뒤를 칠까 염려하였다. 이에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요동 지방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장수 위뢰(委餒)와 노문진(盧文進)을 보내어 영주(營州)ㆍ평주(平州) 등에 웅거하여 연(燕) 지방을
어지럽히도록 하였다. 8월에 거란이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다.
《자치통감》
○ 《책부원귀》에는, “동광 2년 7월에 유주(幽州)에서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동쪽으로 발해를
공격한 사실을 정탐하였다고 아뢰었다.” 하였다.
○ 3년 5월 을묘에, 발해국의 입조사(入朝使)인 정당성수화부소경 사자금어대(政堂省守和部少卿賜紫金魚袋)
배구(裴璆)에게 찬선대부(贊善大夫)를 더해 주었다. 《책부원귀》
○ 요 천찬(天贊) 4년 12월 을해에 조서를 내리기를,
“이른바 두 가지 일 가운데서 한 가지 일은 이미 완수하였으나, 발해와의 대대로 내려온 원수는 갚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친히 발해의 대인선(大諲譔)을 정벌하였는데, 황후(皇后)와 황태자(皇太子),
대원수(大元帥) 요골(堯骨)이 모두 따라갔다. 윤달 임진에 목엽산(木葉山)에 제사 지내고, 임인에
오산(烏山)에서 청우(靑牛)와 백마(白馬)를 희생으로 써서 천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었으며, 정사에
상령(商嶺)에 주둔하였다가 그날 밤에 부여부(扶餘府)를 포위하였다. 《요사》
○ 천현(天顯) 원년(926) 정월 기미에 백기(白氣)가 해를 꿰었다. 경신에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을
《자치통감》 주에, “바로 당나라와 고구려 때의 부여성이다. 이 당시에 고려 왕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워
혼동강(混同江)까지 차지해서 지키고, 혼동강 서쪽은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부여성이 발해에 속한 것이다.
혼동강은 바로 압록수(鴨綠水)이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혼동강과 압록수는 서로 다른 강이다. 함락하고는 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를 죽였다.
《책부원귀》에, “후당 동광 4년 정월에 북면초토사(北面招討使) 이소진(李紹眞)이 ‘북쪽에서 해(奚)의
수령(首領)이 와서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를 쳤다고 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동광 4년은 바로 거란 천현 원년이다. 병인에 척은(惕隱) 살펴보건대, 《국어해(國語解)》를
보면, 척은은 족속(族屬)을 맡은 관원으로, 바로 종정(宗政)의 직책이다. 안단(安端)과 전 북부재상(北府宰相)
소아고지(蕭阿古只) 등에게 명하여 1만 기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게 하였는데, 대인선의 노상(老相)이 거느린
군사를 만나서 격파하였다. 황태자, 대원수 요골, 남부재상 소(蘇), 북원(北院)의 이리근(夷离菫) 살펴보건대,
이리근은 군마(軍馬)를 관할하는 대관(大官)이다. 사녈적(斜涅赤), 남원(南院)의 이리근 질리(迭里)가 이날
밤에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였다. 기사에 대인선이 항복을 청하였다. 경오에 홀한성의 남쪽에 군사를
주둔하였다. 신미에 대인선이 소복(素服)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고 양을 끌면서 요속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니, 태조가 후하게 대우하면서 풀어 주었다. 갑술에 조서를 내려 발해의 군현에
유시하였다. 병자에 근시(近侍) 강말항(康末恒) 등 13명을 성안으로 보내어 무기를 수색하게 하였는데,
나졸(邏卒)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정축에 대인선이 다시 반란하니, 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어가(御駕)가
성안으로 들어가자, 대인선이 말 앞에서 죄주기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대인선과 그 족속들을 군사들로
에워싸고서 나와 천지의 신에게 제사 지낸 다음 다시 군중(軍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2월 경인에 안변(安邊)ㆍ막힐(鄚頡)ㆍ남해(南海)ㆍ정리(定理) 등의 부와 제도의 절도사(節度使)와
자사(刺史)가 와서 조회하니, 위로하여 보냈으며, 노획한 기물과 포백 등의 물품을 장사(將士)들에게
하사하였다. 임진에 청우(靑牛)와 백마(白馬)를 희생으로 써서 천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고, 대사령을
반포하였으며, 연호를 천현(天顯)으로 고치고 발해를 평정하였다는 내용으로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통보하였다. 갑오에 다시 홀한성(忽汗城)에 행행하여 창고에 있는 물품을 둘러본 다음 따라간 신하들에게
차등이 있게 하사하였다. 그리고 해부(奚部)의 장(長) 발로은(勃魯恩)ㆍ왕욱(王郁)이 회골(回鶻)로부터
신라(新羅)ㆍ토번(吐蕃)ㆍ당항(黨項)ㆍ실위(室韋)ㆍ사타(沙陀)ㆍ오고(烏古) 등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하여 넉넉하게 상을 주었다. 병오에 발해국을 고쳐 동단(東丹)으로 삼고, 홀한성을 천복(天福)으로 삼았으며,
황태자 배(倍)를 책봉하여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 이를 주관하여 다스리게 하고, 황제(皇弟) 질라(迭刺)를
좌대상(左大相)으로, 발해의 노상(老相)을 우대상으로, 발해의 사도(司徒) 대소현(大素賢)을
좌차상(左次相)으로, 야율우지(耶律羽之)를 우차상으로 삼았으며, 발해 국내의 사형수 이하의 죄인을 모두
사면하였다.
3월 무오에 이리근(夷离菫) 강묵기(康默記), 좌복야(左僕射) 한연휘(韓延徽)를 보내어 장령부(長嶺府)를
공격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장령부는 홀한성이 함락되었을 적부터 성을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었다.
기사에 안변ㆍ막힐ㆍ정리 등 세 부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안단(安端)을 보내어 토벌하였다. 정축에 세
부를 평정하였다. 임오에 안단이 포로를 바치자, 안변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수 2명을 처형하였다. 갑신에
천복성(天福城)에 행행하였다. 을유에 회군하였는데, 대인선의 모든 족속들을 데리고 갔다. 5월 신유에
남해ㆍ정리 두 부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원수 요골이 토벌하여 6월 정유에 두 부를 토평하였다.
7월 병진에 철주 자사(鐵州刺史) 위균(衞均)이 반란을 일으켰다. 을축에 요골이 철주(鐵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미에 대인선을 호송하여 황도(皇都)의 서쪽으로 보내 성을 쌓고 살게 하였으며, 대인선에게
오로고(烏魯古)란 이름을 하사하고, 아내에게는 아리지(阿里只)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살펴보건대,
《국어해(國語解)》를 보면, 오로고와 아리지는 태조(太祖)와 술률후(述律后)가 대인선에게 항복을 받을 때
탔던 말의 이름인데, 인하여 대인선 부부에게 이름으로 하사한 것이다. 신사에 태조가 부여부(扶餘府)에서
붕하니, 황후가 임시로 군국(軍國)에 관한 일을 주관하였다.
8월 신묘에 강묵기(康默記) 등이 장령부(長嶺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인에 요골이 여러 주를 토평하고
행재소(行在所)로 달려왔다. 을사에 인황왕(人皇王) 배(倍)가 뒤이어 계속하여 행재소로 왔다. 《상동》
○ 《책부원귀》에는, “당 명종(唐明宗) 천성(天成) 원년(926) 11월에 청주(靑州)의 곽언위(霍彦威)가 아뢰기를,
‘등주(登州)의 장계를 보니, 거란에서 먼저 여러 부(部)의 군사를 출동시켜 발해국을 공격하였는데, 아보기가
죽은 뒤에 비록 군사를 퇴각시키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병마를 발해의 부여성에다가 남겨 두었다. 지금
발해 왕 동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성에 남아 있는 거란 군사를 포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천성 원년은 바로 요 천현 원년이다.
○ 주 세종(周世宗) 현덕(顯德) 초에 발해의 추호(酋豪) 최오사(崔烏斯) 등 33명이 와서 귀부하였다. 발해는
당(唐)ㆍ후량(後梁)ㆍ후당(後唐) 때부터 중국에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쳤다. 후당 천성 초에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부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야율아보기가 죽자, 발해 왕이 다시 부여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장흥(長興 후당 명종의 연호)과 청태(淸泰 후당 폐제(廢帝)의 연호) 연간에도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그러다가 주나라 현덕 연간 이후로는 길이 끊어져서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다. 《송사》
○ 송 태종(宋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6년(981)에 태종이 요나라를 크게 정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7월
병오에 발해의 오사성 부유부 발해 염부왕(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王)에게 조서를 내렸는데, 그 조서에 대략,
“우매한 저 북쪽 오랑캐가 대대로 주멸되지 않은 채, 도리에 어긋나는 일로 원한을 맺어 번번이 멋대로
잠식해 왔다. 이에 지난번에 군사를 출동시켜 오랑캐의 군사를 많이 참획하였다. 이제 진군의 북을
울리면서 깊숙이 쳐들어가 자리를 말듯이 휩쓸면서 말을 몰아 오랑캐의 궁궐을 불사르고 오랑캐의 무리를
섬멸하려고 한다. 내가 평소에 들으니, 그대 나라는 원수의 나라와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 그들에게
병탄당하면서도 무력으로 그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탓에 꼼짝없이 복종하면서 땅을 떼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모든 부족을 다 출동시켜 우리의 군사를 돕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면 오랑캐들을 다
섬멸한 다음에 크게 상을 내려 북쪽 사막 바깥의 지역은 모두 다 그대 나라에 떼어 줄 것이니, 협력하기
바란다. 짐은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하였다. 《상동》
○ 순화(淳化) 2년(991) 겨울에 발해가 조공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여진(女眞)에 조서를 내려치게 하였다.
《상동》
○ 요 성종(遼聖宗) 개태(開泰) 7년(1018)에 발해를 친히 정벌하였다. 《요사》
○ 태평(太平) 9년(1029) 8월에 동경사리군(東京舍利軍)의 상온(詳穩) 대연림(大延琳)이 살펴보건대,
대연림은 발해 고왕(高王)의 7세손이다. 유수(留守)와 부마도위(駙馬都尉) 소효선(蕭孝先)을 수금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왕을 참칭하면서 국호(國號)를 흥료국(興遼國)이라 하고,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천흥(天興)으로 되어 있다. 이때에 남북의 여진이 모두 대연림을 따랐으며,
고려에서도 역시 조공을 늦추었다. 10월에 소효목(蕭孝穆)을 도통(都統)으로 삼아 토벌하였다. 《상동》
○ 10년 8월에 대연림을 사로잡고 발해를 평정하였다. 《상동》
○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5년(1115) 2월에 요주(饒州)의 발해인(渤海人) 고욕(古欲)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는 자칭 대왕(大王)이라 칭하였다. 《상동》
○ 6년 정월 초하루 병인에 동경(東京)에서 한밤중에 악동(惡童) 10여 명이 술에 취해 칼을 들고는
유수부(留守府)의 담을 뛰어넘어 들어와서 유수 소보선(蕭保先)을 찔러 죽였다. 이에 유수의 비장(裨將)으로
있던 발해 사람 고영창(高永昌)이 왕호를 참칭하고는 융기(隆基) 원년이라고 칭하였다. 윤월에
소한가노(蕭韓家奴)와 장림(張琳)을 보내어 고영창을 토벌하였다. 4월에 소한가노 등이 다시 고영창에게
패하였다. 5월에 황제가 산목원(散木原)에서 피서하였다. 여진의 군사가 심주(瀋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시 동경을 함락시키고 고영창을 포로로 잡으니, 동경의 주현(州縣)에 있던 족인(族人)들이 모두 여진에게
항복하였다. 《상동》
○ 7년 정월에 여진의 군사가 춘주(春州)를 공격하니 발해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상동》
○ 금 태조(金太祖) 수국(收國) 2년(1116) 4월 을축에 알로(斡魯)에게 제군(諸軍)을 모두 거느리고
도모(闍母)ㆍ포찰(蒲察)ㆍ적고내(迪古乃) 등과 함께 가서 함주로 도통(咸州路都統) 알로고(斡魯古)와 군사를
합해 고영창을 치게 하였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고영창이 군사들을 위협하고 꾀어서 한쪽 방면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허술한 틈새를 파고들어 차지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원대한 계책이 있는 것이 아니니, 고영창은 곧바로 망할 것이다. 동경(東京)에 있는
발해 사람들은 나에게 덕을 입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쉽사리 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발해
사람들이 우리에게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나아가서 토벌하되,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는 말라.”
하였다.
고영창은 발해 사람으로서 요나라에 벼슬해 비장(裨將)이 되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동경의
팔담구(八甔口)에 주둔해 있었다. 고영창은 요나라의 정사가 날로 문란해지고, 태조가 군사를 일으키자
요나라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 동경에 있는 한인(漢人)들이
발해 사람들과 원한을 맺어 발해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이에 고영창이 발해 사람들을 꾀어 군사들과 함께
동경에 들어가서 동경부를 차지하니, 한 달도 못 되는 사이에 원근에서 이에 호응하여 군사가 8천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자 고영창이 드디어 왕호를 참칭하면서 융기(隆基)로 연호를 고쳤다. 요나라 사람들이
고영창을 토벌하였으나, 오래도록 토평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영창이 달불야(撻不野)ㆍ표합(杓合)을 시켜
폐백을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 “둘이 함께 힘을 합하여
요나라를 탈취하였으면 한다.” 하였다. 이에 태조가 호사보(胡沙補)로 하여금 가서 유시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나에게 항복하면 왕의 관작을 주겠다.” 하고, 이어 요나라에 편입된 여진족
호돌고(胡突古)를 보내게 하였다. 그러자 고영창이 달불야로 하여금 호사보ㆍ호돌고와 함께 가게 하였는데,
고영창이 올린 표문(表文)의 내용이 공손치 않았으며, 또 포로로 잡아간 발해 사람들을 돌려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태조가 호돌고를 머무르게 하고 보내지 않으면서 대약사노(大藥師奴)를 파견하여
달불야와 함께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5월에 알로가 심주(瀋州)로 진격해 함락시켰다. 이에 고영창이 크게 두려워해서 가노(家奴)인 탁라(鐸刺)를
시켜 금인(金印) 하나와 은패(銀牌) 50개를 보내면서 명호(名號)를 버리고 번국(藩國)을 칭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알로가 호사보(胡沙補)ㆍ살팔(撒八)로 하여금 통보하게 하였다. 이때 마침 발해 사람 고정(高禎)이
항복해 와서 말하기를, “고영창은 진심으로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늦추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알로가 진격하니, 고영창이 드디어 호사보 등을 죽인 다음 군사들을 거느리고
항거하였다. 옥리활수(沃里活水)에서 두 군사가 만났는데, 고영창의 군사가 싸우지 않고 퇴각하였다. 알로가
드디어 북쪽으로 가서 동경성 아래에 이르렀다. 다음 날에 고영창이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와서 싸웠는데,
다시 고영창이 크게 패하고는 드디어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장송도(長松島)로 도망쳤다. 이보다 앞서
태조가 영강주(寧江州)를 함락하였을 때 거기에 있던 동경(東京) 발해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들이
가끔 중간에서 도망치자, 여러 장수들이 발해 사람들을 모두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이미 적을
이겨서 성을 함락했으면 되었지, 어찌 많이 죽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동경 사람
은승노(恩勝奴)ㆍ선가(仙哥) 등이 고영창의 처자식을 잡은 뒤 성을 들어서 항복하였는데, 이들은 바로
영강부에서 석방하였던 동경 발해 사람들이었다. 얼마 뒤에 달불야가 고영창 및 탁라(鐸刺)를 잡아
태조에게 바치니, 모두 처형하였다. 이에 요의 남로(南路)에 있던 여진족과 동경의 주현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요나라 법을 없애고 세금을 줄여 주었으며, 맹안(猛安)과 모극(謀克)을
설치하기를 한결같이 본조(本朝)의 규례와 같이 하였다. 《금사(金史)》
○ 발해국은 연경(燕京)이나 여진이 도읍한 곳에서 모두 1천 5백 리 떨어져 있는데, 돌로 성을 쌓았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아울렀다. 왕의 성은 대씨(大氏)이며, 대성(大姓)으로는
고씨(高氏)ㆍ장씨(張氏)ㆍ두씨(竇氏)ㆍ오씨(烏氏)ㆍ이씨(李氏) 등 몇개에 불과하다. 성씨가 없는 부곡(部曲)과
노비들은 모두 왕의 성씨를 따른다. 부인들은 모두 투기가 심하다. 이에 다른 성씨와 서로 결연을 맺어
10자매(姊妹)가 되어 번갈아 가면서 남편들을 기찰하여 측실(側室)을 두거나 유녀(游女)들과 놀지 못하게
하며, 그런 사실이 있다고 들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독살한다. 만약 어떤 남편이
이를 범하였는데도 그 아내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경우에는 나머지 아홉 사람이 함께 모여 욕설을 퍼붓는
등 투기하는 것을 서로 떠벌리면서 자랑한다. 이에 거란이나 여진에는 모두 여창(女娼)이 있고
남편들에게는 모두 작은 마누라나 시비(侍婢)가 있으나, 발해만은 그런 것이 없다.
발해의 남자들은 지모가 뛰어나며 날쌔고 용감하여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다. 그래서 ‘발해 사람 셋이면
호랑이도 당해낸다’는 말까지 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의 왕 대인선을 멸망시킨 뒤
발해의 명장(名帳) 1천여 호를 연(燕) 지방으로 옮기고는 토지를 나누어 주고 세금을 줄여 주었으며,
왕래하여 무역하면서 시장에서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이 선봉에 서게
하였다. 천조제(天祚帝)의 변란 때 발해의 무리들이 모여 예전에 발해의 도성이 있던 지역에서 대씨(大氏)
성을 가진 자를 세워 왕이 되게 하였는데, 금나라 사람들이 이를 토벌하였다.
그때 금나라 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고씨(高氏) 성을 가진 발해의 귀족이 가족을 팽개치고 금나라에 가서
항복한 다음 발해의 허실에 대해 모두 말하였다. 성이 함락된 뒤 거란에서 연 지방으로 옮긴 발해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불어나 5천여 호나 되었으며, 군사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금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자주 산동(山東) 지방에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는데, 매년 수백 가를 옮기는 데 불과하여 신유년에 이르러서야 모두 옮겨 가게 하니, 발해 사람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이들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편안하게 산 지가 2백 년이 넘어 왕왕 집에 정원을 만들고는 모란(牡丹)을
심었는데, 많은 경우에는 2, 3백 그루나 되었으며 어떤 모란은 수십 줄기가 빽빽하게 자라난 것도
있었는데, 이는 모두 연 지방에는 없는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런 정원들을 겨우 몇만 냥이나 혹은 5천
냥에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떠나갔다. 옛 발해 지역에 살던 자들은 거란의 지역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옛날에 동경(東京)이 있었던 지역에 유수(留守)를 두었다. 소주(蘇州)와 부주(扶州) 등이 있었는데,
소주는 중국의 등주(登州)나 청주(靑州)와 아주 가깝게 서로 마주하여 있어서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개와 닭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송막기문(松漠紀聞)》
살펴보건대, 요 천현(天顯) 원년(926)에 바로 후당 천성(天成) 원년이다. 홀한성(忽汗城)을 이미 격파하고
대인선(大諲譔)을 임황(臨潢)으로 옮겼으며, 대광현(大光顯)이 고려로 달아났다. 그러나 《요사》에는 “태조가
영웅의 도량이 있어서 발해를 멸하고서도 그 족장(族帳)을 요련(遙輦)의 다음에 두었다.” 하였으며, 요나라의
동북로관압사(東北路管押司)에 발해부(渤海部)와 서북발해부가 있다. 태종 때에는 발해 사람들을 한결같이
한(漢)나라 법에 의거하여 다스리고 그 풍속을 고친 것이 없었으며, 성종(聖宗) 통화(統和)와 개태(開泰)
연간에는 혹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혹 중국에서 군사를 보내어 친히 정벌하기도
하였으며, 소한가노(蕭韓家奴)는 “발해ㆍ여진ㆍ고려가 서로 합종연횡(合從連橫)하고 있다.” 하였다.
후당(後唐)의 장흥(長興)ㆍ청태(淸泰) 연간에는 해마다 중국에 직공(職貢)을 닦아 사신이 끊이지 않았으며,
《오대사》에는 “주나라 세종 현덕(顯德) 연간까지 발해의 사신이 항상 왔다.” 하였으며, 송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는 중국에서 염부왕(琰府王)에게 조서를 내렸고, 순화(淳化) 2년에는 발해에서
조공을 보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진에 명해서 공격하게 하였으며, 호삼성(胡三省)은 “발해는 5대 시대를
거쳐 송나라 때 이르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비록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상의 사실들로 보면 발해가 비록 이미 망하였으나 오히려 남은 부(部)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송사(宋史)》 송기열전(宋琪列傳)에는, 송기가 변방의 일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발해의 병마와 토지는
해장(奚帳)보다 더 성합니다. 지금 비록 억지로 거란을 섬기고 있지만, 모두 자신들의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킨 데 대한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끝내는 대연림(大延琳)과 고영창(高永昌)이 서로
이어서 반란을 일으켰고, 춘주(春州)와 요주(饒州)에 있던 발해 백성들도 걸핏하면 흔단을 일으켜, 요나라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반란을 일으키고 귀부하기를 멋대로 하였다. 주나라 현덕 이후의 사실은 모두
대인찬이 요나라에 항복한 이후의 일이므로 지금 대충 끝에다가 기술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야율아보기가 이미 발해의 호구를 내지(內地)로 옮긴 뒤에는 발해군상온(渤海軍詳穩)과
발해군도지휘사사(渤海軍都指揮使司)를 두어 요양로(遼陽路)에 속하게 하여 이로써 고려를 제압하게 하면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징발하였다. 천경 4년(1114)에 여진이 영강주(寧江州)를 공격하자, 해주 자사(海州刺史)
고선수(高仙壽)를 파견해 발해군을 거느리고 응원하게 한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할 경우에도 유독 발해의 병마에 대해서만은, 비록 조서(詔書)를 받들더라도 반드시 위에 아뢴 다음,
위에서 대장을 파견하여 금어부(金魚符)를 가지고 와서 맞춰본 다음에야 군사를 발했다. 무릇 전투를
하면서 적과 대치했을 때에는 발해의 군사들이 항상 앞장서서 싸워 가장 강했다. 《금사》
종간열전(宗榦列傳)에 “태조가 요나라를 정벌할 적에 종간이 먼저 출동했는데, 발해군이 앞으로 돌격해
나가자 요나라의 좌익(左翼)에 있던 제7 모극(謀克)이 조금 물러났다. 이에 드디어 요나라의 중군(中軍)을
범하였다.” 하였다. 또 발해장사(渤海帳司)를 두었는데, 관속(官屬)으로는 발해 재상(渤海宰相), 태평(太平)
8년(1028) 9월에 발해 재상 나한(羅漢)에게 임시로 동경 통군사(東京統軍使)를 맡게 한 것과 같은 일이
그것이다. 발해 태보(渤海太保), 태평 9년(1029)에 나오는 발해 태보 하행미(夏行美)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발해 달마(渤海橽馬)가 통화 12년(994)에 나오는 발해 달마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있었다. 그리고
발해근시상온사(渤海近侍詳穩司)가 있었다. 통화 9년 발해 근시상은 고청명(高淸明)과 같은 유이다. 성종
개태 8년(1019)에는 또 동경발해 승봉관(東京渤海承奉官)을 두어 관직에는 도지압반(都知押班)이 있었다.
통괄하게 하였다. 해왕(奚王) 회리보(回离保)가 참칭하였고, 또 발해추밀원(渤海樞密院)을 두었다.
금나라 초기에 이르러서 발해의 백성들을 제압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해서 항상 이들을 불러 위로하면서
회유하였다. 태조가 국경에서 요나라 군사를 패몰시키고는 양복(梁福)과 알답라(斡答刺)로 하여금 발해
사람들을 불러 회유하게 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디 한집안이다.” 하였는바, 대개 그 처음은 모두
물길(勿吉)의 7부(部)이다. 수국(收國) 2년(1116)에는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부터는 발해의 부민(府民)으로서
항복하였거나 포로로 된 자들을 죄주지 말고, 추장(酋長)은 관직에 그대로 있게 하라.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아무 곳에나 가서 살게 하라.” 하였다.
천보(天輔 금나라 태조의 연호) 2년(1118)에는 발해군(渤海軍)에 8개의 맹안(猛安)을 두었으며,
이해 7월 계미에 조서를 내리기를, “발해대가노(渤海大家奴) 등 모극(謀克)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예전에
일찍이 관량(官粮)을 나누어 주고 고기잡이와 사냥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었다.
지금 이미 날짜가 오래되었는데, 얼마나 불어났는지 모르겠으니, 그 숫자를 갖추어서 아뢰라.” 하였다.
또 동경로발해 만호(東京路渤海萬戶)를 두어 《금사》 열전(列傳)에, 세종 때 고송(高松)을 관압동경로발해
만호(管押東京路渤海萬戶)에 충임(充任)하였다고 하였다. 서로 통섭(統攝)하게 하였다. 국가의 형세가 점차
성대해짐에 미쳐서는 황통(皇統 금나라 희종(煕宗)의 연호) 5년(1145)에 요동의 발해인과 한인(漢人)이
맹안과 모극을 승습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점차 병권(兵權)을 내족(內族)에게로 옮겼다. 《금사》
식화지(食貨志)에, “모든 한인과 발해인은 맹안과 모극에 충임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9년 8월에는
재신(宰臣)들의 의논에 따라 요양(遼陽)에 있는 발해의 백성들을 연(燕) 지방 남쪽으로 옮기고, 그 뒤에는 또
자주 산동(山東) 지방에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다. 신유년에 이르러서 모두 내몰았는데, 옛 땅에 살고 있던
자들은 혹 거란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에 발해의 종족이 드디어 끊어져 전해지는 바가 없게 되었다.
[주-D001]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속말부(粟末部) :
말갈족 7부 가운데 하나이다. 말갈은 퉁그스족의 일족으로, 시대에 따라 그 명칭이 바뀌는데, 주나라
때에는 숙신(肅愼), 한나라와 위나라 때에는 읍루(揖婁),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물길(勿吉)로 불렸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는 말갈로 불렸다. 말갈 7부는 속말부(粟末部)ㆍ백돌부(伯咄部)ㆍ안차골부(安車骨部)
ㆍ불열부(拂涅部)ㆍ흑수부(黑水部)ㆍ백산부(白山部)이다.
[주-D002] 실위(室韋) :
거란의 동북방에 있는 종족 이름이다. 흑룡강 북부에 있다가 뒤에 거란에게 병합당하였다.
[주-D003] 대조영(大祚榮) :
대조영은 발해의 건국자로,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고구려별종(高句麗別種)’ 출신이라고 하는 주장과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이라고 하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 있다. ‘고구려별종’이라는 설은 《구당서》의
‘渤海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를 중심으로 주로 한국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반면에 ‘속말말갈’이라는 설은
《신당서》의 ‘渤海本粟末靺鞨 附高麗者姓大氏’를 중심으로 주로 중국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신서원, 1994, 87쪽》
[주-D004] 5경(京) :
선왕(宣王) 때 설치한 것으로, 국도인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5경을 두었는데, 이는 부여의 사출도(四出道)나
고구려의 오부(五部) 제도에 그 연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5경은 지금의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있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이나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에 있었던
중경현덕부(中京賢德府), 훈춘현(琿春縣) 부근이나 북한의 청진(淸津)에 있었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함북
경성(鏡城)에 있던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에 있던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이다.
《조선전사》에는 남경남해부의 위치가 함경북도 동해안 지역인 신창 부근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주-D005] 15부(府) :
발해의 15부는 5경 이외에 장령부(長嶺府)ㆍ부여부(扶餘府)ㆍ막힐부(鄚頡府)ㆍ정리부(定理府)ㆍ
안변부(安邊府)ㆍ솔빈부(率賓府)ㆍ동평부(東平府)ㆍ철리부(鐵利府)ㆍ회원부(懷遠府)ㆍ안원부(安遠府)이다.
[주-D006] 영주(營州) :
지금의 조양(朝陽)이다. 대조영이 옮겨 가 거주하고 있던 이 지방은 대릉하(大凌河) 상류의 건조한 지대로서
남북조(南北朝) 시대 이래로 중국 세력의 동쪽 관문(關門)이며, 동북아 여러 민족의 교역(交易)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에는 당나라에 흡수되어 들어온 이민족(異民族)들로 구성된 기미주(羈縻州)가 다수
설치되어 있었고, 그 성의 주위에는 거란(契丹)ㆍ해(奚)ㆍ실위(室韋)ㆍ돌궐(突厥)과 함께 고구려 멸망 이후
상당수의 고구려인과 말갈인 등이 옮겨 가서 거주하고 있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419쪽》
[주-D007] 이진충(李盡忠) :
거란(契丹)의 부장(部將)으로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손만영(孫萬榮)과 함께 영주 도독(營州都督)을 살해하고 영주를 점거하였다. 그러고는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칭하고 손만영을 대장으로 삼아 숭주(崇州)ㆍ평주(平州)ㆍ천주(擅州)를 차례대로
공격하였으나 천주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주-D008] 걸사비우(乞四比羽) :
발해 건국 이전에 대조영에게 협력한 말갈족의 추장(酋長)이다. 이진충의 난이 일어났을 때 대조영과 함께
당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쪽에 이르러 요새를 쌓았다. 당나라에서
이해고(李楷固)ㆍ색구(索仇) 등을 파견하여 이곳을 공격하였는데, 걸사비우는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주-D009] 천문령(天門領) :
천문령의 위치는 정겸(丁謙)의 장광재령설(張廣才嶺說),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승덕현(承德縣) 서쪽설,
송정등(松井等)의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渾河)의 분수령(分水嶺)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설 등이 있다.
《발해의 대외관계사, 85쪽》 북한에서는 요령성 창무현 서쪽 산간 지대에 있는 고개라고 하였다.
《조선전사 제5권, 21쪽》
[주-D010] 해(奚) :
4세기경부터 몽고 동부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면서 거란족과 인접해 있던 선비족의 한 부족으로,
처음에는 고막해(庫莫奚)라고 불렸다. 뒤에 흉노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주-D011] 발해로 가는 길 :
당나라에서 발해로 가는 길은 영주(營州)를 거치는 육로가 가장 안전한 길이었는데, 이때에는
해ㆍ거란인들이 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이후 당나라에서는 발해로 갈 적에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서 배를 타고 요동반도에 상륙한 다음,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발해의 경내로 들어서서
발해의 수도인 동모산으로 갔다.
[주-D012] 읍루(揖婁)의 …… 살았다 :
발해가 건국한 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다. 사료상에도 《구당서》에는 ‘계루(桂婁)의 옛 지역’이라
하고, 《신당서》에서는 ‘읍루의 동모산’이라 하는 등 기록이 일치되어 있지 못하고 계루나 읍루의 위치나
동모산의 위치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발해의 대외관계사, 85쪽》 동모산(東牟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예전에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오동성(敖東城)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였으나, 최근에는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을 동모산으로 보려는 견해가 우세하여 굳어지고 있다.《발해의
대외관계사, 85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길림성 돈화현 오동성은 이전 고구려 영역의 동북부에
해당되는 곳으로, 말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3백여 리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매우 길고 험한 장광재령 산줄기, 서남쪽으로는 부이령 산줄기, 동쪽과 남쪽으로는
노야령 산줄기, 동북쪽으로는 목단강의 상류를 끼고 있어서 고구려의 유민들이 자리 잡기에 적당한
지점이었다.”고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21쪽》
[주-D013] 오루하(奧婁河) :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이다. 읍루하(揖婁河)ㆍ홀한하(忽汗河)라고도 한다.
[주-D014] 걸걸중상은 …… 달아났는데 :
걸걸중상과 대조영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두 사람을 이명동인(異名同人)이라는 설, 기록대로 대조영의
아버지가 걸걸중상이라는 설, 대조영이 걸걸중상의 아들이 아니라 백산말갈인(白山靺鞨人)이며 걸걸중상은
거란인(契丹人)이라는 설이 있다.《발해의 대외관계사, 91쪽》
[주-D015] 측천무후 성력(聖曆) 연간 :
발해국의 건국 연대는 성력 연간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정확하게 몰랐으나, 《유취국사(類聚國史)》 권193
수속(殊俗) 발해 상(渤海上)에 ‘後以天之眞宗豐祖父天皇二年 大祚榮始建渤海國’이란 기사를 근거로 698년에
건국한 것으로 분명하게 되었다.《발해의 대외관계사, 85쪽》
[주-D016] 월희말갈(越喜靺鞨) :
길림성(吉林省) 회덕부(懷德府) 근처에 있던 말갈의 한 부족이다.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회원부(懷遠府)에
편입되었다.
[주-D017] 최흔(崔訢)을 발해로 보내어 :
최흔은 당나라 예종(睿宗)의 명을 받아 대조영의 책봉사(册封使)로 파견된 인물이다. 이 기사와 관련된
사료(史料)로는 홍려정비(鴻臚井碑)가 있다. 이 비는 여순(旅順)의 황금산(黃金山)에서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勅持節宣勞靺鞨使 鴻臚卿崔訢井兩口永 記驗開元二年五月十八日”이라는 명문(銘文)이 기록되어 있다. 최흔은
장안(長安)에서 산동반도(山東半島)를 거쳐 해로(海路)로 여순(旅順)에 이르러 다시 압록강을 건너 발해의
국도에 이르는 소위 발해로(渤海路)를 통해 여행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05쪽》
[주-D018] 대무예는 …… 하였다 :
대무예가 연호를 고친 것으로 보아 대조영 역시 연호를 제정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사서(史書)에는
대조영의 연호가 전하지 않는다. 대조영의 연호에 대해 한규철(韓圭哲)은 “대조영도 다른 왕들과 같이
발해의 독자적인 연호인 천통(天統)을 사용하였다고 생각한다. 천통은 중국 측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환단고기(桓檀古記)》 안에 있는 《태백일사(太白逸史)》의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와
《합계태씨족보(俠溪太氏族譜)》에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아직 사료적인 검증이 완료되었다고 볼 수 없지만
《환단고기》 외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발해유민들의 비장서(祕藏書)였다고 소개되는 《조대기(朝代記)》는
실재했다고 믿으며, 이에 근거한 발해사에 대한 기록은 일정하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천통이라는
연호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였다.《발해의 대외관계사, 96쪽》
[주-D019] 흑수말갈의 …… 제수하였다 :
이 당시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을 비롯한 말갈의 다른 6부는 모두 발해와 합류하였거나 포섭되었지만,
흑수말갈만은 오랫동안 발해에 소속되지 않고 상당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흑수말갈은 발해가
두려워서 처음에는 감히 독자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가지지 못하다가 이때 와서 당나라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당나라에서는 흑수말갈을 자기 측으로 끌어들여 발해를 침공하기 위해
흑수말갈의 지역에 흑수부(黑水府)를 세우고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통제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31쪽》
[주-D020] 토둔(吐屯) :
돌궐(突厥)의 관직명으로, 어사(御史)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관직이다. 이족(異族)의 지역에 주재해
있으면서 그곳의 수장(首長)의 통치를 감독하고, 조세(租稅)의 납부를 독촉한다.
[주-D021] 상경(上京) :
발해의 수도로 지금의 동경성(東京城)이다. 발해의 도성은 처음에는 동모산(東牟山)이었으며, 다음은
상경이었고, 그 이후 잠시 동안 동경용원부로 옮겼다가 다시 상경으로 옮겨, 발해가 망할 때까지 상경이
수도였다.
[주-D022] 홀한하(忽汗河) :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이다. 읍루하(揖婁河)ㆍ오루하(奧婁河)라고도 한다.
[주-D023] 문왕 20년 :
원문은 문왕 19년으로 되어 있으나, 당나라 숙종 원년은 문왕 20년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4] 동경(東京)으로 옮겼다 :
한규철은 “발해가 수도를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긴 시기는 정원(貞元
785~808) 연간이고, 여기서 다시 상경용천부로 옮긴 시기는 대흥(大興) 연간이다. 동경용원부는 약 9년
정도 수도였다고 생각된다. 동경용원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개 길림성 훈춘현 팔련성(八連城)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북한에서는 청진(淸津) 부거리설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다.” 하였다.《발해의 대외관계사,
175쪽》
[주-D025] 내양(內養) …… 올렸다 :
발해의 중앙 군대 편제는 《신당서》 발해열전에 의하면 10위(衞)로 되어 있는바, 이곳의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조선전사》에는 “신책군은 반드시 발해에 있었던 부대의 실제 이름이 아니라 당나라 중앙
군대에 있었던 좌ㆍ우 신책군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어떤 발해군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되고, 좌ㆍ우
삼군이란 것은 그 내용이 명확치 않으나 역시 좌ㆍ우의 이름이 붙은 각 3개의 군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백 20사라는 곳의 사(司)는 혹 군(軍) 아래에 있는 군대 단위를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치가 않다. 그리고 사(司)라는 용어는 군대 단위의 이름으로는 쓰이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이를
군대와는 관계없는 중앙 관청 숫자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1백 20이란 숫자는 발해국의 중앙
관청 숫자로는 지나치게 많다. 이 보고는 정확한 기록이 못 된다.”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72쪽》
[주-D026]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
요나라 태조(太祖)로, 야율(耶律)은 성이고, 아보기(阿保機)는 자(字)이다. 이름은 억(億)이다. 야율아보기는
거란 질라부(迭刺部)의 귀족으로 있다가 두각을 나타내어 901년에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의 지시에 의해
일체의 군대와 전쟁에 관한 지휘권을 획득한 다음, 그해에 북방의 실위(室韋) 등의 종족과 서방의 해(奚)를
정복하였고, 다음 해인 902년에는 당나라의 하동(河東) 등의 지방을 공격하여 9개 군을 빼앗았으며,
907년에 대거란(大契丹)의 황제가 되었다. 이 당시에 야율아보기는 돌궐(突厥) 당항(黨項) 등 중국의 북쪽과
서쪽에 있던 여러 종족들을 모두 정복한 다음 중국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후방에 있던 발해를
공격하였다.
[주-D027] 두 가지 일 :
중국의 서쪽에 있는 당항(黨項)ㆍ회흘(回紇) 등의 종족을 완전히 정복하는 일과 발해를 정복하는 일을
말한다.
[주-D028] 이리근(夷离菫) :
거란족의 관직명으로, 거란족의 어느 한 부(部)를 통관하는 장(長)을 가리킨다. 전체 부를 통괄하는 장은
가한(可汗)이라 한다.
[주-D029] 홀한성(忽汗城) :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에 있는 성으로, 장백산의 동북쪽 오루하(奧婁河)가 있는 곳이다.
[주-D030] 해부(奚部)의 …… 주었다 :
이 부분의 원문은 ‘以奚部長勃魯恩王郁 自回鶻新羅吐蕃黨項室韋沙陀烏古等 從征有功 優加賞賚’이다.
이 부분의 해석을 한규철은 “해의 부장 발로은과 왕욱 그리고 회골로부터 신라ㆍ토번ㆍ당항ㆍ실위ㆍ
사타ㆍ오고 등은 발해 정벌에 공이 있었다고 하여 특별히 상을 더하여 주었다.”고 해석하여,《발해의
대외관계사, 132쪽》 회골ㆍ신라ㆍ토번 등이 요나라가 발해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운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는 한문 문리상 무리이며, 또 왕욱이 요나라에 투항하여 태조의 양자가 된 이후에도 요나라에서
여러 차례 회골ㆍ실위ㆍ당항ㆍ토번 등을 정벌한 일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무리한 해석인 듯하기에
위와 같이 번역하였다. ‘해부(奚部)’는 요나라에서는 천찬(天贊) 2년(923) 3월에 해(奚)의 호손(胡損)을 토벌한
다음 그 지역에다가 해부를 설치하였으며, 발로은(勃魯恩)에게 그 지역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遼史 卷2》
‘토번(吐蕃)’은 서장(西藏) 지역에 있던 나라로, 서강족(西羌族)이 세운 나라이다. 토로번(土魯蕃)이라고도
표기한다. ‘당항(黨項)’은 지금의 청해(靑海)ㆍ감숙성(甘肅省) 일대에 있던 호족(胡族)이다. ‘사타(沙陀)’는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일부 지역에 살던 서돌궐(西突厥)의 한 종족이다. ‘오고(烏古)’는 길림성(吉林省)
동북쪽 지역에 있던 부족의 이름이다.
[주-D031] 철주(鐵州) :
중경현덕부(中京賢德府) 관할 하에 있던 주이다.
[주-D032] 오사성 부유부 발해 염부왕(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王) :
원본에는 ‘烏舍城淸渝府渤海琰府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틀렸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부유(浮渝)는
부여(扶餘)ㆍ부여(夫餘)ㆍ부유(鳧臾)와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전사》에서는 “오사성은 이 나라의
수도성(首都城)을 가리킨 것이고, 부유부는 부여부(扶餘府)와 같은 것이며, 발해는 이 나라의 연원을 가리키는 말이고, 염부왕은 아마 이 시기에 국왕 자신의 칭호였을 것이다.”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116쪽》 이 오사성 발해국(烏舍城渤海國)은 발해의 귀족이었던 오씨(烏氏)가 발해 유민들과 함께 세운
국가이나, 주민의 대다수는 여진족의 일파인 올야부(兀惹部) 사람들이었다. 오사성 발해국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록들만 있어서 존속 기간, 소재지 등에 대해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주-D033] 상온(詳穩) :
《국어해》에 “여러 관부(官府)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장관이다.” 하였다.
[주-D034] 7세손 :
이에 대해 《조선전사》에는 “대연림의 계보에 대해 《고려사》에는 발해시조 대조영의 7대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1대를 30년으로 치고 두 사람 사이의 연대를 따지면 7대는 너무 짧고 한 11대쯤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후세에 한자 ‘十一’이 ‘七’로 잘못 변해진 것으로 보인다.” 하였다.《조선전사, 119쪽》
[주-D035] 흥료국(興遼國) :
발해국이 망한 뒤 대조영의 후손인 대연림이 세운 국가이다. 건국한 뒤 고길덕(高吉德)을 고려로 파견하여
건국을 알리는 동시에 원병(援兵)을 청하였으나 고려에서 이에 응하지 않아 나라를 세운 지 1년도 못 되어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주-D036] 요주(饒州) :
지금의 열하성(熱河省) 적봉이다. 거란의 상경도에 속하는 한 개 주로, 발해가 망할 당시 거란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발해 유민으로 구성된 주이다.
[주-D037] 고욕(古欲) :
1115년에 요주(饒州)에서 요나라에 반기를 들고 발해 부흥 운동을 꾀한 발해 유민이다. 그의 원래의 직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으나, 단기간에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요주에 설치하였던 발해의 유민들로 구성된 광의군(廣義軍)의 지휘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세운
나라 이름 역시 알 수가 없다.
[주-D038] 고영창(高永昌) :
요나라에 대항하여 발해의 광복운동을 벌였던 발해 지배층 유민이다. 거란인들이 동방 여진의 세력을 막기
위해 발해 사람들로 구성하였던 기병 조직인 발해무용마군(渤海武勇馬軍)의 지휘관으로 있다가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보선(蕭保先)의 압제에 반감을 가진 발해 유민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발해국(大渤海國)이라 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요나라와의 싸움에 고전하면서 금나라의
아골타(阿骨打)와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금나라로부터도 공격을 받게 되어 금나라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주-D039] 융기(隆基) :
고영창이 세운 나라의 연호이다. 고영창이 세운 나라의 국호와 연호에 대해서는 사서(史書)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고려사》에는 국호가 대원(大元)으로 되어 있고, 《요사》와 《금사》에는 국호는 없고 연호는
융기(隆基)로 되어 있으며, 《발해국지(渤海國志)》에는 국호는 대발해국(大渤海國) 연호는 응순(應順)으로
되어 있다.
[주-D040] 심주(瀋州) :
지금의 심양(瀋陽)이다.
[주-D041] 춘주(春州) :
장춘주(長春州)로, 지금의 농안현(農安縣) 북쪽 지역이다.
[주-D042] 팔담구(八甔口) :
요양성 부근에 있다. 백초곡이라고도 한다.
[주-D043] 맹안(猛安)과 모극(謀克) :
모두 금나라의 관직이다. 《금사(金史)》 국어해에 “맹안은 1천 부(夫)의 장(長)이고, 모극은 1백 부의 장이다.”
하였다.
[주-D044] 하행미(夏行美) :
발해 귀족 계통 출신 관료로 보주(保州)에서 거란군을 통솔한 장군이다. 대연림이 흥료국을 세우고
하행미에게 사신을 보내어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도리어 거란인의 편을 들어 요양(遼陽)에서 온
사신을 잡아서 거란의 야율포고에게 넘겼으며, 보주에 있던 발해 군사들을 죽인 다음 거란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주-D045] 수국(收國) …… 하였다 :
이 부분의 원문은 ‘收國二年詔 自今渤海部民已降或俘獲 官其酋長 且使從宜居處’인데, 문리(文理)가 통하지
않기에 《금사》에서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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