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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프다’는 말은 보통 여성들의 성적 방종을 질타하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였다. 김태용 감독은 최근작 <가족의 탄생>에서 ‘헤프다’는 말의 통념을 뒤집어 버린다. 1956년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부터 2006년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까지 몇 편의 한국 영화를 통해 ‘헤픈 그녀’들의 모습을 연대기별로 살짝 들여다 본다.
“정이 헤프면 화냥년 된다”는 악담부터 “헤픈 게 나쁜 거야?”라는 도발적 질문까지 ‘헤픈 여성’을 둘러싼 수많은 수군거림이 존재해 왔다. 영화 속에서 ‘헤픈 여성’은 ‘나쁜 여성’이거나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이었다. 이들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들은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처벌의 대상이 되거나 때론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출구가 되기도 했다.
봉건적 가치관을 위협하는 그녀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은 대학 교수 부인이 사교 댄스에 빠져들어 젊은 대학생과 불륜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 소설이 원작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다. <자유부인>은 전후 물밀듯 밀려든 미국 대중 문화의 유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화 초반 교수 부인은 봉건적 가치관을 대변하듯 한복을 입은 정숙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가 양장점을 운영하기 시작하며 '헤픈 여자'로 돌변한다. 이같은 설정은 전통적인 남녀 역할 구분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인 동시에 봉건적 가치관을 위협하는 미국 대중 문화에 대한 당대 대중들의 혼란과 심리적 저항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영화를 보던 관객들이 "저 년 죽여"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헤픈 것은 곧 도덕적인 타락을 의미했으며, <자유부인>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심리적 혼란감을 해소시켜주는 완충제로 작용했다.
중산층을 위협하는 괴물
1960년대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였다. 급격한 도시화와 근대화는 중산층의 성장과 노동 계급의 출현이라는 사회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는 그러한 시대적 변화와 이로 인한 갈등을 중산층 가정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를 통해 그려낸다. 하녀는 당시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소녀들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로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도시 하층민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노동 계급이었다. 김기영 감독은 하녀를 성적 욕망이 넘치는 헤픈 여성으로 설정한다. 이 여성은 주인집 남자를 유혹해 임신에 이른다. <하녀>에서 헤픈 여성은 중산층의 안정된 삶을 위협하는 괴물처럼 묘사된다. 이는 당대 도시 노동자들에 대한 중산층의 불안감을 반영한다. 또한 주인집 여자에 의해 낙태를 당한 하녀를 통해 계급적 갈등의 상황을 은연 중에 담아내기도 한다.
매매춘 산업에 유입된 그녀들
“영화는 유신 이념을 구현해야 한다.” 70년대 한국 영화 산업의 구호였다. 영화에 대한 국가적인 통제는 살벌했고, 검열은 가혹했다. 당시 가장 착취 받는 대상이었던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는 검열 조항에 묻혀 호스테스를 다룬 영화들로 대체된다. 여성들이 매춘 산업에 유입된 데는 도시화로 인한 구조적인 문제가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일련의 호스테스물은 매매춘을 여성의 도덕적인 타락의 문제로 축소시켜 버린다. 1975년에 제작된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호스테스물을 따르고 있으나 도시로 온 여성이 경험하는 질곡을 통해 은연 중에 여성의 매매춘을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확장시킨다. 이 영화 속의 영자는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와 버스 차장을 하다 팔을 잃어버리고 결국 매매춘 산업에 유입된다. 비천하고 헤픈 여성으로 전락하게 된 영자의 삶은 곧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한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성적 욕망을 당당히 말하다
90년대 후반부터 여성의 성적 욕망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에서 여성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대놓고 자신의 성적 경험을 털어놓는다. 헤픈 여성에 대한 사회적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녀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감추는 것이야말로 구시대적인 발상이라 말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는 더 나아가 남편이 있음에도 애인과 섹스를 즐기는 여성의 모습을 당당히 그려낸다. 2000년대 들어 헤프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닌 여성의 주체성 향상과 맞물려 얘기됐다. 이제 ‘헤프다’는 남성들의 욕망에 이끌려가는 수동적인 여성이 아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능동적인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 된 것이다.
정이 헤픈 그녀들, 유토피아를 꿈꾼다
<가족의 탄생>(2006)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선경(공효진)은 남자 없이 못 사는 엄마 매자(김혜옥)를 미쳤다고 쏘아붙인다. 10년이 지나 엄마를 이해하게 된 선경은 동생 경석(봉태규)에게 말한다. “엄마는 정이 너무 많았던 거야.” 경석은 자신의 애인 채연(정유미)이 자신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친절해 불만이다. 경석이 채연과 헤어지려는 이유는 그녀가 너무 헤프다는 데서 출발한다. 형철(엄태웅)은 20살이나 연상인 무신(고두심)과 결혼한 후 누나 집에 얹혀 산다. 어느날 형철은 사라지고, 피를 나누지 않았으나 정으로 모인 여성들은 새로운 가족을 구성한다. 김태용 감독은 정이 헤픈 그녀들을 통해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인간 관계를 무너뜨린다. <가족의 탄생>에서 ‘헤프다’는 말은 타인에게 누구보다 관대하며 배타적이지 않은 품성으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박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