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마을은 근남면 행곡4리이며 구미산을 등지고 광천을 왼편에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마을이다. 지대가 높아 흡사 섬처럼 떠 있는 듯하다. 1916년 3월 1일에 천연동(泉淵洞: 샘실), 미동(九尾洞: 구미), 천전동(川前洞: 내앞), 상천전동(함질)이 통합되어 행곡리로 개편되었다가 이후에 행곡1, 2, 3, 4리로 개편되었다.
- 울진지방 유학의 성소 근남면 구미마을 근남면 행곡4리 구미(龜尾)마을은 그 마을 이름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전통인문지리관인 풍수(風水)적 입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구미마을은 왕피천을 끼고 36호선 국도를 따라 불영계곡이 시작하는 초입의 왼편에 있다. 마을의 이름을 명명했듯 구미마을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듯 감싸고 있는 산이 태백의 허리에서 뻗어 나온 통고산이 힘차게 동해로 내지르다 발길을 마감한 ‘거북꼬리산(구미산)’이다. 구미산은 그 이름에 걸맞듯 흡사 거북이가 광천(光川, 빛내)을 향해 엎드려 있는 형국이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퇴락한 골기와집을 지키며 추녀 한끝을 꽉 채운 편액 하나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고산서원(孤山書院)이 그것으로 고산서원은 당시 울진·평해지방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1628년(인조 6)에 당시 울진 유학의 중심에 있던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선생과 함께 만휴공을 따르는 유생들이 정사(精舍)를 신축했다. 1673년(현종 14)에 고산사를 창건하고 만휴공을 봉안했다. 당시 고산사는 ‘생사당’으로 불렸다. 생존하고 있는 선비를 모셨기 때문이다. 이후 1686년(숙종 2)에 동봉(東峰) 김시습(金時習)을 봉안하고 1709년(숙종 35)에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을 병향한 뒤 1715년(숙종 41)에 서원으로 승격했다. 현존하는 고산서원의 편액은 불영사 현판을 쓴 황림(皇林) 윤사진(尹思進)선생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고산서원의 존재로부터 구미마을은 현재까지도 ‘울진 유학(성리학)의 본산’으로 불린다. 특히 구미마을은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통칭하는 조선철학의 한 봉우리인 기호학파의 사상적 체계를 울진지방에 배태(胚胎)시킨 철학적 성소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구미마을의 대표적 성소는 고산서원 유허비와 고산서원 배향 3현의 유허비 그리고 주천대(酒泉坮), 주천팔경, 우산동천비(愚山洞天碑), 성황당을 들 수 있다. 이 중 성황당은 마을공동체 신앙의 중심이며, 우산동천비는 구미마을에서 400여 년을 세거해 온 영양남씨 송정공파 남호열(현 울진향교 전교)씨 댁에서 관리하는 성소이다. 당시 만휴공이 기거하던 송풍정은 현존하지 않는다. 고산서원의 배향인물인 동봉 김시습은 주지하다시피 『금오신화』의 저자이자 기일원론을 집대성한 율곡 이이에게 사상적 원류를 제공해 준 15세기 대철학가이다. 동봉선생이 울진과 인연을 맺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현 구미마을의 ‘동봉 유허비’와 성류굴 인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성류사’이다. 동봉은 울진장씨의 외손으로서 천하를 주유(周遊)할 무렵에 구미 주천대와 성류사에서 머문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동봉의 철학적 사유가 울진지방에서 오롯이 되살아나는 시기는 서파 오도일선생이 울진현감으로 있던 17세기 말경이다. 서파 오도일 선생은 생육신이었던 동봉선생의 선비정신을 실천하는데 학문적 자세를 일관해 온 분으로 이름나 있다. 서파선생은 20여 년간 구미마을에 머물면서 후학양성에 힘쓴 만휴공과 함께 울진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유생들의 의견을 들어 향약인 『훈사절목(訓士節目)』을 편찬하고 태고헌을 신축한 뒤 우와(愚窩) 전구원(田九원)에게 『태고헌 향음주례서(太古軒 鄕飮酒禮書)』를 펴내게 하는 등 울진 유학의 정신적·물질적 기반을 제공한 선비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서파선생은 율곡의 기일원론을 집대성한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서 당시 울진 유림을 지키고 있던 임천 남세영, 우암 윤시형, 이우당 주개신, 우와 전구원 등과 함께 기일원론에 기초한 철학적 체계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용이 승천하며 꼬리로 물길을 되돌렸다는 ‘불영사연기설화’의 현장인 주천대는 만휴공이 이름 한 무학암(舞鶴岩), 송풍정(松風亭), 족금계(簇錦溪), 창옥벽(蒼玉壁), 해당서(海棠嶼), 옥녀봉(玉女峯), 비선탑(飛仙榻), 앵무주(鸚武洲) 등 팔경으로 이루러져 있다. 울진정신사의 산실인 고산서원의 사상적 흐름은 당시 만휴공이 조직한 수친계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유림의 모임’을 통해 면면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이들 유림은 해마다 4월 15일 주천대에서 소회를 갖고 삼현에 대한 추모와 철학적 교류를 나눈다.
- 행곡리 4개 마을을 아우르는 성황 고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조직이 사회 상층부를 중심으로 한 결사체라면 구미마을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결사체는 성황당을 중심으로 한 ‘동제(洞祭)’를 들 수 있다. 구미마을 성황당은 주천대 맞은편 36호 국도 변에 위치해 있다. 성황당은 팔작기와집의 당사형태이며 당 마당에 아름드리 고목이 서 있다. 해마다 정월보름 자시에 동제를 지낸다. 동제는 삼헌관에 의해 치러지며 제관은 정월달 초에 마을동회에서 선임한다. 동회에서 선임된 제관은 선출과 동시에 엄격한 금기에 들어간다. 제관 집에는 금색이 드리워지며 마을 주민, 특히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다. 이른바 비의(秘儀) 세계로 들어가는 셈이다. 동제에 사용하는 제물은 네 마지기가량의 동답(洞畓)에서 얻어지는 소출로 충당한다. 과거에는 메(밥)와 나물, 육(쇠고기), 어물(가자미, 방어, 명태, 문어)을 비롯하여 삼색실과(三色實果)와 조라(술), 떡(백설기)을 차렸으나 지금은 간소해져 삼색실과와 포, 떡만 차린다. 마을 공동체적 결속력이 약화하였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월 보름 자시에 동제가 치러지면 이튿날 제수를 장만하는 제관 집에서 음복한다. 이때 마을의 성인 남성만 참석한다. 이로 미루어 동제는 남성 중심의 의례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현재 행정단위로 분화된 ‘구미(행곡4리)’, ‘샘실(행곡1리)’, ‘내앞(행곡2리)’, ‘함질(행곡3리)’ 마을 모두 같은 당을 모시나 제일(祭日)이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여기서 과거에는 네 개의 마을이 모두 하나의 마을로 구성되었으나 자연적인 변화에 의해 마을이 분화된 후 마을 수호신도 분화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구미마을을 지탱하는 물적 토대는 거북꼬리산을 뒤로하고 형성된 마을의 앞자락에 펼쳐진 분지형 들판이다. 마을의 생산기반인 농토는 ‘장전(長田)’, ‘새들(신평)’, ‘찰안들’, ‘질밑(노하)’, ‘솔머리’ 등 다섯 개의 들로 구성돼 있다. 농토의 규모는 대략 400여 두락가량이다. 또 구미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거북꼬리산은 ‘도래끝’, ‘도롱골(회곡)’, ‘황시골’, ‘밤시골(율곡)’, ‘독지골’, ‘주천대’ 등 여섯 개의 골짜기로 나뉘어 불린다. 애초 구미마을의 생산기반은 현 광천을 끼고 형성된 ‘장전들’ 만이 벼농사가 가능한 논이었으며 ‘새들’은 논농사를 할 수 없는 밭이었다. 이후에 거북꼬리산을 관통하여 ‘보(洑)’를 설치하면서 논농사가 가능해졌다. 구미마을 자치규범 혹은 자치조직은 울진의 인근 마을에 비해 그 양적인 면에서 월등하게 나타난다.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는 구미마을의 자치조직은 마을동회를 비롯하여 당계(擔契), 보계(洑契), 제방계, 임계(林契)와 또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직?운용되고 있는 ‘가마계’, ‘그릇계’ 등이다. 이 중 마을 전 주민(성인 특히 호주)이 성원으로 참여하는 마을동회는 명실상부한 마을총회 성격을 갖는 자치조직이다. 동회는 해마다 정월 초하루 날 열린다. 요즈음은 마을회관에서 열리며 이장이 주도적으로 회의를 주도한다. 주로 마을 개발과 행사에 관한 내용이 주된 토의내용이다. 동회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성황제를 주관하는 제관선출이다. 구미마을 담계(擔契, 상여계)의 역사는 마을의 형성과 함께 비롯된다. 애초 구미마을에서는 구담계(舊擔契)와 신담계(新擔契) 그리고 신신담계(新新擔契) 등 세 조직이 있었다. 20여 년 전에 구담계가 해체되고 구담계에 속해 있던 성원들은 신신담계에 추입되었다 한다. 구담계의 해체는 성원들의 작고, 이주 등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담계는 이른바 상여계이다. 곧 죽음의 의례를 치르기 위한 ‘노동품앗이’를 위한 협업노동관행을 규정지어 놓은 조직이다. 이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치규범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담계의 규정은 ‘완의(完儀)’로된 문서로 만들어 져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며, 또한 매우 엄격한 규정을 보유하고 있다. 담계완의는 당계를 조직하는 배경과 운영규정을 담은 ‘절목(節目)’ 그리고 구성원을 표기하는 ‘좌목(座目)’, ‘식이질(殖利秩)’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식이질은 담계의 성원들이 정기적으로 적립하는 곗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내용을 담은 항목이다. 완의에 따르면 신담계는 장자(長子)상속을 원칙으로 하며, 성원의 장례 시에 반드시 건장한 성인 1명과 곗돈을 제공하는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보계(洑契)와 제방계(堤坊契)는 벼농사와 직접적인 연관을 하는 협업노동관행의 정수를 보여준다. 보계는 주로 몽리자를 구성원으로 하며 제방계는 마을 전 주민을 대상으로 한다. 구미마을의 보계는 애초 ‘장전보계’만 있었으나 30년대 ‘새들보’가 만들어지면서 두 개의 조직으로 나뉘었다가 이후 농지정리와 수로정비사업이 이뤄짐에 따라 ‘합보계’로 통합되었다. 또 산림과 관련한 조직으로는 ‘흥림계’가 현재까지 운용되고 있다. 애초 흥림계는 마을 채취림의 성격으로 운용되었으나 땔감에너지에서 석유에너지로 전화되면서 오늘날에는 목재용이나 땔감용보다는 산송이 채취가 주된 사업으로 변화되었다. 이외에도 구미마을에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마계’와 ‘그릇계’의 흔적이 왕성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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