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익철 선생님은 남만주 독립운동의 최고 중추기관인 정의부·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을 진두 지휘하신 분이다. 특히 중국 남경(南京)·장사(長沙) 시절에 조선혁명군을 주도하시며 일제와의 철저한 독립항쟁을 이끄셨다. | |
스물여덟 살 때 중국 요녕성으로 두 번째 망명. 민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독립운동
현익철(玄益哲, 1890~1938.5.7)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애국 애족사상이 투철하여 다방면으로 구국항일투쟁에 종사하였다. 후일 호를 '묵관(黙觀)'이라고 하였다. 본명보다 ‘현묵관 선생’이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선생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직후인 1911년 뜻한 바 있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하여 동지규합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초의 목적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사업에 고심하던 중 일본은행권을 위조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코자 하였다. 그러나 1912년에 평안남도 안주경찰서에서 이러한 작업의 낌새를 탐지하고 선생을 체포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소위 ‘보안법’ 위반과 ‘통화위조’란 죄명으로 재판을 받고 투옥되어 반 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선생은 1918년 다시 압록강을 건너 중국 봉천성(지금의 요녕성) 흥경현(興京縣)으로 망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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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산간지역이었지만, 사이사이로 드넓은 평야지대가 있어 논농사를 짓기에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한인동포들이 이곳으로 건너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선생이 망명할 때인 1918년 흥경현의 한인동포 인구는 무려 6만 5천여 명에 달하는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이에 따라 이곳의 한인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 조직이 결성되어 크게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흥경현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한인공회(韓人公會), 대한독립의용단(大韓獨立義勇團) 등이 있었다. 선생은 이 해에 흥경현의 민족학교인 흥동학교(興東學校)의 교사로 아동들을 가르치면서 이들 조직에 가담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나이 서른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공부. 독립운동단체 광한단 조직하여 활동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어 독립운동의 열기가 크게 고조되자 선생은 새로운 결심을 굳혀 한인동포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북간도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특히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활약한 ‘북로군정서’로 널리 알려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대한군정서는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조직으로 강력한 독립전쟁을 목표로 독립군양성과 훈련사업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밀접하게 연락을 취하며 그를 봉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무장독립전쟁 참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의 주선으로 선생은 적지 않은 나이에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분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이수하게 되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는 3·1운동 이후 찾아오는 청년들로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으며, 통화현 합니하와 칠도구(七道溝) 쾌대무자(快大茂子) 등지에 분교를 세워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봄에 본교를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로 옮겨가고, 종전에 있던 합니하 학교는 김창환(金昌煥)을 교장으로 하는 분교로 운영케 하였다. 선생은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분교에 설치한 6개월 과정의 속성과정을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함께 같은 과정을 마쳤던 김학규(金學奎)도 선생의 평생 동지로서 독립운동을 같이 하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남만주지역의 한인동포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에 참가하는 한편, 서간도 일대 독립운동의 중추적 영도기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도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군정서는 자체의 한계와 중국 군벌정권 및 일제 영사관의 압력으로 본격적인 독립 전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비교적 젊고 혈기방장한 청장년들을 새롭게 규합하여 1920년 2월 중국 봉천성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 조직에는 같은 집안 친척인 현정경(본명 玄炳根)을 비롯해서 이호원(李浩源)·김석선(金錫善)·홍원경(洪元京) 등 40여 명이 참가하였다. 선생은 이들 동지들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 착취기관과 친일주구배의 습격과 처단, 독립운동 자금 모집 등의 치열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 |
조선혁명당 본부 사진. 반양식집 2층 구조로 1937년 후반부터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이 거주하였으며, 지청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선혁명당 본부로도 사용되었다. 2층에는 현익철 선생과 조경한이, 아래층에는 지청천·김학규·강홍대 등이 거주하였다. |
군자금 모집하다 3년 옥고. “교육이 독립” 교과서 만들어 백두산 일대 아이들에게 보급
현익철 선생의 약력과 사진 기사(《한민》1937년 7월 30일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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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21년 4월 선생은 관전현 묘자구(苗子溝)에 근거지를 두고 김준경(金俊京) 등 9명의 단원을 국내로 파견하여 평안북도 정주(定州)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때문에 선생은 일제의 수배를 받고 여러 차례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일경에게 피체되어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1924년 출옥 후 다시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의 독립운동 통합조직인 통의부(統義府)에 가담하였다. 이 때 선생은 외무 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주로 중국 관헌들과의 교섭을 담당하면서 임시정부와도 밀접히 연계하며 활약하였다. 1925년 1월 남만주 지방의 독립운동 단체가 김이대(金履大)·이청천(李靑天)·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에 의하여 정의부(正義府)로 통합되자 선생은 다시 여기에 가담하여 대일항전과 한인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 |
특히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을 맡아 크게 활약하였다. 정의부의 재정운영과 한인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선생은 정의부 관할지역의 아동과 청소년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백두산 기슭의 무송(撫松)·장백(長白)·안도현(安圖縣) 등 깊은 산골 오지 지역에서 군소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차천리(본명 차도선, 의병장 출신)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정의부에 합류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정의부의 중심지인 길림(吉林)에서 수백 킬로나 떨어진 백두산 일대의 한인 동포들을 정의부 구성원으로 영입하였다. 이로써 무송·안도·장백현 일대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흥업단 세력을 정의부의 조직체계로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선생은 정의부 차원에서 아동교육용 교과서를 제작·보급하여 깊은 산간지역 동포들의 2세 교육을 지원하는 등 교육사업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즉 소학교 1~2학년용 교과서는 붓으로 등사하여 제작하고, 그 이상 학년용 교과서는 강필(鋼筆, 등사판)로 등사ㅍ제작하여 백두산 부근 동포 자제들의 교육과 도서보급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남만주 독립운동단체 통합한 정의부 이름으로 부일 모리배들 숙청
선생은 또 과감하게 친일파 숙청에도 앞장섰다. 정의부의 본거지인 신빈현 왕청문(旺淸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통화현(通化縣) 쾌대무자(快大茂子)에 신한철(申漢喆)이란 한의사가 있었다. 그는 정의부 등에 참여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이란 성공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백성의 돈만 빼앗아 간다.”라고 하며, ‘상조계’라는 친일조직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쾌대무자 일대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충동질하여 정의부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게 하면서 독립운동을 방해하였다. 특히 그는 독립군이 가면 자기 집 바로 앞에 있는 중국 경찰에 신고하여 통화일본영사관 경찰에 넘겨주게 하였다. 이에 선생 등 정의부 지도자와 독립군들은 그에게 여러 번 경고하였다. 그런데도 신한철은 여전히 독립운동을 방해하며 친일행각을 벌였다. 이에 정의부 중앙위원을 맡고 있던 선생은 이 ‘암적 존재’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9월 정의부 의용군의 김창림(본명 金元國) 소위 등 5명의 대원을 파견하여 친일파 신한철과 그의 가족 전원을 사살하였다. 이 사건 뒤 통화일본영사관 경찰은 이 사건의 집행자인 김창림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결국 체포하고 말았다. 김창림은 여순감옥에서 사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와 함께 1926년 선생은 양기탁(梁起鐸)·이동구(李東求)·최소수(崔素水)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중앙위원으로서 정의부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노력하였다.
정의부 주류파와 신민부 민정위원회측, 참의부 심용준(沈龍俊) 계열 인사들은 1928년 9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결성하고 통일된 자치정부와 민족유일당을 구성코자 하였다. 이때 선생은 김이대(金履大)와 함께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또 주석단으로는 고활신과 김이대, 황기룡(일명 김찬, 본명 김낙준)이 당선되었으며, 북만주와 동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다물당을 해체하고 그 당원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가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29년 3월에는 정의부 대표로서 이동림(李東林)·고이허(高而虛)·고활신(高豁信)·최동욱(崔東旭)·이탁(李鐸) 등과 함께 남만주 지방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인 국민부(國民府)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 해 5월 28일 국민부의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자 선생은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김이대(金履大)·장승언(張承彦)·이웅(李雄) 등과 함께 한인동포들의 생활안정과 민족교육, 독립운동의 영도, 친일파 및 일제 통치기관의 숙청 등에 전념하였다. | |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과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함께 맡아 일해
선생은 1929년 5월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민족유일당조직동맹 대표로 선임되었으며, 이해 말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겸하게 되었다. 1930년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을 겸하여 더욱 책임이 커졌다. 1931년 7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겸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겸직한 선생은 요녕성(1929년 봉천성에서 개칭됨)의 중심지인 심양(瀋陽)에 가서 지방정권의 실세에게 <동성한교정세일반(東省韓僑情勢一般)>과 <한중민족합작의견서(中韓民族合作意見書)>를 제출하고 한중연합 투쟁을 제의하였다. 그러다가 몇 차례의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중 불행히도 일본영사관 경찰에 피체되어 징역 7년형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이 피체된 데에는 한인 밀정의 밀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외무성은 선생을 체포하기 위하여 4~5년 동안이나 갖은 계책을 다 동원했으나, 그때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피체소식은 국내의 《동아일보》·《조선일보》는 물론 연해주에서 발행되던 교포신문 《선봉》(638호, 1931년 9월 24일자)에도 보도될 만큼 큰 관심을 끌었다. 선생이 피체된 뒤 조선혁명군 사령관은 김보안(본명 김관웅)이 맡아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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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익철 선생 피체 기사(《동아일보》1931년 9월 2일자).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겸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겸직한 선생이 봉천(奉天, 현재의 심양·瀋陽)에서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피체된 사실을 알리고 있다. | |
선생은 세 차례의 옥고에도 불굴의 투혼을 조금도 꺾지 않았고, 1936년 신의주 감옥에서 병 보석으로 출옥한 뒤에도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36년 말 다시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곧 이어 임시정부 요인들이 많이 머물고 있던 남경(南京)으로 이동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임시정부 대가족의 일원으로 부인 방순희(方順熙)와 어린 아들 종화(鐘華)를 데리고 장사에 도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국 절강성 항주(杭州)로 옮겨가 매우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었다. 임시정부와 요인들이 호남성 장사(長沙)로 간 것은 많은 식구를 거느린 처지에 이곳의 물가, 특히 식량 값이 매우 저렴한 데다가 그리 멀지 않은 홍콩을 통해 해외와 통신·연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5년간 옥고 치른 후 상해, 남경 거쳐 장사로 망명
장사에서 선생은 만주 조선혁명당에서 활동하다가 중국정부와 임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934년에 남경지역으로 옮겨온 김학규와 연계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관내지역에서 재건된 독립운동 정당인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새로운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조선혁명당의 당원으로는 선생을 비롯하여 이청천·유동열·최동오·김학규·황학수·이복원·안일청 등이 있었다. 대개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 직후 조선혁명당의 대표로서 9개 독립운동 단체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는데, 여기서 선생은 운영간부가 되어 동지들과 함께 잡지·전단·표어 등을 발행·배포하였다. 나아가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독립운동진영 통합 위해 애쓰다가 불의의 총탄에 안타깝게 순국
중일전쟁 이후 국제정세가 호전됨에 따라 선생은 1938년 봄 조선혁명당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의 통합을 주위에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3당의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 사무실이 있는 남목청(楠木廳)에 김구(金九)·이청천(李靑天)·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모여 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이 때 조선혁명당원으로 남경에서 상해로 특무공작을 가고 싶다고 해서 김구가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던 이운환(李雲煥)이 갑자기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였다. 첫발에 김구가 맞고, 두 번째 총탄에 선생이 맞고 말았다. 이밖에 유동열이 중상을 입고,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선생은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다. 수차례 감옥을 드나들며 20여 년간 불굴의 투지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선생은 이렇게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1938년 5월 7일 순국하고 말았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선생을 장사(長沙)의 악록산(岳麓山)에 안장하였다. | |
이른바 ‘남목청(楠木廳)’ 사건 후 김구 선생이 쓴 편지. 1938년 5월 중국 장사(長沙)에서 일어난 '남목청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현익철 선생이 사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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