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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기행시집 [☆나자르 본주☆]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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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르 본주◎]
절기시회 터키기행시집 / 시로여는 세상(2019.11.20) / 값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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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편
나자르본주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
기념품 가게마다
액운을 막아준다는
나자르 본주Nazar Boncuk가
푸른 눈깔 뜨고 째려보고 있다
액운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
눈썹 사이에도 있는 법
나자르 본주를 열댓 개 사서
누이 또래 길벗들에게 노나준다
제우스Zeus가
아름다운 소녀 이오Io와 밀애를 나누다가
헤라Hera한테 들키자
얼른 이오를 암소로 만들고는
에헴 에헴 시치미를 뗐지만
매서운 헤라는
그걸 바로 알아채고
등에를 풀어서 암소를 괴롭혔다
몸이 가려워서 참지 못한
어여쁜 이오는
‘암소가 건너간 바다’
보스포루스Bosphonus 해협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바로 그 순간!
을유문화사판『그리스신화』를 읽던 나는
무시무시한 초음속으로
책속으로 잽싸게 들어가서
이오의 가냘픈 목에
나자르 본주를 걸어주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는
오늘도 워낭소리 맑게 울리고
물결 이랑마다
나자르 본주가 반짝이고 있다
팽이
되똥거리는 낡은 케이블카를 타고
골든 혼Golden Hom이 내려다보디는
피에르 로티Pierr Loti 언덕에 올라가서
1달러 주고 산 터키 팽이를 돌린다
처음에는 팽이가 곤두박질하더니
요령을 익히니까 금방 팽팽 돈다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박수를 친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서
프랑스 해군제독의 옷도 팽개치고
이스탄불로 달려와서
허무한 사랑의 글을 쓰다가
생애를 끝냈다는
정신 나간 피에르라도 된듯
팽팽 팽이를 돌린다
어린 소년 하나가
내 옆에 와서 팽이를 돌리지만
천등산과 박달재 아래 마을
팽이 돌리기 으뜸이던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
소년의 누나로 보이는
야들야들 예쁜 아가씨가 깔깔 웃는다
한국에서 온 백발노인과
터키 소년이 돌리는
팽팽 팽이 소리 사이로
골든 혼의 물결도
이내 잠잠해 진다
천만에!
카파도키아Kapadokya
앗, 이글이글 끓는 용암이 뜨겁다
솟구치는 활화산의 화염
지구가 통째로 깨지는 지진의 굉음
하느님이 지구를 연옥으로 만들었다
끝!
그러나 끝은 종말이 아니다
수도사들은
괴레메Goreme 바위산을 벌집처럼 뚫어
교회와 수도원들을 만들었다
관명명소? 천만에!
호모사피엔스의 촉루가 잠든
거대한 묘지다
일동 묵념!
파샤바Pasabag에는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거친
큼지막한 바위들이
송이버섯처럼 불끈불끈 서 있다
버섯바위! 천만에!
씩씩한 남근석男根石
일동 기립!
☸이명수 편
메두사의 머리
지하 물궁전에
물구나무선 메두사의 머리를 보았다
대리석 기둥을 받쳐 든 그녀가 불안하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참언讖言을 잊은 것이다
돌이 되어도 좋습니다
뱀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고
물궁전을 빠져나와
카파도키아까지 줄달음질쳤다
요정의 굴뚝 어디 쯤 돌들 곁에
물구나무서서
지중해 노을이 물끄러미, 떠나보낸 이들을 깨운다
아른아른
메두사여
남의 여자를 탐한 죄 값으로
시간의 얼굴에 닿을 때까지
돌이 되어도 좋습니다
이제는 돌이 되어
뒤돌아보지 않겠습니다
에페소의 발자국
샛길은 늘 친숙하다
셀수스 도서관 앞 한쪽으로 기운 길
대리석 조각에 발자국 하나 찍혀 있다
‘이 발보다 작은 사람은 들어오지 마세요’
내 발을 대어본다
꼭 맞는다
유곽遊廓이다
‘나를 따라 오세요’
나는 또 샛길로 빠졌다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사랑의 집’
내 발에 꼭 맞는 여인의 발자국을 신고
2천 년을 걸었다
그리스 여인과 함께 에게해 해변에 앉아
에페소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다
샛길을 따라 들어온
2천 년 전의 지금
막 도착한 편지를 읽는다
☸김지헌 편
지하도시
말들의 아름다운 땅을 지나
데린쿠유 지하도시로 갑니다
죽음이 가장 커다란 안식이라고 여겼던 걸까요
지치고 힘든 자들 눈 가리고
태양은 거세시켰습니다
침략자들은 난폭했으나 지층은 부드러웠습니다
지상은 싸움터였으나 85m 지하세계는 향그러웠지요
적들은 무자비했으나
맑은 우물이 목을 축여주었습니다
도처에 진을 친 이교도를 피해
지하도시에 초승달을 데려오고 커든을 드리웠습니다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면
가장 낮은 곳에서 천상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말들도 따뜻한 볏짚 위에 몸을 풀고 때론
한 식탁에 둘러앉아 포도주를 마셨지요
수탉은 제 알아서 망을 보기도 했고요
그렇게 300년을 살았습니다
순례자들 내내 고개 숙여 경배를 바칠 수밖에요
셀수스와 도산서원
바울이 강론을 펼치던 신화의 도시 에페소
크리테스 거리 끝 셀수스 도서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한다는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의 무덤 위
고대의 태양이 대리석 서가와 고서들을 비추고 있다
코린트 양식의 열주들이 늘어서 있는 신전 앞 광장
시대가 저물고 신들의 세계도 신화로 전해져
발에 채는 돌멩이 하나에도 이야기가 새겨진 셀주크
7대 불가사의 아데미 신전과 신전들 사이
팔 다리 떨어져 나간 토르소들 죽은 듯 널려있다
신전들이 이어지는 성스러운 길을 꺾어들자
대리석 바닥에 발 그림이 보인다
그려진 발 사이즈 보다 작은 사람은 이용할 수 없다는
매춘 숙소 광고
미성년자를 발 사이즈로 가려내 출입을 막았다니
폐허의 거리에서 발견한 기발한 발상
지금은 이십일 세기
도산서원 툇마루에 앉으니 셀수스가 떠오른다
성리학의 등뼈로 고담준론의 산맥을 넘나들던 퇴계와 고봉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리가 고택 툇마루에 낭랑하다
셀수스와 도산서원
살아 움직이는 거대담론의 숲에서 길을 잃어도 좋겠다
☸박분필 편
파노라마 언덕
카파도키아 괴레메에서 나는 석회석 비탈에
물총새집처럼 아늑한 구멍을 파고
버섯지붕을 얹고 그 속에서 당신과 등 기대어 살고 싶다
내 별자리 같기도 한
촘촘하게 짠 붉은 카펫을 깔고
아무런 치장도 없이
동그란 알을 낳고 알을 품으면서
바람 불어도 꺼지지 않는
별빛 불을 켜고
한 쌍의 물총새처럼 파노라마언덕에 앉아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보고
태양의 줄기가 가장 오래 머무는 언덕을 가르며 달리는
그 길로 당신의 뒷모습이 터벅터벅 걸어가고
드디어는 구릉진 숲에 이르러
잘 익은 무화과를 따는 동안 당신을 위해
나는 최초의 터키커피를 끓이고 싶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커피가 식을까 조바심치면서 휘리리이~ㄱ~휘파람 불고
구멍 안으로 고단한 부리를 말아 넣고
여윈 몸 비비며 들어오는 당신에게
가장 해맑은 바람만 골라 호이호이~
휘파람소리가 풀잎처럼 향기로운 아낙으로
터키식의 커피를 그야말로 잘 끓이는
터키의 아낙처럼 살고 싶다
아폴론 신전, 시대
한때 최고의 신전이었던 기둥들 깨어진 벽들
제목만 남아 있고 문장은 다 찢겨버린 공허
까닭도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샘물
슬픔은 가면을 쓰지 않는 유일한 진실
하얀 대리석 기둥에 조각된 잎과 넝쿨은 아폴론을 피해 도망
다니던 소녀의 맨몸일까 머리카락은 잎이었고 넝쿨은 팔이었던
아폴론의 첫 연인 다프네
대 지진 후 신전을 버리고 떠났을 그녀의 발은
이미 흙에 뿌리를 내리고
머리엔 풀줄기를 두르고 가시 돋은 넝쿨을
심장에 감고 원죄의 에덴에 길들여졌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오히려 신을 위로하고 싶어진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풍경 속에서
세상을 향해 쥔 손을 펴고
내리쪼이는 오월의 햇살 속을 끝없이 기어가는
저 마른 잎과 넝쿨은
그녀가 미처 걷어 들이지 못한 감정일까
슬픔의 줄기에는 잎까지도 슬픔일 뿐
☸이영식 편
동굴수도원
아름다운 말들의 땅
카파도키아
아몬드나무 몇 그루
허리춤에 겨우 매단 채
순례자를 맞는 응회암 괴석들
무늬만 수도원이지
폐경 뒤 알집처럼
텅 빈 동굴 하나씩 품었다
수사修士의 발자국
기도소리 모두 긁어 지우고
바짝 마른 고요 속
하늘백성이 되지 못한
비둘기 가족들만
구구구-
구원의 앞마디를
수수만 년 쪼으고 있다
이스탄불의 개
철학자라 불러도 좋겠다
동서양의 교두보
이스탄불
어느 거리에나 개가 있다
덩치 큰 아이만한 놈들
목줄, 입마개도 없이
여행객 틈에 섞여 다닌다
낯선 눈길을 받고도
어떤 불안감 없이 되받아 비치는
고요하고 맑은 눈
피아의 경계가 지워진 듯
위협도 두려움도 없다
길 한가운데 어디서라도
자연스럽게 누워 잠이 든다
동물을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는데
이스탄불의 개는
야성을 버리고 사람을 사랑하여
이미 철학자가 되어버린 듯
도시를 살아간다
☸강영은 편
블랙홀 탈출 익스프레스
토로스산맥을 넘는 기차는 시속 60킬로,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처럼 완행이네 산줄기를 돌아가는 나의 여정도 완행이어서 쇠로 된 지붕에 날아가 앉은 비둘기 같네
내 마음의 급행 속도를 창공에 던져버린 나의 비둘기는 과녁 없는 화살, 시간을 쓰러뜨릴 속도가 없어 꾸벅꾸벅 졸다가 멍하니 깨어 있다가
타쉬칼레, 깎아지른 절벽 곡식 창고에 연습용 화살처럼 잠깐 꽂히네 암벽 과녁은 정다운 비둘기 집 같은데 높은 그곳에 아이로 돌아가는 시간이 들어 있나 봐
타쉬암발라, 꼭대기 창문 향해 할아버지 한 분 성큼성큼 올라가네 아이처럼 날렵하게 밀 창고로 들어서네 썩지도 않고 싹도 내지 않은 밀알이 10년 전 시간 품고 있네
지나간 10년도 도착할 10년도 과녁이 되지 않으니 오늘이란 시간은 썩지 않나 봐, 나의 비둘기를 마지막 속도에 다다르네
백단향 머금은 신의 도시가 세마젠의 육체 위에 수의와 무덤을 걸치네 틴누레의 흰 색깔과 검은색을 두른 나의 비둘기는 화살처럼 춤추네
코니아Konya여 만인은 신 앞에 평등한가 당신이 만든 신은 내 발에도 맞는가, 빙글빙글 도는 춤사위에 끌려 시간 밖으로 이동하네
당신 앞에 나를 낮추고 당신 앞에 가까이 가기 위해 삶과 죽음 사이로 오가는 나의 속도는 기쁨인가, 슬픔인가, 이 질문은 어떤 속도로 여행을 마치는가
깊은 우물
너는 입구가 좁고 낮은 문장
고개 숙이고 무릎으로 걸어야 읽을 수 있다
땅속으로 길게 이어진
수천 개의 단락을 한꺼번에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돌로 통로를 막아버리면
단 한 명의 적군도
숨 가쁘게 날아온 천사도
들어 올 수 없는 문장
캄캄한 구절에 깜짝 놀란 너는
어두운 숲이 되기도 한다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다시 솟네’
이 거친 숲을 읽기 위해
개미 같은 가이드가 필요하네
너는 개미들의 교회, 개미들의 학교, 개미들의 공동 부엌,
개미들의 회의 장소, 개미들의 마구간과
개미들의 포도주 제조 구역까지 있는 계시록을 읽기 위해
개미 아닌 내가 더듬이를 세우네
내가 아는 건
너에게도 깊은 우물이 있었다는 거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 하리라”고 말한
예수가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운 베드로처럼
울음의 깊이를 지킨 너에게 천국이 임했다는 거
얼마나 오래 울음을 파야 우물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지옥 속에서 어떻게 살까
살 수 있을까
몸부림 치는 내 마음속에도 우물이 있다는 거
카파도키아의 황량한 평원 아래 숨겨져 있는
데린쿠유, 지하 우물을 뚫고 나온 닭 울음소리를 듣는다
닭 울음소리 끝에 끌려 나온
지하 동굴을 본다
보이지 않는 깊이에 무엇이 있는지
당신은 아십니까
☸김영찬 편
아이발릭Ayvalik에서 일박
여행이란
운엔트리혜 볼게무트하이트unendlliche Wohlgemutheit
호롤롤롤로-호롤롤로 입술 오므려 발음하면 의미는 사라지고
물거품만 남는다
보스포러스 갈라타 다리Galata Bridge를 가로질러
말마라, 마르마라Mamara 해海를 말없이 걷자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야 옳고
그래야 군말 없이 편하다
안탈라 구시가지에 이글거리던 버닝 썬buming sun
그동안
봄 없는 여름이 몇 번이나 기나간 것일까
까탈 부리자는 게 아니다
따질 건 분명히
따져야지
터키 돈 25리라면 미국 돈 5달러거나 4유로 남짓
그 돈이면
카파도키아산産 단물 밴 오렌지를
한 자루나 살 수 있다
탁심광장 거리의 악사들에게 호롤롤로 호롤롤-
까짓 거 일 백 리라 쯤 통 크게 쾌척하려다말고 쪼다같이
주머니 속사정만 살피다가 그냥 와버렸다
그게 후회막심 마음에 걸린다
내 말은 지금
여행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렇기 하지요 뒤돌아서면 멋있었고
생각해보면 아쉬웠던 것들
관광버스로 후루룩 유명한 곳 몇 군데 둘러보고
그 나라 전부를 다 보고 온 것
맞아요, 맞고말고요
거기가 참 멋있었다고
거기 안 가본 이는 천국 비슷한 곳 근처에도 못 가 본 가련한
종족일뿐이라고 수다를 떨다가 출발지에 돌아오면
거기가 어디였더라?
졸면서 영화 한 편 보는 둥 마는 둥
극장 밖으로 풀려나온 사람처럼
이런 제 길, 고리타분한 일상이 이렇게나 완강하게 기다리고
있을 줄은 왜 진즉 몰랐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소피아 대성당의 뚱뚱한 석조기둥을 끌어안고
악착같이
소원이나 더 빌다가 왔어야 하지 않았나
아이발릭Ayvalik이라는 소읍에서는 어떤 호텔에 묵었더란 말인가
겨울 포도밭 쉬린제에서 와인 한 방울 없이 단출한
점심을 먹고‘언제 트로이로 갔던가?
제 철을 놓친 편도나무
아몬드 꽃은 의문부호 같은 꽃망울을 매달고 서 있다
돌아보면 아이발릭이라는 마을은
골든 혼에서 실종된 목선처럼 종적 없이
가뭇가뭇 사라지고 없다
튤립꽃 키스
3월의 창가에 앉아 튤립꽃 차디찬 입술에
내 입술 슬몃 포개본다
후려칠 듯 매서운 회오리바람
튤립의 고향이 투르키예, 아나톨리아 평원이라는 걸
알기나 하냐고 핀잔 놓는다
기념품상점들 즐비한 콘야의 카페골목
가끔 마주치는 앳된 소녀 같은 꽃
이름을 몰라서 ‘튤립소녀’라고 불러도 달려와 안길
붉은 입술에 상큼
튤립 꽃향기 번지면 나 미쳐 정말, 나는
어찌할 것인가
서둘러 여장을 꾸리고
꽃 속의 위리안치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박수현 편
어느 고전적 슬픔
딱딱하게 마른 슬픔을 본 적이 있다
에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계단을 내려서면
서로 다른 양식의 석주石柱 사이
거꾸로 박힌 메두사의 기둥을 만나게 된다
페르세우스의 검을 받고서 두 눈을 부릅뜬 채
날름대는 머리카락을 날리는 그녀
물구나무선 맹독猛毒의 사랑에 사지가 굳어가는 동안
속수무책, 연인들은 죽음에 파 먹히며 캄캄해졌다
벨그라드 초원에서 끌어온 물길을 가둔
이 고고학적 슬픔 앞에서 만약
당신이 입꼬리를 올려 셀카를 찍었다면
이미 메두사의 슬픔에 전이되었다는 말
참수斬首된 목덜미엔 달빛 같은 허기들이 희붐한데
그녀의 없는 젖가슴과 가랑이에 봄빛이 들었다
어느 무너진 신전 기둥 아래 아직 나뒹굴고 있을까
나는 어떤 울음들이 새겨진
눈물의 푸른 기둥 앞에서 고백의 연대기를 채록採錄해 본다
너에게 끝내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던
나의 글썽임은
이오니아식인가 혹은 코린트식 슬픔일까
살 부러진 우산을 석주石柱 옆에 세워두고
쫓기듯 지하 궁전을 벗어났다
블루모스크를 건너온 빗줄기가 차자
로즈벨리
멀리서 우치히사르 성채가 붉다
나는 낯선 골짜기의 그림자가 되어
이곳이 어디인지 잠시 잊는다
햇살과 햇살의 틈에는 무엇이 있나
저 장미밭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산재 속에서
누가 신의 팔레트에서 덩어리째 훔친 물감일까
땅포도나무와 바위굴을 넘나드는 비둘기 Ep
군데군데 구멍 뚫린 동굴수도원들이 내장하고 있는 침묵들
그것이 얼마나 깊은 우물을 파내려가게 했는지
저 바위들이 왜 흰 불꽃처럼 나부끼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착즙한 석류 주스가 달큰하게 내 목 줄기를 적실 때
시간은 역류되어 흐르고
프레스코화를 입히려 동굴 속 벽과 천장에다
밤새 비둘기 알 흰자에다 돌가루를 개던
그 옛날 수도사들의 옷자락이 내 발등에서 치렁하다
구멍 창들 사이로 저녁 햇살이 들이친다
밖은 옻칠갑을 한 듯 붉다
노을빛이 발꿈치를 들고
오플라야 오플라야Oflaya Oflaya
장미 정원 로즈밸리Rose Valley를 빠져 나간다
☸성배순 편
메두사를 위하여
고발한다, 바다의 통치자인 그
몇천 년 동안 침묵했어도
여전히 꽃뱀이라고?
터키 이스탄불 지하 물 저장고
거꾸로 처박힌 그녀가 울부짖는다
아버지의 아들인 그 사내에게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 판사 아테나
솜방망이 꽃으로 활짝 안긴다
그녀의 고급 찻잔 속 태풍이 몰아친다
아름다운 얼굴로도 충분히 죄가 된다고
지혜로운 검푸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실뱀으로 둔갑되고
흉측한 괴물 되어 효수 당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 돌이 되리라
차마 눈 맞추지 못하는 사내들
찰칵찰칵 그녀의 눈 피해
몰래몰래 사진 찍고 있다
천사의 눈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 앞
시리아 난민입니다 도와주세요
누런 박스 쪼가리 가슴에 붙인
퀭한 눈빛의 아버지와 아들
눈 맞추며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지중해 건너다 배 뒤집혀
터키해변 모래 속에 엎어져 있던
세 살배기 아기 어른거린다
주머니에 있는 1리라 만져본다
혼잡한 기념품가게 앞 머뭇거린다
주머니 속 1리라를 꺼내본다
사람들 속으로 빠르게 묻히며
‘나자르 본주’라는 천사의 눈 하나 산다
네 개 눈동자가 물빛 천사의 눈
비웃으며 내 앞에서 사라진다
☸한영숙 편
피즈올라pizola
텃밭 감자 심는 노인, 앞산 멍하니 앞두다
가려운 듯 손가락자국이 옆구리 박혀있다
하늘하늘 봄바람에
산색이 달라지고 연두가 올라오니 잡념만 늘어난다던
바람난 깜별인 저 멀리 아랫마을 홍연紅鉛한 암캐에게
거만하던 꽁지 휑하니 내빼고
고놈 부랄 반쪽만한 재 묻힌 씨감자를 부러운 듯
힘주어 꾹 눌러 심는다
시룽새룽 혼잣말 흥얼거리는
한국인 관광객 라이브생맥주집
사내DJ
봄날 노래를 코막은쟁이 간드러지게 호리어 잡던
명물인 망갈 피즈올라를 안주로 주문한
입에 맞는 호텔 만찬 배불리 먹고 온 터라 내내 당기지 않았던
나사 부스스 풀린 봄날
뜯어도 뜯어도 흠흠하니 가령취 잡아주던
며칠 만에 갈빗살 해쓱하게 들어와 퍼질러 코를 고는
감자 심던 노인 깡마른 옆구리 머쓱하니 손이 가고
카멜이 바늘귀를 통과한 까닭
1)
레드마을 중턱, 집채만한 바위로 중무장한 하스타네
어느 돌장이가 군부와 귀족을 피해
속 꽉 찬 천만리길 돌덩이에 제 혼과 살을 섞어 뼈대를 만들었나
어느 석수장이 정釘으로 쪼고 석石땀으로 쪼아
엄지검지 함부로덤부로 짓이겨가며 비릿한 석굴을 팠나
치료실 벽면에 덧발라진 무뎌진 상처들을 보며
긴긴 쓰라린 안부를 어루만진다
광음의 드레를 홀연히 불견뎠을 쌍봉낙타 한 마리
가료加療차 들렀을 대상을 하염없이 기다리는지
‘열려라 참깨’ 주문呪文을 외듯 병원 앞 웅크리고 있다
호젓한 햇살 한줌 바람 한 점 고슴도치등짝만한 석창으로
병실 안 텅 빈 공음 주거니 받거니 구석차기질이다
붉은 이암耳巖바랍은 버섯바위 기둥 깎이도록 휘몰아쳤을
갑자기 명치끝 체기가 훅 뭉쳐왔다
관광객좌판대 도열하듯 놓여있는 즉석 석류 즙을
가스활명수처럼 연거푸 들이켰다
푸른 혈관이 긴긴날 넘나들며 막힌 혈전을 뚫어내고 있다
어느 박해받는 기독교인이 예까지 다리 끌며 피신 왔을까
그는 누추한 빈민들을 구제하는 수도자였을까
난 하염없이 망부석이 된 그의 임자가 될 수는 없을까
코뚜레 꿰어올 수는 없을까
20
종일 골몰한 생각에 잠기며
호텔, 구석진 객실 앞에서 유행이 한참 지난 열쇠로
이리저리 돌려도 도무지 열리지 않는
명치끝은 더욱더 올골져오고
호텔리어 올 동안 컴컴한 창턱에 걸터앉다 반짝이는 물체를 보았다
한쪽 귀퉁이 떨어져나간 아주 작은 바늘이었다
간밤 L시인이 체했다고 찾아왔을 때
궁여지책 굵은 옷핀으로 따려고 하자 식겁똥을 쌌던
나는 불현듯 하스테네 앞 웅크린 그를 떠올랐다
그때였다. 이 시인이 창백한 얼굴로
내일 카피도키아 에드벌룬 탈 생각에 애써 찾아왔다는
그녀의 등짝을 세차게 두드리며 차갑게 식은 사관四關에
슬쩍 콧김을 쐬어 바늘로 주문을 왼다
아스피린 처방받은 관상동맥환자 시원하게 뚫리듯
귀耳퉁이 꽉 막힌 석문石文이 렌티시모로Lentissimo열리고
☸정재분 편
위스크다르-미메시스
오랜 불면으로 헛기침하는
동쪽으로 내처 가다 보면
네 개의 강이 발원하는 동산에
좋은 걸 몰라 나쁜 것도 모르는
벌거벗은 두 개의 그림자를
변명하는 특종 기사가 떴다
아흔셋의 영국 할머니
착하게 살아도 생기는 주름으로 쓴
버킷 리스트에는 체포 구금되고 싶다는
발칙한 소망 마침내 수갑 찬 손목과
도둑질 혐의에 환하게 웃으며
아무 일도 없는 생을 조롱한다
무구와 기투의 갈래에서
당신은 그리고 나는 어디에 서 있나
슬픔을 모를 때의 웃음을
소설 시대 이전의 시의 노래를
기어이 목쉬게 만든 자유의지는
어지럼증으로 주저앉았다
실체를 찾아야 한다는
찾아야 그림자는 완전에 이른다는
생의 조건을 울며불며 배웠을까
큰 수술을 앞둔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음은 아플 만큼 아프면
두려움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질까
수천수만의 그림자가 유행병에 걸려
붉으락푸르락 안색이 위중한데
아이가 아프면서 자라지 않냐고
늙을 때 또한 그러하지 않냐고
고통이 저버릴 수 없는 수단이라는
기꺼이 받아야 할 유산이라는
그대와 달리 나의 조바심은
매일매일 잘 죽기 위해
오늘의 경계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후회할 줄 모르는 완전체의
출입을 막아선 화엄검이
역사이든 설화이든
위스크다르
-이역만리의 노래
그때는 갈 수 있는 데가 많지 않았어
웬만한 데는 다 걸어 다녀야 했거든
땀띠가 솟으리만치 무더운 날은 산으로 갔어
옹달샘을 찾아가는 좁다란 길에서
언니와 나는 우스크다리를 불렀어
산중에서 샘물 한 바가지 뒤집어쓰면
숨을 쉴 수가 없었어
흐느끼듯 어깨를 들썩여야 했어
아마도 소름이 돋았을 거야
단번에 땀띠가 시들어버렸을 거야
바다 건너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신기한 나라에
☸신명옥 편
호모 비아토르
지도에 그려진 무수한 거미줄 속의 표고점들
변화는 이동에서 시작하지
시간의 거미줄에 걸린 생에서
내가 처한 한 점 벗어나
대양 건너고 구름 속을 날아간 거리만큼 확장되는 날
종종거리던 일상이 희미해지고
텅 빈 공간으로 새로운 풍경들이 들어오면
꿈꾸는 존재들의 은밀한 열망인
할 일이 보는 일뿐일 때의 자유로움
온전히 나로 있다는 자각 속으로
가볍고 유쾌한 내가 돌아오는 때
여행이란 본래의 나를 찾는 지름길
짧은 여정에서 얻는 것은
꿈이 날아다닐 공간을 회복하는 일이지
먹이를 향해 다가오고 있을 거미를 생각하며
어디서든 문제는 지금 이곳에서 잘 사는 일
이 푸른 행성에 숨은 놀라움을 발견하는 일이지
돌의 인격
지중해 해변에서 만난 거위알만 한
돌 속에 산 사람 웅크리고 있다
파도가 밀려오면 잠기고 드러나며
기원전부터 항구를 지켜본 것
석회석처럼 하얀 얼굴, 웃는 상이다
흰 수염이 발까지 흘러있다
눈 있고 귀 있어도 말 안하는
무심한 것이 그의 철학
흔들림 없는 적응력이 그의 인격일까
그의 고요를 바라본다
느껴지는 무게감, 해탈감이 좋아서
미얀마에서 온 악어, 인도에서 온 코끼리
몽골에서 온 조랑말 옆에 놓는다
돌에도 형상이 있는 걸 보니
파충류단계에 든 악어
포유류단계 지나는 코끼리
인간단계를 향해 달리는 조랑말
돌의 긴 육도 지나며 상승단계로 가는 중일까
완전한 곳에 이른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들은 이미 영원에 들어
형상과 시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차원일지도
☸이서화 편
로즈밸리
일몰에 꽃을 피우는 곳
장미는 없고 장밋빛만 일제히 피어나는
이곳은 오월의 어느 담장인가
일몰의 일가를 이루기 위해
협곡 아래로 늘어선 선홍빛 절벽
날 선 바위들
침식과 바람을 불러
저녁의 한때 꽃피고 있는가
한 가지 꽃으로도
그 꽃의 빛으로도 뒤늦은 정원을 설계한
사람 이전의 시간
고작 사람의 기후에 시달린 사람들
한 무리 풍화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거친 기후와 바람은 반길 일이 아니겠지만
풍화가 이토록 아름답다면
묵묵히 받아낼 협곡 하나 갖고 싶다
풍화에 맞서는 것은
모래 덩어리나 식물이나 같다
하루에 한 번씩 피고 지는
저 오후의 정원
꽃 없이 빛으로만 꽃밭이다
나자르 본주
이스탄불 재래시장에서
나자르 본주 팔찌 하나를 샀다
팔목에 차고 온종일 시큰거리는 눈으로
고대 도시를 바라보았다
오후에는 체기를 앓았고
누군가 손끝을 따야 한다기에
죄 없는 바늘을 수소문 끝에 찾아서
실로 묶은 손끝을 찔렀다
손끝에서 새빨간 눈동자가 튀어나왔다
겉에서 보면 푸르스름한
한 방울의 피가
반짝 눈을 뜰 때
캄캄하던 내 속이 환히 뚫렸다
무수한 눈동자가 꿰어진
본주가 혈관을 돈다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가늘게 눈 뜨고 악마의 눈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오죽하면 그 좁은 바늘 구멍으로
붉은 눈동자 하나가 나올까
더 늦으면
사람의 몸에서 악마의 눈동자가
뚝뚝 떨어질 때가 있다
악마의 눈동자는
상처를 통해 눈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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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절기시회의 세 번째 기행시집이다.
2011년 겨울『티베트의 초승달』2015년 가을『밍글라바 미얀마』에 이어 이번에 터키 기행시집 『나자르 본주』를 낸다,
절기시회절기시회는 2008년부터 2010년 사이 한국시인협회에서 일한 시인들이 모여 만든, 동인도 아니고 동인이 아닌 것도 아닌 야릇한 모임이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 1년에 네 번씩 만나 그때그때 살아가는 이야기를 허심하게 나누자는 뜻에서 출발했다. 이젠 세월의 흔적이 어지간히 묻어서 안 보면 그냥 보고 싶고 막상 보면 이내 시큰둥해지기도 한다.
출입문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절기시회는 국내외 여행을 갈 때마다 평소에 너나들이하는 초대시인들도 함께 한다. 여행의 풍경이 시인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듣도 보도 못한 하나의 언어가 된다.
2019년 가을
오탁번 이명수 김지헌 박분필 이영식 강영은 김영찬
박수현 성배순 한영숙 정재분 신명옥 이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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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달빛자락 / 명상음악
*출처: 이동활의 음악정원(http://cafe.daum.net/musicgarden/5r73/4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