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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묵상글 ( 수호천사 기념일. - 수호천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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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수호천사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수호천사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하느님과
나를 잇는
수호천사
하느님과
너를 잇는
수호천사
나는 너의
너는 나의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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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수호천사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과 내일 강론 못 올린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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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수호천사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하느님께서는 ‘작은이들’ 하나라도 그지없이 존귀하게 여기신지라 그들의 수호천사들을 두어 당신과 함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천사들이 존귀한 존재인 것이라기보다 천사들을 붙여 보호해야 할 만큼 인간이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서로 송사하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2-3)
그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천사들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토록 인간은 존귀합니다.
이는 <시편> 8편을 떠올려줍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 8.5-6)
그렇습니다. 영광과 존귀의 관이 천사에게 씌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결국, 천사는 하느님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되는 하느님 되는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참으로 존엄합니다. 그지없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 존귀함을 잘 보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귀함도 잘 보호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인간의 존귀함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에서 오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인간의 존귀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존엄을 평가하거나 도구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존귀한 존재로 존중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나가야 할 사명도 부여받고 있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혹 우리의 관심이 ‘큰 사람’에게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곧 우리가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이냐?”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내 형제가 나에게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또 내가 내 형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주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주님!
무엇을 하든 당신을 지향하여 일하게 하시고,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게 하소서!
모든 주어진 것을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드리는 감사가 되게 하소서!
오늘, 나의 모든 삶이 당신께 바치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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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수호천사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천사”라는 말은 어떤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모두 구원을 상속받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시중드는 영들”(히브1,14)입니다. 그리스도의 협조자들이 된 인간을 보호합니다(마태18,10). 그들은 하느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고,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루카16,22). 그리고 자기들의 지휘자인 미카엘과 더불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태초부터 사탄과의 싸움을 계속합니다(묵시12,1-9).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실수나 잘못을 거울삼아 나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면 내 부족함을 챙겨봅니다. 누군가의 꾸중을 접할 기회가 있다면 내가 그 꾸중을 듣는 것처럼 부끄러워합니다. 잘 준비된 고해성사를 접하면서 저의 무뎌진 마음을 질책합니다. 나 자신을 보고, 또한 상대의 부족함을 어떻게 보완해 줄까를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된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지닌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합니다. 맑고 밝은 순수함은 그다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계산하지 않고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고, 권력을 가진 힘있는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르10,21).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관념, 틀, 명예욕, 지배욕,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이같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워즈워드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솔직함과 겸손, 단순함, 신뢰, 순진무구, 천진난만, 특별히 의존성 안에서 한 수 배우시길 바랍니다. 키가 커서 큰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큰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가끔은 사람을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든 사람은 배운 것이 많아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해 분야에서 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서 누구나 아는 사람입니다. 당해 실무 분야에서 뛰어나게 실무처리 능력이 있습니다! 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간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꼼수보다는 원칙을 살아갑니다. 곧 하늘을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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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수호천사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유레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었을 때를 뜻합니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을 때도 ‘유레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손님 신부님들이 신문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아침에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고, 9시에는 운동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하에 하수관이 막혀서 물이 넘쳤습니다. 그때 저에게 ‘유레카’가 있었습니다. 24시간 막힌 하수관이나 싱크대를 뚫어 주는 회사가 있었는데 전화번호를 알았습니다. 전화를 했더니 8시까지 온다고 합니다. 기사 분이 큰 기계를 가져와서 막힌 하수관을 시원하게 뚫어 주었고, 저는 다른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기사에서 뜻밖에 좋은 글을 찾았을 때도 ‘유레카’라고 하겠습니다. 평화신문 9월 10일자 지면에서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갈등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그 어원은 몰랐습니다. 갈은 칡나무를 뜻합니다. 등은 등나무를 뜻합니다. 칡나무는 왼쪽으로 꼬는 습성이 있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꼬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칡나무와 등나무가 만나면 좀처럼 풀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내용을 읽으면서 갈등이 풀기 어렵구나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이 역시 ‘유레카’입니다.
인간관계에도 참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관계를 꼬이게 하는 대표적인 것을 칠죄종이라고 합니다. 일곱 죄의 뿌리가 얽히고설키면 인간관계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대표적인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분노도 있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부자라서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함에도 인색하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기가 있습니다. 시기 때문에 카인은 동생을 죽였고, 시기 때문에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나태도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처녀는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지만 게으른 처녀들은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탐욕이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함께 살아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있습니다. 탐욕은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됩니다. 식탐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인병 중 대부분은 과식에서 시작됩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은 음욕 때문에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이 갈등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이 갈등은 어쩌면 숙명처럼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는 ‘유레카’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회개와 겸손은 갈등을 풀어내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카복음 15장은 ‘회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배반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천사는 날개가 달린 생명체가 아닙니다. 천사는 이웃에게 ‘유레카’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얽히고설킨 갈등을 풀어주는 사람이 수호천사입니다. 주변을 보면 이웃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수호천사입니다.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하루 이웃을 위해서 ‘유레카’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이웃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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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수호천사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모든 수호천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할 때 수호천사들도 함께 그 미사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성전을 가득 채웁니다. 우리와 함께 성가를 부르고 우리와 함께 찬미와 경배로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우리 옆에는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안내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악의 유혹에 흔들릴 때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동시에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이 밖에도 많은 부분 우리는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고 지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수호천사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일 중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우리 주님께 의지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즉 기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의 비유로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의지하고 그분 품에 안겨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불리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수호천사는 바로 이런 하느님께로의 의지와 섬김을 위해 우리를 안내합니다.
오늘은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수호천사에게 고마움을 표해보면 어떨까요? 잠시 감사의 기도를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나이테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나무를 잘라보면
그안에 나이테를 만날 수 있다.
나이테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겨울에도 나무는 자란다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자라지만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이테는 나무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겨울은 있다.
누구에게나 시련과 아픔은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뒷걸음질 치는 시간은 아니다.
겨울에도 자라듯이
시련과 아픔 안에도 배움이 있다.
그 배움은 우리는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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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수호천사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년 전에 기분 좋지 않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저를 화나게 했고 또 너무 억울했습니다. 글쎄 예전에 있었던 본당에서 제가 성당 돈을 많이 챙겼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문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억울했습니다. 당시 본당에서는 성당 옆 건물을 매입하느라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외부 강사료, 방송 출연료, 그리고 책 인세까지 모두 성당 수입으로 넣었었습니다. 혹시라도 신자들 부담을 줄 것 같아서 축일 행사도 단 한 번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돈을 제 것인 양 챙기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고 있다고 하니 억울한 것을 넘어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이 상황을 잘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어주었던 많은 신자 덕분이었습니다. 잘 모르는 몇 명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면서, 대부분의 신자는 저를 믿는다면서 힘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이에게 믿음과 희망을 전하는 사제로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즉, 저도 다른 이의 수호천사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예수님을 떠올린 것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억울하다고 화를 내던 저였지만, 주님의 억울함과 비교하면 저의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또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인간에게 억울한 판단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하십니다. 아무 죄 없는 분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난리 치는 인간의 죄악에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죄 많은 저의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난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낮아지지 못하고 그만큼 나를 드러내려는 욕심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회개해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는 단순합니다. 이것저것 재면서 자기 이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그런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어른을 따릅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겸손한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호천사가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든 이 세상 안에서 나를 믿어주고 희망을 전해 줄 수호천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과 희망이 가득할 수 있도록 나 역시 다른 이의 수호천사로 힘껏 일해야 합니다.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에서 보호하는 천사라고 하지요. 따라서 악을 피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내 이웃의 소중한 수호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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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의미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자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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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2. 수호천사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침묵이 가르쳐 주는 진리-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수호천사 기념일이지만 우리 성 베네딕도 수도회 전례력에서는 수호천사 기념미사가 아닌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침묵중에 저절로 떠오르는 수호천사께 바치는 기도로 오늘 강론을,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어제 세계 전 그리스도교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종교일치에 관한 시노드 저녁기도시 교황님의 ‘침묵’을 주제로 한 강론을 들으면서 새삼 침묵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너무 까맣게 잊고 지냈던 침묵의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예전 수도자들은 고독과 침묵중에 하느님을 만나고자 사막을 찾았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들의 우선적 타고난 특징은, 영성가들의 특징은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참으로 내적 깊이와 풍요로움과 자유를 위해 침묵과 고독은 필수입니다.
침묵은 진리입니다. 침묵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침묵은 기도입니다. 침묵은 경배입니다. 침묵은 일치입니다. 침묵은 분별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경청입니다. 침묵은 비움입니다. 침묵은 깨달음입니다. 침묵은 은총입니다. 침묵은 치유입니다. 침묵은 위로입니다. 침묵은 평화입니다. 침묵은 깨어있음입니다. 침묵은 개방입니다. 침묵은 응시입니다. 침묵은 친교입니다. 침묵은 평화입니다. 침묵은 감사입니다. 침묵은 사랑입니다. 침묵은 연대입니다. 침묵은 순수입니다. 침묵은 기쁨입니다. 침묵은 지혜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기다림입니다. 침묵은 수용입니다. 침묵은 관대함입니다. 침묵은 희망입니다. 침묵은 선물입니다. 침묵의 힘입니다. 침묵 역시 선택이자 공부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결국은 침묵은 모두라는 말입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침묵에 대한 진리를 열거해 봤습니다. 말이 막혔을 때, 표현을 찾지 못했을 때 저절로 침묵입니다. 이밖에도 침묵의 유익함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깊이 깨닫고 이해하기위해 침묵은 필수입니다. 제가 한밤중 일어나서 강론을 쓰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밤의 침묵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침묵을 잊고, 잃고 지내기에 우리는 너무 소중한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은 모두가 깊은 침묵중에 나오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진리는 침묵중에 자신을 계시합니다. 교황님의 강론중 일부를 나눕니다.
“침묵은 그리스도의 지상 현존의 시작과 끝에 자리잡고 있다.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은 태어나던 밤 구유에서, 수난의 밤 십자가상에서 ‘침묵’이 되었다. 실로 하느님은 소리침, 잡담, 시끄러움보다는 침묵을 선호하신다. 그가 예언자 엘리야에게 나타나실 때, 바람, 지진, 불 속이 아닌 ‘작고 고요한 소리중에(a small still voice)’ 나타나셨다.
결국 진리는 사람들 마음속에 도달하기 위해 큰 소리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믿는 이들인 우리 역시 그분의 음성을 듣기위해 온갖 시끄러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 오직 우리의 침묵에서 만이 그분의 말씀이 울려 퍼질수 있다.”
뜻밖에 나누고 싶은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추석 다음 파공날 아침 산책기도중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 성심상 앞에서 잠시 뜻밖에 좋은 자매님들과의 만남시간이 있었고, 저에게 오늘 영화 관람하지 않느냐 물었고 유쾌한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저에게 가을 햇살 아름다운 아침의 자연, 아름다운 자매님들과 함께 함이 살아있는 영화입니다. 이보다 생생한 영화가 좋지 극장안에서의 영화는 너무 답답합니다.”
“아, 신부님은 시인이시네요!”-
또 잠시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제 프란치스코 영명축일 10월4일에 훨씬 앞서 어제 오후 늦게 축하 꽃다발을 선물차 들고 온 한 자매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아, 꽃바구니에 가을이 가득 담겼네요.”
정말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온갖 가을 꽃들이 가득하니 가을을 통째로 선물받는 황홀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즉흥적인 시적 감성과 표현 역시 침묵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흥미롭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나자 예수님은 한 말씀으로 말끔히 정리하십니다. 세속화된, 침묵을 잃은 제자공동체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곁에 세우신 다음 제자들에게 물으니 주님의 실물 교육이 참 멋집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정말 침묵에서 솟아난 주님의 지혜와 사랑의 결정체같은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기존관념을 완전히 깨는 역설적 진리를 설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약하고 무력한 이들이, 겸손하고 가난하고 작은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가장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가장 큰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모두의 사랑의 관심이,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요 세상이겠는지요! 말그대로 억강부약, 대동세상, 기본사회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이런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더 나아가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니 예수님의 깊은 침묵에서 나온 참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 진리를 잊지 마시고 주변의 힘없고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이들에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쏟을 때, 나 또한 참 작은 그러나 내면은 한없이 너그러운 관대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의 편협한 마음을 넓혀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처럼 고맙습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구존동이求存同異의 사람,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큰 관점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조그만 차이는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라는 말씀이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지내라는 말씀으로 결국은 같은 뜻입니다. 참으로 깊은 침묵의 대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메시아 시대의 행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즈가르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는 그 미래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가장 작은 이들이 가장 큰 사람이 되어 사람 대우 받는 그 아름다운 공동체의 미래상입니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나이가 많아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든 남녀 노인들이 다시 예루살렘 광장마다 앉아 쉬리라. 도성의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차리라.”
바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된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세상 공동체에서 가장 작은 이들로 상징되는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가장 큰 이들로 대우 받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열정을, 격렬한 열정을 지닌 주님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이제 내가 내 백성을 해뜨는 땅과 해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나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게 하리라. 그러면 진실과 정의 안에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주님의 이런 원대한 꿈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으로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임을 깨닫게 하시어, 우리 모두 ‘작은 이들을 주님처럼 환대하는’ 하느님 중심의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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