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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가위
정용화
낡고 오래된 가위가 있다
종이 하나 자르지 않고
이력서에 붙일 사진 한 장 오려내지 못한다
일용할 양식이 될 삼겹살도 못 자르는
투박한 가위 하나
야시장이 열리는 아파트 단지나
행사장 입구에서 걸죽한 막걸리 장단에
맞춰 하루 종일 신명나는 가위
세월에 밀리고 유행에 뒤처지지만
가위질만큼은 엿장수 맘대로다
찰그락 찰그락 소리에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고
검버섯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한다
이제 막 익어가는 열매는 단맛을 더해가고
저물어가던 노을이 벌써 얼큰하다
타고난 성품 탓일까
자르려는 속성도 잃어버리고
날카로움마저 다 버린 듯
세상을 살면서
잘라내고 오려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오늘도 거리에서 춤추는 가위가 있다
----정용화, [즐거운 가위]({애지}, 2008년 봄호) 전문
시는 스스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시는 비평가(독자)가 말을 걸 때만 말을 하고, 비평가가 역사 철학적, 또는 시문학적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부여해줄 때만이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의미는 비평가가 주관적으로 부여한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의미가 만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으로 승화될 수가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의 창작자이며,비평가는 그의 사상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비평가도 시인의 사상을 받아 들일 때도 있고, 시인도 비평가의 사상을 받아 들일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일반적인 관례상, 시인은 시의 창작자이며, 비평가는 시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시인도 자기 자신의 시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러나 시인이 부여하는 의미와 비평가가 부여하는 의미는 때때로 상호 충돌할 때도 있고, 상호간에 서로 조화롭게 일치할 수도 있다. 시인과 비평가가 상호 충돌할 때는 좋고 나쁨, 선과 악, 취향과 취향, 사상과 사상 등이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고, 시인과 비평가가 상호간에 서로 조화롭게 일치할 때는 비평가가 부여한 시적 의미가 시인이 부여한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이 부여한 의미를 넘어서서, 비평가로 하여금 말을 하고 싶게 만들고(되풀이 읽고 글을 쓰고 싶게 만들고),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게 만드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때에 비평가는 철학예술가가 되며, 그 시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의미는 철학예술가의 사상의 산물이며, 그 철학예술가는 타인의 말과 타인의 사유를 지우고, 그 모든 것을 새롭게 명명하는 가치의 창조자이다. 고귀하고 위대하고 새로운 것은 기존의 역사와 전통, 또, 그리고, 기존의 인습과 문맥을 넘어서서, 가장 독특하고 독창적인 새로운 언어의 기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철학예술가는 독창적인 명명자이며, 입법자이고, 수많은 언어의 기원의 창시자이기도 한 것이다. 외디프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에도 스핑크스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고, 오딧세우스가 사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고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때에도 사이렌은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어떻게 수수께끼가 그 수수께끼로서의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고도 존재할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만인의 심금을 울릴 수 없는 사이렌의 노래 소리가 그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가 있겠는가? 시인은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창시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비평가는 그 수수께끼를 단 번에 무력화시키는 외디프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만인의 심금을 사로잡는 새로운 노래의 창시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비평가는 그 어떠한 시인의 노래 소리에도 유혹당하지 않는 오딧세우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과 비평가의 이 숙명적인 싸움의 과정은 그들이 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적인 수단이며, 시인과 비평가의 이 숙명적인 싸움에 의하여 그들이 소속한 국가의 문명과 문화는 건강하게 되고, 그리고 그 민족의 삶은 모든 인간들의 이상적인 전형으로서의 지상낙원의 삶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시는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철학예술(비평)도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정용화 시인은 2001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 [흔들리는 것은 바람보다 약하다}를 출간한 바가 있다. 나는 정용화 시인의 출신성분과 성장과정, 그리고 그의 시세계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지만, 계간시전문지 {애지}에 발표된 이 [즐거운 가위]를 몇 번이고 되풀이 읽어보면서 이 시만큼은 나의 ‘명시감상’에서 꼭 다루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즐거운 가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고, 나는 이 [즐거운 가위]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철학예술가로서 [즐거운 가위]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이고, 이 [즐거운 가위]를 새롭게 해석해 하고 그 의미를 완성해 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가위’란 무엇이며, ‘즐거운 가위’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가위란 두 개의 날(刀)을 상호 교차시켜, 그 지렛대의 원리로 다양한 물건들을 자르는데 사용되는 도구를 말한다. 가위는 옷감과 종이를 자를 때에도 사용되고, 또한 가위는 가죽과 털을 자를 때에도 사용된다. 플락스틱 판이나 얇은 철판을 자를 때에도 사용되고, 나무를 전지하거나 바느질을 할 때에도 사용된다. 따라서 가위의 종류와 그 용도는 매우 다양해서 서양의 헬레니즘 시대와 중국의 전한前漢 시대에서부터 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위의 수효는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위는 절단과 단절의 도구이며, 이 가위의 존재의 의미는 그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다. 실용적인 목적은 고착미를 낳고, 비실용적인 목적은 순수미를 낳는다. 고착미는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데 이용되고, 순수미는 그 잉여가치와는 무관하게, 다만, 순수하게 아름다운 미美만을 생산하게 된다. 가위는 노동의 도구이며, ‘즐거운 가위’는 유희의 도구이다. 순수미와 고착미에 대한 칸트의 미학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또한 그만큼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정용화 시인의 ‘즐거운 가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즐거운 가위’는 엿장수의 가위이며, 이 가위의 쓰임새는 그것(가위)의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있다. 왜냐하면 ‘즐거운 가위’는 절단과 단절의 도구가 아니라,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그 주체자에게 고통을 주지만, 음악(노래)은 그 주체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노동은 모든 인간들을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떠나가게 만들지만, 음악(노래)은 그 이해관계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오늘날의 엿장수는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의 엿가위질 소리에 따라서 노래를 부르고, 온몸으로 춤을 추며, 만인들의 시선과 발걸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타악기의 연주자이며, 노래하는 가수이고, 그리고 그 축제를 주관하는 연출가이다. 따라서 그의 가위는 즐거운 가위가 되고, 그 즐거운 가위는 드디어, 마침내, 새로운 타악기로 탄생을 하게 된다. 정용화 시인은 순수예술의 주창자로서, 실용적인 목적에서 벗어난 이 엿장수의 가위를 주목하고, 그 엿장수의 가위를 ‘즐거운 가위’로 가장 아름답고 독특하게 명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엿장수의 가위는 즐거운 가위이며, 만인들의 시선과 발걸음을 사로잡는 천하 제일의 ‘명품 악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 “야시장이 열리는 아파트 단지”나 어떤 “행사장의 입구”에는 아주 “낡고 오래된 가위가 있다.” 낡고 오래된 가위는 “종이 하나 자르지”도 못하고, “이력서에 붙일 사진 한 장도 오려내지 못한다.” 낡고 오래된 가위는 “일용할 양식이 될 삼겹살도” 자르지 못하고, 낡고 오래된 가위는 이미 시대착오적인 “투박한 가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첫째 연의 “낡고 오래된 가위가 있다”라는 시구는 매우 도발적이면서도 또한, 그만큼 충격적인 시구이기도 한 데, 왜냐하면 그 시구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고정관념과 문화적 인습을 거부하는 반항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낡고 오래된 가위는 이미 쓸모가 없어진 가위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위는 폐기처분해 버리면 그만인 어떤 가위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정용화 시인은 그 쓸모 없는 엿장수의 가위를 더욱 더 단호하고 강렬
한 목소리로 부각시키며, 그의 걸작품인 [즐거운 가위]의 첫 행을 시작하게 된다. 왜, 정용화 시인은 ‘낡고 오래된 가위’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그 도발적인 목소리를 내뱉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대로, 쓸모가 없어짐으로써 더욱 더 쓸모가 있어진 낡고 오래된 가위의 존재를 그 역설적인 어법을 통해서 더욱 더 압도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엿장수의 가위는 골동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가위도 아니며, 더욱 더 수많은 잉여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가위도 아니고, 오직, 쓸모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악기로 탄생하고 있는 가위일 뿐인 것이다. 무목적의 합목적성, 즉, 쓸모 없음의 유용성----, 바로 이 기적 속에는 낡은 것의 새로운 탄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낡은 가위는 엿장수의 가위이고, 엿장수의 가위는 즐거운 가위이다. 아니, 정용화 시인의 [즐거운 가위] 속에서는 ‘즐거운 가위’가 엿장수 자체가 되고, 그 엿장수가 새로운 악기가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엿장수는 자기 자신이라는 타악기----왜냐하면 엿가위가 엿장수로 의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의 연주자이며, 노래하는 가수이고, 그리고, 그 축제를 주관하는 연출가이다. 정용화 시인의 “낡고 오래된 가위가 있다”라는 시구 속에는 낡고 오래된 가위의 중요성과 함께, 그 축제의 중심사상, 즉, ‘대화합의 사상’의 싹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엿이란 무엇인가? 엿이란 찹쌀과 멥쌀, 옥수수와 조와 고구마의 녹말 등에 엿기름을 섞어 졸인 식품이며,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과자를 말한다. 엿의 종류로는 쌀엿, 호박엿, 고구마엿, 옥수수엿, 꿩엿, 닭엿 등이 있으며, 과자가 귀했던 그 옛날에는 전국 어디에서나 엿가위 소리를 ‘찰그락 찰그락’ 내며 다니는 엿장수----지게에 엿판을 짊어지고 다니는 엿장수----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가 있었다. 엿장수는 쌀도 받았고, 술병도 받았다. 또한, 엿장수는 헌책도 받았고, 고철도 받았다. 엿장수의 엿가위 소리가 동구 밖에서 들려오면 마을의 아이들은 십원 짜리 지전을 들고 나가거나 그 동안 모아 두었던 폐품들을 들고 나갔고, 다 큰 청년들이나 마을의 어른들은 엿치기라는 노름을 통해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그 엿을 먹었던 것이다. 오늘날은 서양의 과자들과 함께, 온갖 신제품의 과자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의 전통적 과자인 이 엿들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다. 이 엿에 얽힌 민담 중의 하나는 딸이 시집을 가면 그 차반으로 엿을 보내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입학 시험 때가 되면 꼭 엿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예는 시댁 식구들이 엿을 물고 있는 동안은 새 며느리의 흉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고, 후자의 예는 끈적끈적한 엿의 특성상, 반드시 그 시험에 붙게 된다는 민간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밖에도 ‘엿 먹이다’라는 관용구는 남을 은근히 골탕먹이거나 속여 넘길 때 쓰는 말이 되고,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관용구는 엿장수가 엿을 제 마음대로 늘이듯이, 무슨 일이든지 제멋대로 처리할 때 쓰는 말이 된다.
막걸리란 무엇인가? 막걸리란 참쌀과 멥살과 보리와 밀가루 등을 쪄서 ‘지에밥’을 만들고, 그 지에밥과 함께, 누룩과 물을 섞고 일정한 온도에서 발효시킨 대한민국의고유의 술을 말한다. 막걸리는 탁주濁酒, 농주農酒, 재주滓酒, 회주灰酒라고도 부르며, 그 빛깔은 뜨물처럼 희고 탁하며, 알코올의 농도가 6~7도 정도에 불과한 술을 말한다. 지에밥에 누룩을 섞어 빚은 술을 체에 부어 거르면 텁텁한 탁주가 되고, 이 탁주에 용수를 박아서 떠내면 맑은 술의 청주淸酒가 된다. 이때에 찹쌀을 원료로 한 것은 찹쌀 막걸리가 되고, 그것을 체로 거르지 않고 밥풀이 담긴 채 뜨게 되면 동동주가 된다. 아무튼 좋은 막걸리는 단맛, 신맛, 쓴맛, 떫은맛이 아주 잘 어우러져 감칠맛을 내게 되고, 우리 한국인들은 이 시원하고 감칠맛이 나는 막걸리를 아주 옛날부터 대표적인 전통 술로서 애용愛用해 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상, 두산백과사전 참조).
정용화 시인의 낡고 오래된 가위가 즐거운 가위가 되고, 그 즐거운 가위가 새로운 악기로 탄생하는 장소는 “야시장이 열리는 아파트 단지”나 어떤 “행사장의 입구”인데, 왜냐하면 그 장소들은 축제가 열리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축제는 어떤 뜻 깊은 날과 경사스러운 날을 맞이하여 그 구성원들의 미래의 소망과 행복을 기원하는 잔치날이며, 또한 그 구성원들의 대동단결과 대화합을 도모하는 잔치날이기도 한 것이다. 축제의 날에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모두가 다같이 지난 날의 아픔과 회한들을 씻어버리고, 즐겁고 기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가 있는 잔치날이기도 한 것이다. 새해맞이 축제, 단오절 축제, 정월대보름 축제, 한가위 축제, 벚꽃 축제, 철쭉꽃 축제, 인삼 축제, 소싸움 축제, 제주도 특산물 축제, 신토불이身土不二 농산물 축제, 시민의 날 기념축제 등이 바로 그것이며, 이 축제의 날에는 온갖 산해진미의 음식들과 온갖 특산품들이 즐비하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된다. 바로 이 축제의 날에, 대한민국의 엿과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어떻게 빠질 수가 있겠으며, 또한, 한 잔 마시면 그 황홀함의 절정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되는 막걸리가 어떻게 빠질 수가 있겠는가? “야시장이 열리는 아파트 단지”나 어떤 “행사장의 입구에서”의 엿장수의 가위는, 비록, “세월에 밀리고 유행에 뒤처진” 가위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막걸리 장단에/ 맞춰 하루 종일 신명나는 가위”이며, 또한, 그 “가위질만큼은 엿장수 맘대로인” 가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에 엿장수 마음대로의 가위는 모든 것이 제멋대로인 가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즐거운 가위이며, 너와 내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만드는 가위이다. 엿장수는 개성과 독창성이 제일급인 엿장수이며, 그 축제를 대화합의 축제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순수예술가이다. 따라서 엿장수의 자유 자재로운 가위질 소리에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고”, 또한, 엿장수의 자유 자재로운 가위질 소리에 검버섯이 핀 늙은이들의 웃음꽃이 만발하게 된다. 이때에 강아지는 모든 동물들을 대표하는 동물이 되고, 검버섯이 핀 늙은이의 웃음꽃은 만인들의 웃음꽃이 된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사람과 동물들이 하나가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남녀노소 할 것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하나가 된다. 웃음꽃은 ‘물아일체物我一體’, 또는 ‘동심일체同心一體’의 꽃이며, 대화합의 꽃이다. 계절은 모든 만물들의 열매가 “단맛을 더해가는” 가을이며, 때는 이제 마악 “저물어가던 노을”마저도 벌써 얼큰하게 취해버린 저녁이다. 축제의 시간은 황홀함의 시간이고, 가장 아름답고, 멋 있고, 꿀맛같은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타고난 성품 탓일까
자르려는 속성도 잃어버리고
날카로움마저 다 버린 듯
세상을 살면서
잘라내고 오려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오늘도 거리에서 춤추는 가위가 있다
엿장수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며, 소외된 인물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엿장수는 소수의 예외자로서 엿가위를 새로운 타악기로 탄생시킨 창시자이며, 언제, 어느 때나 대쪽같은 장인 정신으로 만인들의 축제를 연출해낸 문화적 영웅이다. 왜냐하면 엿장수는 “타고난 성품 탓”으로 “자르려는 속성도 잃어버리고/ 날카로움마저 다 버린 듯/ 세상을 살면서/ 잘라내고 오려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오늘도 거리에서 춤추는” 엿장수이기 때문이다. 가위는 유용한 도구이며 그 이기적인 목적에 따라서 절단과 단절을 감행하고, 즐거운 가위는 무용한 가위이며 그 이타적인 목적에 따라서 축제를 연출해낸다. 가위는 모든 사람들을 사적인 개인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즐거운 가위는 모든 사람들을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 불러 모은다.
너도 노래를 부르고, 나도 노래를 부른다. 너도 춤을 추고, 나도 춤을 춘다.
모든 축제는 대화합의 축제이며, 마치, 엿장수처럼, 아니, 정용화 시인처럼, 생사를 초월한 순수예술가만이 그 축제를 연출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정용화 시인의 [즐거운 가위]는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사실성을 단어 하나, 토씨 하나 어긋나지 않게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아주 조용조용하면서도 구수한 목소리로 제일급의 멋진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