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98
5월22일[부활 제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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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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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lYKzE6i3sM&
(유명일 사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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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을 이기시고, 세상의 가치관을 능가하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아름다운 성지에서 2박3일간의 은혜로운 피정을 마치고 돌아갑니다. 피정에 오신 분들과 함께 대화도 나누고, 강의도 해드리고, 동반해드리며, 사목자로서 느끼는 보람도 큽니다.
“당신 자신만을 위한 맞춤형 강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며 감사를 표하는 분들에게 오히려 제가 감사했습니다. 피정 파견 미사는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였는데, 강론 때 제가 그랬습니다.
“이제 우리는 2박3일 간의 은혜로운 피정을 마치게 됩니다. 좋은 느낌들, 좋은 깨달음을 마음에 안고, 이제 다시금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또다시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야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마다 주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주신 기쁨과 위로를 생각하며, 성령과 성모님께서 우리 일상 안에 굳건히 현존하고 동반하심을 기억하며 시시각각 힘을 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이 피정 끝나자마자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타고 온 트럭을 몰고 이사 나가는 집으로 달려갑니다. 쓸만한 침대와 소파를 건져 피정센터로 싣고 갑니다.
여러분들께서도 하늘만 쳐다보지 마시고,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인간 관계, 때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가정사, 그 속에 주님께서 굳건히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주님께서 참으로 큰 힘이 되는 위로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항상 현존하시고, 우리 매일의 일상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명확히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그 어떤 세상의 고난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악으로 인해 고통당할 때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을 이기시고, 세상의 가치관을 능가하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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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RUaBCnlM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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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악마의 목구멍임을 잊을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과 싸우신 것입니다. 세상과 싸우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해있다는 말은 하느님께 속해있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우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1922년 6월 10일 미네소타주 그랜드래피즈에서 태어난 주디 갈랜드(Judy Garland)는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배우이자 가수였습니다. 그녀는 상징적인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에서 도로시 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공연으로 그녀는 16세의 나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주디를 스타로 만든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주디는 세 자매 중 막내였습니다. 어머니 에델은 방송작가로 자식들을 스타로 만들겠다는 강한 집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각종 무대에 세웠는데 막내 주디는 괴상한 어머니로 인해 네 살 때부터 무대에 올라 노래하였습니다.
세 자매 중 주디가 재능을 보이자 어머니는 각종 오디션을 통해 열세 살의 주디를 MGM 영화사의 전속 배우로 합격시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녀의 전성기와 불행이 동시에 시작합니다.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각종 파티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감독과 프로듀서들에게 성접대를 강제로 해야 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미성년자였습니다.
결국 오즈의 마법사로 일약 스타 반열에 오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닦여진 출중한 연기력, 탁월한 노래 실력과 무대 감각으로 각종 영화와 쇼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처참한 비극이 있었습니다.
당시 40~50년대 할리우드는 ‘핀업걸’이라고 하여 섹시한 여배우들이 유행이었는데 151cm라는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인 그녀는 당시 시류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소속사 MGM 영화사는 그녀가 날씬할 수 있도록 식단을 수프 한 그릇만 줄 정도로 엄격하게 감시하고 제한했으며 식사 대신 담배와 ‘암페타민’ 같은 마약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이 암페타민 같은 경우 어머니가 열 살 때부터 주었다고 합니다.
일을 할 때는 마약과 담배를 주고 일이 끝날 때는 ‘바르비튜레이트’라는 강력한 수면제를 먹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녀는 평생 약물 중독의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약물중독, 성접대, 가혹한 노동으로 그녀는 정신쇠약에 걸려서 여러 번의 자살 시도와 여러 번의 결혼을 반복하였고 각종 소동과 약물 중독으로 1950년, 소속사와 계약이 종료됩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어머니 에델과 결별하고 혼자 힘으로 살아보려 했습니다. 실력이 출중하여 나름 인기를 유지했지만, 약물남용, 알코올중독, 자살소동으로 그녀의 고통이 지속하였고 1969년 6월 22일 47세의 나이로 바르비투르산염 과다복용으로 일찍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많은 연예인이 어렸을 때부터 세상 인기에 중독되어 결국엔 안 좋은 파국을 맞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공연하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 우울증에 시달리는 스타들이 많은 것입니다.
세상은 혼자가 되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속여 그 사람의 재능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단물이 빠지면 가차 없이 버립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전부였던 그들은 참지 못하고 타락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생을 마감합니다. 세상의 힘은 정말 엄청나다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음을 믿읍시다. 이구아수 폭포에 악마의 목구멍이라 이름 붙여진 구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 근처로 가면 빨려 들어갑니다. 세상은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과 싸워 이기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신”(2코린 4,4)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떠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 방법은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세상은 무엇으로 우리를 굴복시키려 할까요? 바로 ‘외로움’입니다.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혼자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엔가는 소속되려 합니다. 이것을 위해 노력하다 결국 세상에 나 혼자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게 됩니다.
주디는 어머니와 세상에 속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망쳐버렸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속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속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누군가의 공간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만든 공간을 지배하는 법을 따라야 합니다.
주디가 어머니와 머물기 위해 어머니의 법을 따랐듯이 예수님은 당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아버지의 법을 따랐습니다. 그것으로 세상의 법을 이기신 것입니다.
세상을 악이 지배하고 있음을 믿읍시다. 그래서 세상에 속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믿읍시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속하지 않는 방법은 아버지께 속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세상은 멸망할 것이나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 물속에서 수영을 즐기다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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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면서 ‘올리브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의 정점에는 ‘주님의 승천 성당’이 있습니다. 승천 성당에서 내려오면 ‘주님의 기도’ 성당이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기도 성당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곳은 프랑스의 공주가 땅을 매입하였고, 봉쇄 수도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기도 성당을 순례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국의 언어로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주교님께서 순례를 하신 후 ‘주님의 기도’를 한국어로 봉헌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 ‘개신교’의 용어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어떤 사람이 봉쇄 수도원을 찾아와서 기도문의 내용을 수정하겠다고 하였고, 수도원 측에서는 당연히 받아 들여서 수정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분은 주님의 기도 내용을 개신교의 기도문으로 바꾸어서 수정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순례자들은 주님의 기도 내용이 바뀐 것을 알고 놀라기도 하였고, 분노하기도 하였습니다. 수도원 측에 문의하였지만 수도원도 누가 그랬는지는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가톨릭의 ‘주님의 기도’로 바꾸려고 했지만 수도원 측은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서 개신교의 ‘주님의 기도’는 그대로 두고 가톨릭의 ‘주님의 기도’를 다시 봉헌하도록 제안하였습니다.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다시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기도 성당에는 2개의 한국의 ‘주님의 기도’가 봉헌되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과정이나 방법은 올바르지 않았지만 주님 기도의 가르침대로 용서하자는 이야기를 하였고, 함께 했던 3명의 개신교 신자들도 기뻐하며 순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미사에는 참례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모두 미사에 참례하였고, 가톨릭에 대한 오해를 많이 풀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기도문 수정은 어쩌면 작은 일이지만 역사를 보면 종교의 이름으로 타 종교와 문화를 무시하고, 그 흔적을 지워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원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신전을 헐어버리고 그 위에 웅장한 교회를 세운 적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몇 번씩 파괴되었고, 성전의 기물들이 손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은 아름다운 성화가 회색으로 칠해지기도 했습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는 ‘현상유지법’이 생겼다고 합니다. 성지의 모든 소유는 지금 관할하고 있는 종교에게 권한이 있다는 법입니다. 예전에 가톨릭의 소유였다고 다시 가톨릭의 소유로 주장할 수 없다는 법입니다. 예전에 이슬람의 소유였다고 다시 이슬람의 소유로 주장할 수 없다는 법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2층 발코니에는 빛바랜 나무 사다리가 있습니다. 현상유지법이 발효되면서 100년 동안 그 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현상유지법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다양한 종교가 한 지붕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남의 기도문을 떼어내고 자기들의 기도문을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이방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부활의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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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기도 전에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다. 주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30절) 한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제자들이 믿음이 약하다고 하신다.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으며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제자들이 스승님께서 잡혀가시자 행동으로 그분을 버렸으며, 믿음마저도 버렸다.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절망에 빠져 자기들의 믿음이 죽게 했다. 이렇게 그들은 그분을 떠나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만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32절)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제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려가 온갖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분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고백은 언제나 지배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사악한 범죄자를 대하듯 그들에게 온갖 형벌과 고문을 가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순교자들은 언제나 평화를 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제자들이 그분 안에 머물며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때 그들은 환난을 받으면서도 그분을 버리지 않았다. 이 고을 저 고을로 피해 다녔지만,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박해를 당하지만, 그분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피난처로 삼고 그분 안에서 평화를 누렸다. 이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고 모든 선행과 선의는 이 평화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하신 덕분에 우리는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용기를 갖는다. 그분은 참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우리가 말씀을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그분을 팔아넘기는 것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덕을 위해 이겨낸 모든 환난의 결과는 기쁨이며, 모든 수고의 결과는 안식이며, 모든 치욕의 결과는 영광이다. 즉 덕을 위한 모든 고난의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세상을 이기며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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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세상을 이겼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33)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의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박해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군인들과 함께 오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두고 흩어진 일은, 또는 달아난 일은 ‘배반’이 아닙니다. ‘배반’이란, 예수님을 등지고 박해자들 편에 서는 일입니다. 흩어진 제자들은 박해자들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배반자는 유다 한 사람뿐입니다.)
요한 사도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두고 흩어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보호하려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일로 해석했고, 복음서에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8,8-9)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사람들(제자들)로부터도 버림받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신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 모든 일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결코 버림받은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은 신앙인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도 박해를 받다보면 완전히 고립되어서, 하느님과 사람들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심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되든지, 어떤 심정이 되든지 간에, 하느님은 신앙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고, 항상 지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마태 10,29-3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15장과 16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말씀과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미리 예고하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르고 당하시는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것, ‘인간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보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나를 믿어라. 그리고 평화를 잃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시 상황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제자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모두 기억났고, 그 말씀들의 진정한 뜻도 모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더욱 깊은 믿음과 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있다.”입니다. <지금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도 제자들이 겪고 있는 고난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도 제자들은 끊임없이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에서’는 ‘내 안에서’의 반대말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서’는 평화를 얻지만,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신앙인들은 ‘세상에서’는 고난을 겪지만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얻어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라는 말씀은,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승리를 미리 앞당겨서 선언하신 말씀이고, 동시에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들은 “하느님 뜻과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 즉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창조주이신 분이고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에서 패배나 실패는 결코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승리자는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중간 과정에서 사탄이, 또는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자체를 막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생활이고, 승리자이신 하느님과 예수님의 편에 서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곧 하느님의 일이고, 이 생활에 패배는 없습니다. 신앙인 자신이 포기하지만 않으면…. 중간에 힘든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가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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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별 담화(요한 13―16장 참조) 뒤에 그분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신 분’이심을 이제는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하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인정하여서가 아닙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구원의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머리로 아는 지식이나 믿고 싶다는 바람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성령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제1독서는 요한의 세례만 알던 에페소 신자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자가의 부르짖음(“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과 서로 어긋나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예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아버지와 떨어져 계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외침은 시편 22(21)편의 첫 구절이었습니다. 죄 없는 의인이 자신의 수난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받고, 앞으로 온 세상과 미래의 모든 세대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확신하며 기쁨 속에 찬미를 드리는 이 시편 기도는, 십자가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외치셨을 예수님의 확신에 찬 고백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얼굴에서 지독한 고독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는 확신과,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기쁨을 볼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도 주님처럼 고난을 겪을 때 용기를 잃지 않도록 말입니다. 우리도 십자가 너머 빛나는 희망과 구원을 바라보며, 주님 뒤를 따라 힘차게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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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별 담화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이해하고 그분 말씀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왔음을 예언하십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이해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결정적인 십자가 사건의 걸림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우리 신앙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할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이제야 겨우 주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게 되었고, 주님과의 만남을 체험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세상의 일들이 내 신앙을 흔들어 버리거나, 세상에 휩쓸려 주님을 잊어버리고 마는 경험을 한 번씩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세상의 논리는 신앙의 논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이 따르는 일입니다.
때로 내 노력에 비하여 세상의 벽이 너무 높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과 생명의 논리가 욕심과 죽음의 논리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현실에서 그 승리를 이미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용기를 내어 신앙의 길, 승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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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이 끝이 아님을 당신의 부활로 보여 주십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악과 그의 권세인 죽음에 대한 승리임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라는 사도 신경의 부활 신앙은, 빈 무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더라도,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이며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이라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639-647항 참조)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괜히 모든 것을 잃고 손해 보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수님의 방법은 인간 세상의 방법과 전혀 다름을 알게 해 줍니다.
무조건적이며, 아낌없이 내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통하여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며, 사랑을 통하여 움츠려 있던 우리의 몸을 펴고 용기를 내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수록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것을 내어 주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삶에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로마서 12장 1절-21절 참조)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는 부활의 삶을 향하여 용기를 내어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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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동안 부활시기 내내, 우리는 예수님의 고별담화인 요한복음 13장 후반부부터 14장, 15장, 16장의 다락방에서의 유언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해질 때가 올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복음 16장 32절)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의혹에 휩싸이고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더듬거리고 무지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탱한다.”(루돌프 스테르텐브링크. “하늘은 땅에서 열린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6장 33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그 어떤 곤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
평화’란 단순히 갈등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 분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 혹은 그 어떤 낙담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요한복음 16장 33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 주시는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좋은 환경이나 자기만족에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데서나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자신의 마음 안에서 찾는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분 안에서’ 평화를 찾는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당신 안에’ 마련한 평화를 찾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이 주시는 평화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주는 평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16장 32절) 이제 그분이 주신 평화로, 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16장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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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옳고도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세상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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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것이 승리라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 그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때문에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이지만 속을 보면 오히려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겪기까지 그리고 부활하시어 제자들과 동행하시고 마음의 문을 열어 일깨워 주시기까지 그들의 믿음은 갈 길이 멀었습니다. 굳센 믿음을 지닌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과 슬픔에 관해 말씀하시며 세상의 환난을 겪어내기를 기원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고통과 환난을 겪겠지만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당부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승리할 것이고 그 승리는 제자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승리를 받아들여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치워보십시오. 그러면 시냇물은 아름다운 노래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시련은 과정입니다. 그러나 곁에 있었던 제자들도 믿음이 온전히 영글기까지 오랜 시간과 시련의 시간이 필요하였는데 하물며 우리에게는 어떻겠습니까? 말씀을 믿고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면서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면 어느새 성장한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사도10,38). 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줄 것입니다”(필리3,21).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굴복시키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는 능력의 예수님을 굳게 믿음으로써 세상을 이겨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애타게 부르고 마침내 그분 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생각하고 찾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빌기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시골에 가문이 오래된 집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한 농부가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농부는 오래된 가구며 골동품을 다 팔아 버리고 병풍 하나만 남겨 놓았습니다. 그것도 엿장수가 자꾸 팔아 버리라고 조르는 바람에 십만 원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나중에 그것이 시가 오천만 원을 웃도는 귀한 병풍임을 알고 후회하며 가슴을 쳤답니다. 좀 더 지혜로워 그 병풍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죄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이 우리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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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유명 연예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습니다. 너무나 멋진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이 세상 삶을 마감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안고 있는 사람인데 무슨 부족함이 있을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마음속에서 바라보는 자기 모습의 간격이 너무 크다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 머리 위에 자기 몸 상태가 뜨면 참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예를 들면 이런 상태 창이 뜨면 어떨까요?
‘외로움, 힘듦, 지쳤음, 보이기 위한 삶이 싫음.’
이 상태 창을 보고서 사람들은 좀 더 배려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몸 상태가 드러나는 상태 창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즉, 우리 눈에 상대방의 상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는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입니다.
어떤 분과 나눈 대화가 생각납니다. 이분은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었고, 대인관계도 좋아서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분이었습니다. 가족도 매우 화목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큰 고통과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급히 병원에 가 보니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이분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매우 여리고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보살피고 안아주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내가 함부로 해도 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바라보면, ‘남’도 귀하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부셔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벗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벗이 되기 위해 오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 고통과 시련이라는 겪을 수 있지만,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안에서 평화를 갖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님입니다. 주님을 믿고 함께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으로 나의 이웃과 함께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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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는 혼자가 아닙니다>
요한 16,29-33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대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대 가는 길
사랑의 길이라면
홀로라도
뜨거우리니
사랑의 하느님께서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대 가는 길
정의의 길이라면
홀로라도
굳건하리니
정의의 하느님께서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대 가는 길
살림의 길이라면
홀로라도
푸르르리니
살림의 하느님께서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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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세상을 이기는 삶>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부러우면 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명품을 가지고 있어도 그가 부럽지 않으면 나는 그도 이기고 세상도 이긴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싸움을 걸어와도 내가 싸우지 않으면,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 그것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싸울 마음이 도무지 없으면 그것이 더더욱 완벽하게 이긴 것입니다.
누가 나를 무시하고 심지어 대놓고 모욕을 퍼부어도 그것으로 내가 무시당하지 않고 욕을 먹지 않으며 화가 나지 않고 여전히 평화롭다면 그것이 그를 이기고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말로는 믿는다고 하고선 배신하고 떠날지라도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지 않고 여전히 믿어주고 오히려 용서한다면 그것이 그를 이긴 것이고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미움엔 사랑이 승리고, 배신엔 믿음이 승리고, 상처엔 용서가 승리고, 모욕엔 평상심이 승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승천이 승리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삶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고,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임을 알지만 관건은 어떻게 이 승리의 삶을 살아낼 것인가, 그것이겠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신다고 하는데 혼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 때 가능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내렸던 성령이 우리게도 임하기를 우리도 빌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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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한결같는 하느님 중심의 삶
-하루하루, 이제부터, 늘 새로운 시작-
어제 저녁식당 독서시 성규의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자연스레 따라 오는 수행 요목들입니다.
44.심판의 날을 두려워하라.
45.지옥을 무서워하라.
46.모든 영적 욕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
47.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48.자신의 일상 행위를 매순간 조심하라.
49.어느 곳에서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심을 확실히 알고 있어라.
50.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나쁜 생각을 즉이 그리스도께 쳐바수고, 영적장로에게 밝히라.
51.나쁘고 추잡한 말을 입에 담지 마라.
52.많이 말하기를 좋아하지 마라.
53.실없는 말이나 웃기는 말을 하지 마라.
54.거룩한 독서를 즐겨 들어라.
55.기도에 자주 열중하라.
늘 강론을 써오며 깨닫는 사실은 삶은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냥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 엄중한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의 정주의 삶을 잘 들여다 보면 반복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일종의 반복도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좋은 반복을 통해 날로 깊어지는 내적여정의 삶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수도사제로서 초창기 34년전부터 지금까지 강론중 참 많이 반복해온 주제가 삶의 중심,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어제도 뜻밖의 모녀의 방문을 받고 두시간 동안 집중 만남 시간을 갖고 강조한 삶의 중심과 의미, 희망과 기쁨이었습니다.
“정말 건강은, 중요한 명약은 ‘사랑, 희망, 기쁨, 감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삶의 의미, 그리고 사랑, 희망, 기쁨, 감사의 삶입니다. 건강 식품, 좋은 음식보다 더 중요한 명약이 샘솟는 사랑, 희망, 기쁨, 감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이런 명약으로 영혼을 튼튼히 하는 것이 건강생활의 첩경입니다.”
조언을 드린후 이어 보속으로 어제 강론을 소리내어 읽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역시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하루하루, 이제부터-”로 정했습니다. 요즘 산책하다 보면 이맘때쯤 어김없이 수녀원 담장 넘어에서 곱게 피어나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장미꽃들이요, 담벼락을 줄기차게 타고 오르는 담쟁이입니다. 담쟁이를 볼 때 마다 참 많이도 반복했던 떠오르는 하느님 중심을 노래한 ‘담쟁이'란 시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를 하루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하느님만 아실뿐 나는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1998년 6월 여기에서의 작품이니 무려 25년전 시입니다. 읽을 때 마다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전의를 새롭게 하는 느낌입니다. 그렇습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88세 노령에도 정신은 영원한 청춘입니다.
영원한 청춘의 젊은이로 하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영원한 청춘의 모범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서의 위인들,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제자들의 배신을 예상 하면서도 전혀 동요됨이 없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고백하며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예수님입니다.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때로 공동체도 허상일 수 있습니다. 궁극에는 혼자요 하느님 중심의 삶이 나를 버텨내고 견뎌내고 지탱해줍니다. 각자도생을 목표로 떠날 제자들을 예상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이런 와중에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하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께서 선물하시는 참평화가, 내적평화가 고난을 견뎌낼 수 있게 합니다. 평화의 힘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평화의 전사로 살게 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성구이기도 합니다. 바로 주님의 영적승리에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주님이 이겨놓은 세상의 영적전투에 참여한 우리들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선교활동이 참 불가사의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샘솟는 열정의 에너지임을 깨닫습니다. 아테네에서의 실패에 아랑곳 없이 안티오키아 본거지에 돌아와 충전한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으로 에페소에서 선교활동에 전력투구합니다.
요한의 세례만 받은 불충분한 이들에게는 안수를 통해 성령을 선물함으로 이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하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사도는 자신의 집요하고 치열한 한결같은 선교활동을 통해 그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보여줍니다. 바오로의 일차적 선교 대상은 동족인 유다인이였습니다.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백절불굴 믿음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복음 말씀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루하루 이제부터, 지금부터 하느님 중심을 잡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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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세상을 이겨내자!>
오늘 복음(요한16,29-33)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예수님과 하나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어제 주님승천대축일미사의 고유기도문들은 모두 이런 기도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승천에 희망을 두고 거룩하게 살아, 우리도 세상을 이겨내고 마침내 하느님 곁으로 오르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세상을 이겨내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5,8)
베드로 사도의 이 권고처럼 우리 주위, 내 주위에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악마들이 많습니다. 보호자 성령께서 함께 계시지만, 악령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악마가 하는 일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고 악마와 싸워 이기게 하지만, 악마는 우리를 무너지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깨어 있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악마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은 늘 우리를 승리로 이끕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깨어있지 않으면, 패배자가 됩니다.
악마는 그 틈을 타서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나 자신의 모습부터 깊이 성찰해 봅니다.
악마와 싸워 이기는 승리자가 됩시다! 세상을 이겨내는 승리자가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기도 안에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입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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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PG1VGRd8D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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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용기는
실행입니다.
실행하시는
새로운 용기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용기를 낼 때
우리가 맞닥뜨리는
고난도 은총이
됩니다.
평화를
사랑할
용기를 배우고
두려움과 싸울
용기를 냅니다.
용기를 내면서
용기는
다름아닌
주님을 향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웁니다.
공동체의 삶에서도
용기가 필요한
용기의 여정입니다.
피하지 않는 용기
시간을 견디어 내는
용기가 필요한
공동체의 삶입니다.
용기의 근간과
중심에는
함께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치열한 사랑
치열한
용기입니다.
그래서 용기는
용기를 낳고
비겁은 비겁을
낳습니다.
용기는
가장 뜨거운
삶의 변화입니다.
용기는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용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믿는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씩
이루어
나갑니다.
패배와
실패에서도
다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복음이라
부릅니다.
용기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주님을 닮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며
용기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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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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