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힘
예레 28,1-17; 마태 14,13-21 /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2024.8.5.
예레미야 예언자가 활약하던 당시에 유다 왕국에는 하난야라는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집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바빌론 임금이 유다인들에게 씌워준 멍에를 부수시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이 예언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전형적인 인기 발언이었고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참칭한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져야 그 예언이 하느님의 말씀임이 입증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이라는 말이 현실에서 실행될 수 있어야 말씀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영주에게 죽임을 당한 후 살해 위협을 느끼신 예수님께서는(루카 13,31 참조)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지만, 여러 고을에서 그분이 행하신 기적 소문을 들은 군중이 쫓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짐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목자 없이 흩어진 양떼같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마르 6,34 참조) 그곳은 외딴 곳이었고 시간도 늦었는지라 예수님께서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었던 그 군중이 굶주리지 않도록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경위는 이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군중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하신 행동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신 기도의 말씀뿐이었던 것입니다. 예언자가 전한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시간이 흘러 실제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아야 입증될 수 있다고 했지만,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말씀이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셨습니다(요한 1,1).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는(요한 1,14)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모든 피조물에게 빛을 주시어(요한 1,4) 생명의 빛을 통해 동물에게는 소리를, 사람에게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진화시키셨습니다. 소리에는 단순한 신호만 있지만, 말에는 복잡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하고 자신의 신원을 밝혔습니다. ‘소리’라고는 했지만 그는 하느님의 ‘소리’였습니다. 이 ‘소리’는 제자들의 ‘말’이 되어 말씀이신 예수님과 공생활 동안 내내 소통을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어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말씀’을 선포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발현하셨습니다. 이것이 말의 진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사람들도 반복합니다. 이것이 소리와 말로 본 인류 역사입니다.
사람은 머리 속에서 해 낸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합니다. 이 의사소통의 결과로 개인은 자기 존재를 의식할 수 있게 되고, 인류는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 속에는 의식주를 비롯하여 건강과 위생, 치안과 안보 같은 생활의 기본 필요는 물론이고, 인류가 깨우쳐 온 지혜를 후대에 전달하는 교육과 문화, 학문과 예술, 교통과 통신, 생산과 상업 같은 필수적 필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정신문화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기 시작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그 말씀을 처음으로 알아들은 아브라함 이래로 수많은 예언자들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좀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인류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류에게 건네신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컬어 ‘하느님의 말씀’이시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알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하느님의 입이었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개인의 각성이 언어의 진실성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가 오염되면 사회의 정신적 통합이 심각하게 지장을 받게 됩니다. 한 개인의 인격의 성숙 정도에 대해서도 그가 쓰는 언어의 진실함에 좌우되지만, 한 집단의 경우에도 그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의 진실성 여부와 정도에 따라서 과연 공동선에 기여할만한 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과 글로 표현되어 교회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도 오염되어 가는 세상의 언어를 정화시키는 역할도 자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에 바탕한 의사소통이야말로 복음 선포의 바탕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에서 세상과 화해하고 세상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세상 속에서 걷는 일이야말로 하느님께서 화해의 도구로 우리를 쓰실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강생과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도 비로소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세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교회만의 전통적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말하고자 하면 세상은 알아듣지 못하여 결국 외면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속된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먼저 세상의 그 속된 환경을 성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방향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말과 글을 진실되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귀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십자가 죽음을 겪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도 현재적 사실을 공유함에 있어서 진실성을 담보하는 일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중차대한 관심사여야 합니다. 교회의 언론과 사목자들의 강론은 하느님의 언론으로서 진실한 말과 글의 도구여야 할 것도 물론입니다. 타락해가는 사람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소리와 말의 차이는 의미 여부에 있고, 말과 말씀의 차이는 실행력 여부에 있습니다. 우리가 발설하는 말이 말씀이 되어 실행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진실에 기초하되 진리를 향해야 합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엘리야처럼 세례자 요한도 그 시대의 엘리야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마르 9,13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도 엘리야와 같은 반열의 예언자로 인정하셨지만,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보면 실제 엘리야와도 영적 통공을 이루고 계셨습니다.(마르 9,4 참조) 이처럼 말은 말씀으로 진화되어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며 미래를 창조하는 실행력이 있습니다. 그 실행력의 백미가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일컬어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 말씀으로 진화되어 복음을 선포하는 실행력을 갖추려면, 다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해야 합니다.(마태 5,37) 우리네 인간 이성이 하느님의 영성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 의미 없는 소리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말이 되려면 진실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에 바탕한 우리네 말이 실행력을 갖추도록 하자면 우리가 발설한 말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함께 사는 이들과 진실하고 원활한 의사 소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활성화, 교회의 복음적 쇄신, 민족의 복음화,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의 복음화라는 과업도 그렇게 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