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풍랑을 뚫고
거센 풍랑을 뚫고, 성난 파도를 헤치고 평온한 항구에 도달했을 때의 그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만치 크다.
내가 매년 몇 차례 방문하면서 선교사역을 진행하고 있는 필리핀의 민도로 Mindoro 섬은 청정지역으로써 참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필리핀의 7,107개 섬 가운데 유일하게 망얀 Mangyan이라는 원시 부족이 살고 있을 만큼 오염이 덜 된 곳이고 섬 한가운데 제주도의 한라산처럼 높은 해발 2,616m의 할콘산 Mt. Halcon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주변의 울창한 열대 밀림 속에 망얀족들이 부족을 이루어 지금도 발가벗고 살아가고 있다. 민도로섬은 필리핀의 바나나와 망고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나는 1992년부터 지금까지(2024년) 이곳을 약 100번 정도 오가며 교회와 선교센터도 세우고 목회자와 학생들을 도우며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인천공항)에서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 Manila까지의 비행시간은 약 4시간 정도이며 대구 우리 집을 떠나 민도로섬의 선교지까지는 택시와 버스, 비행기와 다시 자동차와 배와 버스와 자동차, 트라이시클을 번갈아 타며 보통 꼬박 하루가 걸린다. 그리고 원시부족이 사는 산꼭대기 부근의 촌락까지 가려면 다시 6시간을 원시 밀림을 헤치고 걸어 올라가야 한다.
필리핀을 오갈 때마다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섬을 오가는 뱃길이다. 바다가 평온할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풍랑이 조금이라도 일면 배가 끊기고 마는데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을 때는 마닐라로 가는 배가 아예 없어서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는 귀국편 비행기를 놓치고 말기 때문이다.
한번은 비행편이 촉박한데 갑자기 태풍의 경로가 바뀌어 거센 풍랑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모든 배들의 운항이 정지되었는데 그중 제일 큰 배 하나가 오후 늦게 겨우 떠나게 되어서 비행편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걸 타고 민도로섬의 주도인 깔라판 Calapan을 떠나 필리핀의 주도인 루손 Luzon섬의 항구인 바탕가스 Batangas로 오게 되었는데 그나마 조금 잠잠해진 바다였지만 배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승객들이 모두 온갖 비명을 다 질러대며 초주검이 될 정도였다. 배가 우당탕거리며 전후좌우로 심하게 요동침은 물론이고 집채만 한 파도가 수시로 배를 덮치고는 했는데 모두가 느낀 두려움은, 공포심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치 대단히 컸다. 짐보따리들과 사람이 뒤섞여 배 바닥에 내동댕이치기가 여러 번이었고.
게다가 민도로섬과 루손섬을 오가는 거의 모든 배들은 주로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운항을 한 후 수명을 다해 내어다 판 오래된 고철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낡은 것들이었는데 그것에다 페인트칠만 적당하게 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잔잔한 바다에도 그 배를 타기가 겁이 나는데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날은 정말 비행기를 놓치더라도 하루나 이틀 더 머물렀다가 안전하게 출발하는 게 맞았다.
그렇게 너댓 시간을 혼비백산하여 바탕가스 항구에 들어서니 우리가 탄 배보다 더 큰 화물선 하나가 침몰해서 그 윗부분만 물밖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 배에 실려있던 수 천마리의 돼지는 깊은 바다로 다 떠내려가고.
그나마 파도가 잦아들고 거센 폭우도 잠잠해진 항구에 무사히 들어서니 두려움에 떨던 모든 승객들이 그제사 박수를 치며 이젠 살았다고 환호를 한다. 게 중에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다시 가고 싶은 승객이 있을까 싶다.
다시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배를 타라면 탈 사람이 또 있을까.
어서 이 풍랑이 이는 바다를 지나 안전하고도 포근한 항구에 도달하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거센 풍랑이 일던 그 바다보다도 더 위험하고 흉측한 곳인데, 더한 죽음의 바다요 질곡인데 어쩌자고 모두들 이토록 평안하기만 할까.
죽음이 바로 내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고, 내가 늘 오가는 길모퉁이에 서서 나를 기다리며 내가 잠든 침대맡에서 나를 들쳐 메어 끌어가려고 하는데 우린 어찌 이리도 평안하다 평안하다만 되뇌며 깊이 잠들어 있을까.
그날의 그토록 무섭고도 혹독했던 바닷길은 후로도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깨우침이 되었다.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속히 지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는 그 찬란한 소망 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