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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방인의 조선 관찰기극동지역에 파견된 선교사 이야기
독특한 이방인
동치(同治) 5년(1866) 1월 11일 신미(辛未). 상(上)께서 창덕궁에 계셨다.
좌우 포도청에서 이렇게 보고하였다.
이달 9일 유시(酉時)에 수상한 놈을 체포하였는데
키는 7, 8척(尺)쯤 되었고 나이는 50세 정도 되었으며
눈은 우묵하게 들어가고 콧마루는 덩실하게 높았는데, 우리나라 말도 잘하였습니다.
입은 옷들을 보면 모포천으로 만든 두루마기를 걸쳤는데
그 안에는 양가죽을 댔으며 무명 저고리에 무명 바지를 입었고
우단(羽緞)으로 만든 쌍코신을 신었습니다.
엄하게 조사하여 공초(供招)를 받으니,
그의 공초에 ‘저는 불랑국(佛浪國) 사람으로서 병진년(丙辰年, 1856)에 조선에 와서
홍봉주(洪鳳周)의 집에 거주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교(聖敎)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울과 지방을 자주 왕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고종실록』 권3, 고종 3년 1월 11일 신미
포도청에서 체포한 ‘수상한 놈’이란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수장이었던 프랑스 선교사 시메옹 베르뇌[Siméon François Berneux, 1814~1866, 한국식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주교였다.
포도청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냥 오다가다 우연히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고 체포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열흘 전부터 포졸들이 베르뇌 주교의 집 주위를 치밀하게 조사했으며,
언제쯤 덮쳐서 주교를 붙잡을지도 미리 정해놓았던 것 같다.
포도청에서 일차로 조사를 받고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베르뇌 주교는
심문관이 죽이지 않고 석방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이 나라에 머무른 지 이미 10여 년이 지났고, 이 나라 말을 배워 익혔습니다.
천주교를 자못 널리 전하여 교우들도 많아
이미 이 땅에서 편안히 사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참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정말로 만약 죽이지 않고 그대로 살게 한다면 큰 다행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죽더라도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 『추안급국안』 29, 「죄인 종삼 봉주 등 국안」, 동치 5년 정월 19일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왜 머나먼 이방의 땅에까지 왔던 것일까?
죽이지 않고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해도,
싫다면서 죽어도 이 나라를 떠나지 않겠다던 사람들.
그들 가운데에는 무려 20년 동안이나 조선 땅에서 조선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천주교를 전한 선교사도 있었다.
가까운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 사람도 함부로 들어와서 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19세기 조선에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낯설다 못해 기이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상인이나 여행가, 군인, 외교관처럼 조선을 잠깐 다녀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터를 잡고 살다가 죽을 생각으로 왔다니 더욱 그러하다.
이 사람들의 행적을 더듬으면서 개항 이전 조선 사회를 샅샅이 훑고 다니던
낯선 시선의 정체를 파헤쳐보자.
『추안급국안』 「죄인 종삼 봉주 등 국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베르뇌 주교에 대한 심문 기록이 적혀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아시아 전역에 선교사를 파견하다
이야기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량된 항해술과 선박 제조기술을 바탕으로
해외 영토 개척에 나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대서양과 태평양 곳곳을 누비면서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교황청은 유럽 바깥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일에
세속 국가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에 식민지 영토의 점유권을 인정해주면서
천주교 전파의 의무도 함께 짊어지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이들 나라의 국왕이 식민지에 성당을 건설하고
선교사의 생계유지와 신변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처럼 남의 땅에 금을 긋는 행위의 종결판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1494년 스페인의 토르데시야스라는 곳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양측을 중재하여 조약을 체결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서 대서양 위에 남북으로 선을 그어 오른쪽은 포르투갈,
왼쪽은 스페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은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지역은 스페인이 영토 개척의 우선권을 확보했다.
단 브라질만은 포르투갈이 선점한 곳이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기득권이 인정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유일하게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쓴다.
한편 비유럽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천주교회를 세우는 일 역시
포르투갈과 스페인 국왕의 권한에 속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아시아 지역에서는 포르투갈 국왕의 허가 없이는
제아무리 교황청이라고 해도 새로 교구를 설립할 수 없고, 주교를 임명할 수도 없었다.
선교사를 선발하여 파견하는 것도 일일이 포르투갈 국왕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대신에 포르투갈 국왕은 아시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는 일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하지만 이 일은 숱한 폐단을 일으켰다.
선교사로 파견된 주교와 신부들이 선교활동보다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지키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게다가 예수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등 여러 수도회가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면서 서로 갈등을 빚는 일마저 벌어졌다.
『예수회 신부들의 여행기』, 로크만, 21.8×14cm, 1783, 서울역사박물관
신대륙과 아시아 포교의 선봉에 섰던
예수회 신부들의 보고 기록과 편지글 등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예수회 신부의 모습
예수회 신부들은 서구세계를 넘어 미지의 땅인 동양으로 앞 다투어 파견되었다.
그런 와중에 베트남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추방된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신부가 1649년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천주교가 아시아 지역에 뿌리를 내리려면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포르투갈 국왕이 파견한 주교의 관할권을 축소시키고,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이 직접 선발한 주교를 파견하여
선교사업을 관할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황청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드 로드 신부는 파리로 가서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포교성성은 1655년에 가서 드 로드 신부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1658년 프랑수아 팔뤼(1626~1684) 신부와
랑베르 드 라 모트(1624~1679) 신부를 교황 대리 감목으로 임명하여
오늘날의 베트남 지역인 코친차이나와 통킹으로 파견하였다.
이 두 사람을 설립자로 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파리외방전교회(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이다.
이 단체는 프랑스의 교구 사제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서 선교 지역으로 파견했는데,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지역 교회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1658년부터 시암, 베트남, 중국 등 주로 아시아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지역 주교들, 1920,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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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으로?
천주교의 특성상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사제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사제만이 각종 성사(聖事)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는 권한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북경 교구에 사제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가 조선으로 와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801년에 벌어진 신유박해 때 그는 순교하고 말았다.
그 뒤 조선의 신자들은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북경에 사제 파견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되었지만,
1824년 무렵에 보낸 사제 요청 서한이 북경을 거쳐서
마카오에 있던 포교성성 극동대표부에 전달되었다.
정하상(丁夏祥, 1795~1839)과 유진길(劉進吉, 1791~1839) 등이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서한을 받은 극동대표부의 움피에레스 신부는
한문을 라틴어로 번역한 다음 자신의 의견서를 첨부하여 로마로 보냈다.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은 이번 기회에 조선 천주교회를 북경 교구에서 독립시켜
별도의 선교회가 관할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로마에 있던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1765~1846) 추기경은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선 교회를 맡아줄 선교회를 물색했다.
당시 교황청의 해외 선교에 관한 방침을 가장 잘 따르던 곳은 파리외방전교회였다.
이에 카펠라리 추기경은 1827년 파리에 있는 외방전교회 본부로 서한을 보내 조선의 문제를 의논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새로운 선교 지역을 관할하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소속 주교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렇지만 속마음은 골치 아픈 일을 맡지 않으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왜냐하면 조선을 떠안게 되면
북경, 남경, 마카오 교구의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갈등을 빚게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속한 대로 소속 회원들에게 조선의 문제를 상의하는 회람 서한을 보냈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발행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발전』, 21.5×14cm, 1924
제목 그대로 한국 천주교회의 전교 상황을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삽화와 함께 기록한 책이다.
본부에서 보낸 서한을 받고 즉각 반응을 보인 것은
시암에서 활동하고 있던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였다.
그는 파리 본부에 있는 사람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개하면서
자신만이라도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사태는 급진전되었고,
1831년 카펠라리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 선출되자
로마에서 조선 대목구를 새로 설정하고
그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 자신은 조선으로 가기 위하여
중국 대륙을 종단하는 등 갖은 고생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입국하지 못하고
만주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대신 브뤼기에르 주교를 따라서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했던
모방(1803~1839) 신부와 샤스탕(1803~1839) 신부가 1836년과 1837년에
각각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1837년 말에는 두 번째 대목구장으로 앵베르(1796~1839) 주교가 입국했다.
이리하여 조선 천주교회는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하는 선교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지속적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펼쳐나갔다.
김대건 신부와 조선에서 활동했던 12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모습을
동판화로 새긴 것, 한국교회사연구소
중국 대륙을 종단해 조선으로 잠입하다
아시아로 떠나는 프랑스 선교사들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르 아브르 항구나 보르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항해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남쪽으로 한 바퀴 돌아서 인도양으로 나갔다.
또는 프랑스 남쪽의 마르세유 항구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지른 후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이르러 육로를 이용해서 수에즈까지 간 후
다시 배를 타고 홍해를 거쳐서 인도양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뒤에는 대부분 마르세유 항구에서 출발하여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후 아시아로 향하곤 했다.
인도양을 가로지른 배는 인도의 고아 항구에 잠시 정박한 다음에
인도 대륙을 남쪽으로 돌아서 스리랑카를 지났다.
거기서 조금만 더 동쪽으로 항해하면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에 있는
믈라카 해협을 통과하게 된다.
믈라카 해협 끝에 있는 싱가포르를 지난 배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중국 남쪽의 항구 도시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에는 포교성성 극동대표부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었다.
이곳에서 선교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시암, 베트남, 중국의 사천, 귀주, 운남 등 각자의 임지로 흩어졌다.
조선에 배속된 선교사들에게 조선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였다.
마카오를 떠나 중국 대륙을 종단하여 북상한 다음
북경과 만주를 거쳐서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었다.
초기에 입국한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은 모두 이 길을 이용했다.
하지만 최초의 조선인 사제 김대건 신부가 해로를 개척한 뒤에는
대부분 상해나 홍콩에서 출발하는 중국 어선을 타고 조선 연안까지 왔다.
백령도 부근의 무인도에 조선인 신자들이 배를 대고 기다리다가
선교사들을 태워서 조선에 상륙시켰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조선 관헌들의 눈을 피하여 몰래 입국했다.
한양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주교가 상주하던 비밀 거처에서
조선어를 배우기도 했고 경기도나 충청도의 한적한 시골로 가서
신자들만 모여 사는 마을에 한동안 머물렀다.
이들이 어느 정도 조선어에 익숙해져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또 신자들의 고백을 알아듣게 되면 본격적으로 사목활동을 하도록
주교가 선교사 개개인에게 지역을 할당해주었다.
이들의 주된 활동 무대는 한양과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서부 지역, 전라도와 경상도의 북부 지역 정도였다.
19세기 중엽 조선에 들어와서 천주교 선교활동에 종사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모두 합쳐
20명 남짓이었다.
이들은 평균 7년 정도 조선에 체류하면서 활동했다.
그 가운데 12명은 조선 관헌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고, 5명은 병으로 사망했다.
나머지 3명은 1866년 병인박해가 터졌을 때 중국으로 탈출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여정 지도
“임금은 게으르고 양반은 혹세무민한다”
선교사들은 파리 본부나 고향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써 보냈다.
그 속에는 조선의 산업과 정치, 법률제도와 가족제도,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생활 관습 등 온갖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의 생생한 현장을 담아냈기에
오늘날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귀중한 내용도 많이 실려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유럽인이었던 까닭에 편견에 얽매여
조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점도 많았다.
가령 당시 유럽 사람들은
대개 조선이나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사람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산업문명에 필수적인 철도나 기차도 갖추지 못했고,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기선도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게다가 대포나 총 등 전쟁하는 데 필요한 무기도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발달된 과학기술도 없고, 상품을 만드는 대규모 공장도 없다는 이유로
아시아 나라들을 문명화되지 못한 미개한 지역이라고 낮추보았다.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했던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조선에 왔던 프랑스 선교사들도 편견의 시각을 견지했다.
한발 더 나아가 선교사들이 조선의 정치 상황을 바라볼 때
조선의 임금들은 게으름뱅이에다 멍청하고 무능한 자들이라는 식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온갖 특권을 누리는 지배층인 양반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가혹한 세금을 매겨서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는데도
임금은 방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는 조선의 임금이나 양반을 좋게 보지 않았다.
아마 힘없는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면서 어렵게 사는 것을 곧잘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법률제도나 행정제도가 갖추어져 있다고는 하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은 보통의 조선 사람의 성격을 묘사할 때도
경박하고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으며, 까다롭고 탐욕스럽다는 말을 곧잘 했다.
한마디로 야만인 특유의 민족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유럽인으로서 비유럽 지방의 민족들을 폄하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거니와,
근엄한 선교사의 입장에서 조선인들의 생활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유럽적인 생활 방식과 천주교 신앙을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선입견이 들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조선에 들어와 활동했던 프랑스 신부들의 모습, 한국교회사연구소
조선에 들어와 활동했던 프랑스 신부들의 모습, 한국교회사연구소
서구의 선교사들 역시 조선을 보고 미개한 나라라는 인식을 떨치지 못했다.
특히 조선인들이 무속신앙을 믿는 것은 서구인이나 일제에 의해 많이 촬영되었는데,
그것은 곧 조선의 미개성을 입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 전통 의상을 하고 있는 양반들의 모습
선교사들이 보기에 조선의 양반들은 혹세무민한 존재들이었다.
유럽의 이기주의에 경각심을 준 조선의 가족애
한편 선교사들은 보통의 유럽인들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기도 했다.
서양의 상인이나 탐험가, 군인들은 조선에 대해 유럽에서 간행된 책에 실려 있는
내용만 알고 있거나, 잠시 조선을 들러서 겉으로 보이는 것만 구경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비해 선교사들의 처지는 사뭇 달랐다.
길게는 20년 넘게 조선에서 살면서 별별 광경을 다 목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사람의 생활에 관한 것도 무척 잘 알고 있었고, 또 조선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일이나 사회적인 일들도 비교적 소상하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 조선을 다녀간 서양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상세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인상 깊게 보았던 조선의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다블뤼(1818~1866) 주교의 기록을 읽어보면
선교사들이 사랑한 조선 사람들의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몇 가지만 추려서 이야기해보자. 먼저 그는 조선 사람들이 무척 따뜻한 가족애를 지녔다고 적었다.
조선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을 끔찍이 생각하며,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는 딸이든 아들이든 어떤 자식도 내버리지 않습니다.
대기근이 들 경우에 어떤 부모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여 자식을 내버리기도 한다.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약간이나마 여유가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들을 다시 데려오려고 합니다.
유럽에 비할 때 조선 사람들은 아이가 많은 것을 덜 짐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자연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조선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입니다.
가난하다고 자녀들을 내버리는 유럽 사람들은 창피해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외국인 신부들이 보기에 한국의 어머니들은 특별히 따뜻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자식사랑은 끔찍했다.
다블뤼 주교는 시골이나 작은 도시의 마을에서 마주친 조선 사람들에게서
가족이나 친척들과 매우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모습을 발견하고 감동하곤 했다.
우리가 볼 때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친척 관계는 솔직하며 형제애가 넘칩니다.
자주 서로를 찾고 또 만나면 기쁨과 행복으로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지요. 심지어 가족의 친구나 아버지의 친구도 동등하게 대합니다. 자주 서로를 찾아가 보고, 상대방의 주변 형편을 보살펴서 쌀쌀하게 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선 사람들은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유럽 사람들의 차갑고 부자연스러운 풍속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른지요!
다블뤼 주교는 또한 조선 사람들이 이웃끼리 서로 돕는 착한 마음씨를 지녔다고
편지에 적었다.
조선 사람들은 자선 행위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실천합니다.
적어도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면 거절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밥을 다시 하기도 합니다.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식사하다가
가난한 나그네가 지나가면 자기 밥을 나누어줍니다.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여 형제처럼 모든 것을 나눕니다. 는 사람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조선 사람들이 가진 덕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지어 조선 사람들의 공동체 생활에 무척 감동했고,
차갑게 메말라버린 유럽 사람들도 조선 사람들을 본받아야 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조선 사람들에게 서로 돕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주교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또 그만큼 우리 유럽 사람들이 지닌 근대적인 이기주의에 대해서 증오와 가증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이웃집에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을 때에
마치 자기 일처럼 가서 도와줍니다.
화재를 당한 집이 있으면 이웃들이 각자 조그마한 것이라고 조금씩 가져다주고,
또 집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공짜로 일을 해줍니다.
다블뤼 주교 외에도 많은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의 공동체 문화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유럽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약간 유보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들은 오랫동안 조선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같은 모양의 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겉으로 보면 알 수 없는 내적인 맥락도 잘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남의 신발을 신고 1킬로미터를 걸어보아야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개항 이전 조선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살았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