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타고 난 자리에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더니 어느 새 소슬바람이 불어온다.
소슬 소슬......
웬지 풀벌레 날개 부딪치는 소리 같고 입 안의 발음기관이 간지러운 소리다.
이름이 참 예쁘기도 한 소슬바람의 글자는 맑은 대쑥 '소'에 큰 거문고 '슬'자.
대쑥을 스치는 큰 거문고 소리같은 맑은 바람이라니!
소슬바람 불어오는 시월 열아흐레 아침, 교대 앞에서 큰 버스에 오를제
마음 속은 이미 맑은 대쑥향이 밴 거문소 소리가 났다.
다른 계절에 다른 풍경 보러 가는 것도 좋지만, 실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좋아서 모두들 싱글벙글...
2019년 가을 문학기행지는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하동 일대다.
최참판댁과 박경리 문학관, 드라마 '토지' 촬영터를 둘러 보고는 섬진강 송림공원 찍고,
북촌 이병주 문학관까지 간다니 오늘 제대로 문학의 향취에 젖겠다.
달리는 버스에서 우리의 회장님이 책장이 누런 토지 한 권을 내게 내밀었다.
"좀 있다가 여기 '풋사랑' 편을 좀 읽어줘요."
'달리는 버스에서 소설 <토지> 낭독이라, 햐, 이런 특이하고 지적인 단체가 있나.'
하필 내가 지목당했다는 마음보다 우리 단체의 수준에 기분이 삼삼.
오래전 개인 블로그에 써 놓은 <토지> 감상문도 생각나서 폰을 열어 찾아 놓았다.
평사리에 도착해 거대한 비석 앞에서 기념촬영부터.
자,자 여길 보세요! 찍는 사람도 분명히 넣어서 찍었습니당!
주차장에서 최참판댁과 박경리 문학관이 있는 곳까지의 길 가에는 수확한 농산물을 펼쳐 놓은
좌판과 여러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거장은 작품의 공간이나 고향을 이렇게 영원히 먹여살리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작가의 제삿날은 못 챙겨도 작품은 읽으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다들 주루룩 꿰고 계실지도......
와, 최서희와 길상이가 자기 이름을 걸고 천연염색업 사업을 하는구나.
내 친구 중엔 상호에 자기 이름을 넣은 가게는 무조건 믿는 친구가 있다.
칼국수 하나를 먹으러 가도 이름자 들어간 상호면 주저없이 결정한다.
"저기 가자. 자기 이름을 걸었잖아!"
용이의 운명적 사랑인 월선이도 이름을 걸고 주막집을 열었네.
소설 '토지'에서 용이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는 조준구에게 최치수가 평하는 부분이 있다.
"전장에서는 가장 먼저 달려나갈 것이고, 글을 했다면 시인이 되었을 것이며, 부모님 산소에
벌초할 때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다 눈물이 맺혀 있고,
여자를 보석같이 여기는 이 땅의 복된 농부요."
여여한 발걸음으로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서 남촌님 가라사대,
"보이차는 있지만 걸차는 안 보이네."
직수입한 뽀이차, 아니 보이차.
악양벌이 내려다 보이는 너른 마당에 커다란 나무가 서있고 솟을대문과 안채, 사랑채, 별당 등
공간배치를 적절히 한 건물은 연륜이 꽤 돼 보였다.
아이들 어릴적 왔을 땐 한창 조성중이어서 한옥 기둥과 서까래의 색깔이 생나무 색이었다.
이곳에서 촬영한 수많은 한국영화의 포스터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당연히 드라마 '토지'도 여기서 촬영했는데,역대 최서희와 길상역을 맡은 배우들에 눈길이 간다.
1979년에 한혜숙과 서인석, 1987년엔 최수지와 윤성원, 2004년엔 김현주와 유준상 배우였다.
한혜숙 서인석 때는 못 봤지만 1987년과 2004년 드라마 토지는 생생히 기억난다.
최서희 할머니인 카리스마 가득한 윤씨 부인역도 각각 반효정씨와 김미숙씨였는데,
반효정씨가 앞말의 어조를 낮춰 소리내는 경상도 말을 자연스레 잘 구사했다.
물드는 담쟁이와 마삭줄이 엉긴 담장너머를 훔쳐 보는 싸나이 모색이 어째 낯익는데요.^^
별당아씨 연못에 놀러온 여러 나무를 옷 색깔 고운 금붕어가 줄지어 반기고...
연못가에 눈매가 길상이처럼 순한 개 한 마리가 매여 있다.
"이름이 뭐니? 별당아씨 업고 달아난 구천이 못 본게냐?"
흠, 피사체가 담장 너머에...
남촌님의 피사체는 굴뚝 안에 있는 듯...
거장의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화장실 푯말 아래에 놓인 이 물건의 이름과 용도는 뭘까요?
네에, 삶에서 참 중요한 물건인데, 이름이 Star, '장군'입니다.
나무로 된 것도 있고 옹기로 된 것도 있는데 용도는 똥을 퍼서 담아 옮기는 물건이예요.
똥장군이라고 불러요.
김훈장 댁 지나 문학관 마당에서 눈길을 멀리 평사리를 둘러싼 산세와
눈아래 악양벌에 두다가 가을볕 받으며 사진찍기 놀이 합니다.
지금 현재 아홉명입니다.(박경리선생님이 본인은 빼 달라시네요)
누구누구가 인당수에 뛰어드는 심청이마냥 뛰어들어 11명이네요.
앗 내 빼고 찍다니! 한 분이 슬며시 발을 들여 12명.
나도 나도! 코트자락 휘날리며 날아든 한 사람.
그래서 모두 몇 명 됐냐고요?
찍기 놀이는 계속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툇마루엔 도란도란 졍겨운 이야기가 무르익고...
선생, 가을볕에 헤어칼라가 짱 멋있소!
어허, 내 멋짐의 요소는 머리카락뿐이겠소.^^
잠자리 날개 같은 가을볕이 내려앉은 문학관 뜰에서 노닐다가
어둑한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 거장의 육성을 들었다.
"지는 모르겠습니다. 책이 나오면 쓰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그런지 두번 다시 읽고 싶지 않아요.
토지는 말할 것도 없지요."
"글을 쓸 때 언어가 달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성격상 뒤를 돌아보는 성격은 아니에요. 기자들이나 여러 곳에서 불러도 잘 안 나갔는데.
내가 당신네들 오라는 곳마다 가고 모이는데 다 가면 어떻게 토지를 썼겠느냐고 하니까
끄덕끄덕해요."
글쓰기란 무엇이냐고...
삶 속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이, 결코 구현되지 않는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에 ...씁니다.
...쓰기는 삶에의 연민입니다.
두 분의 관계는 신뢰와 사랑. 박완서씨는 살아생전 음식을 싸서 원주의 박경리 선생을 찾았고,
박경리 선생님 운명 땐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통영 박경리 문학관에 갔을 때 빗속을 걸어 문학관 뒷산 묘소까지 올라갔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묘지 앞 제단에 누군가가 제물처럼 올려놓은 솔방을 몇 개가 인상적이었다.
문학관 마당 돌에 새겨진 한국 문학의 거대한 마침표인 소설 <토지>의 마지막 부분.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문학관 둘러 보고 나온 마당엔 아는 얼굴 하나 안 보였다.
다들 점심 먹으러 가셨나본데 어느 식당이지?
세 사람에게 차레로 문자를 보냈지만 모두 노답.
혼자 밥 먹게 생겼다며 뭐 먹을까 기웃대며 한참 내려오는데
어, 저 분들이 낯이 익네!
재첩국과 동동주, 해물파전, 메밀전병, 도토리 묵무침, 수수부꾸미 등 왕의 밥상을 받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건 영락없이 결혼식장 입장하는 신부와 아버지 포스.
환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인 섬진강을 옆구리에 끼고 잠시 달리다가
도착한 곳은 섬진강변 송림공원.
강변 평지에 용틀임으로 힘차게 생긴 소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나무 사이로 반짝이며 흐르는 아름다운 강물과 하얀 모래가 보였다.
특히 이 모래 언덕에 혹해서 올라갔는데 와, 이런 데는 완전 처음!
플라스틱 판때기를 타고 모래언덕을 미끄러져내리는 아이들을 보며
충동감이 폭발. 아래까지 미끄러질 때 재미와 스릴에 심장이 쫄깃쫄깃.
오늘은 이쯤만 타고 집에 갔다가 꼭 다시 타러 오기로 결심했다.
정말정말 힘들게 지은 절 이름은 뭘까요? 정답, 우여곡절.
똥의 성은 뭘까요? 응가.
오끼나와에 여행가면 살이 쪄서 오게 됩니다. 이유는? 다섯끼가 나와서.
송림 숲 정자에서 남촌 부회장님이 내는 재밌는 넌센스 퀴즈 맞치며 상품 타는 시간.
전 물방울 우산 탔어요!
다음 행선지는 한국의 발자크가 되고자 한 하동이 고향인 나림 이병주문학관.
언론인에서 소설가로 변했으며 금기시된 빨치산 이야기인 소설<지리산>이 대표작.
박정희 군사정권의 피해자로 옥고를 치뤘는데 감옥에 있을 때 결심했다고 한다.
절대로 남의 눈치 안 보겠다고, 다시는 감옥에 가지 않겠다고.
나폴레옹 앞에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 문학관을 나와 문학기행의 마지막 시간은 가을꽃 속에서 보냈다.
가을꽃은 빛나는 열매의 시간을 예비하는 존재.
거장들의 숨결을 느껴본 특별한 문학기행. 우리도 거장처럼 쓸까요?^^
함께 해서 행복한 가을날이었습니다.
첫댓글 문학기행의 백미는
강경숙작가님 글을 읽으며
마무리하는 것.
어제는 풍경과 사람에 취한 하루.
어김없이 해장 기사를 근사하게
올리셨어요.^^
얼큰하고 맛깔납니다.
가을 문학 기행의 맛과 정취를 오롯이 맛봅니다. 감사합니다.
문학기행을 간 듯 착각하게 만드는 능력자십니다.
사진과 글 정말 감사합니다.
늘해 선생님 덕분에 재미나게 확실히 구경했네요.
감사합니다.
뵙고 싶은 선생님들 너무 많아요. 보고싶어용.
밑지는 장사 하면 안 되는 법! 남는 장사는 요렇듯 하루를 담아 갈무리 해야 추억으로 잘 익어 훗날에 즐거움을 줄겁니다
글을 읽으니 저도 문학여행 함께 다녀온 것 같아요. 생생한 문학기행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