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강론>(2024. 10. 29. 화)(루카 13,18-21)
복음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바로 ‘내가’ 겨자씨이고 누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18-21)”
1) ‘겨자씨의 비유’에서 연상되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보잘것없는 떠돌이 유목민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또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모든 신앙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가 ‘큰 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2) 신약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연상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하나니아스’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5-16)”
이 말씀에서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를
“내가 선택한 겨자씨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열두 사도에 속한 제자도 아니고,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이 된 일은, 글자 그대로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란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ㄱ).”
이 말을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뽑으셨고, 그의 영혼 안에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를
심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씨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한 때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인데, 그때까지 바오로 사도 자신도 자기
안에 무슨 씨가 심어져서 자라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그의 열성을 생각하면, 그는 이미 사도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기 전에 이미 그 안에 겨자씨를
심어 놓으셨고, 아브라함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던 때에도
하느님을 찾으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사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겨자씨로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겨자씨로 뽑힌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바오로 사도처럼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를 심으신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종교와 신앙을 갖고 싶다고 소망할 때,
또는 신앙인이 되기를 희망할 때, 그때가 바로
숨어 있던 겨자씨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할 때입니다.
우리는 “내가 바로 겨자씨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중에 어떤 나무로 자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큰 나무’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여정의 끝은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신 안에 심어진 겨자씨를 잘 가꾸는 일이고,
자신이 받은 겨자씨라는 사명을 잘 수행하는 일입니다.
4) ‘누룩의 비유’에서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라는 말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크게 감화시켰고, 변화시켰음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선한 누룩’의 영향력입니다.
<우리는 ‘악한 누룩’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 16,6).”
만일에 교회가, 또는 신앙인이 세상을 복음화 하기는커녕
세속화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선한 누룩’의 힘을 버리고,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버리고 멸망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출처]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첫댓글 ‘내가’ 겨자씨이고 누룩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