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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3대 이승만 대통령의 아내로,
첫 번째 영부인 되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1900년 6월 15일 사업가인 아버지 ‘루돌프 도너’ 공과 어머니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여사 사이에서 세 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프란체스카 어려서는 의사를 희망했으나 사업을 계승할 아들이 없어
대신 막내딸을 트레이닝을 시켜야 하겠다는 판단 하에 상업전문학교에 보내고
또한 영어 습득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보냈다.
중고 시절 수학 성적이 탁월하여 ‘수학의 진주’라는 애칭을 얻었고,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스코틀랜드에 3년간 영어 연수를 하여
영어 통역사 자격을 취득하였으며, 모국어인 독어와 불어에도 능통했다.
부친의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하기에 손색이 없었던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는 결혼하기로 약조되었던 남성과 파혼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던 중 1933년 2월 모친과 함께 파리를 경유하는
스위스 여행길에 레만 호반의 뤼씨 호텔에 투숙한다.
당시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호텔 식당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 빈자리에 이승만 박사가 동석한다.
다음날 프란체스카는 한국의 독립을 주창하는 이승만의 전면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보고 친절히도 스크랩해서 전달하고 또 다른 신문의 기사 역시 그렇게 하자
이승만은 답례의 차 대접을 한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제네바의 이승만과 서신 연락을 유지했다.
7월 초에는 소련 입국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온 이승만과 재회한다.
프란체스카는 이 독립투사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제공하였고
마침내 1년 3개월이 경과된 가운데
프란체스카 가족의 반대와 한국인 동지들과 동포들의 반발 하에
1934년 10월 8일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34살, 59살로 25년의 차이였다.
결혼반지도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준비했다.
이승만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바 있으며,
먼저 결혼한 첫 부인 사이에 아들도 한 명 있었다.
이승만은 1933년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날 때까지 30년을 독신으로 보낸 것이다.
▲ 프란체스카의 이미지는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
남편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충만” 그 자체 (포토 대통령 기록관)
이승만 박사 내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의 본산을 미국의 워싱턴 DC로 옮겼다.
1941년에 이승만 박사는 영문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발간하여
미국 국무부와 의회에 태평양 전쟁 발발의 섬뜩한 경고장을 주었다.
거듭되는 퇴고의 타이핑에 프란체스카 여사의 손끝은 무르고 터졌다.
고진감래일까!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독립운동 자금의 확보 역시 이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한편, 프란체스카 여사는 미모와 능란한 사교로 워싱턴의
저명인사의 부인들과도 친교를 맺는 등 이승만 박사에 든든한 후원군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이미지는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
남편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충만” 그 자체이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맛보던 날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 언론들과 인터뷰에서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이 날을 맞게 했다.” 하며
아내의 고마움을 극진히 표현하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해방 당시는 전문 영문 비서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의 영문 구술을 타자기로 외교 문서를 도맡는 일이 많았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30일 국회의장에 동년 8월에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 후에도 美 군정으로부터 제반 권한을 전반적으로
이양 받는 과정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타이핑을 도맡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6·25 전쟁 전후로 능통한 영어 구사력으로
세계 각지에 구호를 요청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26 하야 성명을 내고
거주지인 4월 28일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한 프렌체스카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발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남편을 보살피고 방문객을 맞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5년 6월 말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에 임종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탈진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 90세가 되던 1965년 별세할 때에 자식도 없는데다
미망인이 된 그녀를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며칠 후 프란체스카 여사는 모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
여동생과 조카의 보살핌과 한국 유양수 대사 내외의 배려 속에 지냈다.
1965년에서 1970년까지 비엔나에서 휴식기를 보내고 난 후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직 대통령의 미망인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법령이 제정되어
1970년 5월 16일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70회 생일을 맞이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된
이인수 씨와 부인인 조혜자 씨의 조력 하에 운명한 93세가 되던 1992년까지
꼬박 만 22년간을 이화장에서 생활했다.
쪽진 머리와 한복을 입고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이었던 프란체스카 여사!
마지막 귀착지 이화장의 22년간은 행복한 할머니로서의 단란한 생활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 19일 이화장에서 향년 93세의 일기로 가족의 기도 속에 영면하고
사랑하는 남편 곁에 묻혔다.
● ‘더글러스 맥아더’와 6.25 한국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의 기선을 제압하고 한반도의 6.25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한반도의 적화 통일을 무산시키고 남북통일의 완성을 위해
중국에 원자탄을 투하하려 했던 전설로 남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유대인 출신이다.
▲ 모든 이들이 맥아더의 전략적 독창성과 우수성,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를 쟁취하는 백전백승의 출중함을 이구동성으로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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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프란체스카 여사 맥아더유대인 아이젠 버그
<스페셜> 獨立과 6.25전쟁, 경제개발 幕前幕後 '유대인 3인방’
프렌체스카, ‘獨立 전후, 6.25전쟁’ 헌신적 內助 영부인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 성공 北 적화 야욕 좌절
‘아이젠버그’, 박정희 경제발전 대초석 쌓은 조력자
2013.1.13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네트워크의 총아인 유대인이 한국인과 접촉한 사례와 역사는
매우 짧다는 것이 중평이다.
바깥세상과는 오랫동안 국제화의 변방에서 머물렀던 한국인이 유대인과 교류할 기회는
매우 일천한 것이다.
오랜 동안 국제 사회에서 인지도가 부재했던
한국에 대해 유대인이 관심을 가졌을 리는 희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독립과 6.25 동란과 이어 경제개발에 있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삼인의 행보에 새롭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손꼽을 수이지만 이들이 미친 공헌과 여파는
한국의 소생과 부흥 계기의 초석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는 평가에 주목할 일이다.
여기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렌체스카 여사와 6.25 전쟁에서 북한의 적화야욕을 영원히 좌절시킨 맥아더 장군, 戰後 경제개발에 지대한 초석을 놓았던 사울 아이젠버그! 이들 3인은 모두가 유대인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이 된 오스트리아 출신 프렌체스카
대한민국의 제1~3대 이승만 대통령의 아내로,
첫 번째 영부인 되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1900년 6월 15일 사업가인 아버지
‘루돌프 도너’ 공과 어머니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여사 사이에서
세 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프란체스카 어려서는 의사를 희망했으나 사업을 계승할 아들이 없어
대신 막내딸을 트레이닝을 시켜야 하겠다는 판단 하에 상업전문학교에 보내고
또한 영어 습득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보냈다.
중고 시절 수학 성적이 탁월하여 ‘수학의 진주’라는 애칭을 얻었고,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스코틀랜드에 3년간 영어 연수를 하여
영어 통역사 자격을 취득하였으며, 모국어인 독어와 불어에도 능통했다.
부친의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하기에 손색이 없었던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는 결혼하기로 약조되었던 남성과 파혼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던 중 1933년 2월 모친과 함께 파리를 경유하는 스위스 여행길에 레만 호반의 뤼씨 호텔에 투숙한다. 당시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호텔 식당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 빈자리에 이승만 박사가 동석한다.
다음날 프란체스카는 한국의 독립을 주창하는 이승만의 전면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보고 친절히도 스크랩해서 전달하고 또 다른 신문의 기사 역시 그렇게 하자
이승만은 답례의 차 대접을 한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제네바의 이승만과 서신 연락을 유지했다.
7월 초에는 소련 입국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온 이승만과 재회한다.
프란체스카는 이 독립투사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제공하였고 마침내 1년 3개월이 경과된 가운데 프란체스카 가족의 반대와 한국인 동지들과 동포들의 반발 하에 1934년 10월 8일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34살, 59살로 25년의 차이였다. 결혼반지도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준비했다.
이승만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바 있으며,
먼저 결혼한 첫 부인 사이에 아들도 한 명 있었다.
이승만은 1933년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날 때까지 30년을 독신으로 보낸 것이다.
▲ 프란체스카의 이미지는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 남편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충만”
그 자체 (포토 대통령 기록관)
이승만 박사 내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의 본산을
미국의 워싱턴 DC로 옮겼다.
1941년에 이승만 박사는 영문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발간하여
미국 국무부와 의회에 태평양 전쟁 발발의 섬뜩한 경고장을 주었다.
거듭되는 퇴고의 타이핑에 프란체스카 여사의 손끝은 무르고 터졌다.
고진감래일까!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독립운동 자금의 확보 역시 이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한편, 프란체스카 여사는 미모와 능란한 사교로 워싱턴의 저명인사의 부인들과도 친교를 맺는 등 이승만 박사에 든든한 후원군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이미지는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 남편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충만”
그 자체이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맛보던 날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 언론들과 인터뷰에서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이 날을 맞게 했다.”
하며 아내의 고마움을 극진히 표현하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해방 당시는 전문 영문 비서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의 영문 구술을 타자기로 외교 문서를 도맡는 일이 많았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30일 국회의장에 동년 8월에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 후에도 美 군정으로부터 제반 권한을 전반적으로 이양 받는 과정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타이핑을 도맡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6·25 전쟁 전후로
능통한 영어 구사력으로 세계 각지에 구호를 요청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26 하야 성명을 내고 거주지인 4월 28일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한 프렌체스카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발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남편을 보살피고 방문객을 맞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5년 6월 말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 1
965년 7월 19일 0시 35분에 임종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탈진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 90세가 되던 1965년 별세할 때에 자식도 없는데다 미망인이 된 그녀를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며칠 후 프란체스카 여사는 모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 여동생과 조카의 보살핌과
한국 유양수 대사 내외의 배려 속에 지냈다.
1965년에서 1970년까지 비엔나에서 휴식기를 보내고 난 후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직 대통령의 미망인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법령이 제정되어
1970년 5월 16일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70회 생일을 맞이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된 이인수 씨와 부인인 조혜자 씨의
조력 하에 운명한 93세가 되던 1992년까지 꼬박 만 22년간을 이화장에서 생활했다.
쪽진 머리와 한복을 입고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이었던 프란체스카 여사! 마지막 귀착지 이화장의 22년간은 행복한 할머니로서의 단란한 생활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 19일 이화장에서 향년 93세의 일기로 가족의 기도 속에 영면하고 사랑하는 남편 곁에 묻혔다.
● ‘더글러스 맥아더’와 6.25 한국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의 기선을 제압하고 한반도의 6.25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한반도의 적화 통일을 무산시키고 남북통일의 완성을 위해
중국에 원자탄을 투하하려 했던 전설로 남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유대인 출신이다.
▲ 모든 이들이 맥아더의 전략적 독창성과 우수성,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를 쟁취하는 백전백승의 출중함을 이구동성으로 칭송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맥아더를 한국전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의 인기는 본국은 물론 한국과 극동지역에서 하늘 높이 치솟았다.
출중한 능력과 준수한 외모, 군인 명문가 출신의 맥아더 장군은 항상 남보다 탁월했기에
부러울 게 없었다. 모든 이들이 그의 전략적 독창성과 우수성,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를 쟁취하는 백전백승의 출중함을 이구동성으로 칭송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맥아더는 눈부신 활동과 혁혁한 무공을 인정받아 1918년 38세에 준장으로 진급한다. 맥아더는 39세인 1919년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역대 가장 젊은 교장이 되었다. 전임자는 71세였다. 맥아더 교장은 사관학교 행정과 교과과목을 현대화했고 당시 정해진 교과목은 수십 년간 요지부동이었다.
맥아더는 1922년 잠시 필리핀에 부임했다가 1930년 대장으로 승진,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올랐다. 1935년 다시 필리핀에 부임해 독립에 앞서 필리핀 군대를 조직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37년 12월 31일 전역했다.
그러나 미국 전쟁성(戰爭省, 오늘날 국방부)은 일본의 연이은 아시아 침략과 대미 침략전에 대한 우려 하에 1941년 7월 26일 맥아더를 다시 현역으로 재소집 했다. 극동 미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맥아더에게 부여된 책무는 필리핀의 일본군 침공에 대비하여 이 지역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에 참석한 미국 맥아더 장군(왼쪽)과 이승만 초대 대통령
맥아더 장군은 1942년 초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서
1945년 필리핀의 수복과 일본이 무조건적 항복할 때까지 대일 작전을 총지휘했다.
맥아더는 65세 때인 1945년 9월 2일 도쿄만(灣)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군의 백기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6년간
일본의 전후(戰後) 복구와 민주헌정 수립을 전폭 지원했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이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맥아더는 우선 전투부대(스미스 대대)를 일본에서 한국전선에 급파했고,
1950년 7월 8일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3만 명의 북한 보병부대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제 북한군은 낙동강 지역까지 밀고 내려와 한국의 마지막 교두보를 위협했다. 천우신조이었을까! 그해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대한민국을 구출했다.
인천상륙작전 구상은 맥아더에게 섬광처럼 스쳐갔고, 2개월 반 동안 참모들과 수십 차례 토론 끝에 마침내 실행 작전으로 결론 났다. 최종 작전 안은 8월 23일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서 로튼 콜린스 합참의장·해군작전처장 포레스트 셔먼 제독 등 고위 참모들과 장시간 격론 끝에 매듭지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최고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지도력, 악에 대한 정의감이 어우러진 찬란한 승리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시작되었고 맥아더는 최소의 사상자로 승리했다. 뒤이어 계속된 수도
서울 탈환 작전도 성공,
한국군은 그해 9월 28일 중앙청 꼭대기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꽂았다.
맥아더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로…유엔군은 대한민국 고도(古都) 서울을 공산 전제정치로부터 해방함으로써 서울 시민들은 불가침의 개인 자유와 존엄성을 으뜸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변함없이 누릴 기회를 회복하게 되었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맥아더 진정성은 그의 최고통치권자에 의해 지지받지 못했다.
38선 이북으로 진격한 국군과 유엔군이 그해 10월 완전 승리를 앞두고 돌연 중공군 개입이라는 복병을 만난 것이다. 압록강까지 진군한 국군은 통일을 목전에 두고 휴전으로 타협해야 했다. 맥아더는 한국전 최종 승리의 완결을 위해 중공 폭격 등 확전론을 주장했다가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유엔군 사령관에서 전격 해임되었다.
이후 그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한 선거전에 뛰어 들었으나
자금부족과 주류언론의 외면으로 대권 도전은 초라하게 끝이 났다.
맥아더 회고록에는 의미심장한 두 개의 문장이 나온다. "나는 1931년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나는 1948년 프리메이슨의 가장 높은 계급에 올랐다." 왜 가입하였는지, 무슨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1880년 1월 26일 미국 아칸소에서 태어난 맥아더는 1964년 4월 5일 워싱턴 DC에서 타계했으며,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 전시 중 이승만과 맥아더!
한국의 초대 영부인이 유대인 출신인 덕분에 역시 유대인 맥아더는 한국을 힘껏 도왔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이스라엘은 약 17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원조했다.
실제 6·25 전쟁 당시 미군이나 영국군 등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유대인은 4천여 명에 달한다.
한국전에 참전한 유대계 미군들은 병영 내에
간이 시나고그(Synagogue, 유대교 회당)를 설치했다.
차임 포톡이란 군종 랍비가 유대교 예배를 집전하였는데, 포톡은 戰後 뉴욕에 돌아가 철학가와 문인으로 명성을 구가하였는데 2002년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렇게 잊지 않고 우리를 찾아주니 정말 고맙습니다.” 주 이스라엘 대사관이 6·25 전쟁에 참전한 유대인 참전용사들에게 감사 메달을 수여하는 활동을 벌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대사관 측이 유대인 참전 용사에게 메달을 수여한 것은 지난 2009년부터다.
노르망디 미군 묘지에서
우연히 유대인 묘비를 발견한 마영삼 주 이스라엘 대사가 6·25 전쟁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참전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 계기가 됐다.
이스라엘 영자신문 예루살렘 포스트에 관련 기사를 소개하고 라디오 방송국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출연해 참전용사들의 소재를 수소문했다.
그 결과 2009년 3명, 2010년 4명, 2011년 9명의 참전용사를 찾아냈다.
대사관 측은 매년 이들을 대사관저로 초청해 국가보훈처가 수여하는 평화의 사도 메달을 전달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1962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64년에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개설된다.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키부츠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모델이 됐다.
이스라엘공관은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박정희 정부가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고 아랍세계와 가까워지면서 1978년 2월 철수했다가 1992년 복귀했다.
● 유대인 거상 ‘사울 아이젠버그’
1950~1970년대 한국경제 부흥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는 유대인 거상(巨商) ‘사울 아이젠버그’(Saul Eisenberg, 1921~1997년)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 자유당 시절부터 제3공화국 말기까지 약 4반세기 동안 한국의 차관 도입 중개에 깊이 간여한 독일·스위스계 유대인 사울 아이젠버그!
그는 한국의 독립 이후 우리와 인연을 맺은 최초의 유대인으로서 한국이 무척 힘들었던 시기에 수호천사로서 출현했다. 1921년 독일 뮌헨 출생인 아이젠버그! 그의 선조는 오늘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양국에 걸친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이자 유대인 밀집 지역이었던 ‘갈리치아’ 출신이다.
▲ 1947년 상하이의 유대인 집단 거주지역인 게토
1939년이 되자 아이젠버그의 가족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직감하고 독일을 떠나 스위스와 네덜란드를 거쳐 중국 상하이로 갔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였던 상하이엔 유럽 각국에서 피해온 약 3만 명의 유대인들이 게토(집단 거주지)를 형성했다. 같은 시기 만주의 ‘하르빈’에도 나치를 탄압과 살육을 피해 건너온 유럽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있었다.
1945년엔 미군정 치하에 있던 일본으로 건너가 미군을 상대로 생활용품과 고철을 판매했다. 일본의 혼혈 여성과 결혼한 아이젠버그는 도쿄에 거점을 두고 한국과 태국 등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전 정전 무렵 한국에 진출했다. 자유당 정권 시절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 오퍼상을 차리고 철강과 섬유, 목재 등 수입품 중개업을 했다.
유럽과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대형 사업을 벌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아이젠버그는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당시인 영부인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당시 오스트리아 여권을 소지했던 아이젠버그의 한국 진출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스라엘과 오스트리아 이중 국적자인 아이젠버그는 같은 나라 출신인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막역한 사이로 발전하여 경무대를 수시로 방문해 이승만을 자주 만났다는 것이다.
아이젠버그는 이승만이 하야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1961년부터 한국에서 본격 사업을 시작했다. 5·16 직후 미국의 무상 원조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서 당시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차관을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아이젠버그가 처음으로 서독 차관 도입을 중계한 것은 1961년 가을이었다.
그가 주선한 차관은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재원에 있어 가뭄의 단비였다. 서독과의 끈끈한 관계는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하는 우호 관계로 급발전 하기에 이른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의 주요 사업에 깊숙이 관여했다.
1959년에 도입된 서독 지멘스社의 전화교환기도 아이젠버그가 중계한 것이었다.
그는 시멘트 공장, 발전소, 원자로 도입 등 초대형 사업에 외자 도입을 주선했다.
대부분 정부와 기업, 은행과 건설회사 등을 일괄 아우르는 턴키 방식이었다.
영월화력 2호기, 부산화력 3·4호기, 영남화력 1·2호기, 인천 화전, 월성 원전 3호기,
동해화력 1·2·3호기, 쌍용․고려․동양․한일 시멘트, 일신제강, 유니온 셀로판, 피아트 자동차, 석탄공사의 채탄시설 현대화, 중앙선 전철화, 포항제철 증설 등등. 그의 성과는 한국기간산업의 총람으로 간주될 정도라는 것이 관련 연구가들의 평가이다.
특히 1973년 한국원전 3호기인 캐나다 원자로의 도입 땐 유럽 30개 은행의 차관단 컨소시엄을 형성하는 비상한 수완을 발휘했다.
앞서 밝힌바, 아이젠버그는 오스트리아와 이스라엘의 2중 국적 소지자였다. 1949년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한 아이젠버그는 1968년 텔아비브에 본사를 둔 이스라엘코퍼레이션(IC)이란 다국적 기업을 설립했다. 핵심 업종은 무기·에너지·해운업이다.
그는 현재에도 세계 각국의 경호기관과 특공대가 애용하는 이스라엘제 기관총 우지(Uzi)를 90여 개국에 전파했다. 또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협력하에 캄보디아와 중국에도 이스라엘제 무기를 밀매했다. 비정하게도 이란·이라크 전쟁 땐 양측에 무기를 팔았다.
▲ 세계 각국의 경호기관과 특공대가 애용하는 이스라엘제 기관총 우지(Uzi)
아이젠버그는 1970년대 말 월남 패망 후 공산 베트남에 억류됐던 이대용 공사 석방을 위해 막후에서 움직였으며, 중국-이스라엘 간 관계 개선 교섭에도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이젠버그는 1997년 중국 베이징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아이젠버그는 100억 달러 대의 재산과 함께 보잉 727 자가용 비행기와 세계 7개 도시에 저택을 소유한 대부호였다.
[출처] 프렌체스카, 맥아더, 아이젠버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