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삼(麻) 짐을 허리가 부러지게 잔뜩지고 험한 산길을 걸어가던 중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가까이 가보니 금이었다. 덩어리가 무척 커서 값어치가 어마어마할 듯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순간 고민이 생겼다. 삼 짐을 지고 가자니 금덩이를 버려야 하고 금덩이를 지고 가자니 지금까지 힘들게 지고 온 삼 짐을 버려야 했다. 그는 어떻게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래 금덩이도 중하지만 몇 천리를 지고 온 전공이 아까워서라도 삼을 포기할 순 없지.'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진짜 보배를 만났으면 아무리 공들여 얻은 것이라도 가짜는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작은 집착을 벗어던지지 못해 귀한 보물을 얻지 못한 것이다. 중생의 인생살이가 이와 같다.. 참선에서도 법의 큰 보배를 얻으려면 지금까지 짊어지고 온 알음알이, 선입지견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깨달음과 알음알이는 함께 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선 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이 말의 뜻은 종전 악지견을 모두 버리고 순직한 마음으로 법문을 받아들이고 오직 실답게 참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참선 법문에 비하면 모든 교리는 삼 짐에 불과하고 참선은 금덩이와 같은 것임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인생의 가장 귀한 것은 정법을 만나는 일이다.. 정법을 만았으면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금생에 해탈문중 큰 보배를 꼭 붙잡아야 한다..
*참선, 마음공부의 핵심
선이란 인도 고대 말인 범어에서 따온 말로, '생각하여 닦는다.' 또는 '고요히 생각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런 공부는 불교인만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편안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선은 좀 더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고요히 생각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닦느냐에 특징이 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분류하면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緣廬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 이다. 육단심은 우리의 육체적 생각에서 우러나는 마음이고, 연려심은 보고 듣는 데서 분별하여 내는 마음이고, 집기심은 망상을 내는 깊은 속마음이다. 견실심은 본성으로 이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자리다. 참선은 부처님 마음자리인 견실심을 보는 공부이며, 이것을 쓰는 것이 도다. 부처님의 교법도 분명 선의 경지를 깨우쳐 주려는데 근본이 있는 것이니, 부처님의 8만 4천 법문과 교리는 부처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한다. 선이 추구하는 부처님 마음자리를 깨치면 생사가 없고 일체에 뛰어난 대해탈인이 되며,완전한 지혜와 덕성을 갖춘 큰 성인이라고 일컫게 된다. 우주 만유의 근원적 실상 진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당시에 선법은 어떻게 깨달아 들어갔을까? 한 외도가 부처님께 물었다. "말이 있는 세간법도 묻지 않고, 말이 이를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시오" 이때 부처님이 잠잠히 있었다. 이에 외도가 일어나 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돌아갔다. "대자대비하신 세존께서 저의 미혹한 마음을 열어 주시어 저로 하여금 도에 들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처님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난존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부처님은 한 말씀도 안 하셨는데 도대체 무엇을 알고,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가.. 이를 궁금해하던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한 말씀도 안 하셨는데 지금 외도는 알아들었다고 하니, 도대체 무엇을 알아들었다는 것입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하루에 천리를 가는 준마는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바람처럼 뛰어가지만, 둔한 말은 궁둥이에 피가 나도록 때려도 가지 않느니라." 영리한 사람은 말로 이르기 전에 다 알아차린다는 말씀으로 외도를 빗댄 말이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에는 수행인이 근기수승해서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차렸다. 원래 도는 분별이 붙으면 외도라 하고, 분멸심이 끊어질 때 비로소도에 든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항상 살아 있는 법을 들려 주셨으나 이는 눈 밝은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여러 말을 하게 되고 여러 방편을 쓰게 된다. 선의 여러 가지 방법은 후대에 와서 발달하게 된 것이다. 선은 근본 자성을 요달하여 생사를 끊는다. 우리는 아무리 힘이 있고, 건강하고 권세가 막강해도 언젠가는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음이 나고, 머물고, 변하고,없어지는 번뇌 망상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생로병사도 생기는 것이다...선은 마음속의 생멸을 없애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하지만 마음의 생멸을 잡아 없애려 하면 더 일어난다. 따라서 이때는 '나라는 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고 잠잠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나'라는 놈이 없는 줄을 바로 알게 된다. 그때에만 생멸상이 사라지게 된다.
*근기에 따라 생사를 초월하는 방편들
불교에는 구방심하는 방법론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다. 거기다가 상중하의 근기에 따라 각자에 맞는 방편을 사용할 수 있다. 상근기를 위해서는 '참선법'있다. 참선이란 교리, 언론, 사량 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조사의 말씀을 참구하는 것이다. 이런 조사의 말씀으로 1천7백 개의 대표적인 공안이있다. 공안에 답하는 것은 예컨대 "소금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싱겁지 않은 것이다" 라든가 "짜다" 라고 답하지 않고 직접 소금을 맛보아 그 맛을 스스로 알게 하는 방법이다. 중근기 수행법에는 '관법'이 있다. 팔만대장경 교리는 모두 차전 아니면 표전으로 되어있다. 차전은 부정하는 말로 예를 들면 소금을 물을 때 "싱겁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한 것과 같고,표전은 긍정한 말로 소금을 물을 때 "짜다"고 대답한 것과 같다. <원각경>에는 이관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시 정관(靜觀),환관(幻觀),적관(寂觀) 으로 분류되어있다. 천태종에서는 이를공(空),가(假),중(中), 3관 이라고 한다. 먼저 정관은 철저하게 주관적인 관점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것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그것을 염념히 살펴서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가 본래 없는 것임을 확연히 통찰하여 도에 이르는 방법니다. 두 번째 환관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철저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행동할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실상이라고 보지 않고 환 또는 허상, 즉 꿈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삼라만상을 꿈으로 보면 집착이 없어진다. 우리가 매순간 변화하는 현상적 꿈인 세계를 실상 실재하는 것으로 보는 데서 집착이 생기고 고통이 생긴다. 이러한 수행법을 통해 도에 이르는 것을 환관이라고 한다. 세 번째는 적관이다. 적관은 주관과 객관을 모두 수용한 공부법이다. 안으로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봐도 일어나는 곳이 없고, 밖으로 우주 삼라만상을 봐도 삼라만상이 꿈 같은 것이어서 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궁극에는 주관과 객관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 적관 수행법이다. 이렇게 교리적으로 정.환.적.삼관의 공부법은 중근기의 방편이다. 하근기가 도에 이르는 방법으로는 염불문 혹은 비밀문(다라니,진언)이 있다. 이것은 무슨 생각이 나든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열심히 진언을 외우거나 관세음보살,석가모니불,아미타불등 부처님의 명호를 외워 도에 들어가는 방밥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도에 들어 갈 수 있다. 예컨데 이 세계가 고해라면 일체중생이 모두 고해에서 헤매는데 부처님의 대자비로 고래잡이 그물로 상근을 명태,대구잡이 그물로는 중근을, 새우나 멸치잡이 그물로는 하근을 남기지 않고 모조리 고해에서 건져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시대로 부터 1천년이 지나자 사람들 근기가 약해졌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분별심과 나쁜 지견을 일으키므로, 깨달아 들어가는 법에도 여러 방법이 더해졌다. 참선법이 가장 체계화.조직화 된 것은 중국 당나라 때 대해 스님 생전으로 볼 수 있다. 대혜스님은 참선의 가장 착실한 방법으로 화두를 보라고 가르쳤다. 화두는온갖 분별과 지견이 끊긴 알맹이 법이다. 조사들은 이화두를 뚫어내고 깨친 분들이다. 화두를 보는 간화선, 화두를 보지 않고 참선하는 묵조선도 있다. 교리적으로 들어가는 관법은 묵조선과 일맥상통한다. 참선은 반드시 화두를 보는 간화선이라야만 한다고 고집할 것은 없다. 교법에 의한 관법으로도 깊은 도리를 깨칠 수 있으며. 묵조선법으로도 깨친 조사가 실로 많다. 그것은 중생 근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고승법문중에서...
첫댓글 금과 삼을 다 가져 갈 수는 없을까,,,그 먼길을 가져왔는데,,라고 생각했는데,,헉,,,그 생각이 ㅋㅋㅋ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였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성불 하세요..
반갑습니다~^^*
알음알이를 지니고 선문을 열수가 없답니다.
망상(알음알이)을 내려놓아 허허로우면
선문이 저절로 열립니다.
선은 고요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내려놓는 공부랍니다.
념념이 생각이 끊어져 고요하면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쉽고도 어려운 공부이나 발심해 현상계에 자유로우면 누구나
마음의 문을 열어봅니다~^^*
사족을 붙여봅니다.
념념히 생각이 끊어지게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물사람 물사람님 반갑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하얀 도화지 한장을 받아납니다.
이 도화지를 성품에 비유합니다.
부모님을 인연으로 태어나 6식이 발달하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부모님 친인척관계 사회현상 교우관계 종교 사상 이념 철학 인생의 시비선악,,, 등
끝없이 덫그림을 그려 도화지 바탕은 흔적이 없고 6진의 그림자만 수북이 쌓였지요.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은 6섯 감관이 그려놓은 6식과 잠재의식 무의식을 통틀어
8식이 그려놓은 작품이 오늘의 내 사고요. 마음으로 작용합니다.
8식이 그려놓은 그림을 걷어내면 흰 바탕의 도화지가 드러납니다.
성품이 현전함이지요.
다행히 현재 작용하는 육식의 작용만 쉬면
@解冥 흰도화지를 복원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선각들이 화두를 쥐라고 하는 것도 념념이 일어나는 망상을 쉬게하는 방법으로
화두에 몰입하라고 합니다.
어떤 선각들은 자신의 마음을 관조를 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온갖 망상들이 침잠합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얼른 알아차리고 망상을 안으로 거두어드려 쉽니다.
관조든 화두선이든 마음이 화두로 몰입이 되거나 관조로 망상이 제어되
마음이 허허로와 텅 비게되면 흰도화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먹구름이 흩어져 청천백일이 드러나는 것에 비유됩니다.
에공! 아는 것 없는 무지랭이라 이해에 도움이 될란동 모르겠습니다~^^*
@解冥 참고로 뱀발을 그리자면 누구나 타고난 성품은 종교를 초월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함니다
나그네가 길을걸어가는데
맑고깊은 향기의 바람불어주는것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