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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게시물번호: 3
작성자: 문정영 ()
수북이 나무의 재만 남은/아궁이 속으로/시커먼 둥근 고구마 같은 기억이 느릿느릿 익어가네/바람이 갈라진 벽 틈으로 들어와/치유되지 않은 몇 개의 깨어진 그릇들만 덩그렁 거리고/부엌 안을 맵게 그을리네/허물어진 굴뚝으로/모정의 갈증을 누군가 끊임없이 피어 올리고/그 밑으로 이따금 아이가 울며 지나가고/연기가 담벼락 틈으로 기어 나와 그 아이와/임의동행 형식으로 가네/늙은 개는 그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짖을 때를 기다리네//어떤 슬픔의 시간이, 덜컹거리는 문짝들을 안에서 꽉잡고/놓지 않은 것일까/무너진 담벼락은 손쉽게 놓아버린 것일까/불기가 사라진 아궁이의 눅눅함을/수굿이 덮고 있는/붙박이 쇠솥이 검은 햇볕에 천연스럽게 타고 있네
겨울고추
끓던 찌개가 바닥나고/초장에 고추를 찍어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구레나룻을 기른 탓인지/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가 말했다/하루에 마음을 17번 바꾼 적이 있다고/그 중 4번쯤은 생각 없이 바꾸었고/짧은 고통마저 없었다고/그의 마음은 서슴없이 꾹꾹 찍어 먹어도/맵지 않은 겨울고추며/무위도식의 웃자란 열매였다/찬이슬과 바람을 알지 못하는 고추는/맵지 않다/맵지 않다고 누구나 잘 먹는 것은 아니지만/아무도 손대지 않던/기억 자로 구부러진 고추 하나가/끝난 잔치처럼 남았다/나는 그 고추에 서름을 잔뜩 발라/그에게 내밀었다/하루가 아주 매웠으면 했다
바뀐 생각 하나가 가슴속을 얼얼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알았으면 했다
가슴 속에 등불을 켜면
가슴속에 등불을 켜고 보면 /저만큼 지나가 버린 사람의 뒷모습도 아름답다 /젊음의 서투른 젓가락질 사이로 빠져나간 /생각들이 접시에 다시 담기고 /사랑니 뺀 빰처럼 부풀어 오른 한낮의 취기도 /딱한 거리를 훈훈하게 한다 /나무들도 나처럼 한 잔의 술로 /등불을 켜는 것일까 /겨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윈 저들의 /어깨가 지나친 사람의 뒷모습처럼 아름답다 /한때 와디가 흐르지 않는 사막처럼 /모래성이 쌓이던.
씹히지 않던 일상도 생각의 양쪽 어금니를 사용하면 /잘게 부셔져 소화된다 /입 속을 행구워낸 / 모금의 수돗물로도 입내음이 향기롭다
가슴속에 등불을 켜고 보면 스쳐 지나간 사람의 옛모습도 종이학처럼 작게 접힌다
3월
작성자: 문정영 ()
땅 위로 솟구친 시퍼런 심줄들 속으로 핏물이 흐른다/꾹꾹 눌러 만든 주먹밥만한 크기의/상수리나무의 굴 속으로/쉴새없이 빨려들어가는 꽃빛의,
경계 1
물살 느린 강가에서 나는/지난 한 세월을 찌에 묶어 멀리 던졌습니다/기쁜 날들과 슬픈 날들이 낚시바늘에 교대로 매달려/물 속 깊이 가라앉았습니다/그 중심 위에서 작은 미끼 하나에/혼돈과 명징의 세계가/자꾸만 흔들리고 흔들렸습니다/어느 한 세상도 가볍게/부표처럼 떠 흐르거나/쉽게 가라앉지 못했습니다/해넘이 적/몇 갈래의 물살을 거스르고, 피라미 떼들만/때 벗은 조약돌 같은 흰 배를 내밀며/언뜻언뜻 뛰쳐 올랐을 뿐입니다/물이 차 오르면서 마흔 개의 빈 낚시 바늘에 /아가미가 걸린 커다란 달 하나가 흔들리던 경계를 /남은 삶 속으로 끌어당기고 당겼습니다/
항아리 2
느티나무 옆에서/항아리처럼 오래 웅크리고 있으면/나도 속이 텅 빈 그릇이 될까/몸 속 냄새나는 오장육부/다 썩고, 빈자리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던/욕심마저 다 비워질까/그 곳에 낯선 공기방울들 떠돌다 들어와/한 바퀴 돌다 가면/갈비뼈 사이 아직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던/희망마저 다 삭아들겠지/닿을 수 없는 희망 떠나고 나면/그 자리에 투박한 내 모습 빈 독으로 남을 거야/공기방울들 나무 위로 올라가고/이따금 통하고 물방울 떨어지면/내 몸 잠시 공명관처럼 울리기는 하겠지/하지만 곧 잠잠해지면서 정강이 사이에 낀 /속 깊은 메아리마저 쓸어 낼 수 있을 거야/하늘을 쳐다보며/겨울나무의 없는 집착 배우고 나면/내 몸 정말 매끄러운 항아리 하나 될까/담겨지는 것 그대로 담을 수 있는법구경 하나 넣고 뚜껑을 닫는다
다층 2001년 여름호에서
외눈박이 잉어
내가 누군가에게//배려라는 귓속말을 할 때 며칠 전 식당 어항에서 본 /외눈박이 잉어가 생각난다/그가 바라보지 못한 세상의 한 쪽은
늘 차갑거나 불안할 것이고,/그가 바라본 세상에 대한 지느러미 또한 /짙은 굴곡을 이룬다/바라볼 수 없는 쪽의/수초의 흔들임이나 물결의 부드러운 밀착은/늘 기억 저 편에 있을 뿐/찌개가 부글부글 끊는 동안에는/그의 보이는 눈이 적개심처럼 이글거리고,/다시 찌개가 식으면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세상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 모른다/내가 배려라고 이야기하는 동안 /내가 바라본 세상은 그의 어떤 눈이었을까
겨울화분
그가 내 몸 속 물렁해진 흙 위에/날아와 앉은 것은 지난봄이었다/자신이 누구의 씨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오직 살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나는 그의 집이며 체온이었을 뿐, 그가 가져온 세간을/내 몸 속에 들여놓지 못했다/그의 뿌리가 굵어지면서,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들이면서/내 몸은 변하기 시작했다/그가 내 몸의 어느 부분을 휘감을 때의/기쁨이란, 그가 뿌려준 온 몸의 땀을 받아 안으며/집안에 하나씩 들여놓은 세간의 무게를 느끼는 일이었다/그러나 그가 무슨 꽃을 피울지, 어떤 씨방을 갖고 있는지/그의 몸짓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여름을 타면서 무척 많은 땀을 흘렸고,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낯선 바람의 등을 타고 온 것이라는 것을 알 때쯤/그는 자신의 출생비밀을 들려주었다 사생아라는, 다시는 꽃을 피울 수 없다는, 뿌리의 들썩임이/한동안 지속된 뒤에 나는 그의 물관을 통하여 누구나 한 번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전해주었다/나는 더 오래 계절을 느낄 수 있도록 온 몸을 들썩이며/그를 받아주었다 겨울에는 뿌리의 움직임이
주춤거릴 것이며, 더 이상 내 몸에 흔적을 남길 수 없을 것이다/굽은 허리의 노인 몇이 옹기종기 앉아있는 /햇볕 잘 드는 아파트 입구에 있는,
빨래판 같은 남자
그는 오래된 시간의 나무 판자에/울퉁불퉁 홈을 파서 만든,켜켜이 햇살을 나이테로 바꾼 널빤지 같은 남자다/그에게 한 번 길들여지면
빠르고 電子動인 것들보다 우묵한 마음에서/오래 더럽혀진 생각을 씻어내곤 한다/다른 것들과 섞이지 못하는 자폐증의 빨래감들도
그 앞에서는 깨끗해진다/다만 누군가가 올 때와/갈 때가 다른 것이 늘 그를 그늘지게 한다/서로의 마음을 치대면서 부딪기면서 사랑하는 일조차/그렇게 깨끗한 관계로 헹구고 나면 애증의 물기만 남아있는 것일까/헹구고 짜내어 물 맑아지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인지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닦아내어/더 이상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마음의 상처는 속속들이 더 깊어 가는지 모른다/곪아터진 흔적을 옹이로 틈틈이 박고 사는/그래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첫물로 받아들이는,
剪枝
봄은 과수원의 풀리는 나뭇가지 자르는 힘으로 온다바람벽 닫아두고 冬安居한, 가벼워진팔을 자르든지, 다리를 절단하든지모를 게으름이 꽃망울로 피기 전에,묵은 괴로움은 먼저 잘라내야 한다그런 열망과 수정되어야할 꽃가루의 수집을요즘 꿀벌들은 모른다그저 눈에 보이는 꽃 속의 욕망을 찾고 있을 뿐잘린 나뭇가지 끝에서 품어내는 따스함을 알지 못한다아직 처녀티를 벗지 못한 젖꼭지 만한 생각을봉투로 소중히 싸두는 것은내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자리가 부끄러워서이다늑장을 부린 剪枝의 수정이 안된 꽃들의 집단자살 같은
지루함에 대하여
운현궁 낮은 담벼락 위의아직 상량식 끝나지 않은 거미가 지은 집,주인은 손님 맞을 준비로 바쁜지 보이지 않는다몇 천년을 걸어서 온 햇살이 먼저 환한 등불을서까래 사이사이 걸어 둔다바람은 방금 풀칠한 창호를 말리며, 일자지붕을천천히 걸어가는 중이다아무 세간도 없는 집안에 지루하지 않은 시간한 자루만 누군가 부려놓고 간다어디서 나타났는지 늙은 주인이자루 주둥이를 풀어 아주 느린 시간 한 줌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손님을 맞는다거 기 조갈증을 앓고있는 내 조급함의 빈 자리 !
잠그고 푸는 법
출근길 겨울 외투를 한 겹 더 입다보면참 잠가야할 세상이 많다잠그지 못하고 흘린 인연이 얼마나 많으랴만,하루는 단추를 제 구멍에 잘 넣는 일에서 시작한다걸어온 길만큼 크기와 모양이 다른 단추나 쟈크들내가 잠근 세상은 나만이 알고 있다는 듯,그렇게 열어놓고 태평하게 서 있었던 때가 간혹 있다보이지 말아야할 것들을 보이고 난 뒤의 헛손질외투의 구멍에 양복의 단추를 잠근 채내 생의 반이 구겨져 있는,
마흔이 훨씬 넘어서야 겨우 나는,욕망 푸는 법을 배운다
옛 집터에서
목대문이 있던 자리의 키가 안 맞는 풀잎 사이에서 흔들리는 거미의 집과흙 묻은 사금파리에서 빛나는 노래들그물에 걸린 민들레 씨앗이
아직 이주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내 살의 온기가 조금씩 빠져나간 뒤온갖 잡풀들 오른쪽 마루며, 왼쪽으로 구부러진 방을넘보고 있고, 그 곳에 햅쌀 같은 햇살로 새집을 짓고 있는 더부살이하던 놈들누군가 떠난 자리도 남은 누군가에는 몸 기댈 수 있는자리가 되는가 보다
나를 살게 하던 봉숭아 꽃잎 만한 미소들, 물에 잠겨도 지워지지 않은 길들, 잎새에 숨은 숨소리들그대로 남아서 물고기의 밥이 되는 것들
나는 마루터의 풀잎에 앉아 오래도록 그리움의 탁본을 뜬다
* 옛집터 - 2003년 수몰예정지구 전남 장흥군 유치
문학나무 봄호에서
폐선
그가 태어난 곳은 낙조가 긴 서해의 섬,그는 자라면서 늦은 저녁과 홍조 띤 바다를 사랑했네그를 안아주며, 쓰다듬어준 아버지는더 넓은 해양 지도를 그가 잠드는 방에 붙여주었네그는 날마다 알 수 없는 나라를 항해하였고그 나라의 풍물을 하나씩 사올 때쯤,
아버지의 저녁은 깊어갔네허리가 굽듯, 갑판 위의 안전대가 부러져 가고낡은 철사로 동여맨 만선깃발이 내려앉은 날
아버지는 낮은 풍랑에 넘어졌네아버지의 혈관은 이미 오래된 기름에 막혔고그가 건네준 풍물로는 고칠 수 없었네
오직 바다로 난 길만을 알던아버지 잠들어 계시는 모래언덕아버지의 무덤 위로 그가 사랑한 밀물의 안온함이 끊임없이 다녀가네
그가 물 위에 그린 지도를 따라 아버지의 꿈이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네
물방울무늬 생긴 날
겨울비 내리는 휴일두터운 잠바를 꺼내 입고 이발을 하러갔다무성히 웃자란 머리칼 위로 차가움이 은실처럼 붙었다
잠바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비의 소리가가슴으로 파고들었다오래 닦지 못한 옷먼지에 닿은 비의 무늬가 생기기 시작했다
불편하게 살아온 생의 파란(波瀾)이스르륵 전신으로 번졌다잘 닦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거기 그렇게 옷먼지로 있었다
내 안에 이런저런 소름들이 잘린 머리칼처럼 몰래 숨어있었다젖을수록 속이 환해지는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물방울 만한 생!
人工魚礁(인공어초)
게시물번호: 147
작성자: 문정영 ()
人工魚礁
오래 쓸리고 흘러내리며봉분마저 사라져 버린 때, 무덤 밖으로몸 내민 廢船 같은 아버지DNA검사도 어려운 뼛조각들이 얽힌
그를 수장한다그가 이름처럼 지닌 완장 같은 거그가 서해의 낙조로 날인한 인장 같은 거물 밖에 남겨둔다그를 해체할수록
그의 몸은 더 큰 해초의 집이 된다물 안에서는 왼쪽 사타구니의 혈관을 뚫던 가는 철사의 관통도 없다위장을 오래 점령한 악성종양도 없다
관 속 편안한 자세만 취하면 된다
인공어초 : 폐선 등을 바다에 가라앉혀 만든 해초와 고기들의 집
오후
게시물번호: 148
작성자: 문정영 ()
오후
석계역 가는 철길가오월 꽃자리가 아토피성 피부 같은 담벼락 앞,바람이 파헤친 흙살에누군가 가눌 수 없는 마음을 심어놓고
그 위에 노란 양산을 펼쳐 두었나양산의 그늘이 촉촉이 젖어있다마음 도둑은 가고 늦은 시간이 자라고 있는,
나무의 꿈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다더 이상 무늬가 이야기로 남아 있지 않는 날내 몸에 비치는 것은 윤기 나게 마루를 닦던 어머니, 어머니의 깊은 주름살이었다
풀무치의 애벌레
말랑거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다만 풀잎이 말랑거리는 시간을 풀무치의 애벌레는 안다허울을 벗고 기어가는 애벌레는
몇 번을 더 벗어야 풀잎을 자유롭게 뛰어 넘을까그렇게 空으로 사는 것은 없다허공에서 커 가는 것은 허공이 집이다
허공에 서까래를 올리기 위해서는 풀잎보다더 말랑말랑해져야 한다풀무치가 넘어가는 세상,허공은 건너뛰어도 건너뛰어도 절벽이다
그리고 더 이상 건너 뛸 수 없을 때허공이 말랑거리는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맨드라미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돼지우리 곁에감나무 몇 그루 기둥처럼 서 있었다봄이면 볏짚이 목련꽃잎처럼 썩어갔다수탉의 벼슬 같은 꽃이 마당에 지천으로 피었다그 무렵이면 내 몸에도 붉은 꽃이 피었다'아토피, 아토피' 지루한 가려움증의 꽃이었다접힌 살 부위에서 먼저 뿌리를 내렸다
사각사각 긁는 소리 따라자잘한 상처가 모인 꽃이삭이 솟구쳤다꽃은 내 몸에 천천히 퍼지는 독이었다독은 늦은 봄부터 여름 내내 번졌다
번지면서 하늘을 태우고 흙을 태우고,내 눈가는 늘 붉어 있었다할머니가 썩은 볏짚을 태워 온 몸을 씻겨주었다내 검어진 사타구니를 제법 벌어진 감꽃들이 몰래 들여다보곤 하였다
책 속의 개미
달리는 전철 안에서책을 펼쳐 한참 줄거리를 읽고 있는데아직 읽지 않은 글자 하나가 떨어져 꿈틀거린다어디서부터 따라 왔는지
책 안으로 들어와 행간을 두리번거리는 한 마리 개미결코 글자의 형상으로만 남지 않겠다는 작심을 했는지나가는 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데,
책 밖으로 나가는 길은 읽는 사람이 글자를삼킬 때에만 보인다글자가 생각 속으로 들어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옮겨졌을 때, 그 사람의 입이나 눈을 통하여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개미는 처음 들어온 쪽에 사다리를 놓고 싶으나지나온 길에는 걸어놓을 턱걸이가 없다
이미 굳어버린 생각의 집에서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 것이다개미가 열심히 출구를 찾는 한 쪽에 누군가의 신발 한 짝이
들어오는 길인지 나가는 길인지 모르게 옆으로 엎어져 있다
대나무女子
대나무 흰깍지벌레가 등을 간질인다따끔거리는 마음을 바람에 맡기고 있는 울어도 늘 반듯이 서서 우는 그녀는,그 작은 벌레가 뚫어놓은 욕망에 힘겨워한다등뼈의 첫마디에서 끝마디로 번져 가는열 개의 손가락으로 틀어막아도목에서 터져 나오는 죽비소리그 사이, 벌레가 낸 마음 구멍으로푸른 그리움이 먼저 고개를 쑥 내민다일생에 꽃 한 번이라도 피우다 시들고 싶은,그러나 누군가의 거실에서 하나의 가구가 되고 싶지 않은, 女子
황구
신용산역 호프집 만남의 광장에 오면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늘 길 쪽으로 몸을 틀고 앉아교차로에서 짐차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황색털 안에 햇빛이집 한 채 짓고 있습니다 한 낮에도 시장의 야채꾸러미처럼 엎드려 있는 그는 말라버린 젖꼭지를 아직도 땅에 물리고 있습니다
다 자란 새끼에게 마지막 젖줄을 내어주고 있는 듯합니다어미임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눈 속으로 신호등 없는 사람들이 건너다닙니다
그가 그렇게 숭고하게 보이는 것은 전자상가 쪽으로배달되는 무수한 전자칩 때문인지도 모릅니다누군가 쓰다가 낡거나 고장나면 버리는
일상들을 그는 쓰레기봉지에서 자주 찾아냅니다그가 바라보는 나 또한 그렇게 버려진 칩 중에서날이 나간 칩 하나가 아닌 가 생각해 보다가
그가 웅크리고 있다 일어난 따뜻한 자리에가만히 앉아봅니다
낯선 금요일
()
한 쪽 팔이 저리는 이유는 내가 그를 미워하기 때문이다미워하다 미워하다 어느 사이 피가 돌지 않은 사랑을 한 것이다
그가 어두워지고, 내가 붉어지지 않는 날들은물관이 잘린 나무의 꽃이 피지 않은 가지와 닮을 뿐이다
聖금요일, 내게 눈설게 다가오는 神의 이름을 불러본다神은 내게 낯선 금요일이다, 말을 듣지 않는 한 쪽 날개를
부러뜨리고 억지 고해성사를 시키는 그는 사실 미움의대상이 아니다 유행을 이끄는 누드의 사진, 거기에서 벌거벗고
뛰쳐나오는 이 시대의 얼굴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를 믿고 피 멈춘 사랑을 하고 있다니, 어제 내가 거울을 보고 한 행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노래있을까
몇몇은 아직 재래식 아궁이로 몸을 뎁히는그런 바람 부는 동네의 길가에 쌓인완전 연소된 연탄재 같은그러나 우리는 이미 스스로를 위해
다 타버린 몸을 가지고 있을 뿐,그런 몸들은 항산화제로도 노화를 막을 수 없으며이미 주어진 권리를 다 써버린 뒤
'토지거래허가제'처럼 얼마만큼 크기 이상의 자유는사전 허가를 득해야하는,대지가 효능보다는 가격으로 결정되는 그런 시대에서는
사람들은 이제 누구를 위해 자신의 구멍을 열어불꽃을 피울지 알지 못하고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허락 받아야만 하는 시대에서는
어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래 있을까
사랑이라고 부르는 노래있을까
몇몇은 아직 재래식 아궁이로 몸을 뎁히는그런 바람 부는 동네의 길가에 쌓인완전 연소된 연탄재 같은그러나 우리는 이미 스스로를 위해
다 타버린 몸을 가지고 있을 뿐,그런 몸들은 항산화제로도 노화를 막을 수 없으며이미 주어진 권리를 다 써버린 뒤
'토지거래허가제'처럼 얼마만큼 크기 이상의 자유는사전 허가를 득해야하는,대지가 효능보다는 가격으로 결정되는 그런 시대에서는
사람들은 이제 누구를 위해 자신의 구멍을 열어불꽃을 피울지 알지 못하고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허락 받아야만 하는 시대에서는
어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래 있을까
마흔살 9
연필깎기
흑색의 단단한 심이 온 몸을 관통한 나무는분별할 수 없도록 껴안고만 있으면 그것이 하나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처음 그들은 제 마음 타는 줄 모르고온전히 서로의 몸을 그렇게 껴안고만 있었습니다나는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나무의 살을 잘라 내고심은 심대로 깎아 내렸습니다
내 안에 그들의 사랑을 톱질하는칼날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그 둥근 톱날에 나무와 심의 깨어나는 상처들그러나 그들은 깎여야만
서로의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배려라는 글씨를 쓰기 위해서나무는 마음의 뼈대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그렇게 서로의 깎은 몸을 보여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들은 몽당연필이 되기 전에 알 수 있을까요
耳鳴
내 왼쪽 귀의 좁은 동굴에서는 작은 소리들이 산다매미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휘파람새 울음 같기도 한다
내 안에서, 날마다 충동되는 분노와 욕심이 내는 소리는 아닌지달팽이관을 따라 돌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 소리는
내 안에서 얼마나 울고 싶었을까, 마흔 해 넘어서야 그 소리가내 울음인지 알고, 조금씩 나누어 우는 법과 홀로 흐느끼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시끄럽고, 남들이 있는 곳에서 울지 못하는 그 울음이 나를 깨우는 또 다른 소리가 되도록,귀에 갇히지 않으면서 한없이 열리도록, 한 밤중 더 크게 들리는울음의 등을 나는 자주 두드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