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강남역에서 1분만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버스를 타려다 지하철로 돌아왔다.
만일 내가 곧 바로 지하철을 탔다면 그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그를 보고 사랑에 빠진 것은
3만 피트 상공의 하늘에서 운명의 줄을 잡아당긴 것이었다.
짧은 헤어 스타일의 그는 연갈색 자켓에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옆 모습은 하정우를 닮았다.
조금은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내게 입맞춤을 쉽게 허락하지도 (그러면 나는 배은망덕해질 것이다.)
절대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지도 (그러면 나는 곧 그를 잊어버릴 것이다.) 않고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내 마음에 안겨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너무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또 약간 부족한 듯 보이기도 했으니까.
그에게 달려가 내 마음을 말할 수 없는 내 침묵이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이 흐르면 그것은 상대가 별로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멋진 그와의 침묵은 내 자신이 별로인 여자가 된다.
난 나의 상비군 패션의 현실이 줄 없이 번지 점프하고 싶게 만들었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나는 그가 언젠가는 내려버릴 것을 염려하며
나의 마르크스 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하며
나는 잠시 동안 중요한 위험을 망각했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 줄 경우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바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타락한 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그가 어떻게 내가 바라는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나는 내게 묻는다.
그가 정말로 늘 그렇게 멋진 모습이라면 어떻게 상비군 패션에, 살 따윈 신경도 안 쓰고 닭발을 먹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나만 그를 사랑하는,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안전하게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나 이외에는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는, 내 스스로 겪는 달콤 씁쓸한 사적인 고통이니까.
어쩌면 나는 아름답고 고귀한 그와의 사랑으로 동맹을 맺음으로써 부족한 외모, 몸매 등 나의 약점을 외면해 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수준이 낮은 게 아니라, 내가 사랑받을 만한 증거라고 나는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나는 생각했다, 그와 마시멜로 같은 달콤함이 있었으면 하고.
그의 코는 약간 스탕달적인 매부리코였는데, 매력과 삐뚤어짐 사이에서 나를 더 빠져들게 만들었다.
실리콘이 튀어나올 듯 성형이 난무하는 요즘, 그만의 진정한 미는 아슬아슬하게 수학적 비율을 비켜가며 세밀한 곳들에서 매력을 발산했다.
고전적으로 멋진 그동안의 오빠들은 내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었다.
강남에서, 그가 내리는 건대 입구까지 열 정거장. 그리고 24분.
그의 옆모습이 아직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가 내 허리를 감는 오빠였으면 하고, 바둑이 끝나면 뜨거운 커피 한 잔 들고 날 반겨주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나와 한스 갤러리에서 달콤한 티라미슈를 먹는 단 한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미리가 나보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그랬다.
난 차갑지 않다. 내 마음 안에도 따뜻한 사랑이 숨 쉬는 데, 단지 그를 오늘에서야 만났을 뿐이다.
내 심장 소리가 들리니?
그는 내릴 때 큰 키 때문에 머리를 숙였다.
마지막 뒷 모습까지 멋진 그가 그렇게 내리고 문이 닫혔다.
이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늘 자살을 시도했다.
롤 케익을 꾸역꾸역 먹으며 뱃속이 꽉 차 터져버리길 바랐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개워내며 나의 자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사랑은 커피나 담배처럼 완전히 끊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포도주 한 잔이나 초콜릿처럼 가끔은 허용되는 것일까.
유리가 맑아 보이기는 하지만 뚫고 날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파리들은 계속 미친 듯이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다.
지나친 의욕, 고통, 씁쓸한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도록 어떤 기본적인 진실들, 지혜의 조각들을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돈에 지혜로워질 수 있듯이, 사랑에도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내 야심은 당찬 것일까?
나는 내일 91모임을 하고 유택이가 손구락으로 안경을 올리며 웃는 미소를 보며 다시 살아갈 것이다.
다시 바둑을 두고, 왕십리의 지겨운 골목 구석구석을 돌다니며..
그리고 나는 언젠가 다시 사랑을 하겠지...
2010년 1월 29일 금요일.
첫댓글
...혹시 그 키 큰 분이 우리 프바사 회원님 아니었을까요


충 누구인지 감은 잡히지만...차마...제 입으로 말할 순 없네요. 

지만,
대
그려요. 슬아님 때론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위안을
어서 좋은 사랑 만나시길 바래요. ^^*
키크시고 훈남이시라면 밑에계신 다터오님이 아닐까요? -ㅁ-
저는 키만 크지 훈남은 아니잖아요 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말 좀 해 보시지......
흠.. 글은 재밌는데. 본인이 미니홈피를 폐쇄했다면 글이 밖으로 유출되는걸 안좋아할수도 있다는 얘긴데.. 오로광장에 올려졌다니. 문제 안되려나 모르겠군요.
이글은 지울까요?
개인적으로.. 간단한 하나의 사건만으로.. 깊은 사색에 잠길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이전전전부터 이슬아 프로가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새로운데요~~^^*
이슬아 초단 얼굴이 예쁘네용~~~~~
상비군 패션, 마르크스 주의, 스탕달...
외모는 풋풋하고 참 예쁘고 신선하신데, 마르크스와 스탕달을,, 마타하리가 떠오르네요^^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립 하신듯...우오~~~
저는 이해할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