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엄마가 입으셨던 니트 한복 속치마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쯤 만드신 것입니다.
엄마 유품을 정리하면서 장롱 맨 아래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반세기 전엔 지금처럼 양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이 드신 여성들은 대부분 한복이 일상복이었습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긴 치마는 땅에 끌리고 저고리 옷고름도 처리 곤란이고... 참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한복을 입고 생활하셨습니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 이 털실로 뜬 속치마가 나오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어 엄마도 빨간색 모사로 이 속치마를 장만하셨습니다.
그 당시엔 제일모직에서 생산하는 100% 모사만 있었습니다.
나일론이나 화학합성섬유가 보편화되기 전이었으니까요.
겨울철이면 엄마는 털실을 몇 파운드 씩 사 와서 늘 뜨개질을 하셨습니다.
가족들 내복부터 겉옷까지 다 엄마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었습니다.
6.25로 황폐해진 경제사정으로 변변한 기성복이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알뜰하고 솜씨 좋은 엄마가 직접 만들고 떠서 입혔던 것입니다.
가장 많이 쓰이는 중간 굵기의 모사엔 장미 그림이 붙어있어 '장미실'이라 불렀고, 굵은 실엔 공작새 그림이 붙어있어 '공작실'이라 불렀습니다.
내복은 장미실로 떴고, 겉옷은 공작실로 떴던 생각이 납니다.
한 파운드는 454g으로, 두 팔을 벌리고 잡아야 할 정도의 타래로 되어있습니다.
할머니께선 실감기 전문이셨습니다.
모사는 부드러워 느슨하게 감아야 한다고 포근하게 조심조심 감아주셨습니다.
겨울철이면 엄마의 손에는 늘 실과 바늘이 들려있었습니다.
10 명 가족이 많기도 했지만, 순모사라 무릎이나 팔꿈치가 잘 헤지기에 풀어서 다시 떠야 하기 때문입니다.
푼 실은 꼬불꼬불한데 뜨거운 김을 쐬면 어느 정도 풀리기에 이런 과정을 거쳐 엄마 손에서 다시 옷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엄마를 보면서 국민학교 취학 전부터 나도 실과 바늘을 가지고 뜨개질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뜨개질 경력이 60년이 넘는 셈입니다.
동생들 양말 뜨기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유일한 취미생활이자 가장 내세울 수 있는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거의 60년이 다 되어가는 니트를 아주 정갈하게 간수해서 좀도 범접하지 못하게 했고, 줄어드는 모사의 성질도 잘 다스려 처음 모양대로 단정한 상태로 남았습니다.
엄마와 비슷한 체형이라, 남겨진 옷을 네 박스나 챙겨 택배로 부쳐와서 잘 입고 있는데, 그중에 이 속치마도 들어있었습니다. 이 속치마는 한 복을 입을 일이 없는 까닭에 일단 풀어서 다시 뜰 요량으로 풀었습니다.
세탁할 때 주의하지 않으면 크기가 줄고 엉켜서 실을 풀 수도 없는데, 관리를 잘 해서 솔솔 잘 풀렸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며 무엇을 뜰까 고민 중에 있습니다.
빨간 색상이면서도 고운 빛깔이라 무엇을 떠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한 파운드가 더 되었을 텐데, 그동안 닳았고 실을 푸는 과정에서도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해서 두 뭉치의 실을 저울에 달아보니 한 파운드 450g이 조금 못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소 긴 베스트 한 점쯤은 충분히 뜰 수 있습니다.
어떤 무늬를 넣을까? 길이는 얼마나 길게 할까? 어떤 모양으로 할까? 라운드 넼으로 할까? V넼으로 할까?
즐겁고 행복한 상상을 하며 엄마를 가까이서 느껴봅니다.
첫댓글 옥덕아 나도 저런 털 속치마를 입었는데... 그 땐 융 속바지에 저 털 속치마를 입고 양단 치마 저고리 위에 20대에 새색씨 시절이 그것으로 가디간을 뜨서 늘 만만하게 걸치면 좋겠다
비단 두루마기를 입으면 지금의 오리털 코트 입은것보다 더 따뜻했다
떠 오르네...그런데 어째 요렇게 잘 보관하셨을까
쌀쌀할 때는 4철을 걸치는 요긴한것이 가디간이드라. 이건 내 생각이야...
언니도 입으셨군요.라고 맡겼던 거라고 기억합니다.
한복을 제대로 갖춰 입을려면 여러겹이라 추위를 막을 수는 있겠지만,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치렁치렁한 치마와 옷고름이 멋은 있지만 일 하는덴 불편했지요.
편물기가 들어와 저 속치마를 짧은 시간에 짜는 걸 보는 것도 참 신기했어요.
엄마도 저 속치마는 실을 사다주고 편물기에 짜
60년이 다 된 건데도 실이 술술 풀릴 정도로 보관을 잘 하셨어요.
엄마의 성품이지요.
장미실 공작실 저도 압니다
장미실로 뜨게질한것도 기억이 나네요
어쩜 이렇게 상세하게 기억하고계셔요?
노인의 특성상 옛날일은 기억을 잘 하는데, 어제 일은 가물가물 하지요.
어린시절 일이 선명하게 머리속에 그려지니 신기합니다.
아~!
무조건 반갑습니다.
그 시절 풍속도가 선배님으로 하여 다시 떠 오릅니다.
유품 중에는 까만 비로도 한복 긴치마가 있는데, 장만할 때는 매우 高價로 구입하셨을텐데
버리자니 너무 아까워 가져왔는데, 무엇으로 재활용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아끼느라 장롱에 고이 모셔두어 새것처럼 보이더군요.
@36회 김옥덕 재활용보다 우리 친구 공명희와 의논하셔서
복식 박물관에 기증하심이 어떨지요?
@40회 장인순 생각해 볼게요.
히야 역사적인 물건으로 놔두시지요! 풀기 아까운 느낌이!!!!1
역사적인 물건임에는 틀림없지만, 모사라 오래 가지 못할 것같고, 내가 물려줄 딸이 없으니 무용지물이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 저런 물건 좋아하지 않지요.
정말 예ㅅ날 생각이 나네. 그때는 저 속치마 꼭 있어야 되는 줄 알고 장만들 했었지.주머니 갖고 있는데 러고 있어.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난방이 좋은 요즈음이야 런닝에 인조바지가 최고인데
풀지 말고 보관할걸 그랬다.유품으로,,,,나는 어머니 손수놓은
박물관에 줘야겠다고
제가 간직한다고 해도 얼마나 오래 될지도 모르겠고 물려줄 딸이 없는데...
며느리야 좋아할 리가 없지요.
모사라 오래 보관도 안될 것같아서요.
옥덕씨 이니트 속치마 한꾹주부들의 홈웨어이지요.
제일모직의장미표 순모중세살ㄹ 편물집에서 짜입은 생각합니다.
언니도 이 속치마 입으셨군요.
편물기가 들어와서 많이들 맞춰 입었지요.
아...진짜 아깝다....박물관에 주시지.....복식계통에서는
6.25 무렵의 유물이 없어 어려움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요
경기여고에서는 이런것 모아 경운박물관 채렸다는데...우리도 박물관 하나 있었으면.....
경상도 쪽 좋은 유품 많이 사라지는게 안타까워요...
박물관, 생각은 못했어요.
풀기 전에 먼저 사진 올릴걸 그랬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