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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12권 / 세기(世紀) 12
고려(高麗)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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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고려(高麗)의 ‘려’ 자는 음이 ‘리(離)’이다. 장위(張位)의 《발음록(發音錄)》에 “고려의 ‘려’는
평성(平聲)에 권발(圈發)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은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뜻을 취해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대개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고려라고 칭한 것이다.
왕씨(王氏)의 선조에 대해서 동사(東史)에서는 혹 당나라 선종(宣宗)에게서 나왔다고도 하나 이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하다가 태조의 아버지인 금성 태수(金城太守) 왕륭(王隆)에 이르러서 비로소
송악(松嶽)에 살면서 태조를 낳았다. 태조는 장성함에 미쳐서 궁예(弓裔)에게 벼슬하여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궁예가 정사를 어지럽히자 장사(將士)들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설거정(薛居正)의 《구오대사(舊五代史)》와 당나라의 남은 기록들 및 구양수(歐陽脩)의 《신오대사(新五代史)》,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모두 “왕씨가 고씨(高氏)를 대신해서 나라를
얻었다.”고 하였고, 《송사》에서는 이를 따라 역시 “후당(後唐) 동광(同光)과 천성(天成) 연간에는 그곳의
임금인 고씨가 여러 차례 조공하였으며, 장흥(長興) 연간에는 권지국사(權知國事) 왕건(王建)이 고씨의
왕위를 이어받고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호삼성(胡三省)이 《통감(通鑑)》의 음주(音註)를 내면서 이미 틀렸다는 것을 상세하게
밝혔으므로 지금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대개 《당서(唐書)》에서는 고씨의 군장(君長)은 영순(永淳) 당
고종의 연호이다. 과 수공(垂拱) 무후(武后)의 연호이다. 뒤에는 이미 끊어졌으니, 어떻게 동광과 천성
연간에 중국에 조공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왕씨가 나라를 세운 것은 후량(後梁) 정명(貞明)
4년(918)이니 또 동광과 천성 이전이었다.
○ 후량(後梁) 균왕(均王 말제(末帝)를 가리킴) 용덕(龍德) 2년이다. 태조 5년 태봉(太封)의 왕 궁예(躬乂)가
살펴보건대, 동사에는 태봉(太封)이 태봉(泰封)으로 되었고, 궁예(躬乂)가 궁예(弓裔)로 되었다. 성품이
잔인하자, 해군통수(海軍統帥) 왕건이 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다시 고려 왕이라고 칭하였으며,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왕건은 검소하고 관대하였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자치통감》
○ 《자치통감》 본주(本註)에는,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말하기를, ‘고려 왕건의 선조는
고구려의 대족(大族)이다. 고씨의 정사가 쇠미해지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이 어질다고 여겨 드디어 함께
추대해서 군장으로 삼았다. 후당 장흥(長興) 3년(932)에 권지국사(權知國事)라고 자칭하면서 명종(明宗)에게
청명(請命)하니, 명종이 대의군사(大義軍事)를 제수하고 고려 왕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서긍이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고려도경》을 올렸는데, 기재된 내용이 아주 소략하다.
이는 그 나라 사람들이 전해 주는 말을 듣고 드디어 왕건이 고씨의 뒤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면서 왕건이
실은 궁예(躬乂)를 살해하고서 나라를 세운 것임을 모른 것이다.” 하였다.
○ 후당 장종(莊宗) 동광 원년에 태조 6년 고려가 정사(正使) 광평 시랑(廣評侍郞) 한신일(韓申一)과 부사
춘부 소경(春部少卿) 박암(朴巖)을 보내었다.
○ 고려는 본디 부여인(扶餘人)의 별종이다. 고려의 땅과 임금의 세차(世次)는 《당서》에 모두 나타나
있는데, 살펴보건대 이는 고구려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다른 오랑캐에 비하여 성씨(姓氏)가 있으며
관직의 칭호는 대략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이상 모두 오대사》
○ 요(遼) 태조 천현(天顯) 원년 태조 9년 3월 정미에 고려가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살펴보건대, 이에 앞서 신책(神册) 4년(919) 바로 후량 정명(貞明) 5년에 이미 사신을 보내어
거란(契丹)과 교빙하였다.
○ 후당 명종 장흥(長興) 3년 태조 15년 3월에 권지국사 왕건이 사신을 보내왔다.
왕건은 고려의 대족(大族)이다. 《오대사》
○ 5월에 살펴보건대, 《오대사》에는 6월 갑인으로 되어 있다. 제서(制書)를 내려 권지고려국사 왕건을
특진 간교태보 사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特進簡較太保使持節玄菟州都督上柱國)으로 임명하고 고려국왕에
봉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로 삼았다. 7월에 조서를 내려 고려국왕 왕건의 처 하동 유씨(河東柳氏)를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삼았다. 고려의 입조사(入朝使)인 대상(大相) 왕유(王儒)가 주청한 것이다.
《책부원귀》
○ 진(晉) 고조 천복(天福) 원년에 태조 19년 고려 왕 왕건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ㆍ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가 모두 내부하였다. 2경(京), 6부(府), 9절도(節度), 1백 20군(郡)이 있다.
《자치통감》
○ 《남당서(南唐書)》에는, “오(吳) 천조(天祚) 2년(936)은 진(晉) 천복(天福) 원년에 해당하는데, 고려 왕
왕건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 승원(昇元) 2년(938)에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리면서 ‘전(牋)’이라 칭하여
격식을 표(表)와 같이 갖추면서, 신(臣)이라 칭하지 않았다. 열조(烈祖)가 무공전(武功殿)에 나아가 사신을
알현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 뒤에는 사책에 빠져 있어서 사신이 왔는지의 여부를 상고할 수가 없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태조 18년(935) 을미에 신라 왕 김부(金溥)와 후백제 견훤(甄萱)이
모두 와서 항복하여 드디어 삼한의 땅을 통합하였다.
○ 3년 태조 21년 8월에 청주(靑州)에서 왕건이 즉위하고는 글을 올려 고려국에서 볼모로 와
숙위(宿衞)하고 있던 왕인적(王仁翟)을 향리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였다. 《책부원귀》
○ 요 회동(會同) 2년 태조 22년 정월 을사에 후진(後晉)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사신을 보내어
고려에 통보하였다. 《요사》
○ 진(晉) 천복(天福) 6년 태조 24년 5월에 제서(制書)를 내려 고려국왕 왕건에게 개부의동삼사 간교태사
(開府儀同三司簡較太師)를 더해 주고, 예전대로 사지절 현도주도독(使持節玄菟州都督)에 대의군사
(大義軍使)를 삼고 식읍(食邑) 1만 호, 식실봉(食實封) 1천 호의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봉하였다.
8월에 광록 경(光祿卿) 장징(張澄), 국자 박사(國子博士) 사반(謝攀)을 파견하여 고려로 가서 책명(册命)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 천복 연간에 서역(西域)의 중 말라(襪囉)가 진에 와서 조회(朝會)하였는데 화복(火卜)을 잘하였다. 얼마
후 고조(高祖)에게 하직하고 고려에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고려 왕 왕건은 그를 심히 예우(禮遇)하였다.
이때 거란이 발해의 지역을 병탄한 지 몇 년이 되었다. 왕건이 조용히 말라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본디 우리의 친척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게 잡혀갔다. 내가 중국 조정을 위하여 거란을 쳐서
그 지역을 취하고, 또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니, 대사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말해 기일을 정하여 양쪽에서
습격하게 해 달라.”
하였다. 이에 말라가 돌아와서 낱낱이 아뢰었으나, 고조는 회답하지 아니했다. 《속통전(續通典)》
○ 제왕(齊王 출제(出帝)를 가리킴) 개운(開運) 2년에 혜종(惠宗) 2년 왕건이 졸하고 그의 아들 왕무(王武)가
즉위하였다. 11월 무술에 왕무를 고려국왕에 봉하였다. 《오대사》
○ 살펴보건대, 고려 태조는 천복 8년(943) 계묘에 훙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개운 2년이라고 기록한 것은
대개 부고를 알린 데 따라서 쓴 것이다.
○ 출제(出帝)가 거란과 원수가 되니, 말라가 고려와 힘을 합해 거란을 치는 일을 다시 말하였다. 출제는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방을 흔들도록 하여 그들 군사력을 분산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마침 왕건이
죽고 그의 아들 왕무가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를 칭하면서 표문을 올려 상(喪)을 고하였다. 11월 무술에
왕무를 대의군사 고려왕(大義軍使高麗王)으로 삼은 다음 통사사인(通事舍人) 곽인우(郭仁遇)를 사신으로
보내 유지(諭旨)를 내려 거란을 치게 하였다. 곽인우가 고려에 이르러서 고려의 군사가 약한 것을 보고,
지난날 말라가 한 말은 모두 왕건을 위해 과장하여 떠벌렸을 뿐 실지로는 거란과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곽인우가 되돌아오자, 왕무가 다시 다른 일로 변명을 하였다. 《자치통감》
○ 후한 은제(隱帝) 건우(乾祐) 4년(951)에 왕무가 졸하고 그의 아들 왕소(王昭)가 즉위하였다. 왕씨 3대는
오대(五代) 시대가 끝날 때까지 항상 와서 조공을 바쳤으며, 즉위하여서는 반드시 중국에 승인을
요청하였고, 중국에서도 항상 후하게 대접하였다. 《오대사》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혜종 왕무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훙하자, 군신들이 왕의 동생인
왕요(王堯)를 옹립하였는데, 이가 바로 정종(定宗)이다. 정종이 재위한 지 4년 만에 훙하자, 동모제(同母弟)
왕소(王昭)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광종(光宗)이다. 광종 원년 경술년은 바로 후한 건우(乾祐) 3년이다.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신오대사(新五代史)》 및 《고려도경(高麗圖經)》, 《송사》에는 모두 광종을 혜종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 주(周) 태조(太祖) 광순(廣順) 2년 광종 3년 정월에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왕소가 광평 시랑
(廣評侍郞) 서봉(徐逢)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을 바쳤다. 2월에 조서를 내려 특진 간교태보 사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特進簡較太保使持節玄菟州都督上柱國)에 임명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로 삼아 고려
왕(高麗王)에 봉하였다. 이어 담당 관서로 하여금 책명하는 예를 청하게 한 다음, 태복 소경(太僕少卿)
왕연(王演)을 고려국책례사(高麗國册禮使)로 차임하고, 우위솔부(右衛率府) 여계빈(呂繼贇)을 부사로
차임하였다. 《책부원귀》
○ 살펴보건대, 《오대사》를 보면, 왕연이 이해 9월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
○ 세종(世宗) 현덕(顯德) 2년 광종 6년 11월에 고려에서 광평 시랑(廣評侍郞) 순질(荀質)을 보내와 황제가
등극한 것을 축하하였다. 이에 고려의 국왕 왕소에게 개부의동삼사 간교태위(開府儀同三司簡較太尉)를
제수하고, 전과 같이 사지절 현도주제군사 행 현도주 도독(使持節玄菟州諸軍事行玄菟州都督)을 삼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임명하여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봉하고 훈(勳)은 예전과 같게 하였다. 《상동》
○ 6년에 광종 10년 공제(恭帝)가 즉위하였다. 고려국왕 왕소에게 간교태사(簡較太師)를 제수하고
식읍(食邑) 3천 호를 더해 주었다. 8월에 왕소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겸하여 《별서효경(別序孝經)》
1권,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8권, 《황령효경(皇靈孝經)》 1권, 《효경자도(孝經雌圖)》 2권을 올렸다.
《상동》
○ 송 태조 건륭(建隆) 3년 광종 13년 10월에 왕소가 광평 시랑 이흥우(李興祐)와 부사(副使)
이희려(李希勵), 판관(判官) 이빈(李彬) 등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송사》
○ 4년 광종 14년 봄에 조서를 내려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현도주도독(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玄菟州都督)
에 제수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하였으며, 고려 왕(高麗王)에 봉한 왕소에게 식읍 7천 호를 더하고,
이어 추성순화보의공신(推誠順化保義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고려도경》에, “황조 건륭 3년(962)에
태조황제께서 등극하시어 만국을 소유하심에 고려 왕 왕소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이에 공신의
칭호를 하사하고, 이어 식읍을 더해 주었다.” 하였다. 9월에 고려에서 시찬(時贊) 등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는데,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 빠져 죽은 자가 70여 명이었고, 시찬은 겨우
살아남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위로하였다. 《상동》
○ 개보(開寶) 5년 광종 23년 7월 경인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식읍을
더 내려 주고,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推誠順化守節保義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진봉사(進奉使)인 내의
시랑(內議侍郞) 서희(徐煕)에게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더해 주고, 부사인 내봉 경(內奉卿)
최업(崔鄴)에게는 검교사농경(檢校司農卿)을 더해 주었으며, 모두 어사 대부(御史大夫)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고 판관인 광평 시랑 강예시(康禮試)에게는 소부 소감(少府少監)을, 녹사(錄事)인 광평 원외랑
(廣評員外郞) 유은(劉隱)에게는 검교상서금부낭중(檢校尙書金部郞中)을 더해 주고, 모두 후하게 대접하여
보내었다. 《상동》
○ 8년에 광종 26년 왕소가 졸하고 그의 아들 왕주(王伷)가 영권국사(領權國事)가 되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송사》에는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동사(東史)에 따라 바로잡았다.
○ 9년 경종 원년 9월 경오에 왕주가 조준례(趙遵禮)를 사신으로 보내어 공물을 바쳤는데, 아버지가 죽어서
승습을 받아야 하기에 와서 조지(朝旨)를 청한 것이다. 왕주에게 검교태보 현도주도독 대의군사
(檢校太保玄菟州都督大義軍使)를 제수하고, 고려국왕에 봉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검교태부(檢校太傅)로
올리고 대의군(大義軍)을 태순군(太順軍)으로 바꾸었으며, 좌사어부솔(左司禦副率) 우연초(于延超)와
사농시승(司農寺丞) 서소문(徐昭文)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었다. 왕주가 그 나라 사람 김행성(金行成)을
보내어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상동》
○ 태종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 경종 2년 12월에 왕주가 그의 아들 왕원보(王元輔)를 보내어 명마(名馬),
토산물, 병기 등의 물품을 가지고 와서 바치게 하였다. 이해에 김행성(金行成)이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다. 《상동》
○ 3년 경종 3년 또 사신을 보내어 방물과 병기를 바쳤다. 왕주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를 가하고 태자중윤
직사인원(太子中允直舍人院) 장계(張洎)와 저작랑 직사관(著作郞直史館) 구중정(句中正)을 사신으로 삼아
보내었다. 《상동》
○ 7년에 성종(成宗) 원년 왕주가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경종이 태평흥국 6년 신사에
훙하였다. 그의 동생인 왕치(王治)가 지국사(知國事)가 되었다. 사신 김전(金全)을 보내어 금실과 은실로
꿰맨 계금포(罽錦袍)와 계금욕(罽金褥), 금과 은으로 장식한 칼과 활, 좋은 말, 향약(香藥) 등을 조공으로
바치고, 인하여 왕위의 승습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치에게 검교태보 현도주도독(檢校太保玄菟州都督)을
제수하고, 대순군사(大順軍使)로 삼아, 고려국왕(高麗國王)에 봉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 이거원(李巨源)과
예기박사(禮記博士) 공유(孔維)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상동》
○ 요(遼) 성종(聖宗) 통화(統和) 원년 성종 2년 10월에, 장차 고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성종이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말지(耶律抹只)가 거느린 병마를 친히 사열하였다. 병오에 선휘사 겸 시중(宣徽使兼侍中)
포영림(蒲領林)ㆍ아긍덕(牙肯德)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고려를 토벌하게 하고는
기고(旗鼓)와 은부(銀符)를 하사하였다. 《요사》
○ 3년 성종 4년 7월 초하루 갑진에 모든 도(道)에 조서를 내려 군사와 무기를 정비하여 동쪽으로 고려를
정벌하러 가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8월 계유에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고려를 정벌하는 일을 파하였다.
《상동》
○ 송 옹희(雍煕) 2년에 성종 4년 왕치(王治)에게 검교태부(檢校太傅)를 가하고 한림시서(翰林侍書) 왕저
(王著)와 시독(侍讀) 여문중(呂文仲)을 사신으로 보내었다. 《송사》
○ 3년에 성종 5년 북쪽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거란(契丹)을 정벌하였다.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항상 거란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이에 감찰어사 한국화(韓國華)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조서는 예문지에 나온다. 이보다 앞서 거란이 여진(女眞)을 칠 적에 고려의 경계를 거쳐
군사를 출동하였기 때문에 여진은 고려가 거란의 군사를 유도하여 화근을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에 조정에 말[馬]을 바치면서 와서 하소연하고, 또 고려가 거란과 우호를 맺어 서로 응원하면서 그들의
백성을 약탈하여 가고는 다시 놓아 보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고려의 사신 한수령(韓遂齡)이 들어와
조공을 바칠 때 살펴보건대, 한수령이 들어와 조공을 바친 것은 옹희 원년이었다. 태종이 그 틈을 타
여진이 급박함을 고한 목계(木契)를 내어 한수령에게 보이면서 “돌아가면 본국에 말하여 요나라에서 잡아
온 포로를 돌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왕치는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송나라의 사신
한국화가 이르자, 사람을 시켜 한국화에게 말하기를,
“지난해 늦겨울에 여진이 목계를 급히 보내어서 ‘거란이 군사를 내어 우리 요나라의 경계에 들어왔는데,
고려에서 알지 못할 듯하기에 미리 알려 주니, 그에 대해 미리 방비를 하라.’고 하였다. 본국이 여진과 비록
이웃 나라라고는 하지만 길이 멀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속셈을 평소에 알고 있는바, 탐욕스럽고 속임수가
많아서 믿을 것이 못 되었다. 그 뒤에 또 사람을 보내 거란의 군사가 이미 매하(梅河)를 건너왔다고 알려
왔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오히려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구제해 줄 겨를이 없었다.
그 뒤 얼마 지나서 거란의 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서 여진을 크게 공격하여 죽이고 빼앗는 것이 매우
많았다. 이에 여진의 남은 족속들도 흩어져 도망가자, 거란의 군사들이 여진을 잡으려고 뒤쫓아 와서
우리의 서북쪽 덕창(德昌)ㆍ덕성(德成)ㆍ위화(威化)ㆍ광화(光化)의 경내로 들어와서 살펴보건대, 덕창은
지금의 박천군(博川郡)이고, 덕성은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고, 위화는 지금의 운산군(雲山郡)이고, 광화는
지금의 태천현(泰川縣)이다. 포로로 잡아갔다. 그때 거란의 한 기병(騎兵)이 덕미하(德米河)의 북쪽에
이르러서 살펴보건대, 덕미하는 평안도 북쪽 경계에 있어야 한다. 관성(關城)을 지키는 군졸을 큰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우리는 거란의 기병이다. 여진이 우리의 변방 지역을 노략질하는 것이 상습화되었는데,
이제 원수 갚는 일을 끝냈으니,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본국에서는 거란의 군사가
물러갔다고 들었으나 오히려 예측하지 못한 근심이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이에 본국에서는 병란을 피하여
도망온 여진 사람 2천여 명에게 물자를 주어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여진에서는 또 본국에게 매하진(梅河津)을 봉쇄하고 성루를 쌓아 거란을 방비하라고 권하였다. 이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막 그곳을 둘러보고 공사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진은 군사를 몰래 출동시켜 본국의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으며, 장정을 잡아가서 모두 노예로
삼은 뒤 다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 보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여진이 해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때문에
감히 군사를 내어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도리어 본국을 무고하여 황제를 현혹시킬 줄
알았겠는가. 본국이 대대로 중국에 정삭(正朔)을 여쭙고 조공을 바치고 있는데, 어찌 감히 두마음을 두어
외국과 몰래 내통하겠는가. 하물며 거란은 요해(遼海)의 바깥에 끼어 있고 또 대매하(大梅河)ㆍ
소매하(小梅河)의 두 강으로 막혀 있으며, 여진ㆍ발해는 본래 일정한 주거지가 없으니, 어떤 경로를 통해
오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터무니없는 말로 참소와 비방을 하니, 분통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막힌다. 일월이
지극히 밝으니 굽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병란을 피하여 도망온 여진의 무리를 모두 구휼해
주었으며, 또한 본국에서 관직을 제수받아 본국에 남아 있는 자가 아직도 있는데, 높은 관직에 있는 자로는
물굴니우(勿屈尼于)ㆍ주원(郍元)ㆍ윤능달(尹能達)ㆍ주노정(郍老正)ㆍ위가야부(衞迦耶夫) 등 십여 명이 있으니,
경사의 대궐로 불러들여 본국에서 조공하러 들어간 사신과 함께 뜰에서 그 일에 대해 해명하게 하기
바란다. 그럴 경우 변함없는 우리의 충심이 밝혀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한국화가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고, 곧바로 군사를 징발하여 서쪽에서 모이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왕치가 시일을 끌면서 곧바로 조서대로 시행하지 아니하자, 한국화가 이를 여러 번 독촉하였으며,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돌아와 여진에 관한 일을 사실을 갖추어 진달하였다. 10월에 왕치가
고려의 학사(學士) 최한(崔罕)ㆍ왕빈(王彬) 등을 파견하여 국자감에 나아가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상동》
○ 단공(端拱) 원년에 성종 7년 왕치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더해 주고, 고공원외랑 겸 시어사
지잡사(考功員外郞兼侍御史知雜事) 여단(呂端)과 기거사인(起居舍人) 여우지(呂祐之)를 사신으로 보내었다. 《상동》
○ 2년에 성종 8년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조서를 내려 사신으로 온 정사(正使) 선관 시랑
(選官侍郞) 한인경(韓藺卿)과 부사 병관 낭중(兵官郞中) 위덕유(魏德柔)에게 모두 금자광록대부
(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고, 판관(判官) 소부 승(少府丞) 이광(李光)에게 검교수부원외랑(檢校水部員外郞)을
제수하였다. 이에 앞서 왕치가 승(僧) 여가(如可)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 조근하게 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사하였다. 이어 여가에게 자의(紫衣)를
하사하고,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게 하였다. 《상동》
○ 순화(淳化) 원년 성종 9년 3월에 조서를 내려서 왕치에게 식읍(食邑) 1천 호를 더하고, 호부 낭중
(戶部郞中) 시성무(柴成務)와 병부원외랑 직사관(兵部員外郞直史館) 조화성(趙化成)을 파견하여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고려의 풍속에서는 음양술(陰陽術)과 귀신에 관한 설을 믿어 꺼리는 것이 아주 많아,
매양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반드시 길한 달, 좋은 날짜를 택해 예식을 갖추어 조서를 받았다. 시성무가
사신으로 와서 객관(客館)에 머무른 지 한 달이 넘게 되자, 마침내 왕치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왕이 대대로 번국(藩國)으로서 왕실(王室)을 존숭하므로 큰 경사가 있을 적마다 가장 먼저 휘장(徽章)을
받았습니다. 지금 중국 조정에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특수한 은총을 내림에 있어서 머나먼 물길을
지나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득한 바다를 파도를 헤치고 건너왔으니, 황조에서 고려를 대우하는 것이
역시 융숭한 셈입니다. 그런데 금기(禁忌)에 얽매이고 점술에 구애받아, 점치는 자의 허튼소리에 현혹되어
천자의 조서를 받드는 것을 지체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천자의 책명(册命)에 기록된 내용은 점치는 자
따위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서도 상일(上日)만을 말하였지 육갑(六甲)에
있어서 좋은 일진은 가리지 않았으며, 《예기(禮記)》에서는 중동(仲冬)을 기록하여 일양(一陽)이 처음
생동하는 좋은 시기만을 취하였습니다. 찬란한 옛날의 훈계를 밝게 상고할 수가 있는바, 마땅히 생각을
바꾸어 황제가 내리신 조서를 빨리 받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조서로 내린 명령을 즉시 시행해서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낼 경우, 황제의 은총이 빛나 칙명을 욕되게 하였다는 책망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알리는 바이니, 왕께서는 저의 말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왕치가 글을 보고는 부끄럽고 두렵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사과하였다. 그때 마침 장맛비가
그치지 않고 내렸는데, 왕치가 날씨가 개기를 기다려서 조서를 받겠다고 하자, 시성무가 또다시 글을
보내어 힐책하였다. 이에 왕치가 다음 날에 나와 조서를 받았다. 《상동》
○ 2년에 성종 10년 고려에서 한언공(韓彦恭)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조공을 바쳤다. 한언공이 표문을
올려 왕치의 뜻을 아뢰고 불경(佛經)을 간행하여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대장경(大藏經)》
및 황제가 지은 《비장전(祕藏詮)》ㆍ《소요영(逍遙詠)》ㆍ《연화심륜(蓮花心輪)》 등의 서책을 하사하였다.
《상동》
○ 요 통화(統和) 10년 성종 11년 11월에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항덕(蕭恒德) 등이 고려를 정벌하였다.
《요사》
○ 송 순화 4년 성종 12년 정월에 왕치(王治)가 백사유(白思柔)를 사신으로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아울러
불경과 황제가 지은 책을 하사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2월에 비서 승 직사관(祕書丞直史館)
진정(陳靖)과 비서 승 유식(劉式)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왕치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를 더해 주고, 이어
조서를 내려 군리(軍吏)와 기로(耆老)들을 위로하였다. 진정 등이 사신으로 갈 때 동모(東牟)에서 출발하여
팔각해구(八角海口)로 나갔다. 그곳에서 고려 사신 백사유가 탄 배와 고려의 수공(水工)을 만나 그 배를
얻어 탔다. 곧 길을 떠나 지강도(芝岡島)로부터 순풍을 만나 바다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옹진(甕津) 어귀에
닿아 상륙한 뒤, 다시 육로로 1백 60리를 가서 고려의 경내인 해주(海州)에 닿고, 또 1백 리를 가서
염주(閻州)에 닿고, 또 40리를 가서 백주(白州)에 이르고, 또 40리를 가서 그 국도(國都)에 이르렀다.
왕치는 사신을 교외에서 맞이하여 번신(藩臣)의 예절을 다하였다. 진정 등을 70여 일 동안 머물게 하다가
돌려보냈는데, 돌아올 때 습의(襲衣), 금대(金帶), 금기(金器), 은기(銀器) 수백 벌과 포(布) 3만여 단(端)을
주고, 표문을 부쳐 사은하였다. 이에 앞서 순화 3년에 황제가 제도(諸道)의 공거인(貢擧人) 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는, 조서를 내려 고려의 빈공 진사(賓貢進士) 왕빈(王彬)과 최한(崔罕) 등을 급제시키고, 얼마 뒤에
관직을 제수한 다음 고려로 돌려보내었다. 이때에 이르러 진정 등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편에
왕치가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표문은 예문지에 나온다. 또 장인전(張仁銓)이란 자가 있었는데,
진봉사(進奉使) 백사유(白思柔)의 공목리(孔目吏)로서 마음대로 중국 조정에 글을 올려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백사유가 장인전이 고려의 기밀 사항을 중국 조정에 고하였다고 생각하자, 장인전이 두려워서 감히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상이 진정 등에게 명하여 장인전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하고는, 이어
왕치에게 조서를 내려 장인전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치가 또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표문은 예문지에 나온다. 또 왕치가 상언하여 판각(板刻)된 구경(九經)의 서책을 하사하여 유교(儒敎)를
진흥시켜 달라고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식 등이 복명하면서 ‘왕치가 사신으로
원증연(元證衍)을 파견하여 우리들을 호송하게 하였는데, 원증연이 안향포(安香浦)의 포구에 이르러서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지는 바람에 싸 가지고 온 물품이 모두 가라앉았다.’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등주(登州)에 조서를 내려 원증연에게 증명서를 발급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이어 왕치에게 옷감
2백 필, 은기 2백 벌, 양 50마리를 하사하였다. 《송사》
○ 요 통화 11년 성종 12년 3월에 고려 왕 왕치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죄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여진(女眞)에게서 빼앗았던 압록강(鴨淥江) 동쪽 수백 리의 땅을 고려에 내주었다. 《요사》
○ 12년 성종 13년 3월 정사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사로잡아 간 사람과 가축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서 속환(贖還)하게 하였다. 병인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에 유시하였다. 《상동》
○ 송나라 순화(淳化) 5년 성종 13년 6월에 고려에서 사신 원도(元都)를 파견하여 구원병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면서, 거란이 침입해 왔다고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북쪽 변경이 겨우 평온해졌으니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켜서 국가에 일이 발생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단지 조서만을 내려서
위무하고, 사신을 정중하게 접대하여 보내었다. 이 뒤로는 고려에서 거란의 제재를 받아 조공을
중단하였다. 《송사》
○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성종 13년 갑오에 거란의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로부터 송나라와는 국교가 단절되었다.
○ 요 통화 13년 성종 14년 11월 신유에 사신을 보내어서 왕치를 책봉하여 고려국왕으로 삼았다.
무진에 고려에서 동자(童子) 10명을 보내어 요나라 말을 배우게 하였다. 《요사》
○ 14년 성종 15년 3월 임인에 고려 왕 왕치가 표문을 올려 혼인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동경 유수
(東京留守)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경술에 고려에서 다시 동자 10명을 보내어
요나라 말을 배우게 하였다.
○ 6월 기축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으며, 뒤에는 수시로 사신이 왔다. 《이상 모두 상동》
○ 15년에 성종 16년 고려에서 한언경(韓彦敬)을 보내어 폐백을 바치고 부마 소항덕(蕭恒德)의 처 월국공주
(越國公主)가 훙한 것을 조문하였다.
○ 11월에 왕치가 훙하니, 왕치의 조카 왕송(王誦)이 왕동영(王同頴)을 보내어 부음을 고하였다.
12월 갑인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 왕 왕치에게 제사 지내고 조서를 내려 그의 조카를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삼았다. 《이상 모두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목종(穆宗) 왕송은 바로 경종의 장자(長子)로 성종의 당질(堂姪)이다.
그러니 《송사》에서 왕치가 졸하자 동생 왕송이 즉위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16년 목종(穆宗) 원년 11월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국왕 왕송을 책봉하였다. 《상동》
○ 송 진종(眞宗) 함평(咸平) 3년이다. 목종 3년 고려의 왕송(王誦)이 일찍이 병교(兵校) 서원(徐遠)을
보내와서 조정에 문안하였는데, 거리가 멀어서 덕음(德音)이 오래도록 미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송의 신하 이부 시랑 조지린(趙之遴)이 아장(牙將) 주인소(朱仁紹)에게 명하여 등주(登州)에 와서 정탐하게
하였다. 등주의 장수가 이 사실을 아뢰자, 황제가 특별히 주인소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 그 자리에서
주인소가 고려 사람들이 황제의 교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거란에게 견제를 당하고 있다는 상황을
진달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왕송에게 전함(鈿函)에 담은 조서 한 통을 내려 주인소로 하여금 싸 가지고
가게 하였다. 《송사》
○ 요 통화 20년 목종 5년 2월 정축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송나라를 정벌하여 이긴 것을 축하하였다.
7월 신축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서 조공하면서 고려의 《지리도(地里圖)》를 바쳤다. 《요사》
○ 송 함평(咸平) 6년에 목종 6년 왕송이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선고(李宣古)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회하면서 사은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후진(後晉)에서 연(燕)과 계(薊) 지방을 거란에게 빼앗긴 탓에 드디어 현도(玄菟)와 통하는 길이 생겨
번번이 와서 공격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으니, 송나라 군사를 변경에 주둔시켜서 이를 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정중하게 답하였다. 《송사》
○ 요 통화 22년 목종 7년 9월 기축에 남쪽으로 송나라를 정벌한다고 고려에 유시하였다. 《요사》
○ 23년 목종 8년 5월 병인에 송나라와 화친하니,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였다. 《상동》
○ 28년 현종(顯宗) 원년 5월 병오에 고려의 서경 유수(西京留守) 강조(康肇)가 임금 왕송을 시해하고
제 마음대로 왕송의 종형(從兄) 왕순(王詢)을 세웠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강조가 통화 27년(1009)
기유에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 왕순을 세웠는데, 현종은 바로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왕욱(王郁)의 아들로,
목종에게는 종숙(從叔)이 된다. 그러니 《요사》에서 종형이라고 한 것이나 《송사》와 《고려도경》에서 목종의
동생이라고 한 것은 모두 틀린 것이다. 조서를 내려서 각도(各道)의 병기를 수선하여 동쪽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 황제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 왕송을 시해하고는 왕송의 족형인 왕순을 왕으로 세운 다음 그가 정승 노릇을 하니,
이는 큰 역적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 죄를 문책해야 하겠다.”
하니, 신하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그런데 소적렬(蕭敵烈)이 아뢰기를,
“국가가 여러 해 계속 정벌을 행하여 사졸들이 지쳤는데, 더구나 지금은 폐하께서 상중에 계십니다. 또
농사마저 흉년이 들어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았으며, 섬오랑캐의 작은 나라는 성루(城壘)가 튼튼합니다.
그들과 싸워 혹 승리한다 하더라도 무위(武威)를 빛낼 수 없을 것이며, 만일 승리하지 못할 경우에는
후회를 끼칠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사신 한 사람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묻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저들이
만일 죄를 자복하면 덮어 두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성상의 상기(喪期)가 끝나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군사를 일으켜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황제의 명령이 이미 내려져 그 말이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식자들이 옳게 여겼다.
○ 8월 정묘에 황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면서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그 사실을
통보하였다. 그러고는 황제의 동생인 초국왕(楚國王) 융우(隆祐)에게 경사(京師)에 남아서 지키게 하고,
북부재상(北府宰相) 부마도위(駙馬都尉) 소배압(蕭排押)을 도통(都統)으로, 북면임아(北面林牙) 승노(僧奴)를
도감(都監)으로 삼았다. 9월 신묘에 추밀 직학사(樞密直學士) 고정(高正), 인진사(引進使) 한기(韓杞)를 고려에
파견하여 고려 왕 왕순에게 사유를 물었다. 10월 초하루 병오에 여진에서 좋은 말 1만 필을 진공하면서
고려를 정벌하는 데 종정(從征)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왕순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면서 출병을 파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11월 을유에 대군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강조(康肇)가 막아 싸우는 것을 패퇴시키니,
강조가 동주(銅州)로 물러나 있었다.
○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선봉장이 되어 동주(銅州)에 이르자, 강조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요나라 군사에
항거하였다. 한 군대는 동주의 서쪽 삼수(三水)가 만나는 지점을 차지해 주둔하여,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있었고, 한 군대는 동주에서 가까운 산에 주둔하였으며, 다른 한 군대는 성에 붙어서 주둔해 있었다.
병술에 야율분노가 야율홍고(耶律弘古)와 우피실(右皮室)의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삼수에 주둔한 군대를 격파한 다음 강조와 부장(副將) 이현온(李玄蘊) 등을 사로잡으니, 군사들이 바람에
쓸리듯 무너졌다. 이때 마침 대군이 이르러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3만여 명을 참수하였으며, 고려 군사들이
버린 군량미, 갑옷, 무기 따위를 노획하였다. 무자에 동주(銅州)ㆍ곽주(霍州)ㆍ귀주(貴州)ㆍ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도(北道)를 경유하여 나아가 노고달령(奴古達嶺)에 이르러서
적병을 만나 싸워 패퇴시켰다.
신묘에 왕순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조회하겠다고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고 군사들이 고려
사람들을 포로로 잡거나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런 다음 정사사인(政事舍人) 마보우(馬保佑)를
개경 유수(開京留守)로 삼고, 안주 단련사(安州團練使) 왕팔(王八)을 부유수로 삼았으며, 태자태사(太子太師)
을름(乙凛)으로 하여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마보우 등을 호송하고서 개경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또 고정(高正)을 파견하여 왕순을 맞이해 와 들어와서 조회하게 하였다. 임진에 고려의 수장(守將)
탁사정(卓思正)이 요나라 사신 한희손(韓喜孫) 등 10명을 살해하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항거하였다.
고정(高正)이 도중에 머물러 있다가 탁사정에게 포위되었다. 고정이 형세상 고려의 상대가 되지 않으므로
휘하의 장사들과 함께 포위망을 돌파해 나왔는데, 죽거나 부상당한 사졸이 아주 많았다. 이에 마보우 등이
되돌아왔다. 을름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서 탁사정을 치게 하니, 탁사정이 마침내 서경(西京)으로
도망쳤다. 5일 동안이나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성종(聖宗)이 성의 서쪽에 주필(駐蹕)하였다. 고려에서 예부 낭중(禮部郞中) 발해타실(渤海陀失)이 와서
항복하였다. 경자에 성종이 소배압과 야율분노 등을 파견하여 개경을 공격하였는데, 서령(西嶺)에 이르러서
고려 군사를 만나 격파하고서 수천 급을 참수하였다. 고려 왕 왕순이 변성(邊城)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성을 버리고 평주(平州)로 도망하였다. 이에 소배압과 야율분노 등이 개경으로 들어가서
왕궁을 불사른 다음 백성들을 위무하고서 청강(淸江)으로 와 있다가 회군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고려가 임금 왕송을 시해하고서 왕순을 세웠는데, 요나라에서 그 죄를 추궁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니
고려에서는 마땅히 음식물을 싸 들고서 나와 요나라의 군사를 맞이하고, 숙소를 청소해 놓고서 기다려야
마땅하였다. 그런데 험한 곳에 웅거하고 군대를 들어 항거해 요나라로 하여금 지혜로운 자가 지모를 다
쏟고 용맹한 자가 힘을 다 쓰게 하였다. 비록 그 수도를 얻은 바 있었지만, 좁다랗게 바다 한 귀퉁이에
있는 고려는 예전 그대로였다. 그러니 어찌 다른 사람을 승복시키는 것은 힘으로는 안 되고 덕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고려의 궁실을 무너뜨리고 고려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았으니, 이는 이른바
죄를 물을 자격이 없는 자가 죄를 묻는 군사를 출동시킨 것이다. 아, 주애군(朱崖郡)을 버린 것은
가연지(賈捐之)의 힘이었다. 소적렬(蕭敵烈)이 아뢴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하였다. 《상동》
○ 송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이다. 현종 원년 이에 앞서 거란이 고려를 습격하자, 고려에서는
흥주(興州)ㆍ철주(鐵州)ㆍ통주(通州)ㆍ용주(龍州)ㆍ구주(龜州)ㆍ곽주(郭州) 등 여섯 성을 국경에 쌓았는데,
거란에서 자기들을 배반한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 여섯 성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왕순(王詢)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거란이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서 도성으로 쳐들어가 궁실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약탈하니,
왕순은 승라주(昇羅州)로 옮겨 피난하였다. 거란 군사가 물러가자 사신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니,
거란에서 여섯 성 문제를 들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고려에서 군사를 보내어 이 여섯 성을 지키게
되었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성종 때 여섯 성을 쌓았다. 거란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입해
오자, 왕순은 여진과 더불어 기병(奇兵)을 매복해 요격하여 거란 군사를 거의 모두 죽였다. 왕순이 또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아 내원성(來遠城)과 서로 마주 보게 하였다. 그러고는 강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은
다음 군사를 매복시켜 새로 쌓은 성을 튼튼하게 하였다. 《송사》
○ 거란에서 고려를 정벌한다고 떠들어 대면서 요양성(遼陽城)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에 진종(眞宗)이 왕조(王朝) 등에게 이르기를,
“지금 거란에서 고려를 정벌한다고 하는데, 만일 고려가 위급해져 우리에게 귀부하거나 혹 우리에게
구원병을 보내 주기를 요구할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자, 왕조가 아뢰기를,
“그 큰 것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거란은 현재 우리와 동맹을 굳게 맺고 있고, 고려는 조공을 여러 해
동안 바치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등주(登州)에 유시하여,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해 구원병을 보내 달라고 청해 올 경우에는 즉시
‘여러 해 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감히 조정에 상달할 수가 없다.’고 하게 하고, 귀순해 오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보살펴 주기만 하고 조정에 보고하지는 말게 하라.”
하였다. 《의각료잡기(猗覺寮雜記)》
○ 요 통화 29년 현종 2년 정월 초하루 을해에 고려에서 군사를 철수시키자, 항복하였던 고려의 여러
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귀덕주(貴德州)의 남쪽 산악 지역에 이르렀을 때 큰비가 연일 내렸는데,
날씨가 개고서야 겨우 강을 건널 수 있었으며, 말과 낙타가 모두 피로하여 병기를 대부분 버렸다.
기축에 압록강에 주둔하고 임진에 조서를 내려 군사들을 파하였다.
○ 2월 무오에 포로로 잡아 온 고려 사람들을 여러 능묘(陵廟)에 나누어 있게 하고, 나머지는 내척(內戚)과
대신(大臣)들에게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요사》
○ 개태(開泰) 원년 현종 3년 4월 경자에 고려에서 채충순(蔡忠順)을 보내어 옛날과 같이 칭신(稱臣)하기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왕순(王詢)이 직접 조회하라고 하였다. 8월 기미에 고려 왕이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병이 있어 직접 조회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다시 강동의 여섯
주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상동》
○ 2년 현종 4년 6월 초하루 신유에 중승(中丞) 야율자충(耶律資忠)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여섯 주의
옛 땅을 다시 취하게 하였다. 8월 기축에 야율자충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 10월 병인에 상온(詳穩) 장마류(張馬留)가 고려에 대해 잘 아는 여진 사람을 바쳤다.
황제가 고려에 대해 물으니, 답하기를,
“신이 3년 전에 고려에 포로로 잡혀 낭관(郞官)으로 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이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살펴보건대, 승라주가 《송사》에는 승라주(昇羅州)로
되어 있다. 남쪽에도 두 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前路)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의 북쪽 길을 취하여 곧장 압록강과 대하(大河)를 건넌 다음
올라가면 곽주(郭州)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이상 모두 상동》
○ 3년 현종 5년 2월 갑자에 상경부유수(上京副留守) 야율자충(耶律資忠)을 다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강동 여섯 주의 옛 땅을 취하게 하였다.
○ 5월에 조서를 내려 국구(國舅)인 상온(詳穩) 소적렬(蕭敵烈)과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단석(耶律團石)
등으로 하여금 고려를 정벌하게 하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놓고, 보주(保州)ㆍ선의주(宣義州)ㆍ정원주(定遠州) 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송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에 현종 5년 고려에서 고주사(告奏使)로 어사공부 시랑(御事工部侍郞)
윤증고(尹證古)를 보내와 금실로 짜서 만든 용봉안(龍鳳鞍)과 수놓은 용봉안복(龍鳳鞍㡤) 각 두 벌과
세마(細馬) 2필, 산마(散馬) 20필을 조공으로 바쳤다. 윤증고가 돌아갈 때 왕순에게 조서(詔書) 7통 및
의대(衣帶), 은채(銀綵), 안륵마(鞍勒馬) 등을 하사하였다. 《송사》
○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왕 왕순이 거란을 크게 격파하고는 대중상부 7년에 다시 조공을
바치면서, 존호(尊號)를 내려 주고 정삭(正朔)을 반포해 주고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진종이 처음에는
그대로 따라 주려고 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곤란하다고 하자, 드디어 그 명을 중지하고는 조서만 내려
주었다.” 하였다.
○ 이때 여진 역시 장군(將軍) 대천기(大千機)를 파견하여 고려의 사신을 따라 들어와서 조공을 바쳤다.
여진은 대개 옛 숙신씨(肅愼氏)로 대대로 혼동강(混同江)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압록강 발원지 부근에
살아왔는데, 남쪽으로는 고려와 인접하였고,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발해(渤海)ㆍ철전(鐵甸)과 경계를 나누었고, 동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았다.
여진의 추장은 본디 신라 사람으로 완안씨(完顔氏)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말의 왕(王)과 같은 말이다.
여진 사람들이 그가 일을 잘 처리하는 데 감복해서 수령으로 추대한 것이다. 순화(淳化) 2년(991)에 발해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여진에 조서를 내려서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발해 사람 수급 하나에 비단
5필씩으로 쳐주었다. 그 뒤에 드디어 고려로 귀화하여 복속되었다. 대중상부 3년(1010)에 거란이 고려를
정벌하였는데, 여진을 경유하여 진군하였다. 이에 여진이 고려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서 항거하여 거란은
많은 군사를 잃어버리고 돌아갔다. 이때에 이르러서 고려의 사신과 함께 오자, 숙소와 음식 및 잔치를
베풀어 주는 예를 고려의 사신에게 해 주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8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왔는데, 고려의
사신을 따라 함께 왔다. 《문헌통고》
○ 8년에 현종 6년 등주(登州)에 조서를 내려서 해변에 관(館)을 설치하고 사신을 접대하게 하였다. 그해에
또 고려가 어사민관 시랑(御事民官侍郞) 곽원(郭元)을 보내와서 조공하였다. 곽원이 스스로 본국의 국경은
남쪽에서 북쪽까지가 1천 5백 리이고 동쪽에서 서쪽까지가 2천 리라고 하였다. 곽원은 언사와 용모가
공손하고 단정하여 잔치를 받을 때마다 반드시 손수 사표(謝表)를 지었는데, 자못 문장이 좋아 조정에서도
후하게 대접하였다. 《송사》
○ 요 개태(開泰) 4년 현종 6년 4월 갑인에 소적렬(蕭敵烈) 등이 고려를 정벌하러 갔다가 돌아왔다. 5월
신사에 북부재상(北府宰相) 유성(劉晟)을 도통(都統)으로, 추밀사(樞密使) 야율세량(耶律世良)을 부도통으로,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소굴렬(蕭屈烈)을 도감(都監)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였다. 유성이 약속한 기일을
지체시키자, 뒤미쳐 돌아오게 하고, 야율세량과 소굴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토벌하게 하였다.
《요사》
○ 5년 현종 7년 정월 경술에 야율세량과 소굴렬이 살펴보건대, 《요사》 제70권 속국표(屬國表)에는
소굴렬이 소선녕(蕭善寧)으로 되어 있다. 고려와 더불어 곽주(郭州)의 서쪽에서 싸워 격파하고는 수급 1만여
급을 베었으며, 군수 물자를 모두 노획하였다. 《상동》
○ 송 대중상부 9년에 현종 7년 고려의 사신 곽원이 하직하고 돌아갈 때 왕순(王詢)에게 조서(詔書)
7함(函)과 습의(襲衣), 금대(金帶), 기폐(器幣), 안마(鞍馬) 및 경서(經書), 사서(史書), 역일(曆日),
《성혜방(聖惠方)》 등을 하사하였다. 곽원이 또 《국조등과기(國朝登科記)》와 하사한 어시(御詩)를 베껴
가지고 돌아갈 것을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송사》
○ 천희(天禧) 원년에 현종 8년 고려에서 어사형관 시랑(御事刑官侍郞) 서눌(徐訥)을 파견하였는데,
숭정전(崇政殿)에서 표문을 올리면서 방물을 바쳤다. 또 수춘군왕(壽春郡王)을 봉하여 세운 것을
하례하였다. 《상동》
○ 요 개태 6년 현종 8년 2월 정축에 조서를 내려서 국구장(國舅帳)의 상온(詳穩) 소외와(蕭隗洼)에게
본부(本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5월 초하루 무술에 추밀사(樞密使)
소합탁(蕭合卓)을 도통(都統)으로, 중국 사람인 행궁도부서(行宮都部署) 왕계충(王繼忠)을 부도통으로,
전전점검(殿前點檢) 소굴렬(蕭屈烈)을 도감(都監)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9월 을묘에 소합탁 등이
고려의 흥화군(興化軍)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군사를 철수하였다. 《요사》
○ 7년 현종 9년8월 병진에 조서를 내려 동평군왕(東平郡王)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소허열(蕭虛烈)을 부총(副摠)으로,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팔가(耶律八哥)를
도감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였다. 이어 고려의 수리(守吏)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스스로 귀순하여 오는
자에게는 후하게 상을 내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항거하는 자는 뒤늦게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이다.’고
유시하였다.
○ 12월에 소배압 등이 개경(開京)에 이르자, 적들이 무너졌다. 이에 군사들을 풀어 사로잡고 노략한 다음
돌아왔다. 군사들이 다타이하(茶陀二河)를 건널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의 군사들이 쫓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려의 군사들로 하여금 두 강물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야율팔가 혼자서만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적들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인바, 이는
위태로운 방법이다. 그러니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다. 적군이 양쪽에서 화살을 쏘아 대어 요나라 군사들이 불리하자, 소배압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천운(天雲)과 우피실(右皮室) 두 부대의 군사들 가운데 강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천운군의 상온(詳穩) 해리(海里), 요련(遙輦)의 상온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渤海)의
상온 고청명(高淸明) 등이 모두 진중에서 죽었다. 《이상 모두 상동》
○ 8년 현종 10년 3월 을해에 동평왕(東平王) 소한녕(蕭韓寧),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팔가(耶律八哥),
국구인 평장사(平章事) 소배압(蕭排押), 임아(林牙) 요지(要只) 등이 고려를 토벌하러 갔다가 돌아왔다.
군사를 잃은 죄에 연좌되어 죄를 낱낱이 따진 뒤 석방하였다. 기묘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운 발해의 장교관(將校官)들에게 관직을 높여 주었다. 6월 무자에 고려를 정벌하다가 사망한 장교의
자제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을사에 남피실(南皮室)의 군교(軍校)들이 고려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금과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7월 기미에 고려를 정벌하다가 죽은 여러 장수들에 대해 조서를
내려서 그의 아내들에게는 봉작(封爵)을 올려 주고, 자제들은 녹용하였다.
신유에 효리(肴里)ㆍ열가(湼哥) 두 해(奚)의 군사들이 고려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모두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8월 경인에 낭군(郞君) 갈불식(曷不式) 등을 파견하여 여러 부(部)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대군을 편성해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12월 신해에 왕순(王詢)이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치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받아들였다. 《상동》
○ 송 천희(天禧) 3년 현종 10년 9월에 등주(登州)에서 아뢰기를,
“고려의 진봉사(進奉使) 예빈 경(禮賓卿) 최원신(崔元信)이 진왕수(秦王水) 어귀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서 공물(貢物)이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내신(內臣)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11월에 최원신 등이 들어가서 알현하면서
계금의(罽錦衣), 계금욕(罽錦褥), 오칠갑(烏漆甲), 금으로 장식한 장도(長刀)와 비수(匕首), 계금안마(罽錦鞍馬),
저포(紵布), 약물(藥物) 등을 바쳤다. 또 중포(中布) 2천 단을 바치면서 불경(佛經) 1장(藏)을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칙을 내려 불경을 하사하고 포(布)는 도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최원신 등이 배가 침몰되어
물자가 다 떨어졌으므로 특별히 의복과 비단 등을 하사하였다. 명주(明州)와 등주에서 자주 고려의
해선(海船)이 풍랑에 표류하여 해변에 떠밀려 왔다고 아뢰자, 그때마다 조서를 내려서 위로하고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필요한 식량을 지급해서 돌려보내게 하였는데, 이것이 그대로 규례가 되었다. 《송사》
○ 요 개태 9년 현종 11년 5월 경오에 야율자충(耶律資忠)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왕순이
표문을 올려서 번국(藩國)을 칭하고 조공을 바치기를 청하였으며, 구류하고 있던 왕인(王人)
지랄리(只剌里)를 돌려보냈다. 지랄리는 고려에 6년간 구류되어 있었는데, 충절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임아(林牙)로 삼았다. 신미에 사신을 보내어 왕순의 죄를 풀어 주었으며, 아울러 그가 요청한 것을
윤허하였다. 《요사》
○ 송 천희 5년 현종 12년 왕순이 고주사(告奏使) 어사예부 시랑(御事禮部侍郞) 한조(韓祚) 등 1백 79명을
파견하여 와서 사은하였으며, 또 거란과 수호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표문을 올려 음양지리서
(陰陽地理書)와 《성혜방(聖惠方)》을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모두 하사하였다. 《송사》
○ 건흥(乾興) 원년 현종 13년 2월에 한조 등이 하직 인사를 하고 귀국하게 되니, 왕순에게 예전과
마찬가지로 하사하였다. 마침 진종(眞宗)의 상(喪)을 당하여 또 유물(遺物)을 싸 보내서 왕순에게
하사하였다. 《상동》
○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 현종 21년 왕순이 다시 어사민관 시랑(御事民官侍郞) 원영(元穎) 등
2백 93명을 파견하니, 표문을 받들고서 장춘전(長春殿)에서 황제를 알현하였으며, 금기(金器),
은계도검(銀罽刀劍), 안륵마(鞍勒馬), 향유(香油), 인삼(人蔘), 세포(細布), 동기(銅器), 유황(硫黃),
청서피(靑鼠皮) 등의 물품을 조공으로 바쳤다. 《상동》
○ 《고려도경》에는, “천성(天聖) 연간에 고려의 사신이 여진의 사신과 함께 들어와 공물을 바쳤다.
천자가 은혜를 내리고 예우함이 대단하였다.” 하였다.
○ 9년 현종 22년 2월에 원영 등이 하직 인사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등주까지 원영 등을 호송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의 왕래가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못한
지가 43년이나 되었다. 《상동》
○ 《고려도경》에는, “고려 왕 왕순(王詢)이 졸하고 아들 왕륭(王隆)이 즉위하였는데, 결단성이 부족하여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힘이 모자라 북쪽 오랑캐를 꺼려 드디어 다시 신하로 섬겼다. 이에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졌다. 왕륭이 죽자 정(正)이라고 사시(私諡)를 올렸다. 아들 덕왕(德王) 왕흠(王欽)과 왕흠의 동생
목왕(穆王) 왕형(王亨)도 모두 조공하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으며, 조정에서도 역시 사신 보내는 것을
파하였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현종이 훙하고 태자 왕흠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덕종(德宗)으로,
그사이에는 이름이 왕륭이고 시호가 정(正)인 임금이 없다. 《고려도경》에서 말한 것은 어디에 근거하여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 요 태평(太平) 11년 현종 22년 12월 신축에 고려 왕 왕순이 훙하니, 그의 아들 왕흠(王欽)이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였다. 즉시 사신에게 명하여 왕흠을 고려국왕에 책봉하도록 하였다. 《요사》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현종 왕순이 요 태평 11년 신미에 훙하고 덕종 왕흠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요사》에는 태평 2년의 일로 되어 있는바, 이는 틀린 것이므로 《고려사》를 따라서 바로잡았다.
○ 태평 7년 덕종 때 11월 계해에 삼한왕(三韓王) 왕흠을 계성군 절도사(啓聖軍節度使)로 삼았다.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덕종 왕흠은 요 중희(重煕) 원년(1032) 임신에 즉위해서 3년 갑술에 훙하였으니,
덕종이 계성군 절도사가 된 것은 마땅히 중희 초년의 일이어야 할 것이다. 태평 7년(1027)이라 한 것은
아주 틀린 것이다.
○ 흥종(興宗) 중희 15년 정종(靖宗) 12년 8월 계축에 고려 왕 왕흠이 훙하니, 사신을 보내어 와서
고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덕종 왕흠이 요 중희 3년 갑술에 훙하고 동생
정종(靖宗) 왕형(王亨)이 중희 4년 을해에 즉위하여 12년간 재위하다가 이해 병술에 훙하였다. 그런데
《요사》에는 덕종이 이해에 훙하였다고 썼으니, 혹 당시 국내에 일이 많아서 이때 비로소 와서 고한
것인가?
○ 23년 문종 8년 6월 임인에 고려 왕 왕휘(王徽)가 그의 아들에게 관작을 제수해 주기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검교태위(檢校太尉)를 가하였다. 《상동》
○ 송 신종(神宗) 희령(煕寧) 2년에 문종 23년 고려 왕 왕순의 손자 왕휘(王徽)가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문왕(文王)이다. 살펴보건대, 문종은 바로 현종의 아들이고 정종의 동생이다. 《송사》에 현종의
손자라고 한 것은 틀린 것이고, 《고려도경》에 목왕 왕형의 동생 왕휘라고 한 것이 맞다. 고려의
예빈성(禮賓省)에서 복건전운사(福建轉運使) 나증(羅拯)에게 이첩하기를,
“본조의 상인 황진(黃眞)ㆍ홍만(洪萬)이 와서 말하기를, ‘복건전운사가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고려와 접촉하여 통호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국왕의 뜻을 받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글은 예문지에 나온다. 지금 공장(公狀)을 황진과 홍만이 서쪽으로 돌아가는 편에 부쳐 보내니, 회답이
오기를 기다려 즉시 예물을 갖추어 조공하겠습니다.”
하였다. 왕휘가 또 일찍이 꿈속에서 중국에 갔었는데, 시를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송사》
○ 《봉창일록(蓬窓日錄)》에는, “고려는 송나라 태종 단공(端拱) 이후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왕휘가
즉위한 뒤 어느 날 밤의 꿈속에서 변경(汴京)에 이르자, 황제가 불러서 관등(觀燈)놀이를 하였는데, 왕휘가
그 사실을 시로 지어 기록하였다. 그리고 신종 때에 이르러서 다시 옛 고사를 따라 행하였으니, 꿈속에서도
중화(中華)를 잊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 시는 예문지에 나온다.
○ 3년 문종 24년 나증이 이 일을 조정에 아뢰니, 의논하는 자들 역시 고려와 맺어 거란을 치기를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허락하고, 나증에게 명하여 후하게 대접하라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왕휘가 드디어 민관 시랑(民官侍郞) 김제(金悌) 등 1백 10명을 보내왔다. 조서를 내려서
하국(夏國)의 사신과 같게 접대하도록 하였다. 《상동》 ○
《동파집(東坡集)》에는, “원우(元祐) 2년(1087) 2월 17일에 왕호병(王虎炳)이 말한 것을 보니,
‘예전에 추밀원예방검상문자(樞密院禮房檢詳文字)가 되어 고려에서 보내온 공안(公案)을 보니,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에 사신으로 감을 인하여 오랑캐의 장중(帳中)에서 고려의 사신을 만났는데, 고려의
사신이 그 임금이 중국을 흠모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러자 장성일이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아뢰니,
선제(先帝)께서 비로소 고려를 불러오게 할 뜻이 있었다. 추밀사(樞密使) 여공필(呂公弼)이 이를 인해 선제의
뜻에 영합하여 직접 글을 지어 차자로 올려 고려를 불러오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드디어 운사(運使)
나증(羅拯)에게 명하여 상인(商人)을 파견하여 고려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나증에 대해서만 잘못이라고 말할 뿐 여공필을 허물할 줄은 알지 못한다. 장성일과 같은 경우는 대개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하였다.
○ 7년에 문종 28년 고려 왕이 그의 신하 김양감(金良鑑)을 파견하여 보내왔다. 이때 고려 사람들이 중국에
왕래하면서는 모두 등주(登州)를 경유해 왔는데, 와서 아뢰기를 ‘거란과 멀리 하고자 하니, 길을 바꿔
명주(明州)를 경유해 예궐(詣闕)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군현에서는 고려의
사절(使節)을 접대(接待)하는 옛 준례가 없어서 백성들이 자못 괴로워하였다. 이에 조칙(詔勅)을 내려
법식(法式)을 세워 반포하였으며, 접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모두 관가에서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고려의
사신들이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탓에 모리(謀利)하는 자들이 사사로이 거래할까 염려하여 고려의 사신이
이르는 곳마다 왕래를 금지시켰다. 왕휘가 중서성과 추밀원에 선물하는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조칙을 내려
시장에서 교역하여 겸백(縑帛)을 사서 보답하게 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의약(醫藥)을 구하고 화소공(畫塑工)
을 파견하여 고려 사람들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나증(羅拯)에게 조칙을 내려 고려로 가기를 원하는
자를 모집하도록 하였다. 《상동》
○ 9년에 문종 30년 고려에서 다시 최사훈(崔思訓)을 보내오니, 황제가 총애하는 근시(近侍)에게 명해
도정(都亭)ㆍ서역(西驛)의 예에 따라 관소(館所)를 수리하여 아주 후하게 접대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
사신으로 나오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고려에서 일찍이 영관(伶官) 10여 명을 바치면서 아뢰기를,
“오랑캐의 음악이라 볼 것은 없지만 국사(國史)를 빛내고자 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고려는 글을 숭상하는 나라라고 하면서 조서를 내릴 적마다 반드시 글을 잘 짓는 신하를
뽑아 짓게 한 다음 그 가운데서 가장 잘된 것을 뽑아 보내었다. 《상동》
○ 《고려도경》에는, “희령(煕寧) 4년(1071)에 왕휘가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다시 조공을 바쳤다.
7년과 9년에 사신을 거듭 보내오자, 신종황제가 고려 왕의 충성을 가상하게 여겼다.” 하였다.
○ 요 도종(道宗) 태강(太康) 4년 문종 32년 4월 신해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압록강 이동의 지역을
돌려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요사》
○ 송 원풍(元豐) 원년에 문종 32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안도(安燾),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각기 가관(假官)으로 임명하려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빙문하였다. 명주(明州)에서 두 척의 배를
만들었는데, 한 척은 ‘능허안제치원(凌虛安濟致遠)’이라 하고, 또 한 척은 ‘영비순제(靈飛順濟)’로서 모두
신주(神舟)라고 이름하였다. 정해현(定海縣)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가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나와 맞이하였다. 왕휘가 포(袍)ㆍ홀(笏)ㆍ옥대(玉帶) 등을 갖추어 입고 절한 다음 조서를
받들었고, 안도와 진목을 대우함에 있어서도 예로써 하였다. 그들을 별궁(別宮)에다 묵게 하면서 관소의
이름을 순천관(順天館)이라 하였는데, 이는 ‘중국을 하늘처럼 높이 받들고 따른다’는 뜻이다.
이때 왕휘는 이미 병들었으므로 간신히 조서만을 받들었으며, 또 의약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송사》
○ 《고려도경》에는 왕휘가 풍비증(風痺症)을 앓았다고 하였다.
○ 2년에 문종 33년 왕순봉(王舜封)을 파견하여 의원을 데리고 고려로 가 진찰하고 치료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문종 33년 7월 신미에 송나라에서 왕순봉과 한림의관(翰林醫官)
형조(刑慥)ㆍ주도능(朱道能)ㆍ심신(沈紳)ㆍ소화급(邵化及) 등 88명을 보내오고 약 1백 종을 하사하였다.
왕휘가 또 유홍(柳洪)을 파견하여 사은하도록 하였는데,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조공할 물품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에 유홍이 글을 올려 자신의 죄를 진달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위로하였다. 얼마 뒤에
일본에서 만든 배를 바치면서 아뢰기를,
“제후는 거복(車服)을 조공으로 바치지 못하는 법이기에 감히 토산물과 함께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고려에서 공물을 바칠 때마다 문득 유사에게 내려 그 값을 헤아린 다음 1만 겸(縑)을
대가로 주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값을 헤아리지 말고 1만 겸을 정수로 삼도록 하였다. 《상동》
○ 6년에 문종 37년 왕휘가 졸하였는데, 왕위에 있던 것이 38년이었다. 왕휘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어질고 너그럽게 하기를 숭상하였으니, 동이의 어진 임금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의 풍속을 그대로
따라 왕녀(王女)는 신하나 서인들에게 시집보내지 않고 반드시 형제나 종족(宗族)에게 시집보내었으며,
귀족들 역시 그렇게 하였다. 둘째 아들인 왕운(王運)이 ‘이미 중국과 통호하였으니 예의로써 예전의 풍습을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간하자, 왕휘가 노하여 왕운을 밖으로 내쫓았다. 고려에서 부음을 아뢰자, 황제가
가엽게 여겨 명주(明州)에 조서를 내려 절간을 수리한 다음 왕휘를 위해 1개월간 불공을 드리게 하였으며,
양경략(楊景畧)ㆍ왕순봉(王舜封)을 파견하여 제전(祭奠)을 올리게 하고, 전협(錢勰)ㆍ송구(宋球)를 파견하여
조위(弔慰)하도록 하였다. 양경략이 이지의(李之儀)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자, 황제가 이지의는 글재주가
시원치 않다고 하면서, 그 대신 학문이 깊고 기국이 빼어난 자를 중서성에 나오게 해 글재주를 시험한
다음 파견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먼 외방의 나라라 완벽하게 갖추기를 요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신에게
서로 접견하는 장소의 전각 이름이나 망새 기와의 모양새 등에 구애되지 말고 접견하라고 유시하였다.
왕휘의 아들 순왕(順王) 왕훈(王勳)이 뒤를 이어 즉위한 지 1백 일 만에 졸하였다. 그의 동생인 선왕(宣王)
왕운(王運)은 《고려도경》에는 국원공(國原公) 왕운이라고 하였다. 어진 이를 사랑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품행이 근신하여, 장사치가 서책을 팔려고 올 적이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향불을 피운 다음 대하였다.
《상동》
○ 《요사》에는, 태강(太康) 9년(1083) 8월에 고려 왕 왕휘가 훙하고 기사에 왕휘의 세자 삼한국공(三韓國公)
왕훈(王勳)을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삼았으며, 12월에 고려 왕 왕훈이 훙하였다고 하였다.
○ 살펴보건대, 태강 9년은 송 원풍 6년이다.
○ 요 대안(大安) 원년 선종 2년 11월 병진에 사신을 보내어 삼한국공(三韓國公) 왕훈(王勳)의 세자
왕운(王運)을 고려국왕으로 삼았다. 《요사》
○ 송 원풍 8년에 선종 2년 고려 왕이 그의 동생 승통(僧統)을 파견하여 조회하면서 불법(佛法)에 대해
물었으며, 아울러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바쳤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고려에서 김상기(金上琦)를
봉위사(奉慰使)로, 임기(林曁)를 치하사(致賀使)로 파견하였다. 고려에서 형법(刑法)에 관한 서책과
《태평어람(太平御覽)》ㆍ《개보통례(開寶通禮)》ㆍ《문원영화(文苑英華)》 등을 사 가겠다고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서 《문원영화》 한 책만 하사하였으며, 명마(名馬), 금기(錦綺), 금백(金帛) 등의 물품을 주어 그 예에
보답하게 하였다. 《송사》
○ 철종(哲宗) 원우(元祐) 4년 선종 6년 11월에 항주(杭州)를 맡고 있는 소식(蘇軾)이 상주(上奏)하기를,
“고려의 승통(僧統) 의천(義天)의 수하인 승(僧) 수개(壽介) 등 5인이 고려 예빈성(禮賓省)의 공문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국왕의 명을 받들어 수개 등으로 하여금 의천이 지은 제문(祭文)을 싸 가지고
항주로 가서 승 원사리(源闍梨)를 제사 지내게 한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국모(國母)의 지시를 받들어서
두 개의 금탑(金塔)을 가지고 가서 황제와 태황태후께서 오래 사시도록 축원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고려의 속셈을 살펴보건대, 이는 대개 이성(二聖)께서 자리를 이은 지 몇 년 동안에 감히 함부로
들어와 조공하지 못하여서 그들의 이익을 모두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사신을 파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성상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원사리를 제사 지낸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고, 인하여
금탑을 바쳐 우리 조정에서 고려를 어떻게 대우하는가를 시험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찌
금탑을 바쳐 축수(祝壽)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만약 조정에서 그들을
조금이라도 후하게 대해 주면 그들은 탐욕스러운 마음을 다시 가져 조공을 자주 바쳐서 반드시 무궁한
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하였다. 《동파집》
○ 《속문헌통고》에는, “의천의 성은 왕씨로, 고려국 인효왕(仁孝王)의 넷째 아들이다.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우세(佑世)라는 호와 승통(僧統)이라는 직위에 봉하여졌다. 원우(元祐) 초기에 중국으로 들어와
불법(佛法)을 물었는데, 황제가 칙명을 내려 주객(主客) 양걸(楊傑)로 하여금 그를 호송하여 전당(錢塘)으로
가게 하였다. 이로 인해 의천이 불법을 받았다.” 하였다.
○ 5년에 선종 7년 다시 고려와 사신을 통하여 은기(銀器) 5천 벌을 하사하였다. 《송사》
○ 7년에 선종 9년 고려에서 황종각(黃宗愨)을 파견하여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고 서적을 많이
사 가게 해 주기를 청하니, 예부 상서 소식(蘇軾)이 아뢰기를,
“고려에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는 것은 조금도 이익이 없는 반면에 다섯 가지의 손해되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고려에서 사 가기를 청하는 여러 서책과 금박(金箔)을 수매(收買)하는 것은 모두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조칙을 내려 금박을 사는 것만 허락하였다. 그러나 마침내는 《책부원귀(册府元龜)》를 사 가지고
돌아갔다. 《상동》
○ 요 대안 10년 선종 11년 여름에 고려국왕 왕운이 훙하였다. 그의 아들 왕욱(王昱)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고하니, 즉시 사신을 보내어 부의하고 증직하였다. 《요사》
○ 수륭(壽隆) 원년 헌종(獻宗) 원년 11월 경신에 고려 왕 왕욱이 병이 들었다. 그의 아들 왕옹(王顒)을
권지국사로 명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왕옹은 숙종(肅宗)의 이름으로 바로 헌종의 숙부이니, 이곳에서 그의 아들
왕옹을 권지국사로 명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3년 숙종 2년 3월에 왕욱이 훙하였다. 《상동》
○ 송 원부(元符) 2년이다. 숙종 4년 당초에 고려의 선왕(宣王) 왕운이 즉위하여 4년 만에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선종은 11년간 재위하다가 소성(紹聖) 원년(1094) 갑술에 훙하였다. 그러니
《송사》 및 《고려도경》에 모두 즉위한 지 4년 만에 졸하였다고 한 것은 아주 크게 틀린 것이다. 아들인
회왕(懷王) 왕요(王堯)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선종이 훙하고 태자 왕욱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헌종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회왕 왕요라고 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왕요는 바로
정종(定宗)의 이름이다.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병이 들어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그의 숙부인 계림군(鷄林君) 왕희(王煕)에게 섭정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왕요가 졸하자 왕희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왕희는 뒤에 요나라 임금의 휘(諱)를 피하여 왕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왕옹은 성품이 탐학스럽고 인색하였으며, 장사꾼들의 이익을 빼앗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부잣집에서
범법을 할 경우에는 오랫동안 가두어 두고 속전(贖錢)을 바치게 하였는데, 아무리 하찮은 죄를
저질렀더라도 역시 은 몇 근을 바쳐야만 하였다. 몇 년 동안 사신이 오지 않다가 2월 기묘에 선비를
빈공(賓貢)으로 보냈다. 《송사》
○ 요 수륭(壽隆) 5년 숙종 4년 10월 초하루 기해에 고려 왕 왕옹이 사신을 보내어 책봉해 주기를
청하였다. 《요사》
○ 6년에 숙종 5년 고려 왕 왕옹을 봉하여 삼한국공(三韓國公)으로 삼았다. 《상동》
○ 송 원부(元符) 3년 숙종 5년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고려에서 임의(任懿)와 왕하(王嘏)를 보내어
조문하고 축하하였다. 《송사》
[주-D001] 권발(圈發) :
발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글자의 네 귀퉁이에 권점(圈點)을 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2] 권지국사(權知國事) :
왕호(王號)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에 사용하는 왕의 칭호로, 권서국사(權署國事), 권지국왕사
(權知國王事)라고도 한다. 고려 이후 우리나라는 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아야만 왕호를
사용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조선 태조 이성계는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라는 칭호를 썼다.
[주-D003] 신책(神册) 4년 :
원문은 신책 3년으로 되어 있으나, 정명 5년은 신책 4년에 해당 되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 탐부(耽浮) :
탐라(耽羅) 즉 제주도를 말한다. 천수(天授) 21년(938)에 탐라국의 태자(太子)인 말로(末老)가 와서 조회하자,
태조가 이를 갸륵하게 여겨, 신라의 고례에 따라 국왕에게는 성주(星主), 태자에게는 왕자(王子)의
작호(爵號)를 주었으며, 그 뒤 숙종 때에 이르러서 고려의 군현으로 개편되었다.
[주-D005] 환어라(驩於羅) :
거제도(巨濟島)나 대마도(對馬島)에 있었던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6] 철륵(鐵勒) :
흉노의 후예로, 뒤에 돌궐에 복속되어 지금의 청해(淸海) 지방에 거주하였다. 당나라에 의해 토평되었으며,
남은 종족들은 모두 회흘(回紇)에 귀속되었다.
[주-D007] 왕인적(王仁翟) :
《고려사절요》에 “23년(940)에 후진(後晉)에서 우리나라의 볼모 왕인적을 돌려보냈다.” 하였다.《高麗史節要
卷1 太祖神聖大王》
[주-D008] 화복(火卜) :
점치는 방법의 하나이다.
[주-D009] 별서효경(別序孝經) …… 올렸다 :
이 당시에 중국에는 당나라 말기에서 오대 시대에 걸친 전란으로 전적이 많이 유실되어 후주(後周)에서
고려에 이들 전적을 보내 주기를 요구하여 보낸 것인 듯하다.
《김상기, 高麗時代史,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62쪽》
[주-D010] 여진(女眞) :
만주의 동부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으로, 송화강(松花江)ㆍ목단강(牧丹江)ㆍ흑룡강(黑龍江) 유역에 살던
종족이다. 10세기 초에 요(遼)나라 태조가 발해(渤海)를 멸망시키자, 발해에서 벗어난 말갈(靺鞨)을
여진족이라 불렀다. 그 가운데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요나라 때 고려와의 국경 지역인 두만강 유역에서
함경남북도 지방에 해당되는 지역에 이동하여 살았는데, 이들을 흑수여진(黑水女眞)ㆍ동여진(東女眞)이라
불렀으며, 생여진(生女眞)이라고도 하였다. 또 길림성(吉林省)의 서남부 지역에 사는 여진은
서여진(西女眞)이라고 하였다.
[주-D011] 목계(木契) :
나무 조각에다 의사를 표시하는 부호를 새긴 것이다.
[주-D012] 정삭(正朔) :
정삭은 정월 초하루를 말하는데, 제후가 천자에게 역(曆)을 받는 것을 말한다.
[주-D013] 대매하(大梅河)ㆍ소매하(小梅河) :
대매하는 지금의 요하(遼河)이고, 소매하는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14] 이에 …… 파견하여 :
《동사강목》에는 단공 2년에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여가(如可)가 여가(女可)로 되어 있다.
《東史綱目 第6下》
[주-D015] 소항덕(蕭恒德) :
소손녕(蕭遜寧)을 가리킨다. 소항덕이 본명이며, 손녕은 그의 자(字)이다.
[주-D016] 정벌하였다 :
“11월에……정벌하였다”는 거란의 제1차 침입을 말한다. 이 당시 송나라와 대치 관계에 있던 요나라는
송나라와 고려가 화친을 맺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소손녕을 도통(都統)으로 하여 정병 80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와 지금의 태천(泰川)과 구성(龜城) 중간 지점에 있는 봉산군(蓬山郡)을 점령하고는 항복을 요구해
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서경(西京)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떼어 주고 강화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중군사(中軍使)로서 직접 거란군을 방어하고 있던 서희(徐煕)가 이를 반대하였다. 소손녕은 오랫동안
기다려도 항복에 대한 소식이 없자 안주(安州) 서남쪽에 있는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패하였다.
이 기회를 타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이에 거란에서는 고려가 요나라에 조공(朝貢)하는 대신
압록강 이동의 여진 땅 280리를 고려가 소유하는 것을 묵인한다는 조건으로 화약(和約)을 맺고는
철군하였다.
[주-D017] 동모(東牟) :
산동성(山東省) 봉래현(蓬萊縣)에 있다.
[주-D018] 공거인(貢擧人) :
공사(貢士)와 거인(擧人)을 말한다. 지방에서 천거하거나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중앙의 회시를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주-D019] 빈공 진사(賓貢進士) :
빈공은 제후가 천자에게 천거한 선비라는 뜻으로,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는 변방의 여러 나라 출신들을
등용하기 위해 빈공과를 두었다.
[주-D020] 공목리(孔目吏) :
고려 때 예빈시(禮賓寺)의 하급 관리로 회계와 공문서를 관장하는 관리이다.
[주-D021] 여진(女眞) :
본문에는 ‘여직(女直)’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요나라 흥종(興宗)의 이름을 피휘(避諱)하기 위하여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요사》에서 발췌한 것은 모두 여직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번역을 하면서는 ‘여진’으로
표기하였다.
[주-D022] 강조(康肇) :
《고려사》ㆍ《동사강목》에는 강조(康兆)로 표기되어 있다.
[주-D023] 고려의 …… 하겠다 :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면서 강조를 문책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웠으나,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첫 번째로 제1차 침입 때와 마찬가지로 고려와 송나라 간의 우호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의도에서였고,
두 번째로는 1차 침공 결과 고려 측에 양도하게 된 이른바 강동 육주(江東六州)를 탈환하자는
것이었다.《한국사 제4권, 국사편찬위원회, 1974, 273쪽》
[주-D024] 황제가 …… 정벌하면서 :
이것이 거란의 제2차 침입이다. 1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에서 계속 송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란을 멀리하였으므로 거란에서는 고려를 정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강조(康兆)의
정변이 일어나자,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成宗)이 직접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을 공격하였으나, 양규(楊規)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성공치 못하였다. 이에 성종은 진로를
바꾸어 통주(通州) 부근에서 강조(康兆)의 군사를 만나 이를 격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런 뒤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한 채 곧바로 개성으로 진격하였다.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란하면서
하공진(河拱辰)을 청화사(請和使)로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하였다. 거란에서는 고려 왕이 직접 조회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에서는 이를 허락하니, 거란의 군사가 철군하였다.
[주-D025] 북면임아(北面林牙) :
임아는 문한(文翰)을 맡은 관원을 말하며, 학사(學士)를 칭하기도 한다. 군목(群牧)에 설치한 임아는
문서(文書)를 관장하였다.《遼史 卷106 國語解》
[주-D026] 동주(銅州) :
《고려사》ㆍ《동사강목》에는 통주(通州)로 되어 있다. 지금의 선천(宣川)이다.
[주-D027] 상온(詳穩) :
요나라의 관직으로, 변방 백성을 진무하는 관직이다. 《遼史》 국어해(國語解)에, “여러 관부(官府)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장관(長官)이다.” 하였다.
[주-D028] 강조와 …… 사로잡으니 :
이현온이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이현운(李鉉雲)으로 되어 있다. 이때 거란의 포로가 된 강조는
자신의 신하가 되라는 요나라 성종의 거듭된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면서 끝끝내 버티었다. 성종이 똑같은 말로 이현운을 꾀이자, 이현운은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 마음으로 어찌 옛 나라를 생각하랴.”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강조가 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차면서 “네가 고려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東史綱目 第6下》
[주-D029] 곽주(郭州)ㆍ귀주(貴州)ㆍ영주(寧州) :
곽주는 지금의 곽산(郭山)이고, 귀주는 지금의 구성(龜城)이고, 영주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다.
[주-D030] 청강(淸江) :
《동사강목》에는 청수강(淸水江)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을 말한다.
[주-D031] 주애군(朱崖郡)을 …… 힘이었다 :
주애군은 한나라 때 설치한 군현이다. 한나라 원제(元帝) 초원(初元) 원년(기원전 48)에 주애군의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자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평정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규모의 군사를
보내 평정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대조(待詔)로 있던 가연지가 상소를 올려 이에 반대하면서,
“주애군은 바닷가에 외롭게 있으니, 버린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으며, 치지 않는다 해도 위엄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부자간에 한 냇물에서 같이 목욕하여 금수와 다름이 없어서 본디 군현을
설치할 곳이 못 됩니다.” 하였다. 원제가 이 의논에 따라 주애군을 정벌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漢書 卷9, 卷64》
[주-D032] 흥주(興州) …… 여섯 성 :
평안북도 서북쪽의 해안 지대에 있는 여섯 성으로, 이것이 이른바 강동 육주(江東六州)이다. 이 강동 육주는
당시에 군사상, 교통상의 요지로,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요나라와 고려가 치열한 분쟁을 치렀는데, 거란의
3차 침입 이후에는 고려의 영토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주-D033] 승라주(昇羅州) :
승주(昇州)와 나주(羅州)를 말한다. 이때 현종(顯宗)은 나주로 피란하였다.
[주-D034] 내원성(來遠城) :
요나라의 진지(陣地)로, 압록강 가의 검동도(黔同島)이다.
[주-D035] 고려에서 …… 일으켰다 :
거란 군사가 고려에서 철수할 때, 통주(通州)와 구주(龜州) 등지를 확보하고 있던 양규(楊規) 휘하의 고려
군사가 철수하는 거란 군사를 맞아 대타격을 가하였다. 구주 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은 거란 군사
1만 명을 격살하였으며, 양규는 의주 무로대(無老代) 전투에서 거란 군사 2천 명을 사살하고 포로 3천 명을
탈환하였으며, 이수(梨樹)ㆍ석령(石嶺)의 전투에서 2천 5백 명을 사살하고 포로 1천 명을 탈환하였으며,
여리참(餘里站) 전투에서 1천 명을 사살하고 포로 1천 명을 탈환하였으며, 애전(艾田) 전투에서 1천 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한국사 제4권, 271쪽》
[주-D036] 귀덕주(貴德州) :
귀주(貴州)로 지금의 구성(龜城)이다.
[주-D037] 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 :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진을 정벌할 때 여진 수천 호를 요양(遼陽)의 남쪽으로
이주시켰는데, 이를 갈소관여진이라 한다. 일설에는 숙여진(熟女眞)을 갈소관여진이라고 한다.
합소관여진(合蘇官女眞)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김상기, 高麗時代史,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186쪽 주》
[주-D038] 압록강에 …… 놓고 :
압록강에 놓은 부교는 지금의 구련성(九連城)으로부터 강상(江上)의 검동도(黔同島)를 거쳐 의주에 이르는
곳에 설치된 듯하다.《한국사 제4권, 278쪽 주》
[주-D039] 보주(保州) :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주-D040] 선의주(宣義州) :
지금의 선천(宣川)이다.
[주-D041] 정원주(定遠州) :
지금의 정주(定州)이다.
[주-D042] 세마(細馬) :
잘 길들인 말을 말한다.
[주-D043] 산마(散馬) :
길들이지 않은 말을 말한다.
[주-D044] 철전(鐵甸) :
철리국(鐵利國)을 말한다. 《동사강목》에 “철리국은 여진의 동북쪽 옛 말갈의 부락에 있는데, 발해가
철리부(鐵利府)를 두었더니 뒤에 스스로 일어나 나라가 되었다.” 하였다.《東史綱目 第6下》
[주-D045] 곽주(郭州) :
지금의 곽산(郭山)이다.
[주-D046] 8월 …… 정벌하였다 :
이것이 거란의 제3차 침입이다. 거란에서 고려 왕이 친히 들어와 조회하기를 요구하였으나 고려에서는
병을 핑계로 들어가 조회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에서는 앞서 고려가 차지하였던 강동 육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니, 고려에서 이를 거절하고 요나라와 국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거란은
1014년부터 계속하여 강동 육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침입을 시도하였는데, 그때마다 패하여 돌아갔다.
1018년에 이르러 소배압(蕭排押)의 지휘하에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규모의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과 부원수 강민첨(姜民瞻)으로 하여금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였다. 두 장수는 흥화진(興化鎭)으로 진격하여 산골짜기에 1만 명의 군사를
매복시키고 성 동쪽의 큰 냇물 즉, 지금의 삼교천(三橋川)을 막아 놓은 다음 적이 이르자 물을 트고
급습하여 대파하였다. 이에 소배압은 샛길을 따라 개성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곳곳에서 강민첨의
군사에게 패함에 그 이듬해 퇴각하였다. 이때 강감찬은 구주(龜州)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후퇴하는 거란
군사를 크게 격파하여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다. 이를 구주대첩(龜州大捷)이라 한다.
이를 계기로 거란에서 요구하였던 고려 왕이 친히 조회하는 문제와 강동 육주의 반환 문제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주-D047] 다타이하(茶陀二河) :
이는 고려 측의 기록에 보이는 석천(石川) 즉 지금의 황화천(皇華川)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다타이(茶陀二)의 이(二)를 숫자로 본 데서 나온
착오이다.《김상기, 高麗時代史, 99쪽 주》
[주-D048] 우피실(右皮室) :
국어해에, “피실(皮室)은 군사 제도로, 남(南)ㆍ북(北)ㆍ좌(左)ㆍ우(右)의 피실과 황피실(黃皮室)이 있으며,
모두 정예병을 장악한다.” 하였다.
[주-D049] 하국(夏國) :
서하국(西夏國)을 가리킨다. 서하는 송나라 때 서북방의 당항족(黨項族)이 세운 나라로, 송나라에 대해
신하를 칭하다가 1038년에 조원호(趙元昊)에 의해 건국되었다. 1227년까지 존속하였다.
[주-D050] 이때 …… 허락하였다 :
고려와 송나라가 교류하던 초기의 항로(航路)는 주로 황해도 연안의 옹진(甕津) 항구로부터 바다를 건너
산동성 봉래현(蓬萊縣)에 있던 등주(登州)와 산동성 제성현(諸城縣)에 있던 밀주(密州) 등지에 상륙하는
항로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이 항로가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거란에서 알게 될까 염려하였다. 이에
고려에서 김양감(金良鑑)을 파견하여 송나라에서의 상륙지를 산동성 항구로부터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즉, 지금의 영파부(寧波府)로 옮길 것을 청하여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성강(禮成江)에서 출항하여
인천에 속한 섬인 자연도(紫燕島), 해미(海美)의 서쪽에 있는 마도(馬島), 고군산(古群山), 전라북도
흥덕(興德)의 서쪽에 있는 죽도(竹島), 흑산도(黑山島)를 거쳐 서남쪽으로 항해한 뒤 명주에 도달하는 새로운
항로를 열게 되었다. 등주로 가는 항로를 동로(東路)라 하고, 명주로 가는 항로를 남로(南路)라고 하였는데,
이후로는 주로 남로를 이용하여 왕래하였다.《韓國史 中世篇,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1, 390쪽》
《한국사 제4권 국사편찬위원회, 337쪽》
[주-D051] 도정(都亭) :
도읍(都邑) 안에 있는 전사(傳舍)를 말한다. 진(秦)나라 법에 10리 마다 1정(亭)을 두고 군현의
치소(治所)에는 도정(都亭)을 두었다.
[주-D052] 왕훈(王勳)의 세자 왕운(王運) :
이 기사는 잘못되었다. 선종(宣宗) 왕운(王運)은 문종(文宗) 왕휘(王徽)의 둘째 아들이고, 순종(順宗)
왕훈(王勳)의 동생이다.
[주-D053] 승통(僧統) :
고려 승위(僧位)로 교종(敎宗)의 직위 가운데 가장 높은 직이다. 여기서는 의천(義天)을 가리킨다. 의천은
선종의 동생으로 이름이 후(煦)인데, 송나라로 들어간 뒤에는 송 철종의 휘(諱)를 피하여 자(字)인 의천으로
행세하였다. 《동사강목》 제7을 보면, 의천은 왕명을 받들고 송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몰래 상선(商船)을
타고 도망하여 송나라로 들어갔으며, 송나라에서는 의천을 객례(客禮)로 대우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주-D054] 전당(錢塘) :
남송(南宋)의 도읍지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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