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8—1월, 제184차 산행)] ♣ 무주 <적상산> *
▶ 2018년 1월 21일 (일요일)
* [산행 코스]▶ 전북 무주군 적상면 서천리 ; 국립공원 덕유산 <서창공원지킴터>→ 장도바위→ 적상산성[서문]→ <눈밭>-삼거리→ 향로봉→ 다시 삼거리→ 적상산→ 안렴대→ 안국사→ 적상사고[赤裳湖]→ 송대→ 적상면 치목마을(하산)
* [프롤로그] — 2018년, 대한민국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18년 새해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평창동계올림픽>이 개최된다. 그 동안 수년 동안 우리는 국민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이 대회를 준비해 왔다. 드디어 2월 9일, <2018-평창동계올림픽>의 역사적인 개막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그 동안 온갖 험담으로 우리를 비방하던 북한이 대회 참가 의사를 밝힌 이래, 우리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북의 요구를 받들어 모시며 극진히 응대하고 있다. 북한 매체에서 문 대통령을 향해 '얼빠진 궤변', '가시 돋친 음흉한 악설 일색'이라고 퍼부어댈 때도 가만히 엎드려 있더니, 지금은 비굴할 정도로 저들의 구미를 맞추는 데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북은 우리의 목숨을 겨냥하는 가공할 살상 무기를 개발해 놓고서 평창올림픽을 ‘한 민족끼리의 평화’를 내세워 선전 선동의 장(場)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저들은 대한민국의 민심을 분열시키고,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를 실현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저들의 ‘평화·통일’의 가면(假面) 뒤에는 ‘핵과 미사일’이 있다. 저들이 말하는 ‘한 민족끼리의 평화’는 궁극적으로 ‘적화통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국가적 국민적 자부심으로 개최되어야 할 올림픽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이대로 가면 2월 8일 개막 하루 전 평창올림픽 전야(前夜)는 김정은이 주인공이 된다. ‘평양’에선 핵미사일을 내세운 열병식이 열리고, ‘강릉’에선 북의 현송월 악단이 올림픽 전야제 무대를 연다. 이렇게 해준다고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리 만무하다. 평창을 이용하여 대북 제재를 무력화하고 핵(核)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우리 국민이 수년 간 피땀 흘려 유치한 올림픽이 ‘핵의 인질범’에게 납치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게 됐다. 이대로 진행되어 간다면 평창올림픽? 이건 ‘죽 쑤어서 개 주는’ 꼴이 된다.
문재인 정권이 ‘뭔가에 씌어’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이고 우리 국민의 자존심(自尊心)이다. 남북 대화도 좋고 평화도 좋지만 더 이상 북한에 비굴(卑屈)한 자세를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언제까지, 어디까지 북이 하는 대로 휘둘리며 감지덕지 하고 있을 것인가.
지금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인가. 개막식장에서 태극기를, 우리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대한민국의 영문 약호인 ‘KOR’까지 모두 북의 요구대로 내주었다. 현송월에게 국빈급 예우를 해주며 그가 말하고 웃는 모습을 보도하지 말라는 북한 지침에 따랐다. 한미 연합 훈련을 연기·축소하고, 미 잠수함 부산 입항을 막았다. 우리 공군 F-35A 출고 행사에 국방부 장관 축하 메시지 전달을 보류했다 한다. 참수 작전이란 말도 입에 못 담게 했다. 동맹국 국기를 불태울 때는 가만있던 경찰은 북한 인공기 불태웠다고 수사를 시작했다. 북한에 가서 훈련할 아무 이유가 없는 스키 선수들은 인권유린 논란이 일었던 마식령 스키장에 가야 하게 됐다. 태영호 전 북한 공사 등 탈북 인사들에게 올림픽 기간 공개 활동을 자제하라고도 했다. 청와대와 여당은 ‘북한이 안 왔으면 성공적인 대회가 될 수 없었다’고 하고, 북한은 ‘평창을 우리가 구출해줬다’고 한다. 참으로 허황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김정은의 환심을 사게 되면 북핵 폐기의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지난 20여 년 역사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수도 없이 겪어왔다. 그들이 평화를 내세울 때마다 속으로 칼을 갈고 도발을 일삼아 왔다. 한두 번 속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올림픽 이후 한반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 “북의 핵 ICBM은 (실제) 공격용이고 김정은의 목표는 자신의 권력 하에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이다” 23일 미국의 CIA 폼페이오 국장의 말이다. 이렇게 올림픽을 저들에게 내 주고나면 다음은 나라까지 내 주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아간다면, 향후 안보의 혈맹인 미국의 태도도 달라질 수 있다.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산(山)으로 가는 길] — 겨울 설산(雪山)의 산행을 기대하며
오전 8시, 서울의 능동[지하철 5 / 7호선 군자역]에서 예정보다 늦게 출발했다. 2018년 새해를 맞아 첫 산행[신년산행]이다. 오늘 제184차 산행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 소재한 ‘적상산(赤裳山)’이다. 적상산은 국립공원 덕유산의 권내(圈內)에 있는 산으로 덕유산의 향적봉에서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올 겨울 서울·중부지방에는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덕유산 권역은 겨울이면 언제나 백설이 쌓여있는 곳이라 일말의 눈[雪] 산행의 기대를 안고 기획한 것이다. 마침, 하루 전 덕유산 등업령에서 향적봉까지 산행을 하고 온 민창우 기획위원이 ‘해발 1,000고지의 산릉은 저번에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는 말을 듣고 같은 권역의 적상산도 비슷한 고도(高度)의 산이므로 조용히 기대를 안게 되었다.
오늘의 신년산행에는 김준섭 회장, 민창우 부회장 겸 기획위원, 조인규·한영옥·장태임 부회장, 박은배 총무, 그리고 김재철·유형상 대장이 포진하고, 호산아·장병국·남정균 고문, 김의락 위원이 함께 했다. 전진국, 안상규, 강재훈 님 삼총사, 다정한 오수정·허향순 님, 일심의 김재철 님 내외분, ‘하회탈’의 지기인 신지호 님, 정석희·류경 님도 참석했다, 쾌활한 이명자·나천옥 님, 조용한 장영서 님, ‘여행사랑’의 지기인 권순식·고종길·신수철·이상복 님과 남녀 산우, 뻐꾸기 권혁진 님 등 농암의 벗들이 함께 했다. 박 총무의 지인인 이창재 님 등 몇 분도 참석하여 동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신갈정류장에서 용인의 안연자 님이 승차하였다. 산(山)을 지향하는 마음이 오늘 한마음이 되어 동행을 이루었다.
우리의 금강고속버스(권용길 기사님)는 경부고속도로의 버스전용차로를 이용하여 쾌주의 남행(南行)을 해 나가다가, 대전의 비봉분기점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달려나갔다. 금산의 ‘정안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무주I.C에서 19번 국도에 내려 남하하다가 길왕교차로에서 적상면 서천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산행들머리인 ‘서창마을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전 10시 30분, 예정보다 빨리 산행 들머리에 도착했다.
* [덕유산 국립공원 적상산(赤裳山)] — 덕유산 정상 향로봉 북쪽에 위치한 덕산
적상산(赤裳山)은 국립공원 덕유산 권역에 속한 산으로 덕유산 향적봉(1,614m)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올라온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적상산은 남쪽의 적상산 정상(1,038m)에서 북쪽의 향로봉(1,024m)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아울러 말한다. 적상산은 무주의 서쪽 지역의 첩첩 산군 중의 하나이다.
적상산(赤裳山)은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가을 단풍이 물들면 그 모습이 여인네의 '붉은 치마'와 같다고 하여 적상산(赤裳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적상산은 적상면의 한 가운데 솟은 산으로 북쪽의 향로봉과 남쪽의 기봉(-안렴대)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적상산에는 최영 장군이 건의하여 축조했다는 적상산성(赤裳山城, 사적 146호)이 있다. 적상산성의 서문 아래 있는 장도바위도 최영(崔瑩) 장군의 일화가 깃들어 있다. 현재의 산성은 조선 인조 5년(1628년)에 다시 축조한 것으로 둘레가 8km가 넘는다. 적산산성 안에는 유서 깊은 ‘안국사(安國寺)’와 ‘적상산 사고(史庫)’가 있고 최근에는 양주발전을 하기 위해 만든 산중호수인 ‘적상호(赤裳湖)’가 있다.
* [의병장 장지현(張智賢) 장군의 묘] — 노거수(老巨樹) ‘서창리 소나무’
산행들머리 서창마을의 길가의 산록에 ‘義兵將 張智賢將軍之墓’(의병장 장지현장군지묘)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그리고 장대하고 아름다운 한 노송(老松) 한 그루가 시야에 들어왔다. 묘역에 올라가 보았다. 넓은 묘역에 하단을 원형의 석조로 쌓은 봉묘 앞에 상석과 석등, 호위무사 등 석물이 조성되어 있었다. 묘 앞에 ‘의병장 장지현장군전공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묘역의 아래쪽에 장엄한 낙락장송(落落長松) 한 그루가 묘를 지키고 있었다.
의병장 장지현(張智賢, 1536∼1593) 장군의 본관은 구례(求禮)이고,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다. 충청도 영동읍 매천리에서 태어났으며, 당쟁이 심화되자 관직에 진출의 뜻을 포기하고 향리에서 문무에 힘써 그 명망이 높았다. 1590년(선조 23) 평안동절도사 신립(申砬) 장군의 부장(部將)으로 변방 토벌의 공을 세워 사헌부 감찰에 올랐으나, 이듬해 무주땅 당산리에 낙향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 2,000명을 이끌고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추풍령(秋風嶺)에 진을 치고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의 진로를 차단하였는데, 금산방면에서 공격해 온 왜군 구로다[黑田長政]부대를 맞아 오룡동에서 혈전을 벌이다가 사촌 장효현(張孝賢)과 휘하 장병들도 모두 죽을 것을 결의하고 적진에 돌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적을 무찌르다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그해 5월 초이틀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종자인 신복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이곳 무주 적상사 아래 창묘좌에 안장하였다.(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 산51-1.) 나라에서는 병조참의로 추증되고 정려(旌閭)되었으며, 영동의 화암서원(花岩書院)·무주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노거수 <서창 소나무>는 수령 400~420년으로 추정되는 거목으로 주변 식생과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景觀)을 이루고 있다. 완강하게 휘감아 올라가는 나무둥치와 다복한 솔잎의 생육이 아주 건강하고 기품이 있다. 나무의 가슴둘레는 250cm, 나무의 높이는 8m이다. 적상산성 서문으로 통하는 사천리 서창마을 동쪽 어귀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장지현 장군의 묘지 앞에 위치하여 일명 ‘장군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산행의 들머리 적상 ‘서창공원지킴터’] — 마른 낙엽이 쌓인 완만한 산길
오전 10시 55분, 국립공원 덕유산 ‘서창공원지킴터’에서 본격적인 산행에 돌입했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투명하여 날씨는 봄날처럼 푸근했다. 길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어 올라가고 산길에는 마른 낙엽이 쌓여 바싹거렸다. 산록의 주위는 잎을 모두 떨어뜨린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열을 지어 산을 오른다. 얼마가지 않아 장대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산길의 경사는 가파르지 않았으나 몸에서 열이 솟아 두꺼운 겉옷을 벗었다. 공기가 맑은 조용한 겨울 산인데, 울산 등 지방에서 온 산행객의 무리들이 특유의 사투리로 산을 적막을 조각내고 있었다.
산의 들머리에서 1km 정도 올라온 지점에서부터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은 부드러운 토산(土山)의 흙길이고 그 산길은 지그재그로 고도를 높여가므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겨울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는 산길,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오르는 산길이다.
* [적상산 장도바위] — 최영 장군의 설화가 깃든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길에서 거대한 절벽(絶壁)을 만났다. 조금 위로 올라가 보니 산의 절벽에서 잘라 낸 듯한 날카로운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바로 ‘장도(長刀)바위’였다.
‘장도바위’는 고려 말 최영(崔瑩) 장군이 민란을 평정하고 송도로 개선하던 중 이곳 적상산에 이르러, 산 전체의 붉은 단풍과 깎아 세운 암벽에 띠를 두른 듯한 아름다움에 이끌려 산 정상을 오르게 되었다. 정상을 가는 도중 절벽의 바위가 길을 막고 있어 산을 오르지 못하게 되자 최영 장군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長刀]을 뽑아 바위를 힘껏 내리쳤다. 그 순간 바위가 양쪽으로 쪼개지면서 길이 열렸다. 그래서 ‘장도바위’라 불리게 되었다.
* [적상산성과 서문지] — ‘서창’마을 지명의 유래
장도방위를 지나 다시 가파르게 산길을 오른다. 군데군데 바위가 돌출하여 산세가 결기를 세운다. 그렇게 바위와 평탄한 길을 돌아오르니 돌로 쌓은 성벽이 산의 허리를 두르고 있다. 돌로 쌓은 성벽에 산 위로 올라가는 통로가 있다. 옛날 서문이 있던 자리였다. 바로 ‘적상산성(赤裳山城)’과 ‘서문지(西門址)’였다. 서문은 일명 용담문이라고도 하였으며 규장각에 소장된 <적상산성조진성책>의 기록에 의하면 2층의 세 칸의 문루(門樓)가 있었다고 전한다. 성문 밖에 서창(西倉)과 고경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서창은 서쪽에 있는 창고를 말하는데, 옛날 미창(米倉)과 군기창(軍器倉)이 있었다고 한다. 지형이 험하여 성내(城內)까지 운반이 어려워 성내의 사고(史庫) 옆으로 옮겼다고 전하여 지금도 마을 이름이 서창(西倉)이라고 한다.
* [드디어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록] — 겨울산행의 묘미와 운치
산성(山城)의 서문지에서 평탄한 길로 조금 올라가니 산은 온통 눈밭이었다. 얼마 전에 내린 눈이 쌓여 있는 것이다. 모두 아이젠을 장착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을 가파르지 않았다. 겨울 산의눈 산행의 묘미를 느끼며 산을 오른다. 대원들의 표정도 밝고 신선하다.
* [적상산 향로봉(香爐峰) 정상] — 양지바른 산록에서의 점심식사
낮 12시 20분 눈 쌓인 산의 눙선에 올랐다. 선두의 민창우 부회장이 이정표 옆에서 올라오는 대원들에게 길 안내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좌측(북쪽)으로 가면 향로봉이고, 우측(남쪽)으로 가면 안렴대로 가는 갈림길이다. 우리는 향로봉에 오르고 나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였으므로 향로봉을 향하여 나아갔다. 산의 능선은 토산에 적설(積雪)이 되어 있어 아주 부드럽고 쾌적했다. 완만하게 능선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면서 향로봉(1,024m) 정상에 이르렀다. 시차를 두고 대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향로봉 표지판을 벗하여 선 대원들을 위해 인증샷을 눌러주었다. 우리 대원들은 삼거리쪽으로 다시 되돌아 내려오다가 비교적 평평한 땅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 [적상산 안렴대(按廉臺)] — 오르고 내리는 능선 길을 타고
오후 1시 30분, 식사 후 오후의 산행을 시작했다. 산의 주 능선을 타고 가는 ‘눈밭 산행’이다. 맑은 하늘아래 화사한 햇살이 쏟아진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은 산길은 아주 신선하고 쾌적했다. 눈이 없으면 삭막한 겨울산이다. 산의 능선을 비교적 부드러운 오르내림으로 이어져 나갔다. 동쪽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적상호가 부분적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높은 산봉을 두어 개 넘고 나서 통신시설 기지국 철탑이 앞을 가로 막았다. 그곳이 적상산 정상인데 시설이 점령해 버렸다. 이정표가 서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면 안렴대이고 좌측(동쪽)으로 내려가면 안국사 방향이다. 민 부회장의 안내대로 우리는 안렴대에서 조망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나아가는 길목에 전망대가 있어 가파른 철계단을 내려가면 안렴대에 이른다.
안렴대(按廉臺)는 적상산 남쪽 층암절벽 위의 바위를 이르는 말이다. 사방이 천인단애(千仞斷崖)의 낭떠러지이므로 주위의 산세와 풍경을 전망하는 데 최적의 장소이다. 동쪽을 바라보면 장대한 산줄기 남으로 뻗어가면서 덕유산(德裕山) 산줄기가 이어지는데 동남쪽의 설천봉과 그 산록에 무주스키장의 슬로프가 눈에 들어오고, 남쪽을 바라보면 적상면 치목마을과 도로가 이어진다. 우리가 산행을 시작한 서쪽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와 19번 국도가 시원하게 뻗어가고 건너편의 아항산과 가리골산의 줄기가 남북으로 이어져나가고 있었다.
이곳 안내판에 의하면, 안렴대는 고려시대 거란이 침입했을 때 삼도(三道)의 안렴사(按廉使)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와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병자호란 때는 적상산사고의 실록을 이 안렴대의 바위 밑에 있는 석실(石室)에 옮겨 난을 피했다고 한다.
안렴대(按廉臺)
덕유산 설천봉 <무주스키스로프>
* [유서 깊은 안국사(安國寺)] — 적상산사고를 지키기 위한 호국불교의 도량(道場)
안렴대에서 조망을 하면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동쪽 아래로 내려가는 산길을 잡아 안국사로 내려왔다. 높은 산록의 하얀 눈밭 속의 산사는 고요하다.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년) 월인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광해군 6년(1614년)에는 조선왕조실록 봉안을 위한 적상산 사고를 설치하려고 이 절을 늘려 지었고 사고(史庫)를 지키는 수직승의 기도처로 삼았다. 그 뒤 영조 47년(1771년) 법당을 다시 지었고, 나라를 평안하게 해 주는 사찰이라고 하여 절 이름을 안국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1910년 적상산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호국도량의 역할을 해 왔다. 1989년 적상산 양수발전소 위쪽 댐 건설로 절이 수몰지역에 포함되자 원행스님은 현재의 자리로 안국사를 옮겨지었다.
계단이 높은 청하루를 지나 앞마당에 들어서니, 적상산을 배경으로 단아한 모습의 극락전이, 왼쪽에는 천불전과 성보박물관이, 오른 쪽에는 지장전과 범종각 등이 자리잡고 있고, 아래로는 선방과 호국당 그리고 호국사 시비가 있다. 특히 천불전은 ‘선원록’을 봉안했던 적상산 사고 건축물로 현존하는 유일한 사고 모습이다. '극락전'은 ‘안욕바라밀’ 학이 단청을 하였다는 유명한 학 단청을 설화를 알 수 있듯 오른 쪽 창방 쪽에는 하루 분량의 단청할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안국사를 둘러본 뒤 안쪽에 ‘國中第一淨土道場’(국토제일정토도량)이라는 현판을 올린 일주문을 나와 적상산성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니 절로 이어지는 산간도로를 만났다. 잠시 지름길로 내려온 것이다. 차가 다니는 너른 응달의 도로에도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완만한 경사의 도로를 휘감아 돌아내려오니 발아래 적상산 사고(史庫)가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 적상호(赤裳湖)의 일부가 보이기도 했다. 고요한 적상산 사고와 적상호로 발길 옮겼다.
* [사고(史庫)에 관하여] — 'UNESCO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국가의 주요 서적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서울과 지방으로 나누어 설치한 것은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내외로 구분하여 서울에 있는 것을 내사고(內史庫), 지방에 있는 것을 외사고(外史庫)라 불렀다. 서울의 내사고는 서적을 열람(閱覽)하기가 편하므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방에 있는 외사고는 서적의 열람보다는 보존(保存)이 목적이므로 오늘날의 문서고에 해당한다. 고려 시대의 내사고는 개성의 춘추관(春秋館)에 있었고, 외사고는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내사고는 여전히 춘추관에 위치했다. 그러나 외사고가 건립된 장소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최초의 외사고는 충주(忠州)에 있었고 세종 대에 성주사고(星州史庫)와 전주사고(全州史庫)가 더해졌다. 이들은 모두 읍내에 있었으며 세 사고를 합쳐 삼사고(三史庫)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전기의 외사고 중에서 귀한 책을 가장 많이 보관한 곳은 충주사고이다. 충주사고(忠州史庫)는 <고려실록>을 보관하였고, 조선 초기에 간행된 서적도 대부분 이곳으로 배포되었다. 태종 연간에 사관 김상직은 충주사고의 서적을 가져와 국왕에게 보였는데 여기에는 의서와 천문학 관련 서적이 많이 있었다. 태종은 이 책들을 춘추관으로 보내어 보관하게 했다. 그러나 1538년(중종 33)에 충주사고를 관리하던 하인이 건물 안에 들어온 산비둘기를 잡으려고 불을 켰다가 건물과 서적을 몽땅 태워버렸다. 사건이 중앙에 알려지자 중종은 특별히 관리를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고려 시대의 자료가 매우 희귀한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충주사고의 화재는 몹시 안타까운 장면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도시 지역을 장악했다. 이 때문에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을 제외하면 서울의 춘추관과 세 곳의 외사고는 건물과 서적이 모두 불타버렸다. 급박한 상황에서 전주사고의 실록을 지킨 사람은 오회길, 손홍록, 안의 세 사람과 승려인 희묵이었다. 이후 전주사고의 실록은 정읍의 내장산, 해주의 관아, 영변의 묘향산 등지를 떠돌다가 강화도에 보관되었다.
*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 — <묘향산사고>를 옮겨와 국가문서를 보관하던 곳
무주의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는 1614년(광해군 6)에 건립되었다. 조선과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묘향산사고를 안전한 남쪽으로 옮기려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산 자체가 험준한 지형인데다 산성이 축성되어 있어 실록을 보관하기에 안전했다. 또한 다른 사고가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에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지역적으로 고르게 안배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적상산사고에는 1618년부터 서적을 보관하기 시작하였고, 1634년에 묘향산사고에 있던 실록을 이곳으로 옮겼다. 병자호란이 발생하기 2년 전이었다.
1641년에는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고 ≪선원록 璿源錄≫을 봉안하여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5사고 중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산실(散失)되어 이를 다시 보완하는 작업이 1666년(현종 7)에 시작되었다. 이 때 적상산 사고본을 근거로 등사·교정 작업을 했는데 3도 유생(三道儒生)이 300명이나 동원되었다. 이 사고의 설치를 계기로 사고의 수호와 산성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승병을 모집하고 수호 사찰(守護寺刹)을 건립하는 등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사고 설치 직후에는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산성을 수축하는 한편, 분번(分番)으로 사각(史閣)을 수호하였다. 특히 정묘호란 때에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어 승려 상훈(尙訓)이 사고의 서책을 산성 밖의 석굴(石窟)로 옮겨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사고에 다시 봉안하였다. 사고의 수호가 이와 같이 어려워지자 1643년 산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해 수호 사찰로 하였다.
조선 말기에 사고가 퇴락해 1872년(고종 9)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는 대대적인 개수 공사를 하였다. 1910년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실록을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해 장서각에 보관시켰다. 그러나 산질(散秩)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뒤 6·25동란 중에 분실되어버렸다. 실록전과 선원각의 건물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원각은 부근 안국사(安國寺)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殿)으로 전해오고 있다.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는 적상산의 정상부에 있는 평탄하고 넓은 분지에 건립되었다. 분지의 둘레에는 고려 말기에 축성한 산성이 있으며 산성 안의 동남쪽에 사고(史庫)가 위치했다. 사고의 건물은 1938년에 촬영된 사진에 나타나므로 이후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남북으로 배치되었고, 북쪽에 있는 실록각(實錄閣) 터에는 16기의 초석이, 남쪽에 있는 선원각 터에는 8기의 초석이 남아 있었다.
1992년 적상산의 정상에 양수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사고(史庫)를 수호하던 안국사와 사고지(史庫址)는 물속에 잠기게 되었다. 이에 안국사는 산 정상의 아래에 있는 호국사 인근으로 옮겨갔고, 사고는 원위치에서 조금 높은 지대로 옮겨서 중건하였다. 적상산사고의 사각과 선원각 건물이 복원된 것은 1998년이다. 적상산사고는 전북 기념물 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의 실록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로 갔다가 대한제국의 구황실을 관리하던 이왕직(李王職)이 돌려받았다. 이왕직은 실록을 창경궁에 보관했으며 6ㆍ25 때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이 이를 가지고 갔다. 현재 적상산사고의 실록 823책은 김일성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다. 북한에서 간행한 번역본 [이조실록]은 적상산사고의 실록을 대본으로 한 것이다.
* [산중호수 적상호(赤裳湖)] — 그리고 송대폭포(松臺瀑布)를 경유하는 하산 길
하얗게 눈이 덮인 적막한 ‘적상산 사고’와 ‘적상호’를 둘러본 뒤 본격적인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산의 남쪽에 있는 치목마을로 하산하는 길이다. 눈 덮인 가파른 산길을 타고 내려왔다. 계단을 지나 철다리를 건넜다. 산록의 허리를 감아돌아가는 평탄한 산길에는 눈이 녹고 있었다. 조금 내려오니 간간히 응달을 제외하곤 눈은 다 녹아버렸다. 급박하게 내리꽂히는 산길이 이어지고 아주 가파른 여러 개의 철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송대폭포’이다. 깎아지른 거대한 절벽 사이에 작은 폭포가 있다. 절벽이 주는 장대한 위압감, 그리고 그 앞에 곧게 뻗어 올라간 장대한 침엽수가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송대
* [적상면 치목마을] — 모든 대원이 무사히 하산(下山), 귀경길에 오르다
이어지는 하산(下山) 길은 길었다. 평탄하게 이어지다가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다시 평탄의 토산의 흙길이 이어졌다. 마른 나무들 사이에 군계일학(群鷄一鶴) 같은 소나무가 장중한 품위를 지키고 있었다. 오후 3시 50분, 적상면 '치목마을'에 도착했다. 오후 4시 15분 모든 대원들이 하산(下山)을 완료하여, 일로 귀경길에 올랐다.
치목마을
* [에필로그] — 신임 김준섭 회장이 마련한, 따뜻한 뒤풀이
귀경길의 고속도로 상황은 아주 원활했다. 버스 전용차로를 이용하여 상행의 경부고속도로를 거침없이 쾌주할 수 있었다. 잠시도 정체되지 않았다. 오후 7시 30분에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올라와 따뜻한 음식으로 뒤풀이자리를 마련했다. 동대문구 장안동에 있는 <꽁지네 식당>에서 ‘따뜻한 국수전골’로 겨울산행의 피로를 풀었다. 오늘 새롭게 취임한 김준섭 회장은 오늘 아침 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우리 모두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함께하자’고 당부했었다. 김 회장은 남정균 직전 회장을 우리 산악회 ‘고문’으로 추대하고, 그 동안 총무와 산행대장으로 헌신적인 역할을 해왔던 민창우 대장을 ‘산행기획 부회장’에, 조인규 님을 새 ‘부회장’에, 김재철 ·유형상 님을 ‘산행대장’에 위촉했다. 오늘 따뜻한 자리를 마련해 준 김 회장께 감사를 드린다.…♣
<끝>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체계적으로 정말 잘 기록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런글은 우리 산악회서만
잃을수있는글 아무도 따라할수없는
우리 오상수고문님많이 쓰십니다
항상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행복한 주말되세요
못 올라가 적상산
다음에 올라 가 볼려고 했는떼
후기 읽고 안 올라가기로 했씁니다.
고문님이 훤~~언 하게 다 쓰셔서 올라가 볼 필요가 없어요.
오상수 고문님의 여행기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한마디로 엄지척!!!
2018년도 신년산행부터 송년산행까지 쭈욱 중심잡아 주시고
멋쟁이 회원님들의 면면을 사진으로 남겨 주셨으면 더 없는 고마움과 캄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