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고택을 본 적 있으신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듯하고 세월을 머금고 있어 사연이 궁금해지는 고택. 때론 명문가의 기준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부산에서는 불과(?) 100년 된 고택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던 곳이 부산이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명문대가의 큰 집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어쨌든 부산에서 고택을 찾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아직도 남아있는 고택과, 그 고택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더욱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어렵게 찾아낸 부산 고택 5곳. 집들이 품은 제각각의 사연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부산 동래구 복천동 동래구청 앞 사거리에 가면 100년 가까이 된 고택이 있다. 세월의 묵은 때를 켜켜이 쌓아놓은 듯한 짙은 고동색의 마루, 은은한 빛깔의 전등, 촘촘한 문창살의 문양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쁜 그림을 완성시킨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5칸 접집의 사랑채. 이 건물은 '대궐갈비'라는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 주인 최낙님(56·여)씨는 1980년대 초 이 집을 샀다고 한다. 사랑채와 직각이 되는 부분에 안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안채로 들어가기 전 중문이 있었던 자리에 주춧돌이 놓여있으며 행랑채 자리에도 주춧돌이 놓여있다. 도로가 나고 옆집에 땅의 일부를 떼어주기 전까지 이 집의 대지는 2천300여㎡(700평) 정도였다고 하니 옛집의 규모를 알 만하다. 옛 안채 자리에는 지금 다른 집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 집의 경우 다른 고택들과 달리 지붕 쪽을 올려다보면 상량문을 볼 수 있도록 돼 있는데 집을 지은 시기는 일제강점기 '대정 5년'(1916년)으로 돼 있다.
과거 동래 읍내동 중심가에 자리한 덕분인지 이 고택은 100년 동안 다양한 용도로 쓰여왔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한동안 동래부 객사로 쓰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부산 최초 양의원의 분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최씨는 "창생병원이라는 병원으로 쓰일 당시 이 집 주변으로 알코올 솜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고 들었다"면서 "지금이야 이 집이 좁은 도로 옆 구석진 곳이 됐지만 옛날에만 해도 이 일대가 은행 등 금융기관이 다 모여있던 금융 1번지였다"고 설명했다. 그 때문에 광복 직후에는 이곳이 동래은행의 사택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최근까지도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이 집을 '은행집'이라고 부른단다.
"많이들 다녀갔죠. 예전에 자기가 살았던 집이라며 옛 은행장 아들이 다시 찾아오기도 하고, 건축과 교수들과 학생들도 건축물공부한다고 찾아오고…. 집 팔 때 되면 자기한테 얘기하라고 명함 주고 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최씨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이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추위를 피해 마루 끝에 유리문을 달고 주방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것 말고는 대부분 옛 모습 그대로다. 최씨는 이게 다 선조들이 야무지게 집을 잘 지었기 때문이라며 집 자랑을 늘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