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
섣달그믐은 여느 그믐과는 다른 그믐입니다. 떠났던 이들을 불러들이는 그믐입니다. 집을 지키는 이들은 새날을 맞이하는 설렘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 합니다. 이웃에게서 빌린 농기구라던가 연장 따위는 전부 챙겨서 되돌려 주었습니다. 푼돈이지만 남에게 꾼 돈도 기억해 내어 다 갚았습니다. 이웃과 다툰 일까지도 헤아리고는 설 준비 음식재료들을 소쿠리에 담아 보내면서 마음을 풀었습니다. 그리고는 찾아오는 귀한 이들이 행여 발길을 돌릴세라 집안 곳곳에다 불을 밝히고 삽짝을 활 짝 열어 두었습니다.
문을 바르고 남은 닥종이로 가는 심지를 만들어 참기름 종지에다 꽂습니다. 무쇠 밥솥 안에서 가녀린 심지가 불을 밝히면 신비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한 해 동안 식솔들의 배를 곯게 하지 않고 끼닛거리를 이어가게 한 밥솥에 대한 감사함입니다. 조왕신, 성주신이 있든지 없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새해에도 변함없이 먹을거리를 이어 가기를 염원하는 바램입니다.
외양간에는 좀 커다란 등을 답니다. 문종이로 밖을 바르고 안에다 호롱불을 넣은 네모난 등입니다. 암소가 새해에도 새끼를 잘 낳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해를 거르지 않고 송아지를 쑥쑥 낳아 주는 순둥이는 집안의 보물입니다. 정낭에도 희미한 불을 켭니다. 냄새나는 그곳에다 왜 불을 밝히느냐고요?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않으면 건강을 해칩니다. 먹은 것은 소화를 잘 시켜 살로 가게 해주시고 찌꺼기는 밖으로 내보내서 거름이 되게 해달라는 바램입니다. 측신(廁神)이 있고 없고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소한 일들이 등불처럼 꺼지지 않게 해주십사하는 소망입니다.
그때는 섣달그믐이 오면 새 마음 새 기분으로 새롭게 시작해보고자 하는 염원들이 토담 안 구석구석에 가득했더랬습니다. 나만 살겠다는 마음이 아닌 이웃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마음들로 충만했더랬습니다. 이런 일들은 대게가 다 어머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해가 바뀌어도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난해처럼 식솔들의 삶이 건강하게 이어져 가기만을 바랬더랬습니다. 그렇게 매년 살아가는 기쁨을 주시는 신들이 새해에도 어김없이 내 집을 찾아들어 집안 구석구석을 지켜주길 바랬더랬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이 오면 나는 어머니께서 어렵게 장만해 주신 새 신발이 신고파서 벽장 속에 넣어둔 신발을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보곤 했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그 긴긴밤을 눈썹이 샌다는 말에 뜬 눈으로 밝히다 새 날이 오면 새 옷을 입고 동구 밖을 뛰고픈 꿈을 안은 체 그만 깜빡 잠이 들곤 했습니다. 섣달그믐이 오면 꼭두새벽에 일어나 떡국을 끓여서 머리에 이고, 종조부님 댁으로 세배를 가시던 새해 첫날의 어머니의 모습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로 그렇게 이어지던 그 작은 불꽃에 흔들리며 자꾸 어른거립니다. 설이와도 세배를 다닐 분들이 갈수록 줄어듦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그 만큼 더 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지라 올해는 나도 그들을 위해 불을 하나 밝혀야겠습니다.(2011. 1.31)
첫댓글 어린시절 섣달그믐이면 연습장에 세뱃돈 받을 명단을 적었지요. 그것도 많이 줄 사람부터. 세월이 흘러 조카. 질녀들에게 제가 세뱃돈을 주고. 세월이 더 흐르고나니 이제 세뱃돈 줄 사람도 없네요. 회장님 작품을 읽으니 세뱃돈 받던 그 시절이 그리워 집니다. 설 잘쇠시고 늘 건필하시길 빕니다.
우리 손자가 할애비로 부터 세뱃돈을 받으면 얼굴에 활짝 웃음 꽃이 피어 납니다. 세뱃돈 어디에 쓸거냐고 물으니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랑, 떡볶이랑, 닭꼬치 같은 것을 사 먹을 것이라 하더군요. 아이들도 자기가 친구들에게 한 턱 쏘는 것이 엄청 기분이 좋은가 봐요. 미리 세배를 다녀 갔는데 그래서 2만 원 더 얹어서 줬어요.^^
저는 세뱃돈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설빔으로 새옷을 받은 적은 많습니다.
눈썹 쉰다고 밤새는 일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뱃돈 줄 손자가 어서 생기면 좋겠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애를 안 낳아요.
2024년에는 품은 큰 뜻 이루소서~~~^^*
섣달그믐을 설 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울 어매임도 그랬지요. 집안 구석구석 묵은 때 벗겨야 한다며 몇 날 며칠을 소지 했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 입니다. 요즘은 모두가 급하고 편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 지금의 아이들은 그때 아름다움을 모를겁니다.
제가 조그마한 아이일 때, 아주 오래전 의 기억입니다. 당시는 대구에서 살았는데 어머니를 따라 영화 구경을 갔습니다. 엄마 손 잡고 입장하면 아이들은 공짜이던 시절입니다. 영화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마 "싯다르다"였지 싶습니다. 사람들이 기름 등잔 같은 것에 불을 밝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밝힌 불이 흔들 거립니다. 가난한 어떤 이도 불을 밝힙니다. 정성을 다해서 밝힙니다.그때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다른 불은 다 꺼졌습니다 만 그 가난한 한 사람이 밝힌 불은 꺼질듯 꺼질듯 하다가 다시 살아 납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 사람이 밝힌 불 한 개만 살아 남았던 장면입니다. 성심을 다해서 밝힌 단 한 개의 등불. "빈자일등"의 위대한 생명력 입니다. 임춘희 작가님에게서는 그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