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믿음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믿음도 변하고 진화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어렸을 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존재를 모두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8세기에 익사자는 엉덩이에 담배 연기를 불어 넣으면 소생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대변을 치료 약으로, 즉 두통, 간질 등 모든 병의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던 중세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이를 믿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을 버릴 수 없어.”라는 생각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과 싸우게 합니다. 그 상대를 미워하고 단죄합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이 무조건 맞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군중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병자였습니다. 당시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이가 거부를 했습니다. 병자와 함께하면 자기에게도 그 더러움이 옮겨져서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병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그 병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모두 고쳐 주십니다. 인간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며 치유하시는 주님의 큰 사랑입니다.
이렇게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치유된 이 사람은 보통 의사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지 않을까요? 병원에서라면 치료비를 낼 것입니다. 그런데 치유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무엇인가를 얻고 싶었나 봅니다. 그곳은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기에 외딴곳이었고, 그래서 먹을거리를 살 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당연히 예수님 먹을거리라도 가져와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제자들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하려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맞는 답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도록, 그래서 가진 것이 적어도 내놓으라고 하시지요. 이것이 기적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적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에서 나오는 신념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늘 보여주셨던 겸손의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하느님이면서도 인간의 육체를 취하고 가장 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실제로는 약한 분이 아니시지요. 너무나 강한 분이시기에 겸손으로 약하게 보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강함이 불가능할 것 같은 우리 모두의 구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자기 믿음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한 자만이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고 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진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첫댓글 빠다킹(조명연 마태오)신부님 강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