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91]오수獒樹라는 내 고향에 대한 무지無知
내 고향 오수(상거相距 4km)은, 어느 때에는 하루 두세 번 갈 정도로 나에게는 완벽한 생활권이다. 이제껏 ‘의견의 고장’으로만 알았던 오수에 ‘3.1독립운동기념탑’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 가히 ‘고향 무지無知’가 아니겠는가. 지난해 광복절에 세운 원동산 앞의 기념비를 보고 알았으니 나이를 헛먹었다고 생각할만큼 창피한 일이었다.
1919년 당시 오수가 전국 10대 의거지 중의 한 곳이었다고 한다. 오수초등학교(당시 이름은 오수공립보통학교. 1917년 개교) 1, 2학년생들이 3월 10일 아침 1교시에서 선생님의 울분 어린 훈화를 듣고 교실을 박차고 면소재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니, 전국 최초의 초등학교생 만세운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선생님(설산 이광수)은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상경,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만세운동 내용을 듣고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지고 내려와, 오수면의 깨어있는 시민들과 함게 암암리에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제는 그 어린 학생들을 총칼로 찌르며 거세게 진압했다고 한다. 또한 3월 23일 학생 시위에 작극받은 학부모들을 비롯한 오수면민 이기송, 이만의, 오병용 등 600여명이 임실군에서 처음으로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주도자 이기송을 주재소에 가두자 그곳으로 몰려가 끝내 구출해냈다고 하고, 2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밤을 새워 만세를 부르는 ‘1일 해방구’였다고 한다.
한 마을(둔덕리)에서만 전주이씨 일가 16명이 구속되는 등, 35명이 실형을 살았으며, 이들은 감옥에서 나온 후 ‘밭을 갈면서도 봄을 기다린다’는 뜻의 ‘영춘계迎春契’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지속하자, 일제가 강제해산시켰다. 그중 21명이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설산 이광수(1896-1948)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해방 때까지 활동했으며 체포되어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애국자였다. 이름이 공교롭게도 변절한 문학인 춘원 이광수와 동명이인이어서 대조적이다. 오수초등학교 교정에 1988년이 되어서야 유족들이 서둘러 의거기념비를 세웠으니 만시지탄이 아니고 무엇이랴. 오수의 만세운동은 이로써 인근 임실과 장수, 남원 등지로 확산돼 전북지역의 독립유공자만도 154명이 되었으니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일개 면 소재지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된 것만 보아도, 앞서간 애국지사들의 정신이 오수면민들에게 면면히 흐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수는 한때 임실의 군 소재지로 착각할 정도로 번창한 소읍小邑이었다. 오수는 조선조 때부터 인근 남원과 장수, 순창 등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오수도역참’이 있던 유서깊은 고장이었다. 미물인 개가‘살신구주殺身救主’한 의義의 고장이며, 독립운동을 한 충忠의 고장인 것이다. 또한 인근 임실 옥정호 주변에 있는‘조삼비釣蔘碑’는 조선조 운암 이흥발(1600-1673)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병자호란때 척사파인 이흥발이 낙향하여 후학들을 양성하며 아픈 노모를 극진히 모시는데, 하루는 낚시를 하는데 고기가 물려온 게 아니고 삼뿌리가 걸렸다는 것으로, 그 삼을 노모에게 달여 드려 효행을 했으며, 그의 호를 따 운암면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숙종조 명신인 김수항이 명문名文으로 이흥발의 효행을 기릴 정도였으니, 효孝의 고장으로 손색이 없다하겠다.
또한 임진왜란때 양대박(1543-1592) 장군이 의병 1천명으로 왜군 1만명을 운암에서 격퇴해 호남지역에 첫 승전보를 전하고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정조때 명신 윤행임이 양장군의 승전비 비문을 썼을 정도이니, 우리가 마땅히 기억해야 할 충신이 아니겠는가. 구한말에는 정재 이석용(1877-1914) 장군이 의병 500여명을 모집하여 ‘호남창의군’를 조직, 의병장이 되어 항일운동에 매진하여 숱한 전과를 올렸다. 동료의 밀고로 체포되어 1914년 교수형으로 순국한 이석용 장군의 사당(소충사)이 고향 성수면에 조성돼 해마다 이장군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국에 기초자치단체가 200여곳이 있다지만, 임실군처럼 충과 의 그리고 효의 ‘3박자’를 고루 갖춘 고장이 있는지는, 충과 의 또는 충과 효의 고장은 많을 듯해도 과문의 탓이지만,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다. 우리 고장이 전북지역의 3.1 만세운동을 이끄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나니, 없던 애향심이 솟는 듯해 관련 사진을 찍으면서도 내내 흐뭇한 하루였다.
이렇게 마땅히 선현들을 기리고 본받아도 모자랄 지경이건만, 개뼈다귀같은 '이념논쟁'에 불을 붙이는 자가 누구인가? '역사의 반동'을 태연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는 자가 대체 누구인가? 홍범도 장군이 울고 있다. 부관참시가 웬 말인가? 이러다 하루밤 사이에 독도를 그냥 양보해버리고, 전국 각지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자고 나설까 걱정이 앞을 거린다. 이동순 시인이 홍범도장군의 독백을 시로 읊었다. 국민된 자라면 누구라도 마땅히 소리내어 읊을 일이다. 또한 몰지각한 한 언론인의 칼럼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윤상원교수의 글을 읽어보시라.. 홍범도 장군의 독백/ 시인 이동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홍범도가 본 송평인 칼럼 < 오피니언 <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 - 미디어오늘 (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