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99
5월23일[부활 제7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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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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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SG8XlKeWF8 (장용석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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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감동 깊고 비장한 고별 연설>
오늘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고별 연설이,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고별 연설이 각각 소개되고 있습니다.
에페소에서의 냉대와 박해 속에 겨우 목숨을 건진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로 갔습니다. 그리스에서 석 달가량 머문 뒤에 시리아로 가려 했으나,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를 해칠 계략을 짜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할 수 없이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갑니다.
그야말로 기약 없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필리피에서 트로아스로,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배를 타고 아쏘스로, 아쏘스에서 미틸레네로, 미텔레네에서 사모스 섬으로, 그다음 날에는 밀레토스로 넘어갔습니다.
오랜 여독과 박해와 매질로 온몸이 병든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 참으로 혹독한 여행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도를 횡단하는 먼 거리를 도보로 걸은 후에는 하루 쉴만한데, 바오로 사도는 그다음 날 이른 아침 또 다시 배에 오릅니다. 기도로 꼬박 밤을 지새운 후,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행장을 꾸리곤 했습니다.
밀레토스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64 Km나 떨어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감동 깊기로 유명한 ‘고별 연설’을 행합니다. 이 연설은 바오로 사도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신 유일한 연설입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고별 연설은 사도행전 20장 17~38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만날 기약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음성은 비장함으로 가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될 남아있는 제자들과 양 떼를 생각하니 깊은 슬픔과 측은함이 밀려와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립니다.
“나는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사도행전 20장 22~35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던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 전도 여행길에 겪었던 고초들, 남겨질 양 떼를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바오로 사도의 염려가 아무런 가감 없이 잘 소개되고 있는 명설교입니다.
고별 연설이 끝나자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에페소 교회 원로들은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런 모습을 본 바오로 사도는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지상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다들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바오로 사도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습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 불찰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건강하십시오. 저 위에서 기쁜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고통과 시련, 그러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여건 속에서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에 임하지 못하는가 하는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선교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바오로 사도와 쥐꼬리만큼 일하고도 ‘피곤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가 입에 붙은 제 모습이 크게 대조되어 많이 서글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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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광을 흐르게 해야 나도 영광스럽게 된다>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자 젠센은 유대 민족의 지적 능력이 다른 민족에 비해 우수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유대인의 성공 비결은 다름 아닌 신앙 교육에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 교육의 장(場)은 가정이며, 교사는 부모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가정교육은 신앙을 위한 것이지 지식이나 직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 부모에게는 자녀 스스로 하느님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싶도록 환경을 만들어 줄 책임이 있습니다. 부모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것 등을 보며 자녀들은 무의식중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부모의 모범이 자녀로 하여금 신앙을 갖고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은 글을 배우기 전에 성경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하느님을 어떻게 신뢰하며 살아야하는지 배웁니다. 유대인은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 회당 중심, 랍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첫째로 하느님 중심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 없이 하느님은 있지만 하느님 없이 나는 없다. 나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이 사용하는 도구이다.”라는 것이며, 둘째로 회당 중심은 이사할 때 회당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가가 우선순위가 되는 것이며, 셋째로 랍비 중심은 자녀, 교육, 결혼, 이사, 사업 등 모든 문제를 랍비와 상담을 통하여 결정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경영하는 공장에는 랍비가 고용되어 있어 상담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랍비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영적인 리더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 의해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철저하게 배운 것이 그들이 세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특출한 유대인이 많은 이유를 보며 이 연구결과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부모의 겸손이 들어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를 소유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유대인들의 부모에 의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성경에 일곱 아들의 순교를 독려하는 어머니가 나옵니다. 어머니는 창조자의 능력이 곧 부활임을 믿으라고 자녀들을 독려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창조자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이라면 하느님임을 믿는 인간도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임을 믿는 하느님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2마카 7,22-23)
어머니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아버지를 공경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하느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남편이 술 많이 마신다고 핀잔을 주고 어리석다고 말해버린다면 그 아이는 어머니도 공경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영광을 받으려면 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만든 분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어야하는 것입니다.
영광은 흐르는 것입니다. 영광이 흐르게 해야 나도 영광스럽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리기 위해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는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힘도 우리 스스로는 갖추고 있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양육할 수 있도록 남편에게 돈을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일을 완수하셔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이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을 믿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남편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자녀를 살리는 일입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영광이란 곧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고 ‘성령’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이 영광을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누리고 계셨고 아드님께 주셔서 아드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남편으로부터 돈을 받으면 자녀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내는 남편에게 자녀를 봉헌해야합니다. 남편으로부터 받은 영광을 다시 남편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모든 것’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성령의 흐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진리와 은총’을 받았습니다. 진리와 은총이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와 은총으로 선교를 하여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킵니다. 그러나 내가 탄생시킨 이들을 나의 것인 양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와 은총을 주신 분께 다시 돌려드려야 합니다.이것이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방식입니다. 내가 주님을 영광스럽게 했다면 나를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입니다.
자녀 앞에서 아버지를 험담하는 어머니는 자녀들에게서도 존경받지 못합니다. 아내가 존경받으려면 남편을 존경하도록 자녀에게 교육해야합니다. 영광은 흐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영광의 흐름 중간에 있을 때 영광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할 때 그 영광이 나를 통해서 가기 때문에 나도 영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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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산보 중에 묵주기도를 하고, 강의를 듣는 것은 제게는 작은 기쁨입니다. 걸으니 건강에 좋아서 좋고, 기도를 할 수 있으니 감사할 일이고, 강의를 들으니 배움이 깊어져 좋습니다. 오늘은 세상을 바꾸는 시간(세바시)에서 들었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조서환 선생님은 불행이 깊어지면 행복도 그만큼 깊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장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소위로 근무를 하는 중에 수류탄이 터지는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온 몸에 파편이 박히는 사고였고, 안타깝게도 오른 손목은 절단해야 했습니다. 온 몸을 붕대로 감고 있는 그에게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인에게 자신의 사고를 알릴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사고로 손목을 절단한 자신을 여전히 사랑 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연인을 병실로 불렀습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런 나를 아직도 사랑합니까?” 연인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어제까지는 절망 중에 있었는데 사랑하는 연인이 곁에 있겠다는 말을 들으면서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근심은 용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오른 손은 없지만 연인을 위해서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왼손으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였고,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영어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장인어른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였고, 아이를 둘이나 얻었습니다. 국가유공자로 여러 곳에 입사지원을 하였지만 오른 손이 없는 사람을 채용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의수를 한 사실을 숨기고 애경 그룹에 입사지원을 하였습니다. 면접을 보는 중에 면접관은 오른 손이 의수라는 것을 알고 불합격을 통보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살을 생각도 했지만 너무도 억울해서 다시 면접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손이 두 개 있지만 누구나 글은 한 손으로 쓰지 않습니까? 저는 비록 한 손 밖에 없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한 손이 없는 것은 조국을 위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면접관 중에 한 명이 지긋한 눈빛으로 그들 바라보면서 “당신이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영어’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면접관은 “지금 한 이야기를 영어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하느님께서 ‘너는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영어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면접관들은 잘 못 알아들을 것 같았습니다. 당당하게 영어로 그간의 경위를 이야기하였고, 그는 다음날 전보로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다른 입사 동료들은 퇴근 후에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을 가는 동안 그는 야간 대학원에 입학해서 ‘마케팅’을 공부하였습니다. 외국인들이 주는 명함에 ‘마케팅’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혁신적인 마케팅 전략과 광고 카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외국 회사에 입사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 손이 없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약점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강의 말미에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여러분의 약점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번에는 다시 눈을 감고 여러분의 강점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약점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여러분의 강점을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 저는 강연을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적도 있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우유부단함도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세심하였고, 말을 잘 못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 교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결정적인 순간에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성서의 거인들은 자신들의 강점을 살려서 신앙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니 제게도 약점이 많았습니다. 그 약점들이 제 발목을 잡곤 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강점이 있습니다. 저도 저의 강점을 살려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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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7,1-11: 아버지, 당신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해 하신 주님의 사제적 기도이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1절) 아들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음이며 죽음을 통한 부활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이미 영광으로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다. 십자가와 “높이 들리심”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분은 부활로써 더욱 영광스럽게 되셨다. 부활하시어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부활로써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은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표현되었으며, 그것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셨고 그들은 또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켰다고 하신다. 그 말씀이 바로 스승이신 그리스도이셨고, 그분의 말씀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하여 아들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그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면서 신비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들이 참으로 아버지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9절) 대사제요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인간으로서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뽑힌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9절) 라고 하셨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10절)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찬미를 드리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닮게 되기 때문에 아들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는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직 세상에 남아있어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누룩의 역할을 하도록 용기를 주신다. 그들을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뜻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존재들이다. 영적 생명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박해받을 때마다 늘어난다. 이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훌륭한 지위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으며,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영광이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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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기도>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5)
이 기도는, 표현으로는 당신이 사명을 잘 완수할 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청원 기도’로 보이지만, 내용을 보면 당신의 사명 완수를 말씀드리는 일종의 ‘결과 보고’ 같은 기도입니다.
<지금 옆에서 제자들이 듣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들으라고 일부러 소리 내서 기도를 하신 것 같고, 그래서 이 기도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가르침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말은, 하느님이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것이 드러나는 일,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일을 뜻합니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세주라는 것이 드러나는 일, 그래서 온 세상이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일을 뜻합니다.
그 일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 덕분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이 하느님과 예수님께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겠다고 고집을 부린 사람들 경우에는, 끝까지 그들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세주라는 것이 드러난 뒤에도 예수님께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하느님과 예수님을 피해서 숨으려고 할 것입니다.>
“때가 왔습니다.”는 당신의 ‘죽음의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의 사명 수행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십자가와 영광이 연결되긴 하지만, 십자가 자체가 영광은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구원이 영광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나 안 믿는 사람들에게나 십자가는 최악의 형벌이고 모욕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 너머에 부활과 승리와 영광이 있음을 보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냥 십자가의 고통만 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서, 하느님,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관계, 일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 또는 하나가 되는 일은 그분들이 누리는 영광과 영원성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참여한다는 말은, ‘함께’ 누린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요한 17,9-11ㄴ)
여기서 ‘이들’은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6절), 즉 ‘신앙인들’입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뽑으시어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이라는 말을 신앙인들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라는 말씀은, 지금의 기도는 특별히 신앙인들을 위한 기도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세상, 즉 안 믿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의 20절부터는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인데,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에 응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로 해석됩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를 나타내는 말씀이고, 지금 그것을 특별히 강조하신 것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응답하는 일과 하느님의 사랑과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같은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을, 하느님과 예수님 중에서 한 분만 믿어도 된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함께(동시에)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 믿어도 하느님은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하느님은 안 믿고 예수님만 믿는 것도 신앙이 아닙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라 신약시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14장에서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따라야 할 하느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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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요한 복음 17장은 복음서에서 가장 긴 예수님의 기도로, ‘대사제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수난을 앞두신 주님께서는 이 장엄한 고별 기도를 드리시며, 당신과 제자들과 믿는 모든 이를 위하여 성부께 기도하십니다. 주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명을 완수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십사고 청원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때”(1절)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어 올려지시는 순간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영광스럽게 되시는 때입니다. 영광을 누리시던 성자께서 굴욕과 저주의 형틀에 매달려 인간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온 세상에 드러내시는 그 순간이야말로 아버지께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이며, 그분께서 보내신 아드님께서도 영광스러워지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가 누릴 수 있게 된 “영원한 생명”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알아보는 데서 시작되며,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오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분께서 전하여 주신 아버지의 말씀을 기꺼이 지키는 ‘제자의 삶’으로 주어집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영원한 생명”이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우리의 삶 안에 이미 시작된 실존임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한 작별 인사는 예수님의 고별 기도와 많이 닮았습니다(제1독서 참조).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투옥과 환난임을 알면서도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마칠 수만 있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라는 사도의 고백이, 아침마다 주님과 함께 하루를 여는 나의 진실한 바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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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두 개의 절절한 고별사가 나옵니다. 둘 다 "때"를 맞이하는 비장함과 남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이 가득하지요.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요한 복음 17장 1절)
대사제의 기도라고 불리는 요한 복음 17장의 내용은 수난과 죽음으로 마련된 영광의 때를 맞이하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시간을 통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며, 아버지께서도 아드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 복음 17장 4절)
예수님은 온 생애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셨고,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셨으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으셨지요.
앞으로 닥칠 죽음의 순종을 포함해 이 모든 것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이제 떠남을 준비하시면서 제자들(우리들)을 위해 아버지께 청하시지요.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요한 복음 17장 11절)
예수님의 기도에서 성령께서 오셔야 하는 정황이 명백해집니다. 이 세상에 남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약하디 약한 제자들(우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기억하고 꿋꿋이 신앙의 길을 걸으며 지상 순례 여정을 완수하도록 보호해 주시려는 겁니다.
남은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의 사랑이 성령을 통한 현존으로 실체화될 겁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대목의 앞 부분입니다.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0장 22절)
사도 바오로 역시 자신의 "때"를 맞이하여 이 말을 합니다. 세속적 영광이 아닌, 스승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영광을 맞이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참 예언자들이 죽음을 맞이했던 도성 예루살렘이 "투옥과 환난"으로 사도 바오로를 맞이해 주님의 영광을 완수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0장 27절)
사도는 온 힘을 다해 복음 선포에 매진하였습니다. 늘 그들 곁에 머무를 수 없었기에, 함께 있는 동안에는 열정적 가르침으로, 떨어져 있을 때에는 섬세하고 지혜에 찬 서신으로 자신이 받은 주님의 계시를 남김없이 전해주려 애썼지요.
이제 사도는 남은 이들을 성령께 맡기고 떠나야 합니다. 사도가 남긴 주님의 말씀이 그들을 양육하고 성령께서 그들이 들은 진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알렐루야."(입당송) 떠남은 이별로 이어지지만 영적 관계에서는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죽음조차도 소멸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영원히 제자들과(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면서 제자들을(우리를) 위로하시고 복돋우시며 동행하시듯,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에페소를 떠난 사도 역시 남은 이들의 영의 벗으로 남아 그들의 신앙의 길을 도와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고 성령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오늘의 두 고별사는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떠나시지 않으실 것이고 그분에게서 받은 은총이 나날이 더욱 우리를 견고하게 해 줄 것이니까요.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끝을 모르는 영원이기에 우리는 잠시 지날 환난고초의 세상에서 더욱 찬란히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이 우리 구원"(화답송)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벗님들 마음에 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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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 고별 담화 이후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사제 기도’ 시작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 길지 않은 문단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이라는 표현을 여섯 번이나 쓰고 계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라는 첫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주와 모든 인간의 구원이 실현되는 때를 뜻합니다.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성자께서는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성부께서는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비록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음모와 여러 욕심들을 통하여 전개되고,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고통을 당하시지만, 그 고난과 죽음은 피동적인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스스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봉헌하신 능동적 사건이었음이 분명해집니다.
성부께서는 성자께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고, 성자께서는 성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심으로써 성부와 성자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어졌다.”(요한 복음 19장 30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죽음이 사명의 완성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두고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사명의 완수와 영광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서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전체로 하느님의 진리를 계시하셨고, 신앙인들은 그 계시와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인도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아갑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길 끝에서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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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성자께서 자신의 전 존재를 성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왔음을 아시고 그 시각을 향하여 나아가십니다.
이 ‘때’는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순종과 겸손으로 이루어진, 영광스럽게 되는 때이며(마태오 복음 25장 31절 참조), 성자께서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때입니다.
또한 성자를 보내신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어(요한 복음 6장 44절 참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거저 선물로 받는 때입니다.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히브 9,1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에 동참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알아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하는 순간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시간입니까?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신비하고 거룩하며 기쁨으로 가득 찬 부르심에 동참하기로 다짐하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이 응답에는 십자가와 부활로 길이 영광받으시는 주님을 찬미하며, 우리가 이 신비로운 ‘때’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히브리서 7장 27절 참조) 주님을 따라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는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매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기도, 성체를 모시기도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렇기에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성체를 모시는 것이 소원이었던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 어려움으로 성체를 모시기 어렵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실 수 있는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찾아, 신앙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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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이루는 일치>
많은 분들이 성체조배나 묵주기도, 9일 기도, 15기도, 자비의 기도, 십자가의 길 등등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가끔 “9일기도를 하면 소망을 꼭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도하는 만큼 주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나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기도문만 외운다고 그렇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횟수나 형식에 매이지 말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대로 삶의 쇄신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만들어 놓은 기도문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물론 함축된 그 기도문을 통해서 주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내가 스스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 기도는 기도회나 특별한 경우에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파견한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시점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당신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었는데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은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나, 당신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박병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청하신 것은 십자가의 길을 잘 걸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과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있어서 기본핵심은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믿게 되는 이들, 바로 우리와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기에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과(요한6,32이하) 생명의 물(요한4,10이하)을 주시며 우리를 풍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요, 안다는 것은 결국 통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 현존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로 일치하여 더불어 한 몸이 된다면 “오늘이 영원입니다.”(캠플로)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온전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것을 관철하는 것이라기보다 사랑하면서 사랑의 친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업시간에는 일로써, 기도 시간에는 기도로써 우리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를 말, 생각, 장소, 시간에 국한 시키지 말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 언제 어디서든지 현존하시는 주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부디 삶이 기도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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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열여덟 살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1위에 해당하는 금메달과 두 개의 특별상(청중상, 신작 최고 연주상)을 수상한 임윤찬 피아니스트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지도교수인 손민수 교수를 향해 ‘위대한 선생님’, ‘손민수 선생님은 종교다’라는 말로써, 스승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보였습니다. 스승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았고, 이로써 인생의 목적과 방향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승이신 손민수 교수 또한 제자를 향해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보낸 것입니다. 자신 역시 제자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면서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 한쪽만 의미를 상대에게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더 높은 가치가 이 안에서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나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먼저 상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요? 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나에게도 의미를 전달해주기도 하고, 그 의미가 세상 전체로 그 가치가 펼쳐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범을 따라야 한다면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모범을 받아 우리 역시 사랑의 모범을 따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에게 온 하느님 나라가 조금씩 완성되는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영광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아버지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 이들이 아버지께 보호받도록 청하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거부하는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일까요? 우리도 그분의 영광을 들어 높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의미를 받은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사도 바오로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의미 있는 모범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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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요한 17,1-11ㄴ (당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시다,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오직 하느님께 빕니다
오직 하느님께 빈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요
하느님께 대한 희망고백이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고백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기에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품어야 할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고백이기에
정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돌보아야 할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고백이기에
경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가 살려야 할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오직 하느님께 비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을 믿고
하느님의 사람을 바라고
하느님의 사람을 사랑하기에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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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달릴 길>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원로들과 헤어지며 자신이 어떻게 해왔는지 회고한 다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내다봅니다. 제자들을 떠나시며 주님께서 고별사를 하시는 것처럼, 그도 고별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오늘 “달릴 길”을 다 달리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데 디모테오 후서에서도 이 “달릴 길”을 다 달리는 것에 대해 얘기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달릴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바오로의 달릴 길과 저의 달릴 길은 다를까요? 아니면 같을까요? 나는 나의 달릴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지금까지 달려왔을까? 나의 달릴 길이 뭔지 생각지 않고 무작정 달려온 것은 아닐까?
성찰해보니 나의 달릴 길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인생의 목표를 고민한 바가 있고, 그 고민 끝에 행복이 내 인생의 목표인 줄 깨달았으며, 그 행복의 길을 향해 줄곧 달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차츰 이 세상에서의 행복의 길을 넘어 저세상에 이르기까지의 구원의 길을 줄곧 생각하고 그 길을 달려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긴 하지만, 왠지 제 말에 힘이 없습니다. 적어도 바오로 사도만큼의 확신이 없습니다. “달릴 길”이 아니라 “나의 길”을 많이 달렸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말에 자신이 없는 것은 나의 길을 달린 측면과 열심히 달리지 않은 두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달릴 길을 달리다가 옆길이랄까 샛길이랄까 이런 나의 길을 달리다가 다시 돌아와 달릴 길을 달리곤 했습니다.
제가 달릴 길은 바오로 사도가 달린 것처럼 주님의 길을 달려야 하고, 주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을 달려야 하는데 저는 제 행복의 길, 아니 제가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한 길을 달리곤 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 사로잡혀서 또는 성령께서 일러주셔서 길을 가고, 그렇게 간 길은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이요. 그러기에 대부분이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는 그런 길이었는데 저는 흉내는 냈지만, 대부분 행복의 길, 꽃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 평생의 열등감이요 패배감입니다. 성령께 사로잡히지 못한 자의 인생이고, 그렇게 인생길을 갔기에 열심치 못했고 혹 열심히 달렸어도 달릴 길을 다 달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애는 애대로 썼으면서도, 크게 잘못된 길을 간 것 같지 않으면서도.
나는 과연 성령께 사로잡힌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바오로 사도를 보며 나를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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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떠남의 여정, 새벽길을 떠날 때의 기쁨>
- ‘오늘부터’,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
"주님,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내마음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
진리는 반복해도 늘 새롭습니다. 저에게는 ‘여정’이란 말마디가 그러합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누구도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한곳에서 오래 정주하다 보니,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가 뚜렷한 자연환경의 수도원이고 보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합니다. 특히 휴가를 떠나 귀원하는 형제들을 보면 시간도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아마 인생 휴가 끝나고 아버지의 집으로 귀원할 때도 그러할 것입니다. 수도원 초창기 풋풋한 젊음의 40대 전후의 도반들도 이젠 70을 훌쩍 넘어 버렸습니다. 수도원 사진첩을 보면 더욱 실감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 30년 지나면서 사라질 분도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병고를 안고 더불어 여정중인 형제들에 대해 저절로 연민의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가 참 아름답습니다. 요한복음 제17장은 전통적으로 ‘대사제의 기도’라 칭하지만 예수님께서 수난에 앞서 세상을 떠나기전 ‘고별기도’라 함이 적절합니다. 17장은 자신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에페소를 떠나면서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남긴 고별인사입니다. 두분의 떠남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떠남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떠남의 여정-오늘부터, 지금부터가 중요하다-”입니다. “떠남의 여정” 역시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많이 반복하여 사용했던 주제입니다. 어쨌든 가장 많이 강론 주제로 등장하는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성서의 위인들이나 교회 성인들의 삶의 여정을 보면 대부분 참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벗이라 불렸던 아브라함, 모세는 물론이고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바오로, 그리고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마지막 임종시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떠남의 여정과 관련하여 제가 피정자들에게 자주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강론중에도 자주 반복하여 예를 들지만 저에게는 늘 절실하게 와닿는 내용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할 때, 즉 오전 6시로 시작하여 해가 지는 죽음을 상징하는 오후6시의 하루로 압축할 때, 과연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느냐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일년사계, ‘봄-여름-가을-겨울’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다들 진지한 얼굴이 됩니다. 저로 말하면 하루로 하면 오후 4:30분,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쯤 위치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확인이 삶의 환상이나 허영, 거품을 거둬내고 겸손히, 성실히 하루하루 하느님 주신 선물 같은 날,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 흥미로운 것이 피정 오는 형제자매들 대부분이 가을 나이에 걸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신록의 빛나는 5월의 봄철 나이에 속한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래도 믿는 이들의 영혼은 신록의 젊음이라며 5월 단체 피정자들은 격려하는 차원에서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도록 합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들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피정의날’ 우리들 세상”
싱글벙글 웃으며 하느님의 어린이들이 되어 신나게 부를때는 모두가 신록으로 빛나는 영혼들같이 참 아름답습니다. 역시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주님 사랑의 열정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납니다. 잘 떠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떠나온 삶은 지난 것이고 오늘부터,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늘 새로운 떠남이 중요합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 때도 가장 기쁨으로 설렜던 시간은 새벽길 떠날 때 였습니다. ‘떠남의 훈련’같은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과연 하루하루 기쁨으로 설레는 떠남의 여정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과 바오로의 떠남이 흡사 죽음을 앞둔 떠남처럼 느껴지고 사실이 그러합니다. 정말 마지막 죽음보다 더 중요한 떠남은 없습니다. 떠남 역시 훈련입니다. 하루하루 잘 떠나야 마지막 떠남인 죽음도 참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고별기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한마디도 생략하기가 아깝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이제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잘 살다가 잘 떠나기 위해서는, 하루하루 날마다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떠남의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입니다. 떠남에 앞서 사도의 아름다운 삶에 감동하게 됩니다. 구구절절 감동이지만 일부만 인용합니다.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정말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죽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한 진인사대천명의 삶이요, 주님 사랑에 목숨을 내놓은 바오로의 치열한, 가열찬 감동의 삶이었기에 아름다운 떠남의 죽음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부터,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떠남의 삶이 중요합니다. 이런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평생 도반이신 주님과의 사랑이요 우정입니다. 주님을 절친으로 삼아 날로 사랑과 신뢰의 우정을 깊이할 때 "주님 만날 기쁨"에 설레는 떠남의 여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바로 어제 바친, 매주 화요일 3시경 찬미가 2절이 좋아 나눕니다.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주소서.”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26,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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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17,1)
<예수님의 유언!>
오늘 복음(요한17,1-11ㄴ)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이 유언을 하시고 붙잡히십니다. 그리고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기도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그 첫째 기도는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통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그것이 또한 당신의 영광이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안고 이 세상에 파견되셨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여 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이가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알아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이 지상에서 꼭 하셔야만 될 마지막 일이 하나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는 것입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 속죄제물이 되시는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궁극적인 뜻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잘 죽게 해 달라는, 십자나무에 잘 달리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영광이요, 아들의 영광이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독서(사도20,17-27)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한 유언'입니다. 사도 바오로 앞에 죽음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 죽음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20,24)
지금 여기에서 나도 예수님처럼, 사도 바오로처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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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S2Pu0E66d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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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요한 17, 1)
나의 때도
너의 때도 아닌
아버지 하느님의
때가 중요합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속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삶의 기쁨도
삶의 슬픔도
모두
삶의 의미를
묻게하는 삶의
소중한
여정입니다.
기쁨과 슬픔 속에서
길을 만드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그 길위에서
때를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때는
하느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순간순간이
하느님의 때이며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때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온
아버지의 때는
바로 예수님의
모든 삶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때에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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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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